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편전쟁의 진상
글: 한육해(韓毓海)
대청제국은 실제로 장기간의 서방에 대한 개방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이 역사는 절대로 아편전쟁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니다. 여러 유럽국가중에서 대청제국이 특히 중시한 것은 제정러시아였다. 왜냐하면, 제정러시아만이 중국을 서쪽과 북쪽에서 위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청나라는 북방의 위협에 경계하는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 제정러시아와 평화적인 관계를 안정적으로 건립하고자 했다. 이것은 중국외교의 하나의 역사전통이다. 특히 강희제의 시대가 두드러졌다.
우리는 강희제때 일어난 아크사전투에서 제정러시아를 물리친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강희제가 제정러시아와 적극적으로 경제무역관계를 발전시키고자 했다는 것은 잘 알지 못한다. 한편으로 강경책을, 다른 한편으로 유화책을 사용하는 것은 균형을 맞추는 일이다. 이런 의미에서, 당시의 북경은 국제적으로 주요한 무역도시이기도 하였고, 강희제 또한 실제로 개혁개방과 대외경제무역활동을 중시한 군주였다.
프랑스인인 백진(白晋, Joachim Bouvet, 1656-1730)은 루이14세에게 보내는 비밀보고서에서 이렇게 지적한 바 있다: 당시 모스크바의 사신이 대청제국의 영토를 밟자마자 강희제의 특사가 계속하여 따라다니면서 아주 성의있게 대접했다. "북경은 황제가 모스크바사람들에게 자유롭게 통상을 허용한 대도시이다. 통상과정에서, 그들은 세금을 낼 필요도 없었고, 차별대우도 받지 않았다. 황제가 이렇게 한 것은 그들이 이익을 얻을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이다. 이렇게 하여 영원히 통상을 유지하는 이웃나라로 남고자 했다." 그리고, 모스크바 사람들이 유일하게 중국황제로부터 환대를 받은 외국인은 아니었다. 황제는 네덜란드, 포르투갈에서 온 사신들은 열정적으로 환대했다. 백진은 특별히 이렇게도 지적했다. 외국인들에 대하여, 강희제는 조공의 예로 삼궤구고의 예를 하도록 강요하지 않았다. "황제는 외국인들이 중국의 예의를 따르도록 하려고 하지는 않았고, 외국사신을 친절하게 대했다. 중국예절을 하지 않는 거친 러시아인들에 대하여도 마찬가지였다. 그에 따라 러시아인들은 아주 감동을 한다." 백진의 이 글을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왜냐하면 이것은 바로 대청제국이 자유무역을 추구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특별히 이렇게 언급했다: "청나라는 무역관세가 아주 낮았다. 심지어 거의 세금을 거두지 않는 수준이었다. 대청제국은 무역세수를 주요한 국가수입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이것은 바로 청나라의 무역이 발달한 기본원인이다." 이 특징에 주목하면, 우리가 청나라를 이해할 때, 특히 청나라와 영국의 무역문제에서의 차이를 살펴볼 때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다.
먼저, 백진은 청나라궁중에서 오래 생활한 프랑스학자라는 점이다. 황제의 과학고문이자 선생이었다. 그의 글로 추단해보면, 강희의 손자인 건륭제가 허영에 빠지고 무지하여 영국인들이 삼궤구고를 하지 아니한다고 하여 영국과 통상을 거부했다는 것은 분명히 어떤 악의를 가진 자들이 날조한 것이지, 역사적 사실에 부합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진정한 역사는 사실 이러했다. 1793년, 매카트니의 사신단이 환대를 받은 후, '무역'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다음과 같은 요구조건을 내놓았다: 첫째, 주산 부근의 방어시설이 없는 섬을 영국상인들이 사용하게 해달라. 영국상인들이 휴식하고 화물을 보관하고 영원히 거주할 수 있게 해달라. 둘째, 광주부근에도 동일한 권리를 주고, 영국인들이 자유롭게 왕래하고, 왕래가 금지되지 않도록 해달라. 이는 실제로 영토할양이었다. 건륭제는 당연히 이런 요구를 거절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영국인들의 이런 무례한 요구에 기하여 영국인들은 야만스럽고 무지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영국왕에게 보내는 칙서에서도 영국인들을 훈계했다: "천조의 땅은 한척이라도 모두 등기되어 관리되고, 변방은 삼엄하게 지킨다. 비록 섬이나 사막이라고 하더라도, 경계는 분명하다. 각자 자신의 것이 있다. 이 일은 허가할 수 없다."
확실히 건륭제는 다른 나라들의 동남연해에서의 움직임에 경계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경계심은 영국인들에 대한 것이 아니고, 심지어 외국인에 대한 것도 아니다. 더더구나 무역에 대한 것은 아니다. 대청제국의 해양방어에 대한 경계심은 주로 장기간의 대만문제로 인한 것이다. 영토문제인 것이다. 대만의 정씨왕조의 교란을 막기 위하여, 강희제는 금해령(禁海令)을 내렸었다. 당시 대만은 네덜란드의 군사원조를 받고 있었다. 그리하여 건륭제때, 대청제국은 외국세력이 대만에 간여할 가능성에 계속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대만이 다시 대륙으로 진공해오는 근거지로 되는 것은 막아야 했다. 그리하여, 영국사신과 접견할 때 가장 먼저 분명히 한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건륭제는 해상무역을 거절하지 않았다. 그저 섬을 영국상인의 화물보관지 및 전략근거지로 개방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을 뿐이다. 이는 영토에 관련된 문제라고 생각해서이지 무역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는 바로 건륭제의 심모원려를 알 수 있는 점이다.
건륭제는 그저 글을 읽을 줄 알고, 글을 쓸 줄아는 태평황제가 아니다. 그는 포성이 이어지는 전쟁터에서 단련된 매파군인이다. 심각한 변방의 도전 속에서 건륭은 무수한 곤란을 겪으면서, 중국을 전성기로 끌어올렸다. 티벳, 신강문제에 대하여도 그는 빈틈없이 처리했다. 중국서남, 서북의 변방안정을 위하여 그는 수차례 친정하고 자신의 자제병을 이끌고 혈전을 벌여서 지켜냈다. 자식이 부모의 밭을 파는데에는 마음이 아프지 않다. 우리는 오늘 역사상의 전제주의를 비판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제국주의의 침략을 비호할 수는 없다. 더더구나 역사를 전면적으로 재단하여 마치 중국의 오천년역사가 그저 '전제'라는 두 글자로 포괄되고 나머지는 전혀 없는 것처럼, 청나라는 체두변발을 빼고는 장점이 하나도 없는 것으로 얘기할 수는 없다. 솔직히 말하자면, 중국의 오늘날의 판도는 대청제국이 얻어낸 것이다. 건륭은 일생동안 영토를 조그만큼도 빼앗기지 않았다. 오히려 중국의 판도를 늘이고 지켜냈다. 그에 있어서 영토를 한조각 떼어내는 것은 살점을 떼어내는 것과 같다. 금은을 준다고 해서 땅을 팔아먹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같은 소박한 농민성격은 사실 대륙통치자들의 최저선이다. 이 점 하나만으로도 그는 민족영웅이라고 칭할 만하다.
건륭제를 누구든지 그에게 사탕을 주거나 고개만 숙이면 즐거워하는 저능아로 묘사한다면, 이것은 '이야기꾼'들의 역사왜곡수준이 너무 낮은 것이고, 거짓말마저도 앞뒤가 맞지 않게 한 것이라고 할 것이다. 이런 거짓말은 만번을 하더라도 진리가 될 수 없다. 건륭은 당시에 매카트티가 머리를 땅에 박고 인사하느냐 아니냐에는 관심이 없었다. 하물며 건륭제가 매카트니에게 거절한 것은 무역이 아니라, 영국에게 섬을 넘겨주어 화물집산지로 삼는 것이었다. 이것은 역사상 분명히 글자로 쓰여있고, 왜곡할 수 없는 것이다. 건륭의 이런 생각은 사실 대만의 경험에서 온 것이고 전략적인 것이고, 영토안전을 위한 것이다. 역사는 증명한다. 오늘 날이라고 하더라도 그의 생각은 실제로 100% 옳은 것이다. 중국이 홍콩과 대만을 대륙을 전복시키는 근거지가 되도록 용납할 수 없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때문이다.
강조해야할 역사적 사실은 이렇다: 일찌기 동남지역의 해금이 풀리기 전에, 대청제국은 항구를 개방하는 조치를 취했었다. 그리고 개방한 곳도 정씨군사집단과 대치하던 하문(厦門)이다. 강희23년(1684년) 해금이 풀리고, 대청제국은 마카오, 장주(漳州), 닝보, 강소운태산(雲台山)의 4곳의 통상항구를 개방하고, 곧이어, 광주, 하문, 상해의 통상을 개방한다. 특히 중요한 것은, 광활한 육지의 경계선에서 대청제국은 계속하여 국제무역을 대규모로 개방했다는 것이다. 근대중국의 연구가운데, 아주 가소로우면서 해석되지 않는 문제는 바로, 영국에 개방해야만 개방인가라는 것이다. 해양무역만이 무역인가라는 것이다. 육지의 무역은 그 금액이 거대했는데 그것은 무역으로 치지 않는가? 이런 엉터리논리대로라면, 유럽대륙상의 무역, 남유럽과 북유럽의 무역, 유럽대륙이 오스만제국을 통하여 아랍세계와의 무역은 도대체 무엇인가. 만일 정말 그렇게 해석해야한다면, 베니스공화국에서 네덜란드에 이르기까지 자본주의가 유럽에서 발전한 역사는 모조리 지워버려야 하지 않는가. 그리고, 황당한 것은 이것 만이 아니다. 당시 영국과 해양무역을 하지 않겠다고 한 것은 대청제국만이 아니다. 건륭만이 아니다. 세계의 거의 모든 위대한 국가와 영명한 군주는 모두 포함된다. 유럽에도 네덜란드가 있고, 네덜란드의 다음에는 미국, 프랑스가 있다. 19세기후기 이래로 자유무역에 반대하는 정치, 경제, 문화정책을 내놓은 독일도 있다. 그들은 모두 대청제국보다 훨씬 철저히 영국과의 자유무역과 해양무역에 반대했다. 그리고 이들 국가는 모두 일찌기 세계의 지도자이거나 패권자였다. 그들이 영국과 무역에 반대한 것은 영명한 판단이 아니었는가? 그런데, 왜 대청제국이 대영제국과 무역하지 않겠다고 한 것만 문제삼는가? 설마 영국에 반대하면 그것이 바로 무역에 반대하는 것이고, 영국을 거절하면 그것이 바로 문명을 거절하고 현대화를 거절하는 것인가? 이런 웃기는 이야기는 그저 20세기후반의 중국에서 아주 황당한 후식민지적 상황하에서만 발생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아주 반성해야할 일이다.
사실, 청나라는 국제무역을 반대하지는 않았었다. 제정러시아와는 장기적인 무역관계를 유지해왔다. 그리고 이런 무역관계는 단순한 국가세수를 고려한 것이 아니고, 북방의 이웃나라와의 선린관계를 유지하여, 청나라의 서북변방을 안정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일찌기 영국과 대규모무역을 진행하기 이전에, 대청제국과 제정러시아는 하크투라는 곳에서 거대한 무역활동을 진행했다. 이는 근대중국역사상 규모가 가장 컸던 국제무역일 것이다. 백진이 얘기한 것처럼, 이 무역의 세수는 아주 낮았다. 대청은 무역을 국가세수를 늘이는 주요한 자금원으로 보지 않았기 때문에, 상인들은 무역에서 큰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 바로 이점만 보더라도, 청나라는 쇄국을 한 나라가 아니다. 더더구나 자유무역을 거부한 나라도 아니다.
그러나, 대청제국과 대영제국은 무역에 대한 태도가 전혀 달랐다. 바로 이런 태도와 원칙이 다르기 때문에, 나중에 두 나라는 무역문제에서 첨예하게 충돌하게 된다. 이것은 근대역사를 해석하는 중요한 단서이다.
가장 간단하게 말하자면, 이 원칙과 태도의 차이는 국가가 무역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하느냐의 문제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국가ㅏ 자신을 무역회사의 보안대장 혹은 시장의 흑사회두목이 되어 상업무역에 '보호비'를 징수하여 돈을 벌 것인가? 소위 "자유무역"은 바로 이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닌가?
좀더 학술적인 말로 바꾸어 말하자면, 국가는 대외무역을 정부세수의 주요자금원으로 삼아야 할 것인가? 국가가 대외무역을 세수원으로 삼으면, 자유무역은 자연히 장려되고 발전되는가? 당연히 이점은 현재의 소위 자유주의 배금주의자들에게는 철칙이다. 좀 듣기싫은 말로 하자면, 마약거래나 매춘과 같다. 쉬운 말로 하자면, 이런 두 가지 거래의 경우에만 보호우산이 필요하다. 이 세상에는 마약거래나 매춘의 경우에만 조폭의 보호가 필요하고 '보호비'가 필요하다. 결국 이는 마약거래와 매춘을 당당한 사업인 것처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보면 이런 주장은 터무니없는 것이다.
근대역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최소한 이같은 기본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바로 대청제국의 관세는 다른 세수와 마찬가지로, 이 지구상에서 가장 낮았다는 것이다. 어느 정도로 낮았는가? 간단한 숫자로 설명이 가능하다. 강희가 규정한 관세의 '정액'은 은4만3천냥이다. 이것은 아편전쟁시까지 변경되지 않았다.
무역의 급속한 발전과 더불어, 정부는 비록 '잉여'가 늘어났지만, 이들 '잉여'와 무역액의 비레는 9%를 넘어선 적이 없다. 예를 들어, 1830년대, 광주의 무억액은 1700만냥의 규모였다. 국가의 잉여는 가장 많을 때 150만냥이었다. 모스(Morse)의 <<중화제국대외관계사>>에서 비교한 것을 보면, 찻잎을 가지고 계산했다. 중국정부의 세수에 지방관리의 뇌물을 합해서, 가장 많은 경우에도 무역액의 30%를 넘어서지 않았다. 그러나 영국정부의 찻잎에 대한 관세는 90%였다. 광주에서 발급하는 세금계산서 가격의 200%였다. 도 다른 성실한 영국의 사학자인 그린버그의 <<아편전쟁전의 중국영국통상사>>에는 더욱 솔직하게 지적하고 있다. 영국인은 항상 중국관리의 부패에 대하여 폄하하였지만, 영국은 당시에 중국보다 부패가 훨씬 심했다는 것은 말하지 않았다. 실제로 당시 영국의 부패는 중국보다 훨씬 심했다. 중국관리들이 빼앗아가는 총금액은 동인도회사가 매년 대중국무역수익에서 영국국고, 특히 채권보유자에게 지급하여야 하는 수백만파운드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무역 '보호비'를 받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영국정부와 고리대금업을 목적으로 하는 영국주식상인들은 조폭과 고리대금업자와 같다. 그런데, 이 두 종료의 사람들이 양무파인사들이 보기에는 '선진문명'의 대표였다. 이것은 '도적을 부친으로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도대체 무엇인가?
먼저, 이런 '보호비'를 수령하는 보안대는 중국상인뿐아니라, 영국상인에게도 받았다. 천하의 착실하게 무역을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런 자들은 없는게 나았다. 영국상인이 가장 관심가진 것을 보자면, 옷감수출을 보자면, 영국이 시간과 돈을 들여서 아편전쟁을 이기고 중국을 협상장에 나오게 했는데, 코미디같은 일이 일어났다: 중국은 동남해연해에서 '불평등조약'의 형식으로 영국과 비단무역을 실행했다. 그런데, 러시아와와 진행한 옷감무역액보다 훨신 적었다. 왜 이런 결과가 나타났는가? 왜냐하면 영국의 소위 '자유무역'은 사실 국가가 세금을 올리려는 수단일 뿐이었다. 이런 '국가가 큰 몫을 챙기고, 상인이 작은 몫을 챙기는' 구조의 '자유무역'은 중상주의적이다. 즉 보호비를 수취하는 색채가 강하다. 이 원칙은 정상적인 상인이나 무역에 근본적으로 좋은 점이 없었다. 국가는 세수를 얻어가지만, 어쨌든 양털은 양에게서 뽑아가는 것이다. 상인과 무역은 심각한 세수부담을 짊어져야 한다. 이와는 달리, 장기간 계속된 중국과 러시아의 변경무역은 국가의 세수가 낮은 무역이었다. 청나라의 입장에서 이는 상업적인 고려보다는 이웃국가와의 선린관계를 유지해 안정적인 국방을 위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런 상업관계를 장려하기 위하여, 국가는 이 무역의 세수를 아주 낮게 유지해주었다. 이렇게 하다보니, 국가의 저세수는 당연히 상인들에게는 호기가 되어 무역이 대거 촉진되었다. 이윤이 풍부하면, 상인들의 돈을 벌려는 적극성도 높아지는 법이다. 그러다보니, 무역액도 자연히 올라갔다.
그러므로, 영국이 아편전쟁으로 확정한 '무역조약제'는 사실 무슨 자유무역을 보장하는 제도가 아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것은 국가가 무역에 세금을 징수하는 것을 보증하는 것, 즉 보호비를 징수하는 것이었다. 이런 고액의 보호비는 불법사업에 대하여는 보호우산이 되겠지만, 정상사업에 있어서는 완전히 착취였다. 이같은 미묘하지만 근본적인 차이는 바로 혁명의 스승인 엥겔스에 의하여 간파된다. 즉, 중국의 역사학자가 아니라, 엥겔스라는 영국기업자의 아들이 총명한 상업적 두뇌로 간파해낸 것이다: 중국과 영국의 아편전쟁으로 체결한 조약은 천하의 착실하게 사업을 하는 상인들에게 있어서는 '불평등조약'이다.
왜 이렇게 얘기할 수 있는가? 아편전쟁으로 체결한 무역협정은 그 목표가 그저, "영국국가가 무역세를 징수하기 편리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무슨 '자유무역'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실질적으로 '조약'의 방식으로 무역에 대하여 관리를 하는 것이었다. 이를 통하여 무역을 국가세수의 주요 세수원이 되도록 하는 것이었다. 동시에 이러한 방식으로 무역을 국가의 완벽한 통제하에 놓는 것이다. 이런 무역을 명분으로 한 조약제도는 오히려 진정한 자유무역을 파괴했다.
이렇게 하여 역사적인 희극이 발생한다: 중국의 서북에서는 제정러시아와 국가가 저세율을 기반으로 한 무역이 진행되어, 시장을 핵심으로 한 자유무역이 이루어졌다면, 영국의 조약제 하에서는 오히려 자유무역이 파괴된 것이다. 예를 들어, 당시의 옷감무역에 고액의 세수를 가산하였다. 바꾸어 말하자면, 영국은 전쟁에서 승리한 후 중국에 <<남경조약>>을 체결하도록 강제하고, 이 조약에 근거하여, 영국의 옷감이 중국시장으로 들어오게 하였다. 영국의 수출세와 중국의 수입세가 가산되면, 도저히 제정러시아의 옷감과 경쟁이 되지 않았다. 당시 중국과 제정러시아의 무역에 적용되는 세율은 아주 낮았기 때문이다. 번 돈은 상인들이 가지지, 국가에 납부하지 않았다. 만일 자유무역을 찾는다면 이것이 바로 자유무역이 아니겠는가?
엥겔스는 바로 시장의 관점에서 출발하여, 영국정부의 '황제의 새옷'을 갈파한다. 그는 아편전쟁의 원인은 실제로 영국정부가 고액세수를 통하여 아편재배와 아편무역을 관리하려는데 있다고 보았다. 이 사업은 정부의 중요한 재정수입원이었다. 그러므로, 만일 중국에서 아편을 금지하면, 손실을 입는 것은 아편상인만이 아니라, 영국정부의 세수가 더 컸다. 그러므로, <<남경조약>>의 핵심내용은 사실 중국영국 양국정부가 모두 세수의 방식으로 아편에 대하여 관리해야한다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이는 사실 오늘날 어떤 현명하다는 자들이 홍등구를 만들어 세수를 늘이자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이 두 가지는 논리나 논조가 기본적으로 같다. 근본적인 차이점은 찾아볼 수 없다. 한마디로 말해서, 이 양자는 사실 모두 국가로 하여금 '보호비'를 챙기는 '조폭'의 역할을 하게 하자는 것이다.
이런 정책, 이런 법규하에서 깨끗한 장사를 하려는 상인은 좋은 점이 전혀 없을 뿐아니라, 그들의 근본이익마저도 파괴된다. 이것은 착실하게 장사하는 사람들을 마약밀매군이나 매춘굴을 연 포주와 같은 출발점에서 경쟁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국가에 돈만 내면 된다. 그러므로, 엥겔스라는 맨체스터 공장주의 아들은 정곡을 찔러서 지적했다: 일반적인 상인에 있어서 이는 불공정한 국가간여이다. 그것은 자유무역을 파괴시킬 뿐아니라, 공정경쟁을 파괴한다. 이는 완전히 선량한 사람을 창녀로 만드는 조치이다.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아편전쟁의 핵심은 아편에 있지 않다. 영국에 있어서, 최종전략목표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광주공행(廣州公行, 즉 광주십삼행)이 당시로서는 아시아무역체계의 WTO역할을 하고 있었는데, 이를 타파해야 했고, 둘째는 홍콩을 할양받아 남중국해의 근거지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이 두 가지에 비하자면, 아편 내지 통상은 모두 부수적인 것이었다. 그리하여 임칙서의 후게자인 기선(琦善)은 1841년 1월 20일의 <<천비초약(穿鼻草約)>>에서 '홍콩할양' '광주통상'의 이 두 가지 조문만을 가지고, 영국으로 하여금 휴전하게 만들었다. 기선이 보기에는 작은 재주를 부려서 영국과의 문제를 해결했다
청나라조정에서 기선으로 하여금 임칙서를 대체하게 한 것은 이 보얼지지터가문의 왕공이 1824년이래로 해운, 조운등의 중대한 의사결정에서 과감하게 처리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조정에서는 그가 이렇게 정치적인 두뇌가 없을 줄은 몰랐다. 영토를 가지고 거래를 하다니. 건륭제가 매카트니에게 홍콩할양을 허락하지 않았는데, 기선은 한 마디로 이를 시원스럽게 받아들인 것이다. 도광제는 이 소식을 전해듣고는 비통해마지 않는다. 바로 조서를 내려, "토지 한조각 백성 하나라도 모두 국가소유가 아닌 것이 없다. 기선이 홍콩을 임의롤 넘겨주다니, 그 죄는 극악하여 용서할 수 없다."
실제로, 바로 홍콩을 위하여 청나라는 <<천비초약>>을 승인하지 않는다. 그리고 영국과 전쟁을 재개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결국 어쩔 수 없이 <<남경조약>>을 체결해야 한다. 장기적으로 보자면, <<남경조약>>이 중국에 가한 최대의 타격은 배상도 아니고 다섯항구의 개항도 아니다. 공행제도가 폐지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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