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고대사의 뇌관을 건드리다 | |||||||||||
입력: 2008년 03월 14일 17:03:08 | |||||||||||
ㆍ고대사 뒤흔든 “기자조선은 실존했었다”
표면에서 불과 30㎝ 밑에서 모두 6점의 은(상)나라 시대 청동기가 질서정연하게 놓여있는 것이 아닌가. 청동 항아리 1점과, 청동제 술그릇(뢰) 5점이었는데, 모두 주둥이가 위를 향해 있었다. 희한했다. 제2호 청동 술그릇의 주둥이 안에 이상한 문자가 새겨져 있었다. ■ 고죽, 기후 명 청동기
6자였다. 그런데 6자 가운데 3, 4번째 글자인 ‘고죽’ 두 자는 1122년 송나라 휘종이 출간한 ‘박고도록(博古圖錄)’과 ‘상하이 박물관 소장 청동기 부록(1964년)’에 수록된 은(상) 청동기 명문 중에서도 나온 바로 그 글자였다. 바로 고죽(孤竹)이란 글자였다. 항아리의 무늬와 형태는 갑골이 쏟아진 안양 인쉬(殷墟) 유적에서 나온 은(상) 나라 말기의 청동 술그릇과 같았다. 같은 해 5월, 이 교장갱(교藏坑·물건을 임시로 묻어둔 구덩이)을 정리하던 조사단은 불과 3.5 옆에서 또하나의 구덩이를 확인했다. 지표 밑 50㎝에서 은말주초 청동기 6점을 발견한 것이다. 청동기 6점은 장방형의 교장갱 안에 세 줄로 배열됐다. 솥(鼎), 술그릇(뢰), 물 따르는 그릇(帶嘴鉢形器) 등이 하나의 세트로 일정한 규율을 갖추고 있었다. “제2호 교장갱 출토품 가운데는 방정(方鼎·사각형 솥)이 가장 주목을 끌었어요. 높이 52㎝, 입지름 30.6×40.7㎝, 다리 높이 19.6㎝, 무게 31㎏였는데 굉장히 아름답고 전형적인 은(상)나라 말기의 방정이었지.”(이형구 교수) 방정의 형태와 무늬는 역시 인쉬 부호(婦好)묘와 인쉬 허우자좡(侯家莊) 대묘에서 출토된 대형 청동솥과 같았다. 은(상)나라 말기의 것이었다. 그런데 이 방정의 북쪽 내벽에 4행 24자의 명문이, 바닥 중심에도 4자의 명문이 새겨져 있었다. 문제의 명문은 내부 바닥 것인데, ‘(箕侯)’로 읽을 수 있는 명문이었다. 보고자들은 명문에서 보이는 ‘고죽’과 ‘기후’를 은나라 북방에 자리잡은 2개의 상린제후국(相隣諸侯國·인접해 있던 제후국)이라고 추정했다.
■ 한반도를 강타한 ‘기자조선’의 부활 그로부터 6년이 지난 1979년 새해 벽두. 깜짝 놀랄 소식이 한반도를 강타했다. “箕子朝鮮은 실존했었다”(경향신문 1979년 1월5일자)는 보도 때문이었다. 경향신문과 서울신문은 한·중·일 학계가 뜨거운 감자로 여긴 기자조선의 실체를 고증한 이형구 당시 문화재전문위원(현 선문대 교수)의 논문을 실었다. 논문은 이형구 교수의 국립 대만대 고고학과 석사학위 논문 ‘중국동북부 신석기 시대 및 청동기시대의 문화 연구’였다. 34살 고고학도가 쓴 한 편의 ‘석사논문’은 학계에 거대한 폭풍을 일으켰다. 이른바 ‘물 먹은’ 다른 언론은 다음날 경향신문·서울신문의 기사를 받아 쓸 수밖에 없었다. 경향신문은 사설(1월9일)을 통해 ‘민족사의 재조명-식민사관 극복위한 일대전기를 갖자’고 기원했다. 다른 신문들도 사설에서 ‘기자조선이 뜻하는 것-적극적인 자세로 史實을 밝히자’(한국일보 7일자), ‘상고사연구와 국제협력’(동아일보 8일), ‘기자조선의 허실-이를 밝히는 학술작업’(조선일보 10일자)이라며 연일 다투어 촉구했다.
반면 김정배 고려대 교수와 김정학씨는 “중공자료에 집착한 인상”(김정배 교수·중앙일보 3월20일자) “랴오닝 지방 청동기는 은·주가 아니라 시베리아 계통”(김정학씨·중앙일보 1월17일자)이라고 반박했다. 이기백 서강대 교수는 이형구 교수에게 보낸 편지에서 “기후(箕侯)가 기자조선이었다는 증거가 제시되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 학문엔 ‘절대’란 없다 논쟁은 해외까지 번졌다. 당시 심심치 않게 국내에 인용되던 통일일보(일본에서 한국인이 발행한 일본어신문)는 천관우씨와 김정배씨의 글을 상·중·하로 다뤘다. 또한 대만의 ‘연합보’도 “한국인 학자가 뿌리를 찾는다(韓國學人在尋‘根’-李亨求爲‘箕子朝鮮’正名)”는 제목의 기사를 보도했다. 기자조선의 ‘대동강 유역 존재설’을 흔들림 없이 믿고 있던 중국문화대 량자빈(梁嘉彬) 교수는 얼마나 화가 났던지 이교수의 논문을 급히 입수한 뒤 즉각 반론을 제기했다. 그야말로 동북아 학계가 요동친 것이다. “논문을 지도·심사한 베이징대 출신 원로 고고학자 가오취쉰(高去尋) 교수와 인쉬(은허·殷墟)를 발굴했던 스장루(石璋如) 선생 등이 78년말 기립박수로 통과시킨 논문이었지. 그런데 이 논문을 국내에 소개했을 때, 어느 정도 파장은 예상했지만 사태가 이렇게 걷잡을 수 없이 번질 줄은 몰랐지. 아 글쎄 내 논문을 가지고, 당대최고의 학자들이 그분들끼리 치열한 논쟁을 벌이잖아요. 그때 ‘아, 정신차려야겠구나. 더 공부하지 않으면 큰 일 나겠구나’ 하고 느꼈지.”(이형구 교수) 이 논쟁과 관련된 자료를 들추던 기자(記者)는 학문에서 ‘(상대방의 견해는) 절대 아니다’, ‘내 주장은 100% 옳다’는 쾌도난마는 없어야 한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특히나 고고학·문헌 증거들이 속출하는 역사 및 고고학계에서 과거의 학설이나 주장은 언제든 바뀔 운명에 놓여있다. 그런데도 ‘내 주장만이 옳다’고 고집하는 것은 새로운 성과나 연구결과가 나왔을 때 결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는 것과 마찬가지다. 돌아설 명분, 즉 자신의 고집을 번복하고 새로운 학문을 향해 진일보할 기회를 스스로 놓치는 것이다. 조유전 현 토지박물관장이 늘 드는 재미있는 일화 하나.
“국립문화재연구소장에 있을 때였어요. 백제유적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데, 어느 기자가 그래요. ‘소장님, 봤습니까. 그 때(백제시대) 소장님이 살아봤어요?’ 허허. 물론 농담이었는데 그 말이 맞더군요. (당시를) 살아보지 않고 쾌도난마로 자기 주장을 펼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 선양 | 이기환 선임기자 lkh@kyunghyang.com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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