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역사(한국)

광해군

지식창고지기 2009. 6. 2. 08:32

광해군


민족을 戰亂에서 구했으나 內治 실패한 悲運 君主 光海君

 

조선왕조 제15대 임금으로, 패륜아·폭군 등 부정적 이미지로 분칠되어 온 광해군(재위 1608∼1623). 왕위에 오른 지 16년째 되던 1623, 인조반정으로 쫓겨나 이곳저곳을 떠돌며 귀양생활을 하다 쓸쓸히 눈을 감은 廢主 광해군은 한마디로 역동적이고 극적인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다. 최근 들어 임란후 피폐해진 조선을 재건하고 주변 강대국과의 실리외교를 전개해 전쟁의 위기를 넘긴 탁월한 군주로 재조명받는 광해군이 후세인들에게 주는 두가지 교훈.

 

광해군시대 주요 사건과 연표

 

1575년 광해군 출생
1592
년 왕세자로 책봉됨, 임진왜란을 맞아 분조를 이끌기 시작

1608
년 선조 사망, 광해군 즉위 유영경 사사, 임해군 유배 선혜청 설치하고 경기도에 대동법 시행

1609
년 기유약조를 매정, 임란 이후 단절된 일본과의 국교를 회복하고 통상 재개 광해군, 서북지역의 방어태세를 엄중히 하라 지시

1610
년 허준, “동의보감” 25권 지어 바침 국방상 긴요한 화약 등을 신경써 구입하도록 지시

1611
년 윤방 등을 시켜 동래·부산 등지의 왜구를 살피게 함. 정인홍이 이언직·이황을 비판한회퇴변척사건 발생, 이 사건을 계기로 광해군정권은 사림과 대립관계가 첨예화됨
.
1613
년 계축옥사 발생, 김제남 사사, 폐모 논의 시작 정인홍 문하의 정온까지 영창대군 살해를 비판하는 상소를 올리고 정인홍의 문하에서 이탈할 정도로 사림의 반발을 삼
.
1616
2월 여진족의 위협에 대비하여 서북지역의 방어를 엄히 하라고 지시. 누르하치 후금 건국, 그의 침략 소문에 도성민 동요

1617
년 광해군, 후금 정세 탐지하라고 지시

1618
년 광해군, 명의 원병 요청 강력히 거부. 광해군과 비변사, 파병 여부를 놓고 논쟁 인목대비를
西宮이라 낮춰 부름
1619
년 명의 거듭된 요청에 파병한 강홍립의 조선군 심하전투에서 패전

1621
년 명이 다시 원군 요구, 모문룡 조선에 들어옴

1620
10월 비변사에 방어대책을 세울 것과 후금과의 관계를 원할히 할 것 지시

1622년 모문룡, 가도로 들어감

1623년 인조반정 일어나 광해군 폐위

1624년 이괄의 난 발생

1627년 정묘호란

1636년 병자호란 발생

1637년 인조, 청 태종에게 항복

1641년 광해군 사망

 

조선조에서 쿠데타를 맞아 실각한 임금은 노산군·연산군·광해군, 이렇게 셋이다. 이중 노산군은 어려서 즉위한 뒤 막강한 삼촌의 힘에 떼밀려 퇴위당했다. 그래서인지 조선조에서도 많은 이들의 동정을 샀으며, 죽은 뒤에나마 단종으로 추존돼 복권됐다. 연산군은 정말 원없이 폭군 짓을 하다 퇴위됐기에 왕위에서 쫓겨나는 것이 당연한 일로 치부될 만하다. 연산군은 행동반경이 좁게만 강제됐던 조선의 왕 중에서는 드물게 말 그대로의처럼 임금 노릇을 한 인물이 아닐 수 없다. 정치에는 관심 없이 궁녀만 1,300명을 거느리며 매일 연회 속에서 지낸 임금. 충언하는 신하가 미워 아예 사간원이라는 정부기관을 통째로 없애버리고 마음대로 악패를 저질렀던 연산군이었으니 퇴위당했더라도 억울할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광해군은 달랐다. 15년간의 재위기간내내 복잡다단한 국내외 정치상황에 대응해 자신의 확고한 정치노선을 끌고 가다 반대세력의 쿠데타를 맞아 한순간에 권좌에서 밀려났다. 그의 치적이 만만찮아 쿠데타에 성공한 반란세력들은 조선이 망하는 순간까지 광해군의 치적을 폄하하고 은폐하기 위해선조실록을 수정하고, “광해군일기의 사초를 왜곡하는 등 갖은 수를 써야 했다.

 

그러나 역사의 진실은 가린다고 영원히 덮이는 것이 아니다. 현대의 역사가들에 의해 광해군은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전란을 피하게 한중립외교노선을 펼친 군주로 재평가되고 있다. 한명기(규장각 특별연구원) 박사는 최근 출간한 그의 저서광해군”(역사비평사)을 통해 그를탁월한 외교정책을 펼친 군주로 평가하고 있다. 광해군시대의 방대한 사료와 역사학계의 연구성과를 근거로 저술한 이 책은 당대의 사대주의적 신료들의 거듭된 반대를 물리치고 초강대국 명나라를주무르고’, 신흥 강국 후금을달래는탁월한 외교정책을 구사하는 광해군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필자는 이 책을 보면서광해군의 그런 탁월한 외교정책이 왜 좌절됐는가하는 것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물론 그 의문에 대한 실마리는 책 안에 있었다. 광해군이 그의 시대에 부닥쳤던 외교문제는 미··· 4대강국에 둘러싸여 그에 대한 적절한 대책없이는 민족문제를 해결하기 힘든 지금 우리 시대의 방향 설정에 주요한 시사점을 줄 수 있을 것이다. 광해군이 부닥쳤던 문제들은 구체적으로 무엇이었고, 그는 어떻게 대응했는가. 한명기씨의광해군을 주연료로, “조선왕조실록등 사료를 보조연료로 해서 광해군을 만났다. 그리고 그가 털어놓는 광해군시대의 비망록을 육성으로 들어보았다.

 

진짜 쿠데타로 실각한 광해군

 

광해군을 만난 곳은 그의 마지막 유배지 제주에서였다. 시점은 1840. 그가 죽기 바로 전년이다. 두칸이나 될까, 그와 심부름하는 계집종 하나만 있는 초라한 띠집이었다. 의욕없이 서책을 넘기던 예순여섯살의 노인 광해군은 홀연히 나타난 기자를 보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너는 누구냐?”

  

18년간의 폐위 기간이었지만 왕으로서의 말은 바뀌지 않았다. 조선의 왕은 신하들을 부를 때 통상’()라고 불렀던 것이다.

 

― 400년 뒤의 사관입니다. 전하의 재위기간 중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찾았습니다.

, 다 늙은 이에게 무얼 들으려고…. 그리고 내 시대의 실록은 이미 만들어졌을 텐데.”

 

어느 정도는 아시겠지만 실록은 저들 마음대로 쓰고 싶은 것만 골라 쓰지 않았겠습니까. 심지어 전하시대에 간행된선조실록도 저들이 수정실록을 내놓지 않았습니까.

원래 불만이 많았던 서인들이 득세했으니 그럴 만도 하겠지.”

 

전하께서는 반란이 일어나리라 생각하셨습니까?

어느 정도는 짐작했었다. 내가 그토록 의지했던 정인홍도 나를 떠났고, 오른팔 노릇을 자임했던 이이첨이는 대북정책에서는 사사건건 반발만 하니 믿을 만한 신료는 하나 없었구나. 이이첨이가 내 견해에 반대해숭명배금’(崇明排金)을 주장한 것도 어디 자기 주장이었겠느냐. 다수 신료가 그렇게 주장하니 그에 편들어 제 체면치레만 할 따름이었지. 왕이란 자리가 참 고독했다. 섬이지, . 반란 당시 비원쪽에 불이 나 이씨 종사가 내 대에 이르러 망했나보다 생각했는데, 조카가 대신 올랐으니 역성반란은 아니었다. 그래도 조상들께 면목은 서니 다행이 아닐까 한다.”

광해군은 반란이 있자 처음에는이이첨이 저지른 짓이 아닌가?”하고 물었다고 한다. 왕세자로만 17년간 있었고, 즉위 무렵에는 계모인 인목대비의 소생 영창대군을 옹립하려는 반대파 신료들의 책동 때문에 즉위 여부까지 불안을 느꼈던 광해군. 그런 광해군을 왕위에 오르게 했던 대북파의 중심인물인 이이첨에 대해 이런 의심까지 들 정도였으니 반정을 전후한 광해군의 정치적 처지가 얼마나 곤란했는지 짐작해 볼 만한 대목이다.

 

반란 무렵 이귀와 김자점을 잡아들여야 한다는 대간들의 상소도 있었고, 반란에 대한 첩보도 끊이지 않았는데 전혀 대비하지 않았죠?

내 최대의 실책이었다. 김상궁이 별일 아니라고 하기에 나도 그런 줄만 알았지. 이귀가 또 자신을 고발한 사람들과 대질신문까지 하자며 상소를 올렸으니…. 불안하기는 했지만 우선 그냥 놔두었던 거다.”

여기서 김상궁이란 누구인가. 실록에서 김개똥(金介屎) 상궁이라 전하는 인물로, 이이첨과 더불어 광해군시대 최대 악인으로 묘사된 인물이다. “광해군일기에는 오늘날로 치면 박스기사라고 볼 수 있는 기사들이 있다. 광해군 5 811일자의이이첨과 김상궁 개시에 관한 비교 평가같은 기사다. 이 기사에서는 그 둘의 비슷한 점 세가지를 들고 있다. 첫째, 역적을 토벌해야 한다며 과격한 역적토벌론을 일삼는 것. 둘째, 벼슬 욕심을 줄이되 실권을 최대한 갖는 것. 그래서 이이첨은 영상의 자리에 오르지 않고, 김상궁은 희빈이니 귀빈 자리 같은 데 욕심을 두지 않는 것. 그러면서도 실익은 마음대로 챙긴다는 점. 셋째, 악역은 다른 이에게 맡기고 그 일에 대한 공은 자신이 차지하는 것 등이다.

김개시가 광해군에게 절대적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실록에 의하면 미모는 아니었지만 성적 기교라고 볼 비방(秘方)을 써서라고 한다. “연려실기술에 의하면 선조의 독살에 간여하면서, 광해군의 약점을 틀어쥐고 있었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그런 김상궁을 이귀가 포섭해 광해군에게 들어간 첩보를 무력화시켰던 것이다.

 

유폐된 지 벌써 18년째인데, 아직도 아쉬움이 많을 것 같습니다.

, 지나간 세월 말해 무얼 하겠느냐만 그래도 가슴 속에 울컥울컥하는 게 있지. 그래도 이제는 아무 미련도 없지. 허유·유효립이가 내 복위를 꾀하며 일을 준비할 때는 조금 희망도 품었지만 그새 물거품 아니었나. 그게 벌써 12년전 일이니 그저 모진 목숨이나 이어가고 있구나.”

 

1628년 허유와 유효립 등은광해군을 일단 복위시킨 뒤 인성군(광해군의 이복동생)에게 왕위를 물려주게 하고 상왕으로 추대한다며 반란을 꾀했다고 한다. 반란의 추진 과정에서 광해군의 첫째 처남 유희견의 아들 유효립은 유배지 강화도로 사람을 보내 광해군의 측근들과 연락했다고 한다. 그때까지 광해군은 복권 의지가 살아있었던 것이다.

 

재위기간 중 가장 뿌듯한 기억이 남는다면 어떤 것이 있습니까?

   “아무래도 전란을 막았던 게 아닌가 한다. 3년전 능양(인조)이 청나라 왕에게 머리를 세번이나 조아렸다지? 오랑캐니 뭐니 하면서 함부로 대하다 그런 치욕을 당했으니…. 내가 일찍이 조선사람들은 허풍 때문에 망할 것이라 했는데 오늘날 그렇게 되지 않았나. 신료란 사람들이 현실을 보지 못하고 그저 서책에 있는 말이나 되새기고 저희들 생각대로만 되는 줄 아니…. 내가 왜란 중에 북쪽을 다녀봐서 저들 여진의 힘이 얼마나 강성한 줄 똑똑히 알았다. 수도 적지만 훈련도 제대로 되지 않은 우리 군사들이 저들을 당해내지 못할 것은 조금만 생각해도 알 수 있는 것을 왜 그리 외면하는지….”

 

최용범
월간중앙 2000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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