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전설 야담

오세동자의 오도

지식창고지기 2010. 12. 4. 08:46

오세동자의 오도

<설악산·오세암>

『스님, 속히 고향으로 가 보세요. 어서요.』

설정 스님은 벌떡 일어났다. 캄캄한 방 안엔 향내음뿐 아무도 없었다. 스님은 그제서야 정신을 가다듬고 꿈을 꾸었음을 꾸었음을 깨달았다.

「아름다운 오색구름을 타고 와 자꾸 흔들어 깨우던 이는 관세음보살이었구나.」

이상한 꿈이다 싶어 망설이던 설정 스님은 새벽 예불을 마친 후 고향으로 향했다. 설악산에서 충청도 두메산골까지는 꼬박 사흘을 밤낮없이 걸어야 했다. 30여 년만에 찾은 고향은 비참하기 짝이 없었다.

큰댁, 작은댁 등 친척들이 살던 마을은 잡초만 무성할 뿐이었다. 스님은 괴이하다 싶어 어릴 때 살던 집을 찾아갔다.금방이라도 자신의 속명을 부르며 노부모님들이 쪼ㅈ아 나오실 것만 같은데 인기척이 없었다. 불현듯 불길한 생각에 휩싸야 집안을 둘러봤다. 그리곤 어머니, 아버지, 형님을 불러봤으나 대꾸 대신 마루틈에서 자란 밀과 보리싹만이 보였다. 스님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관세음보살님은 왜 고향엘 가 보라고 하셨을까?」

그때였다. 아랫마을에 산다는 한 노인이 나타났다.

『허, 시주를 오신 모양인데 잘못 오셨소이다. 이 마을은 얼마 전 괴상한 병이 번져 모조리 떼죽음을 당하고 오직 한 사람 세 살된 어린아이가 살아있을 뿐이오.』

알고 보니 그 어린아이는 설정 스님의 조카뻘이 되었다.

설정 스님은 그 아이를 찾아 등에 업고 설악산으로 돌아왔다. 잘 키워 가문의 대(代)를 잇게 할 작정이었다. 그게 바로 관음보살의 뜻이라고 생각했다.

아이는 야무지고 영리했다. 산짐승 소리도 무서워하지 않고 다람쥐와 장난도 하며 잘 자랐다. 스님따라 조석 예불도 하고 염불도 곧잘 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아기는 다섯 살이 되어 제법 상좌 구실까지 해냈다.

그 해 늦은 가을. 겨울살림 준비를 하던 설정 스님은 겨우내 먹을 식량을 구하러 설악산을 넘어 양양에 가야 했다.

워낙 멀고 험한 길이라 조카를 업고 갈 수가 없었다.

총명하고 똑똑하지만 겨우 다섯 살밖에 안된 조카를 혼자 두고 나가자니 그도 마음이 놓이질 않았다. 스님은 조카를 앉혀 놓고 몇 번이고 다짐했다.

『절대로 문밖에 나오지 말아라. 그리고 무섭거든 관세음보살을 외워라.』

조카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목탁을 추켜들었다. 설정 스님은 몇 번을 단단히 이른 후 배낭을 짊어지고 길을 떠났다.

걸음을 재촉한 스님이 숨을 몰아쉬며 양양에 도착한 것은 해질 무렵. 식량을 구해 돌아가려니 이미 캄캄한 밤중이 되었다. 혼자 암자를 지키고 있을 조카를 생각하여 밤길을 떠나려 했으나 동네 사람들은 한사코 만류했다.

『험한 산길에 산짐승도 많거니와 바람이 유난히 날카롭고 세차니 오늘밤은 쉬시고 내일 새벽 떠나십시오.』

스님은 하는 수 없이 양양에서 하룻밤을 지새웠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이튿날 새벽 길을 나서려 하니 밤새도록 내린 눈이 지붕에 닿게 쌓여 있었다.

마을이 이러하니 산은 말할 나위도 없었다. 적설량 많기로 유명한 설악산은 눈이 내렸다 하면 열 길 스무 길이라 이듬해 봄까지 꼼짝달싹 못하는 터다.

그러나 스님은 미친 듯 배낭을 짊어진 채 문을 박차고 나섰다.

『스님 아니되옵니다. 못 가십니다.』

『놓으세요. 내 어찌 다섯 살짜리를 암자에 홀로 두고 그냥 있을 수 있겠소.』

스님의 심정을 모르는 바 아니나 이 눈 속에 설악산을 넘는다는 것은 무덤을 파는 일이므로 마을 사람들은 결사적으로 말렸다. 스님은 마을 사람들에게 붙잡힌 채 멍하니 설악산을 쳐다보았다. 그토록 아름답던 대청봉, 소청봉이 원망스럽기 짝이 없었다.

눈 속에 묻힌 채 배고파 울고 있을 조카를 생각하면 그만 미칠 것만 같아 몇 번이고 설악산을 향해 치달렸지만 번번이 눈 속에 쓰러지고 말았다.

설정 스님은 자연의 섭리를 내다보는 혜안이 없었음을 뉘우치며 한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러다 스님은 그만 병석에 누웠다. 식음을 전폐하고 앓아눕기 한 달. 신도들의 극진한 간호에 병세가 호전되면서 버릇처럼 관세음보살을 염했다.

한숨으로 세월을 보내면서 어느덧 설악산의 산이 변해갔다.

스님은 어디서 기운이 났는지 벌떡 일어났다. 마을 장정들이 스님을 부축하여 대청봉에 올라서니 저 아래 골짜기 관음암에서 이상한 서광 한줄기가 짙게 하늘로 뻗어 있었다.

스님은 미친 듯 조카를 부르며 단숨에 산길을 달려 암자에 당도해 보니, 법당 안에서 관세음보살을 외우는 염불소리가 낭낭하게 들렸다. 순간 웬 여자가 오색 치맛자락을 끌며 밖으로 나와 하늘로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

스님은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법당 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스님!』

반가움에 벼락같이 달려나와 안기는 조카의 모습에 스님은 그만 뒤로 물러섰다.

『아니 네가….』

『제가 왜요? 스님 오시기만 기다리며 관세음보살을 외웠더니 늘 관세음보살님이 나타나 돌봐주셨어요.』

설정 스님은 와락 조카를 껴안았다.

조카는 조금도 변한 것이 없었다.

설정 스님은 어찌나 감격했던지 그날로 암자 이름을 관음암에서 오세암으로 고쳤다. 다섯 살짜리가 지킨 암자라는 뜻뿐 아니라 동자는 그때 이미 불법을 깨쳤음을 시사하는 이름이다.

이는 고려말엽의 일이라 한다. 그 후 오세암은 수차의 중창을 거쳤으나 6·25동란 때 불타 없어지고 지금은 조그만 방 한 칸이 이 전설과 함께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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