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타르와 금성(金星)
그런데 이슈타르에서 특히 주목할 사실이 있다. 이슈타르가 하늘의 금성(金星)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슈타르는 금성의 여신으로 간주됐으며, 태양신 ‘샤마시’, 달의 신 ‘신(Sin)’과 함께 천체의 삼신(三神)을 이루기도 했다. 영어로 금성을 비너스(Vinus)라고 부르는 것은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현재도 미국의 나사(NASA)에서 금성의 지형에 붙인 명칭 중에는 ‘이슈타르 대륙’이 있다.
금성은 우리 민족도 중요시하던 별이다. 우리에게는 흔히 샛별이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그 외에도 태백성, 장경성(長庚星), 계명성(啓明星), 명성, 개밥바라기 등 여러 이름을 갖고 있다. 이처럼 많은 이름을 가진 것은 선조들에게도 그만큼 관심의 대상이었음을 의미한다.
금성은 신라인에게 특히 주목받았던 별인 듯 그에 관한 기록이 많이 전한다. 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수록된 금성에 관한 기록을 인용해본다.
…최초의 기록은 200년(신라 내해왕 5) 7월이며, 그 뒤의 기록에는 관측날짜까지 밝혀져 있다. 또한 월엄범오위(月掩犯五緯)에 “신라 내해왕 10년 추 7월에 달이 금성을 가렸다”, 오위엄범(五緯掩犯)에는 “신라 문성왕 6년 춘 2월 금성이 토성을 가렸다”, 또 오위합취(五緯合聚)에도 “신라 원성왕 6년 하 4월 금성과 수성이 쌍둥이 별자리의 밝은 별인 동정(東井)에 모였다”, 오위엄범항성(五緯掩犯恒星)에는 “신라 남해왕 20년 가을 금성이 태미(太微)에 들어갔다”고 하였다.
태미는 하늘의 북극을 중심으로 크게 나눈 3개의 구획(垣) 중의 하나로 자미(紫微), 천시(天市)와 더불어 삼원을 이룬다. 이 기록은 어느 별을 가렸는지가 불분명한데 다음의 기록을 보면 “성덕왕 14년 추 9월 금성이 작은곰자리에 있는 네 번째 별인 서자(庶子)를 가렸다”고 구체적인 현상을 기록하고 있다….’
‘ 월엄범오위’란 달이 행성을 가리는 현상을 말하며, ‘오위엄범’은 행성끼리 접근하는 현상, ‘오위합취’는 행성들이 한데 모이는 현상, ‘오위엄범항성’은 행성이 항성에 접근하는 현상을 말한다.
왜 유독 신라에만 금성에 대한 관측 기록이 집중적으로 전해지는 것일까. 신라인이 극히 중요하게 여긴 별이 금성이기 때문이었을까.
만일 첨성대가 금성의 여신 이슈타르를 모시기 위한 지구라트였다면 신라에 그럴 만한 사유가 있었을까. 신라라기보다는, 첨성대가 궁성에 가까이 있었고, 선덕여왕 때 쌓은 것이기 때문에 선덕여왕과 관련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선덕여왕이 과연 첨성대를 쌓아야 할 절실한 사유가 있었을까.
선덕여왕의 고뇌
잘 알려진 대로 선덕여왕은 우리 역사에서 최초로 등극한 여성 임금이다. 신라는 내내 성골(聖骨) 출신이 왕위를 계승하다가, 26대 진평왕을 끝으로 더 이상의 성골 남자가 없자 화백회의에서 성골 여자를 임금으로 추대하는데 그가 바로 선덕여왕이다.
그러나 선덕여왕은 재위 기간 내내 여자라는 이유로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아무리 임금이라지만 남성들로 이뤄진 귀족들이 고분고분하게 굴지 않았을 것이고, 왕위 계승 당시나 이후에 여자 임금이어서 나라를 잘 다스리지 못한다는 이유로 반란이 일어나기까지 했다. 결국 선덕여왕은 그 반란 전쟁의 와중에서 죽음을 맞았다. 심지어 당나라의 태종은 나라의 안정을 위해 자신의 친척을 보내 임금으로 삼는 게 어떤가 하고 제의할 정도였다.
이 여왕 때에 유달리 고구려, 백제와 분쟁이 잦았던 것도 최초의 여자 임금이라는 사실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국가란 약하게 보이면 항상 주위에서 넘보게 마련이다. 따라서 선덕여왕은 여성 임금이라는 취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 것으로 보인다.
대표적인 사례가 재위 기간에 영묘사, 분황사, 황룡사 9층탑 축조 등 유달리 큰 불사(佛事)를 많이 일으킨 것이다. 이는 왕실의 위엄을 내세워 여왕의 존재를 정당화하고, 불력에 의지해 왕권을 확립하고자 하는 의도였을 것이다. 여왕이 유독 김유신과 김춘추를 살갑게 대했던 것도 그들의 충성과 지지를 이끌어 내 자신의 입지를 보완하기 위함이었다.
이외에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선덕왕 지기삼사(知幾三事)’도 여왕의 권위를 내세우기 위해 의도적으로 꾸며 냈을 가능성이 크다. 즉 당나라에서 보낸 모란씨 겉봉의 그림을 보고 나비가 그려져 있지 않자 향기가 없을 것이라고 했다는 이야기나, 겨울에 개구리 울음소리를 듣고 백제 군사가 쳐들어올 것이라고 했다는 것, 죽을 때 죽을 달과 날을 미리 알려 줬다는 것 등은 상식적으로 납득되지 않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선덕여왕에게 또 하나의 커다란 고민거리가 있었다. 그것은 신라 성골의 대를 이을 후사가 없다는 점이었다. 자신도 남자가 없어 많은 반대를 무릅쓰고 사상 유례 없는 여성 임금에 올랐기에 대를 이를 후사가 없다는 것은 엄청난 고민을 안겨 주었을 것이다.
최근에 발간된 필사본 ‘화랑세기’에는 선덕여왕이 후사를 두기 위해 얼마나 고심했는지 잘 나와 있다. ‘화랑세기’는 그 동안 그 진위를 놓고 적잖은 논쟁이 벌어졌지만, 최근 그 실체를 인정하려는 경향이고 필자도 이에 동의하는 바이므로 그대로 따르기로 한다.
신라시대 김대문이 쓴 ‘화랑세기’에 의하면 선덕여왕에게는 삼서제(三壻制)가 시행됐다고 한다. ‘서(壻)’는 남편을 뜻하므로, 세 사람의 남편을 뒀다는 얘기가 된다. 그러나 실제 선덕여왕은 결혼하지 않았으므로 삼서제는 여왕에게 씨를 제공하는 씨내리 남자들이었던 셈이다. ‘삼국유사’에는 선덕여왕이 결혼해 음갈문왕(飮葛文王)을 배필로 삼았다는 내용이 있는데, 음갈문왕은 삼서 중의 한 사람으로 간택된 김용춘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갈문왕이란 신라시대에 가까운 친족에게 주던 봉작을 뜻하기 때문이다. 김용춘은 선덕의 숙부 되는 사람으로, 이미 결혼한 몸이어서 선덕과 결혼했다고 해도 정식 결혼이 아니어서 ‘삼국사기’에 기록되지 않은 듯하다.
먼저 김용춘을 택했다가 성과를 보지 못한 여왕은 이어서 친척인 흠반(欽飯)과 대신 을제(乙祭)를 차례로 불러들였으나 끝내 자식 만들기에는 실패하고 말았다. 요즈음으로 말하면 숫제 애를 낳지 못하는 석녀(石女)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 때문에 다음 왕은 부득이 동생이 즉위하는데 진덕여왕이다.
이러기까지 선덕여왕이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했는지 상상해볼 수 있다. 왕조시대의 가장 중요한 일은 왕조의 존속, 유지였다. 따라서 왕손의 맥을 잇는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중대한 사안이었다.
피부병에 걸린 여왕
경북 포항시 흥해읍에는 천곡사(泉谷寺)라는 절이 있다. 현재는 법당과 요사채만 남아 있는 조그만 절이지만, 6·25전쟁 이전까지만 해도 큰 사찰이었다. 이 천곡사는 신라의 자장율사가 창건한 절로 알려져 있는데, 전해지는 얘기에 따르면 선덕여왕의 명으로 건립 됐다고 한다.
선덕여왕이 피부병으로 내내 고생하다가 어느 신하의 권유에 따라 포항의 천곡령(泉谷嶺) 아래에 있는 약수로 목욕한 후 병이 낫자, 자장율사에게 그 곳에 절을 짓도록 해서 천곡사가 됐다는 것이다. 현재도 절의 한쪽에는 선덕여왕이 목욕했다는 우물 석정(石井)이 남아 있다.
선덕여왕은 왜 피부병에 걸렸을까. 왕실은 가장 깨끗하고 위생상태가 청결하게 마련인데 무슨 이유로 임금이 피부병에 걸렸을까. 아마도 심한 스트레스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조선조 세조도 말년에 피부병으로 고생을 많이 했다. 왕위 찬탈 과정에서 단종을 비롯한 많은 사람을 살해한 끝에 훗날 심신이 쇠약해지자 극심한 죄의식이 피부병으로 도진 것이다. 그 때문에 멀리 속리산 법주사까지 행차해 정성으로 불공을 드린 후에 나을 수 있었다.
따라서 선덕여왕이 자신이 믿고 의지할 대상을 갈구했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임금이었기에 충신에게만 의지하는 것도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아마 불교도 만족스러운 의지처가 되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여왕에게 구원의 여신으로 등장한 게 이슈타르, 즉 금성의 여신이 아니었을까. 앞에서 봤듯 이슈타르는 선덕여왕이 인간적으로 부족함을 느낀 여러 여건을 보충할 자질을 두루 갖추고 있었다. 전쟁의 여신이며, 다산의 여신인데다가 젊고, 아름답고, 용감무쌍했다.
15년에 걸친 재위 기간에 외적으로는 고구려 백제와의 전쟁에 시달리고, 내적으로는 귀족들의 거부반응에 시달리다 끝내 그들의 반란 속에서 생을 마감해야 했던 여왕. 그러면서도 왕위를 계승할 후사를 두지 못해 남자를 셋이나 바꿔 가며 노심초사했던 여왕. 이러한 여왕에게 금성의 여신은 자신의 정치적 곤경과 왕손의 출산 문제를 동시에 해결해줄 능력이 있는 신으로 보였을지도 모른다.
비록 우리의 상식으로 금성의 여신은 해와 달처럼 우리 선조에게 익숙한 신은 아니었지만, 앞에서 본 대로 우리 문명은 수메르 문명과 상당 부분 닮아 있다. 그중에서도 특히 신라의 왕실은 근동지역과 문화적 유사성을 갖고 있었다. 때문에 근동지역의 대표적 여신이었던 이슈타르, 즉 금성의 여신이라는 존재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금성의 여신을 왕실로 모시기 위해 생각해낸 제단이 바로 첨성대가 아닌가 생각되는 것이다. 첨성대의 창이 궁성 쪽을 향해 있는 것도 이런 배려가 아니었을까.
‘1개월’과 ‘1년’을 상징
그 외에도 첨성대가 금성의 여신을 위한 제단이었다는 근거는 여럿이다.
첫째, 첨성대라는 이름과 부합한다. ‘瞻’은 ‘바라본다’ 외에도 ‘우러러본다’는 뜻이 있어 금성을 위한 제단의 이름으로 어긋남이 없다.
둘째, 앞에서 첨성대 상층부의 신전으로 보이는 방(室)이 6개의 단으로 쌓여졌다고 했다. 이 방이 6개의 단으로 쌓여진 이유는 금성을 위한 신전을 나타내려는 것인 듯하다. 고대인에게 금성의 수는 바로 6이었다. 우리가 일주일의 이름으로 무심코 사용하고 있는 행성들은 실상 오래전부터 숫자가 주어지고 의미가 부여되어 인간의 주일에 적용되었다. 즉 태양-1, 달-2, 화성-3, 수성-4, 목성-5, 금성-6, 토성-7 등이다.
셋째, 조선조 세종 때 수학자 이순지, 김담이 왕명에 의해 편찬한 역서(曆書) ‘칠정산(七政山)’ 내편(內篇)에는 하늘의 오성(五星) 중 금성 항목에 ‘1개월에 한 궁(宮)씩 머물고, 1년에 하늘을 한 번 돈다’고 했다. 이 내용이 우리 선조가 금성에 대해 갖고 있던 유일한 실제 정보였던 셈이다. 오늘날 금성의 실제 공전 주기는 0.6152년으로 밝혀졌지만, 선조들은 금성이 태양 가까이에서 머물기 때문에 태양과 같이 1년의 공전주기를 갖고 있는 것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칠정산’은 조선시대에 편찬됐지만 금성에 대한 정보는 신라시대부터 알려져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신라인은 일찍부터 금성에 관심을 갖고 많은 관측을 했기 때문이다.
금성과 1개월과 1년. 첨성대에 과연 이에 대한 정보가 담겨 있을까. 첨성대의 몸통부를 이루는 벽돌식 돌들을 보면 길이가 일정하지 않다. 이는 어떤 수를 채우기 위해 의도적으로 조정한 것으로 해석되는데, 석재의 수는 모두 364개(창의 양쪽에 세워진 2개 포함)이다. 364라는 수는 선조들이 1년의 날수로 생각했던 것과 분리해 생각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첨성대의 맨 위에 덮여 있는 판석까지 더하면 365개가 된다.
또한 첨성대의 단수는 원통부가 27단이며, 여기에 사각형의 상단부까지 더하면 29단이 되는데 이 역시 음력 날수로 한 달을 나타내려 했던 게 아닐까. 달이 백도(白道)를 따라 일주하는 항성주기는 27.32일이며, 한 달을 나타내는 초승달에서 다음번 초승달까지의 삭망주기는 29.53일이다. 조형물에 1개월과 1년을 의미하는 숫자를 부여함으로써 결과적으로 금성을 상징하는 구조물임을 나타내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첨성대 창은 창고 문?
넷째, 앞에서 언급한 대로 신라인은 유독 금성에 큰 관심을 갖고 있었다. 이는 그들에게 어떤 위상을 갖고 있던 별이었는지를 나타내는 증거라 할 수 있는데, 해와 달처럼 인간생활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존재가 아닌 이상 그 이유는 신앙적인 것이라고밖에 해석할 길이 없다. 따라서 이를 위한 제단이 있었으리라는 것도 충분히 가정해볼 수 있다.
다섯째, 이 글의 첫머리에서 첨성대가 천문대가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으므로 첨성대의 중앙부분에 있는 창에 대해서도 새롭게 해석해야 할 것이다. 이 창은 과연 무슨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일까. 여신의 하강을 위해 만들어 놓은 것일까. 그리고 가끔씩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서 여신과 조우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것일까.
이 창을 다르게 해석할 수도 있다. 수메르인의 여신 이난나는 창고(倉庫)와 많은 관련이 있는 신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는 재산을 관장하는 여신임을 의미하는 듯하다. 그러면서 ‘창고 문이 이난나의 상징’이라고 했다. 혹시 첨성대의 창은 창고 문을 의미해 금성의 여신을 위한 조형물임을 나타내려 한 게 아닐까.
비밀에 부친 이유
그러면 왜 첨성대는 ‘삼국사기’에도 등장하지 않고 그 내막이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는가. 그 이유는 선덕여왕의 개인적인 제단이었기 때문이라고 해석하고자 한다. 첨성대가 지구라트라고 하기에는 규모가 현저히 작은 것도 이러한 면으로 이해된다. 무엇보다도 선덕여왕은 인간적인 부족함을 많이 느낀 임금이었다.
메소포타미아 사회에서도 대규모 신전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평민들은 사사로운 신전을 만들기도 했고, 가족들만의 신전이 있기도 했다.
최 홍
● 1953년 전북 남원 출생
● 전주고·전북대 법대 졸업, 서울대 환경대학원 수료
● 작품 : ‘마이산 석탑군의 비밀’ ‘천년의 비밀 운주사’ ‘베팅 999’
● 한국소설가협회, 한국문인협회 회원
지난 11월22일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경주시 계림과 첨성대 사이의 황남동 일대에서 8세기 신라 왕실의 제의 시설로 추정되는 유적을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이 유적을 제의시설로 추정하는 주된 이유는 흙 속에 6개의 구덩이가 있었고, 이 구덩이들 중 5개의 구덩이에서 지진구(地鎭具) 항아리가 발견됐기 때문. 지진구란 선조들이 절이나 탑을 세울 때 지기를 무마하여 건조물이 오래도록 보존되게 하기 위해 묻는 물건들을 말한다.
이 유적이 제의시설로 밝혀지면 이 일대는 신라 왕실의 신성한 지역이었음이 확인되는 셈이다. 따라서 첨성대가 선덕여왕의 제단이었다는 내 주장에도 무게가 실릴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끝) (본글은 신동아 1월호에서 발췌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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