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문화의 특징들
중국은 한국의 역사와 밀접한 관계를 고대로부터 맺어왔고 지금도 지정학상으로나 경제적으로 상호관계를 유지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놓여 있다. 한반도는 중국으로부터 문화적으로나 사상적으로 많은 영향을 받아왔다. 한국과 중국은 여러 모로 차이가 있지만 동시에 공통점도 많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우리는 ‘의식주’라고 표기하는 반면에서 중국인들은 ‘식의주’라는 말을 사용한다. 즉 중국인들은 의식생활보다 식생활이 더 중요하다고 여길 만큼 한국인보다 더욱 현실주의를 택하고 있다. 반면에 한국민은 먹는 것이 중요하지만 체통이나 체면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중국인은 한국인에 대하여 말하기를, ‘조선 사람들은 조금 먹고 살만하면 먹고 마시고 노래하면서 놀기를 좋아한다’ 라고 했다. 한국인들은 다른 민족들에 비하여 음악성이나 예술성이 높다는 것을 반증하고 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한국문화는 중국문화의 영향을 피할 수 없었고 그 가운데 유가사상은 지대한 영향을 우리 문화에 남겼다.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라는 제목의 책이 나올 정도로 우리는 유교문화에 대하여 반추해 볼 필요가 있다. 중국문화를 살펴보면 중국의 문화가 한국의 그것과 차이가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중국문화는 지구상의 어떤 다른 나라보다 한국의 문화에 더욱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국인으로서 우리 문화의 정체성을 재확인하고 동시에 중국문화를 더욱 잘 이해한다는 의미에서 중국의 문화의 주요한 특징들을 아래와 같이 여섯 가지로 나누어 살펴보고자 한다.
1. 현세주의적 경향
중국문화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현세적이고 실리를 추구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농경사회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데 중국인들은 내세에 대한 관심이 부족하고 현세적인 안정과 풍요를 추구한다.
초월적인 존재를 찾는 고등종교는 중국에서 시작된 적이 없었고 중국의 사상적 주류가 되는 유교 역시 현세화된 사상이다. 현세에서 인간관계를 형성하고 사회질서를 조화롭게 유지하는데 관심을 두었지 내세나 이상향을 추구하지 않았다. 종교적 신조와 규율이 인간관계의 규칙이 되지 못하고 사람들은 세속윤리와 도덕규범에 복종하거나 순응하였다.
그리고 고대로부터 중국인들은 제한된 경작지에서 생존을 위하여 현실적으로 대처해야 하는 것이 국가적으로 대업이라고 할 수 있다. 홍수와 가뭄과 같은 자연재해와 외침과 내전으로 백성들은 현실적으로 부딪히는 삶의 문제에 직면하고 이를 해결하고자 노력해야 했다. 제왕들의 폭정과 전란 가운데 백성들은 스스로 삶의 문제를 해결해야 했고 현실적 문제에 더욱 집중할 수 밖에 없는 처지였다.
청대의 고증학 역시 중국의 현세적인 면을 반영하고 있다. 고증학은 추상적인 사고와 관념적인 주관을 배척하고 문헌을 근거로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추구하였다. 학문의 목적을 경세치용(經世致用)에 두었기에 현실사회의 개혁과 구제에 관심을 두었다.
2. 중화사상
중국의 천연자연적 조건은 중국이 지상의 중심, 세계의 중심, 지구의 한복판에 있다고 여기는 중화사상을 가지게 했다. 중국인은 자기중심적이고 문화적 자부심을 가지며 자만한 우월의식을 가졌다. 중원지역은 한민족에게 하늘이 부여한 영역이라고 믿고 주위에 거주하는 제민족을 비하하고 천상천하에서 가장 우월한 민족은 오직 중국 민족뿐이라는 자부심을 가졌다. 이러한 중화사상 때문에 중국본토 주위에 산재한 이민족을 동이(東夷), 서융(西戎), 남만(南蠻), 북호(北胡) 라고 칭하였다.
춘추전국시대에 제후국이 난립하였고 제후들은 존왕양이(尊王攘夷)를 표방하였는데 이것이 중화사상의 골격이 되었다. 한민족의 우월성과 한민족 중원지배의 대의명분론이 중국민족의 고정개념으로 정립되었다. 이민족(異民族)은 의당 중국 왕조에 복종하고 조공을 바치는 일종의 제후국으로 취급하는 민족적 고정관념이 형성되었다.
그리고 화하족의 집대성은 전국시대에 이뤄졌으며 화하족은 주변의 민족들을 미개하다고 보고 차별화하였다. 그들의 자민족에 대한 우월의식은 화이관(華夷觀)의 개념 속에서 드러났다.
3. 보수성과 수동성
중국의 문화는 매우 보수적이고 수동적이다. 기존의 질서를 유지하고 변화를 막고자 하는 문화적 정서가 작용하고 있다. 중국인이 안정(stability)을 추구하려는 욕구 때문에 가급적 비정상적인 일이나 모험을 피하고 일상생활에서 평온하고 평범한 것을 애써 추구한다.
중국은 다른 문명들이 서양문화와의 상호 영향 속에서 많은 변화를 거쳐왔던 것과 달리 서양세계와 멀리 떨어져 있었다. 자연지리적 특성상 거의 외부세계와 고립된 채로 오랜 세월 독자적인 문명을 유지해왔다. 광활한 대륙에서 얻어지는 풍부한 자원과 자연환경은 중국인들을 중국대륙 내부로만 관심을 집중시키게 하고 독자적 문명을 발달시키는 가운데 중국인들은 보수적이고 수동적인 문화를 발전시켜왔다. 주위의 유목민들이 진취적이고 모험을 감내하며 적극적인 것에 비하여 중국인들은 수동적이고 폐쇄적이었다. 외래 문화가 들어온 후에야 그것을 파악하고 수용하는 수동성을 보인다.
역사적으로 개혁을 시도한 정치가들은 보수적인 정치에 부딪히면서 사회개혁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중국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져야 했다. 상앙(BC 390-338)은 개혁을 시도한 후 죽음을 맞이했고 왕안석의 개혁도 저항에 부딪혔다. 장거정(1021-1086)의 처지도 상앙처럼 처참했다. 근대에 들어와서 캉유웨이(康有爲, 1858-1927)의 무술변법(戊戌變法)에 이르기까지 모조리 개혁에 성공하지 못했다. 사마광은 재상이 되자마자 왕안석이 추진한 모든 신법을 폐지하였다.
중국문화의 수동성은 유가 사상에서도 드러난다. 왜냐하면 유가의 기본 정신이 보수적이기 때문이다. 유가에서 유(儒)는 춘추시대 이전에 제사나 의례의 진행자를 의미했는데 그들은 본질적으로 옛 것을 숭배했다. 당시에 새로운 예악이 없기에 고대의 예악을 사용해야 했고 그래서 옛 것을 숭배하게 되었다. 결국 보수적이게 되었다.
4. 폐쇄적 공동체 의식
중국의 영토는 동서남북으로 폐쇄되어 있고 넓은 영토에 비해 경작지가 상대적으로 좁아 가부장(家父長) 중심의 가족공동의 집약농업이 발달하였다. 이러한 배경으로 인하여 중국인들은 공동체 중심으로 모이고 한 집단에 대한 소속의식이 강하며 이러한 공동체에 포함되어 있는 성원들은 하나의 가족처럼 서로 도와야 할 의무를 가진다.
문제는 자기가 속한 공동체에 대하여서는 봉사해야 할 의무감을 가지는 반면에 소속된 공동체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대하여서는 무관심하다.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큰 소리로 얘기를 주고받는다. 주위에 많은 사람들이 탑승한 전철 동체 안에서나 버스 안에서도 필요 이상으로 큰 소리로 대화를 나누는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미국에서 길을 함께 걸어가는 중국인들이 서로 싸우는 줄 알고 경찰에 신고를 했다고 한다. 그들은 주위의 사람들에 대하여 개의치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의 이기주의적 공동체 의식으로 인하여 공중도덕에 대한 관심이 결여된 것으로 보인다. 자기가 속하지 않은 공동체나 관계성이 없는 주위 사람들의 이익과 복리를 개의치 않고 그들에 대한 폐해에 대하여 무관심하다.
중국문화에서는 자기의 보호를 위하여 위험한 곳을 피한다. 스스로 남을 위하여 희생하려 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의 일에 무관심하여 정치적 부패와 소시민의 고통은 나와는 관계없는 일이므로 보고도 못 본 척한다. 나와 나의 가족, 나의 공동체를 벗어난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지 못한다. 자기 공동체 중심적이고 사회적 책임에 대하여서는 무관심하다.
5. 획일성
유교에 따르면 과거에 사승(師承)이라는 개념이 있었는데 이것은 스승의 가르침을 벗어나면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유교사상이 후한시대에 하나의 모델로 자리를 잡았는데 그 당시 조정은 모든 지식인은 사상과 강학, 변론에서 사승을 벗어날 수 없도록 규정했다. 학생은 선생이 가르치는 범위만을 맴돌 수 있었다. 너무 많이 강론하여 선생이 가르친 범위를 벗어나면 죄를 짓는 것이었다. 명왕조와 청 왕조에 이르면 정부에서는 주희의 말을 이용하여 해석해야지 왕양명의 말로 해석해서는 절대 안 된다고 규정했다. 지식인의 사고를 근본적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사고력은 쇠퇴하고 상상력이 고갈될 수 밖에 없었다.
진시황은 승상 ‘이사’의 건의에 따라 사상 통일을 위하여 법가 및 실용서적을 제외한 나머지의 책들을 모두 불태웠으며 수많은 유생들을 생매장하기까지 했다. 이를 두고 분서갱유라고 하는데 이러한 사상적 탄압은 학자들의 상상력과 창의성의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당의 학교교육은 유교이념에 의해 관인으로 천하를 통치하는 군자를 양성하는 것이며 관인으로 나아가는 과거시험 준비교육의 성격을 띠고 과거제도에 예속되어왔다. 따라서 순수학문이나 학문을 위한 객관적 진리탐구가 학교교육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당 태종은 유교사상을 통일제국의 이념에 접목시키기 위해 오경정의를 편찬케 하였다. 이로써 유교경전에 대한 해석이 학자의 연구가 아닌 권력에 의한 통일로 획일화되었다. 이에 따라 유교사상의 발전을 막았고 과거시험의 명경과에서는 오경정의에 의한 해석만으로 답을 써야 했기 때문에 경학에 대한 새로운 연구는 필요가 없었고 이는 학문과 사상의 획일화를 초래하였다.
명대의 황종희의 개혁사상은 훌륭하지만 그는 ‘격식을 지키지 못한 고문(古文), 터득한 내용이 없는 어록, 실용성이 없는 주의(主義), 역사학에 도움이 되지 못한 기록’은 출간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는 실용성과 실사구시를 편협하게 추구하였기에 사상의 다양성과 창의성의 기회를 주지 않았다.
6. 유가사상
유가사상은 중국문화의 특징을 논하는데 있어서 빼어놓고 얘기할 수 없을 것이다. 중국문화의 심층에 작용하고 있는 본질적인 특징이며 중국사회를 지배하는 사상적 주류가 유교이기 때문이다
예(禮)는 하늘에 대한 경건한 마음가짐이며 하늘이 인간 각자에게 부여한 윤리규범이다. 그리고 이 예는 그 규범을 지킴으로써 이뤄지는 인간사회의 질서이다. 공자는 예가 무너졌기 때문에 난세(亂世)라고 보았다. 그는 예를 인간의 도덕성을 실현하기 위한 목표라고 주장하였다. 특히 유가는 효(孝)를 강조하였다. 효가 핵심적 사상이었고 이것을 충(忠)으로 변질시켰다. 사회질서를 위하여 효를 강조하였다. 중국의 효 사상은 중국 문화의 핵심으로 그 문화에 용해되어 있다.
중국은 서양의 전통에서 하나님과 같이 초월적 존재가 절대적 권위가 된 것과 달리 인간 세상에서 궁극적인 도덕적 권위를 찾았기 때문에 효가 인간관계의 출발점이 되었다. 이 효의 도덕성이 중국 도덕과 인간관계에 있어서 주요 원칙이고 근본 토대가 된다. 효가 사회의 생활과 중국문화를 좌우하고 있다. 그래서 효의 개념은 정부와 백성 사이의 관계로 확장되어 친민(親民)에서 친(親)이란 말은 부모 같은 정부를 가리키고 민(民)자는 ‘자식 같은 백성’을 의미한다. 친자의 관계가 정부와 백성 사이의 관계에 적용되고 있다. 따라서 유가 사상은 중국문화의 전체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출처 : 바울선교회지 11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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