이슬람의 신학과 꾸란 해석
공일주 교수/
이슬람이 아라비아 반도에서 발흥하여 처음에는 아랍인들만 이슬람을 믿다가 점차 다른 민족들이 이슬람에 들어오게 되자 이슬람은 이들의 언어, 문화, 사상에 맞는 설명을 하여 그들에게 적절한 답을 주어야 했다. 문화가 다르고 언어적 표현이 달라지면서 아랍인들이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사상과 다양한 종교적 지식들이 이슬람에 들어오게 되었다. 그래서 이슬람이 시작된지 첫 200년간은 그다지 큰 어려움이 없었으나 이슬람력 3세기(주후 10세기)가 되면서 이슬람에는 두 개의 큰 신학 조류가 형성되었다.
그 중 아쉬아리(아샤이리)파는 꾸란의 말씀을 상징적으로 해석하면서 때로는 이성적 접근을 하였다. 가령, 꾸란에 나오는 ‘알라의 손’이라는 구절을 알라의 능력이라고 해석하였다. 그러나 또 다른 무으타질라파는 인간의 이성을 사용하여 모든 것을 구별지으러 하였다. 그러나 아쉬아리파와 무으타질라파 사이의 가장 큰 쟁점은 꾸란의 창조성에 대한 문제였다. 후자의 경우, 꾸란은 창조되었다라고 믿는 반면, 전자의 경우 꾸란이 알라의 말씀으로 천상에 있던 것이 그대로 내려왔음으로 꾸란은 절대 창조된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여기서 창조되었다는 것은 원래 천상엔 없었는데 나중에 알라가 꾸란을 새로 만들어서 무함마드에게 주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무슬림들은 아쉬아리파를 신봉한다. 요르단의 경우, 한두 사람의 무으타질라파가 있을 뿐, 나머지는 아쉬아리파라고 한다.
이슬람 신학에는 쌀라프(salaf)와 칼라끄(khalaq)간의 구별이 있는데 전자의 경우, 탄지흐(절대적 완전성)를 믿고 문자적으로 꾸란을 해석한다. 반면 후자는 탄지흐를 믿지 않을 뿐 아니라 우회적으로 꾸란을 해석(ta`wiil)한다. 그러므로 아쉬아리파에서는 인간의 이성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는 원인으로 간주한다. 결국 알라를 믿으면 되었지 질문은 하지말라는 것이다. 알라가 더럽다고 규정한 것은 더럽다고 믿을 뿐 의심의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다시말해서 알라가 뚜렷하게 가르쳐 주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결코 “묻지 말라”고 한다. 이는 알라가 모든 인간보다 진실하며 전지한 반면 인간은 모든 것을 이해하기가 어렵다고 하였다. 아쉬아리파는 자꾸만 이성적으로 따지면 안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생각이 하나님의 뜻을 부인할때는 하나님께 대적하는 것이 되겠지만, 이성이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 말씀을 위해 봉사한다면, 이성은 하나님을 아는데 훌륭한 도구가 될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이성은 원래부터 하나님과 상반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것이 잘못 사용되어 하나님을 대적할때가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슬람의 아쉬아리파는 이런 점에서 인간 이성에 대한 극단적인 부정을 하고 있는 것이다.
아쉬아리파는 꾸란이 창조되지 않아 처음도 없고 끝이 없는 영원성을 갖는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꾸란은 아쉬아리파에게는 영원한 것이지만 꾸란에 쓰인 글자들, 잉크, 종이 등은 창조되었다고 간주했다. 그런데 무으타질라파는 이런 글자들의 근원(원래 뿌리)까지도 창조되었다고 간주한다. 그러므로 후자는 사상과 철학의 한 흐름이었고 특히 페르시아, 그리스 철학의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전자는 여러 지역에서 온 무슬림들이 꾸란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일부 구절을 우회적으로 해석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런 측면에서 오늘날 중동의 아쉬아리파는 기독교의 무천년주의자처럼 말씀을 우회적으로 해석하는 것을 받아들인다. 반면 20세기에 중동에 들어온 침례교단의 경우,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오늘날 거의 대부분의 무슬림들은 아쉬아리파와 무으타질라파에 대해 잘 모를 뿐만 아니라 관심도 없다고 이맘 무스타파는 말한다. 아쉬아리파는 어떻게, 언제, 어디서, 누가?라는 질문을 꾸란에 대해선 절대 하지 말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아쉬아리파에는 이슬람 신비주의자가 있느냐고 물으니, 거의 90% 이상이 신비주의자이며 그러나 사우디에는 신비주의자가 없다고 한다.
이슬람 신비주의는 두 개의 학파가 있다. 순수한 종교적 접근 방법을 취하는 무리와 철학적 접근 방법을 취하는 무리가 있다. 전자의 경우, 유명한 알가잘리가 대표적이며 후자는 ‘내가 진리다’라고 하여 죽임을 당한 아랍인 할라아즈가 대표가 된다. 그럼 오늘날 이슬람 세계는 이슬람 신비주의자가 있느냐?는 질문에 “그렇다”라고 하며 이슬람의 위대성은 꾸란을 아는 지식에서 온다고 하였다. 결국 오늘날 무슬림들은 꾸란에 대한 깊은 지식의 결여로 이슬람의 위대성이 나타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사우디의 와하비야( 와하비즘)는 알라에게 손이 있다라는 말을 문자적으로 믿고 있다고 한다. 반면 알가잘리는 알라가 보좌 위에 있다라는 구절에 대해 형체가 없는 알라가 어떻게 의자에 앉을 수 있느냐고 반문하면서 이를 부인하였다. 창조 전에 알라는 이미 있었고 지금도 알라 밖에는 없다고 말하면서 알라는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어떻게 금요일 모스크에서 설교하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이슬람 종교의 내용을 세상 지식과 연결지어 설명한다고 하면서 이맘 무스타파는 하루 2시간 이상씩 인터넷을 뒤질 뿐만 아니라 세상의 철학과 지식을 섭렵한다고 한다. 그는 이슬람의 교리와 신앙으로 기본이 다져져 있기 때문에 이런 세속적인 학문이 전혀 그의 신앙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고 하였다. 꾸란이 등장한 7세기와 오늘날 21세기 사이를 어떻게 연결지어 설교하느냐는 질문에 그는 꾸란의 다음과 같은 구절을 그 예로 들었다.
“너희의 여자들은 너희에게는 “하르쓰(Harth)"이다”. 여기서 ‘하르쓰’를 어떻게 설명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아랍어 사전상의 의미는 ‘좋은 땅(옥토)’을 의미한다. 반면 우회적으로 해석할시 여성이 옥토인데 우리가 땅에 무엇을 심느냐에 따라서 땅이 우리에게 열매를 준다고 하였다. 결국 남자가 여자와 잠자리를 같이 할 때 사랑으로 좋은 씨앗을 맺어 훌륭한 자손을 낳아준다는 식으로 모스크에서 설교한다고 하였다. 이것은 참으로 오늘날 무슬림들이 꾸란을 우회적으로 해석하는 가장 좋은 예이다. 그러므로 중동 무슬림들에게는 성경을 너무 문자적으로 해석했을 때 그들의 꾸란 해석 방식과 달라 또다른 이해의 벽을 낳을 수 있다. 그는 아랍 기독교인들이 사용하는 기독교 용어 “이을란('I'laan계시)”이라는 단어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결국 동일한 아랍어를 사용하지만 아랍 기독교인과 아랍 무슬림들 사이에서는 서로 이해하지 못하는 신학적 어휘, 사상적 차이, 세계관의 차이가 있었다.
그리고 죄의 용서에 대한 확신이 있느냐라는 질문에 무슬림들은 그가 천국으로 갈 백성(아을 잔나)인지, 지옥으로 갈 백성(아흘 안나아르)인지는 이 땅에서 모른다고 하였다. 단지 “알라여! 용서를 구합니다”라는 말을 자주 되풀이하며 사람들 앞에서 자신이 잘못했다고(무드닙mudhnib) 반복하면 알라가 혹시 들으시고 용서해 줄지 모른다고 하였다. 그래서 그는 일단 악한 일을 했다고 생각이 들면 곧 선한 일을 행하여 알라가 자신의 악한 일을 깨끗하게 지워주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그래서 늘 알라를 무서워하며 선한 일을 하기 힘쓴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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