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출처: 한국 이슬람학회 자료실
I. 이둘 아드하 축제
1. 축제의 의의
이둘 아드하 축제는 하지 순례가 끝난 후의 축제를 의미하지만 실제로는 순례가 이루어지는 기간 전체가 축제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슬람력(히즈라역)으로 순례달(줄 핫즈)이 돌아오면 사우디 아라비아의 한 도시인 메카는 전 세계로부터 온 200만이 넘는 순례객들로 가득차 거대한 사람의 파도를 이루며 이들이 외치는 “랍바이칼라-훔마 랍바익...”(오! 주여, 제가 당신께 왔습니다....), 소리로 온 도시를 메운다. 이 외침으로 온 도시가 떠나갈 듯이 되면 일년에 한번씩 벌어지는 순례의 계절이 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 순례는 이슬람의 행동체계인 5주중의 하나로서 무슬림 중 능력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평생에 한번이상 참여하는 것이 의무로 규정되어 있다. 그러므로 전 세계 무슬림들은 메카를 방문하여 정해져 있는 의례를 행함으로서 스스로의 신앙을 강하게 하고, 내세에서의 구원을 구하는 것은 물론 신자간의 형제애 즉 그들간의 일체성과 연대감을 확인하는 것이다.
인구 60만 정도의 메카는 이때가 되면 전 세계로부터 온 약 200만이 넘는 다양한 순례자들 즉 언어와 피부색 문화 관습 등이 다른 많은 사람들이 이슬람 세계각지에서 속속 도착하여 메카 도시 내부는 점차 이질적이고 다양한 열기를 갖게 된다.
메카는 이슬람교의 첫 번째 성지이다. 아라비아의 서부 지역에 위치한 이 메카에서 570년에 무함마드는 태어났다. 당시 메카는 종교 도시이자 부유한 상업도시였다. 메카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을 받아 건설한 카바 신전(하람사원 안에 있음)이 있었지만 아랍인들 사이에서는 그들의 대상 활동의 안녕을 기원하는 우상숭배의 중심지로 자리 잡았고 인도양과 지중해를 연결하는 중계무역의 거점이기도 하였다. 이는 비잔틴 제국과 페르시아간의 오랜 싸움과 적대 관계로 인해 동서를 잇고 있던 시리아-페르시아간의 교통로가 거의 폐쇄되자 예멘-아라비아서부-시리아로 연결되는 동서교역의 새로운 통로가 열렸는데, 메카는 이 통상 교역로의 중간 지점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아랍부족 중 가장 유력하였던 꾸라이쉬 족이 메카의 상권을 잡고 있었고 이 메카 상인들은 새 교역로의 개척에 눈부신 활약을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메카 꾸라이쉬 족의 한 가난한 집안에서 유복자로 태어난 무함마드는 장성하여 청년시절에 부유한 과부 카디자에 고용되어 대상활동을 하면서 각지로 돌아다녔다. 그 후 그 여주인과 결혼한 그는 종교적 사색과 명상에 잠기곤 하였는데 610년 천사 가브리엘을 통해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유일신 사상을 설파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한결같이 아랍사회의 기존 가치관에 배치되는 것이었다. 그는 다신교적 우상숭배를 부정하였으며 고리대금이나 도박, 음주, 난잡한 결혼 등 아랍의 고대 악습을 배척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것은 기존의 종교관 및 사회관습에 대한 근본적인 개혁을 요구하는 내용들이었기 때문에 무함마드는 당시 지배층의 강한 반발에 부딪쳐 박해와 수난을 받았다. 박해가 심해지는 와중에 그는 622년 하나님(알라)으로부터 이주의 계시를 받고 그를 따르던 이슬람 신자들과 함께 메디나로 이주하였다. 이것을 ‘히즈라’ 라고 부르며 그때를 이슬람력의 원년으로 삼았다.
메디나로 이주한 무함마드는 그곳에서 최초의 이슬람 공동체인 ‘움마’를 형성하는데 성공하여 이주 10년 후에는 메카에 무혈 입성하는 업적을 이루었으며 이때부터 이슬람 세력은 급속히 팽창하였다. 메카에 무혈 입성한 무함마드는 제일 첫 번째로 카바 신전으로 가서 그곳에 있는 우상들을 파괴하고 오직 하나님만을 숭배하는 유일신 사상을 다시 한번 선포하였다.
무함마드 사망 후 정통 칼리프 시대(632-661)에 확장사업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져 아라비아 반도는 물론 그 주변국들이 점차 이슬람화 됨으로서 이슬람 문명권의 기반을 구축했다. 이러한 기반 위에서 피정복지에 대한 아랍 무슬림들의 지배권을 확립한 아랍제국인 우마이야 왕조(661-750)를 거쳐 아랍인과 비아랍인이 이슬람교와 이슬람 문명이라는 공통된 이념에 기초하여 통일된 이슬람 제국인 압바스 왕조(750-1258)을 건설함으로서 마침내 범지역적인 문명공동체로서의 이슬람 문명권이 형성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동시에 무슬림 세계의 정치 경제 더 나아가서 문화의 중심이 아랍반도에서 다마스커스나 바그다드로 이동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 이후의 이슬람 세계의 역사 전개에 있어서도 유력한 무슬림 제왕조의 중심지는 카이로나 이스탄불들에 놓이게 되고 메카나 메디나는 정치 경제적인 면에서는 조연적인 위치를 점유하게 되었다.
그러나 종교적인 의미에서의 이 도시는 이슬람에 있어 제일 중요한 자리로 계속 있었다. 특히 메카 그 안에서도 하람사원 안에 있는 카바 신전은 아브라함과 그의 아들 이스마엘이 주춧돌을 세운 곳이며(꾸란 2:127참조) 이슬람 종교의례의 중심지이다.
무슬림들은 하루 5번의 예배를 보는데 세계 어디에 있더라도 카바의 방향(끼브라 라고 함)을 향해서 예배를 본다. 또한, 메카와 카바 신전은 순례의 행사가 이루어지는 주요 무대이다.
2. 하지 순례방법
메카순례는 2종류가 있다. 일반적으로 메카순례라고 하는 것은 히즈라역 12월(줄 핫즈)에 행하는 것으로서 하지 순례라고 부르고 있다. 이것은 일정 기간 중에 정해져 있는 스케줄에 따라 몇 개의 의례를 행해야 한다. 그것에 반해 기일을 정하지 않고, 편한 시간에 임의로 행하는 순례는 ‘우므라’라고 부른다. 이는 개인이 단독 또는 단체로 가능한 시기에 메카를 방문하여 하지 순례 때에 하는 의례의 일부만을 행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지 순례를 대순례 우므라를 소순례라고 부르는 것이 보통이다.
순례는 그것을 행하는 신체적, 경제적 능력이 있는 자 만이 실행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꾸란 3:97참조) 오늘날에는 교통수단의 발달로 인해 여행기간이 크게 단축되어 긴 여행에서 오는 육체적 피로가 많이 없어졌으며 또한 여러 경제적지원 제도가 많아 메카를 여행하기 위한 비용의 연출이 조금은 좋아졌다 하더라도 아직까지도 하지 순례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긴 여행과 경제적 여력을 동반하기 때문에 이것을 견딜 수 있는 체력과 부를 가져야 한다. 또한 고향을 떠나 있는 동안은 일을 쉬기 때문에 그 기간 동안 가족의 생활 보증을 미리 확보하고 있어야 된다. 실제로 현대에서도 메카 주변에서 오는 순례자의 경우 외에는 아프리카, 인도, 중앙아시아, 동남아시아 등 지리적으로 먼 곳에서 메카를 향하는 사람들의 신체적 피로와 금전적 지출은 매우 크다.
따라서 교통수단이 발달되어 있지 않았던 20세기 이전의 메카순례는 일생에 한번 갈 수 있으면 행운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개인에게 있어서는 큰 행사이었다. 그러므로 하지 순례가 실행능력 있는 자에게만 부과되어 있는 의무라고 하는 것이 이런 점에서 납득할 수 있다.
예전에는 고국으로 돌아가는 비용이 없어 메카에 살게 되는 사람들이나 죽음을 각오하고 고향을 떠나는 나이 먹은 경건한 무슬림이 많이 있었다. 입국 비자의 관리를 엄하게 하는 오늘날에는 전자의 경우가 많이 줄었지만 아직까지도 여러 이유로 인해 순례를 온 후 사우디아라비아에 불법 체류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또한 천국에 가는 길을 보증받게 되는 성지에서의 죽음을 소원으로 생각하면서 그들의 종교적 의무를 다하기 위해 순례를 떠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아 순례도중 체력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사망하는 노약자들의 경우가 상당수 있다.
순례자들은 일반적으로 히즈라역 12월 7일까지 메카에 들어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늦을경우 8일까지도 가능하다 그러나 8일을 지나 메카에 도착하는 것은 하지 순례로 인정되지 않는다. 메카에 들어가기 전에 순례자들은 몸을 물로 깨끗이 하고 특별한 순례 복장으로 갈아입어야 한다. 남자인 경우 이음매가 없는 2장의 흰 색 천으로 되어 있으며 여성인 경우는 특별히 정해져 있지 않지만 얼굴과 손 끝 다리 끝을 뺀 신체 전체를 덮는 청결하고 간소한 옷으로 하게 되어 있다.(Ṣāliḥ bin fūzān. 1997:11-12) 그러므로 머리카락은 천으로 덮어 가리지만 얼굴은 가리지 않는다.
이러한 순례 복장을 이흐람이라고 한다. 이 이흐람 복장을 함으로서 무슬림들은 성스럽고 경건한 상태에 들어가게 되며 그 이후 10일에 이흐람을 벗을 때까지 다툼이나 살생, 성교, 또는 손톱을 자른 것을 금하게 되어 있으며 신체 장식품이나 향수를 사용하는 것도 허용되지 않는다.(al-Ri'āsah. 1983:25-26) 카바 신전이 있는 하람사원의 명칭도 여기서 유래한다. 아랍어로 하람은 금지라는 뜻이다. 즉 이 사원 안에서는 다툼 살생 수렵 등이 금지 되어있는 금지된 사원이라는 뜻으로 사원이름이 하람 사원이다. 이 사원은 여러차례 증축을 거듭하여 현재 총면적 18만㎡로 약 50만명이 동시에 예배를 볼 수 있다.
두 가지의 의례, 따와프와 싸이
이흐람으로 갈아입고 메카에 들어간 순례자들은 우선적으로 카바 신전이 있는 하람사원으로 가야 하는데 이는 메카 방문의 목적이 순례임을 하나님 앞에 명확히 하기 위해서이다. 사원에 도착한 순례자는 전 세계에서 모인 무슬림들과 같이 예배를 드리는 한편, 8일까지 따와프와 싸이라고 부르는 두 가지 의식을 적어도 한번씩 끝내야 한다.
따와프란 카바의 주위를 시계 반대 방향으로 7번 도는 의례이다. 즉 자신의 왼쪽에 카바를 두고 도는 것이다. 이 카바는 하람사원 중앙에 위치해 있으며 가로 10m 세로12m 높이 15m의 입방체로서 검은 천으로 덮여져있다.
카바를 돌 때는 기도문을 외우면서 돌며 한번 돌 때마다 카바 동쪽 구석 모퉁이에 있는 흑석을 만지는 것이 좋지만 워낙 많은 순례객으로 인해 이것은 극히 소수를 제외하고는 거의 불가능 한 일이다. 이때의 카바 주변은 걸어다닌다는 표현보다는 사람들에 떠밀려 떠다닌다는 것이 더 정확하다. 따라서 순례객들에게는 많은 체력이 요구된다.
흑석을 만질 수 없는 경우는 그 부분을 통과할 때 오른 손을 들고 “하나님은 가장 위대하시다”라는 말을 말하고 그 부분을 지나가면 됨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사람의 홍수 속을 뚫고 흑석을 한번 만져보기 위해 노력하는 순례객들의 모습은 진정 일상 생활에서 보는 그들의 모습이 아니다. 일상생활에서 그 많은 인파에 시달리면 짜증나고 언쟁이 일어났을 것이 분명한데도 불구하고 모든 언쟁과 갈등이 금지되어 있는 하람사원에서 이들은 비록 육체는 피곤하고 고달프지만 평생의 의무인 하나님의 집에 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마음만은 평화롭고 즐거움으로 가득 차 있는 그들의 모습이 경이롭다. 이러한 열기와 분위기는 일상의 이슬람 사회에서는 느낄 수 없으며 오직 이 순례를 통해서만이 느낄 수 있는 독특한 분위기이다.
따와프를 끝낸 순례자는 카바의 내부로 들어갈 수 있는 출입구 쪽 벽 앞에 서서 기도할 때 자세인 양손을 가슴이나 얼굴 정도까지 올리고 또는 벽면이나 그것을 덮고 있는 검은 천을 만지면서 알라를 찬미하는 기도를 한다. 그것을 끝내고 카바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곳에서 특별 예배를 드리는데 이 때에는 예언자 아브라함의 발자국이라고 전해 지고있는 우묵하게 패인 돌이 있는 장소 가까운 곳에서 행하는 것이 좋다고 되어 있다.
한편 싸이란, 카바의 동쪽에 있는 두개의 작은 언덕 ‘사파’와 ‘마르와’ 동산 사이 약420m를 사파 동산을 출발점으로 7번 걷거나 뛰는 의례이다. 즉 정해져 있는 일정구간은 걷고 그 외 일정구간은 뛰면서 두 동산사이를 3.5번 왕복하는 의례이다. 현재 이 두 동산은 하람사원 내에 있으며 이 두 동산을 연결하는 통로에도 지붕이 있다.
이 싸이 의례의 기원은 예언자 아브라함으로부터 유래한다. 아브라함은 알라의 명으로 아내 하갈과 어린 자식 이스마엘을 음식물도 주지 않고 이곳에 남기고 떠났다. 얼마 후 뜨거운 태양열 아래 이스마엘이 목이 말라죽을 지경에 이르자 하갈은 필사적으로 물을 찾았다. 그녀가 물을 찾기 위해 두 동산 사이를 7번 질주했을 때 어린 아이 다리 밑에서 맑은 물이 솟아 나오고 있었다. 이 샘이 ‘잠잠’수이며 이 잠잠 샘물은 지금도 솟아 나오고 있어 순례자들은 두 동산과 카바 사이에 있는 이 샘물로부터 의례 후 목을 축일 수 있다. 이렇게 알라의 축복으로 생긴 잠잠수는 메카에 순례에 오는 사람들이 먼저 마시려고 하고 있으며 고향의 사람들에게 선물로 갖고 돌아가기도 한다. 이것이 싸이 의례의 유래다.
따와프와 싸이를 한번 끝낸 순례자들은 12월 8일에 하람 사원을 기준으로 메카 동쪽으로 7Km 정도 떨어진 미나 골짜기로 가서 일박한 후 다음날 아침 일찍 동남방향으로 25Km 정도 떨어진 아라파 땅으로 이동하며 늦어도 정오 전까지는 도착해 있어야 한다.('Abd al-Qādir. 1977:43) 왜냐하면 9일 오후에는 아라파 땅에 뜨겁게 내려 쪼이는 태양 아래서 그 때까지 범한 죄를 회개하는 의례를 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곳에는 라흐마(자비) 라는 조그마한 돌산이 있는데 이곳은 무함마드가 마지막 순례 때 고별연설을 한곳이다. 이를 기리기 위해 낮 동안 아라파에 체류하는 것인데 무슬림들은 이왕이면 라흐만 산에서 머무르기를 원한다 그러나 워낙 많은 순례객으로 인해 모든 사람들이 이 산에서 머무르는 것은 불가능하며 대부분의 순례객들은 산 아래 아라파 땅에 머무른다.
사탄의 돌기둥에 돌을 던지는 의례
이날 태양이 서쪽의 지평선으로 내려가면, 순례자들은 일제히 아라파 땅을 빠른 걸음으로 떠나 아라파와 메카 사이에 있는 무즈달리파에서 일박을 하면서 다음 날 행하는 사탄의 돌기둥에 돌을 던지는 의례용의 작은 돌을 줍는다.
10일 아침 새벽 예배를 끝내고 나서 순례자들은 무즈달리파를 떠나 미나 골짜기 부근에 있는 사탄의 돌기둥으로 향한다. 이 사탄의 돌기둥은 3개가 세워져 있으며 각각 큰 사탄, 중간 사탄, 작은 사탄을 상징한다. 순례객들은 주워온 돌을 이 날은 큰 사탄을 상징하는 돌기둥에 7개를 던진다.
이 의례는 아브라함과 그의 아들 이스마엘로부터 연유한다. 어느날 밤 아브라함은 자식인 이스마엘을 알라께 제물로 바치라는 꿈을 꾸었다. 그 꿈을 알라의 명령으로 해석한 아브라함은 이스마엘을 제물로 바치기 위해 미나 골짜기로 가는 도중 현재 사탄의 돌기둥이 있는 장소를 지나가게 되었을 때 사탄이 나타나서 알라와 아버지에게 반역하도록 이스마엘을 유혹했다. 그러나 신앙심 두터운 이스마엘은 사탄에게 돌을 던지고 쫓아 버리며 유혹을 물리쳤다. 이 사건은 현재 서 있는 돌기둥의 자리에서 3번 반복되었다. 그리고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한 아브라함이 자식을 제물로 바치려고 할 때 부자의 흔들리지 않는 신앙심을 확인한 알라는 천사를 통해 양을 그들에게 보내어 이스마엘 대신에 양을 제물로 바치게 하였다.
이 이야기로부터 사탄의 돌기둥에 돌 던지는 의례가 시작되었다. 순례자들은 돌 던지기가 끝난 후 하람 사원으로 가서 다시 따와프와 싸이를 한 후 미나에 있는 숙소로 돌아와 양을 제물로 바친다. 그런다음 머리카락을 조금 자르고 이흐람 복장을 벗는다. 이것으로 순례자들은 성스러운 상태에서 속세로 돌아가는 것이다.
양을 제물로 바치는 것은 메카에 모인 순례자들만이 행하는 것이 아니다. 그 날 즉 히즈라역의 12월 10일은 세계의 모든 무슬림이 각각의 가정에서 양을 제물로 바치고 그 고기의 일부를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순례의 무사한 종료를 축하하는 축제가 시작된다. 이것을 ‘이둘 아드하’라고 부른다. 이 축제는 히즈라역 9월인 라마단 단식 후에 행하는 이둘 피트르 축제와 함께 이슬람의 2대 축제 중의 하나이다. 이슬람 세계에서는 이날부터 보통 3-4일 동안이 휴일이다.
이흐람 복장을 벗고 보통 옷으로 갈아입은 순례자들은 11일에 사탄의 돌기둥에 가서 작은 사탄, 중간 사탄, 큰 사탄을 상징하는 돌기둥 순으로 각각의 기둥에 7개씩의 돌을 던진다. 12일에도 사탄의 돌기둥에 가서 전날과 같은 방법으로 돌을 던진 후 하람 사원으로 가서 고별 따와프를 한 후 메카를 떠나게된다 이때는 싸이를 하지 않는다.
이와같이 희생의식을 치르고도 며칠동안 더 메카에 머무르면서 하람 사원에서 예배를 보거나 따와프 의례나 싸이 의례 또는 사탄의 돌기둥에 돌 던지기 등을 반복하기도 한다. 그러나 보통 순례달 12-13일에는 메카에서 인파가 급속히 빠져나가기 시작하고 하지의 계절도 마무리가 되는 것이다. 이상이 하지 순례의 의례이다.
메카에서의 순례를 끝낸 순례자들은 대부분 12일부터 메디나로 이동한다. 메디나는 무함마드가 생전에 제일 좋아했던 도시였으며 이슬람 공동체인 움마의 기초를 굳힌 땅이다. 또한 무함마드가 예배보던 예언자 사원이 있으며 그 사원 안에 그의 묘소가 있다. 그러므로 세계 각지에서 온 순례자들은 메카에서의 순례를 끝내고 나서 아니면 순례를 행하기 전에 메디나를 방문하는 것이 일반화되어 있다. 그러나 메디나 방문은 하지 순례의 의무사항은 아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무슬림들 심정은 기왕에 메카까지 왔다면 메디나도 방문하여 예언자 사원에서 예배를 드리고 그 안에 있는 예언자 무함마드의 묘를 참배하고자 하는 강한 열망을 갖고있다. 물론 엄격한 일신교를 추종하는 이슬람에서는 죽은 사람을 모시는 신앙은 없으며 이것은 예언자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무슬림에게 있어 그들이 제일 존경하는 예언자 무함마드의 묘를 참배하고 현세에서의 행복을 기원하거나, 마지막의 심판 때의 예언자의 보호를 원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라 하겠다.
우므라의 경우 순례자는 이흐람 복장을 하고 하람 사원 안에서 따와프나 싸이를 행한다. 그러나 미나나 아라파에서의 의례는 의무로 되어 있지 않다. 우므라 순례자는 임의의 시기에 메카를 방문할 수 있다. 그러므로 메카에서는 년 중 내내 언제나 이흐람의 모습의 순례자를 볼 수 있다. 그러나 하지 순례 때만큼의 인파나 분위기는 재현되지 않는다.
II. 사회 문화적 기능
하지 순례는 그 의례 방법이 기본적으로 예언자 무함마드의 고별 순례라고 불리는 그의 생전 마지막 순례를 기초로 하고 있으며 9세기 중엽에 확립된 이슬람 법학에서 명확히 규정하고있다. 또한 이슬람 역사를 통해 계속 이어져 오고있다.
예전의 메카 여행은 주로 육상 카라반 루트를 사용하고 긴 시간과 과다한 비용을 필요로 하여 무슬림들이 이 종교적 의무를 수행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메카로의 여행 중간에 쓰러지거나 여러 이유로 좌절한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19세기 중엽 이후 이용하게 된 증기선으로 여행일정과 비용의 양면에 있어 메카로의 여행은 보다 간단한 것이 되었다. 19세기 후반의 메카 순례자수는 거의 5-20만명 정도이었다. 그러나 20세기 후반 들어서 사우디아라비아왕국의 체제가 안정하고 교통수단으로 비행기가 대중화되기 시작하면서 순례자 수는 비약적으로 증가했다. 외국에서의 하지 순례참가자수는 1970년대 초에 40만 정도였던 것이 70년대 후반에는 70-80만이 되었고 80년대 초에는 100만을 돌파하였으며 현재는 그 수가 200만에서 250만에 이른다.
이렇게 급증한 외국에서의 순례자를 위해 사우디정부는 호텔이나 텐트 시절들을 만들고, 식음료 공급체제를 개선하고 위생 대책들도 강구하고 있다. 또한 200만-250만의 수가 단시일에 세계의 여러 지역에서 한번에 모이게 됨으로서 메카순례는 인류학적인 면에서 흥미 있는 몇가지 현상을 나타내고 있다.
하나는 그 경제적 효과이다. 여비, 숙박비, 식비들은 물론이고 하지 순례를 무사히 끝낸 사람들은 고향에서 그들이 돌아오는 것을 기다리는 친척이나 식구, 친구들에게 할 선물을 사원 주변에 있는 여러 가게에서 사기도 하고 또한 동시에 순례자 자신이 상품을 가지고 와서 상업을 하는 경우도 있다. 또한 새로운 일에서의 파트너나 아이템을 발견하기도 하고 미래의 계약을 약속하는 좋은 기회가 되기도 한다.
또한 새로운 만남이 정치적인 의미를 가진 자리가 될 때도 있다. 미국의 흑인 활동가 말콤X는 1964년에 메카순례를 하였다. 당시 그는 백인을 적대시하는 조직 Nation of Islam의 지도자 입장에 있었다. 그러나 그는 순례기간 중 백인도 흑인도 모두 무슬림 형제라는 진정한 이슬람 형제애를 이해하게 되고 부당한 차별을 안하는 이슬람의 순례의 세계를 피부로 느끼어 그때까지 갖고 있었던 백인 적대시사상의 편협성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이것은 하나의 정치 지도자의 회심을 나타내는 예이다. 이렇게까지 극적이지 않지만은 무슬림 세계의 지도자들이 하지 순례의 자리에서 만나고 중요한 정치적 안건을 토의하는 것은 흔한 일이다. 그러기에 일찍이 이집트 대통령 나세르는 이 엄청난 순례는 순례자들 스스로가 범세계적인 무슬림들의 모임을 만듦으로서 정규적인 국제회의가 되는 셈이라고 지적했으며 서구 이슬람 연구가인 루이스는 유럽에서는 유형을 찾아볼 수 없는 이 순례야말로 가장 중요한 이슬람 문명의 요소라고 평했다.(정수일 2002:153)
또한 이와는 반대로 정치적 폭력 수단으로 이용되기도 한다. 1979년의 이슬람 혁명 후에 이란 정부는 대량의 순례단을 메카에 파견해서 정치적 폭동을 유발함으로서 다수의 순례객들이 희생당하였다. 그후에도 사우디 당국과 이란 순례단은 자주 충돌하였다. 그러나 모든 무슬림을 위한 ‘성지의 수호자’ 역할을 맡고 있는 사우디정부는 메카순례라는 대의명분을 나타내는 사람들에게 원칙적으로 그들의 입국을 거부할 수는 없다. 사우디 왕의 공식직함 명칭은 두 성지를 지키는 봉사자이다.
또한 노동력 이동의 문제도 있다. 옛날부터 순례를 끝내고 나서도 고국에 돌아가지 않고, 메카에 남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서면서 사우디아라비아가 산유국으로 발전하여 풍부한 오일 달러를 갖게됨으로서 최근에는 순례를 구실로 입국하여 그것을 끝내고도 사우디 국내에 남아 불법 취업을 하려고 하는 사람이 급증하고 있어 사우디정부가 이 문제로 골치를 썩고 있으며 점점 더 하지순례 비자 발급을 강화하고 있어 가난한 이슬람 국가와의 갈등을 빚고 있다.
이 메카순례라는 제도가 무슬림의 이동을 활발히 하고 있는 요인의 하나라는 것은 확실하며 이 여행의 결과로 역사상 많은 학문적 업적을 이루기도 하였다. 이슬람 역사를 화려하게 장식한 중세의 위대한 여행자 이분 줍바일이나 이분 바뚜따 등과 같은 기행가들은 원래 하지 순례를 행하는 것이 그들 여행의 주요 목적이었으나 메카로 오는 여행 중에 겪은 문화적 충격과 메카에서 만난 전세계 순례객들의 상이한 문화와 사상 풍습 등에 자극을 받아 귀로에 다른 여러나라를 여행함으로 해서 장대한 여행기를 완성하여 그 당시의 세계 사정들을 이해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를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는 것이다.
또한 학자이었던 그들은 성도에 사는 무슬림 학자들과의 교류도 여행 목적의 하나였었다. 왜냐하면 메카와 메디나가 이슬람세계의 정치적 중심의 지위를 차지하지 않고 있었지만 지적센터의 역할은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18-19세기의 양 도시에는 많은 혁신적인 울라마(무슬림학자)나 수피(신비주의자)가 모이고, 이슬람 개혁의 기운이 높아졌다. 이 사건은 오늘날의 이슬람 부흥운동의 동향하고도 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또한 아프리카나 동남아시아에서 온 메카순례자가 이들의 개혁사상을 피부로 느끼고 귀국해서 반 식민지주의적인 무장저항투쟁을 전개한 예도 많이 있다.
III. 결론
이상과 같이 이슬람은 물건, 사람, 정보의 교류의 결정점인 도시 메카에서 생긴 종교이며 문명이다. 그러므로 무슬림들의 중요 의무의 하나인 순례의 무대 메카는 1400년 가까이 이슬람의 역사 안에서 그들 교류의 중요한 축으로 있는 것이다.
또한 축제 때 희생의 제물로 쓰는 양이나 낙타는 바로 농촌에서 기르는 동물이다. 도시 사람들은 양을 농촌으로부터 구입하여 희생제를 치르게 된다. 따라서 이슬람 국가의 농촌은 이 희생제를 기점으로 하여 1년 간의 살림 규모를 정한다.
그렇다면 희생제 기간동안 얼마나 많은 양을 도살하고 얼마나 많은 돈이 농촌으로 흘러 들어가며 나라 경제에 어떻게 영향을 미칠까? 모로코 예를 들어보면 모로코 인구는 약 2,800만 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이 가운데 절반은 여자이고 남자의 절반 중 미성년자들을 제외하면 대략 성인인 무슬림들의 수는 약 700만 명 가량 된다. 대개 각 가정마다 한 마리의 양이 도살되므로 약 350만 마리 정도의 양이 희생된다. 양 1마리의 가격이 10만원 가량이므로 이 기간을 통해 3,500억 원 가량의 돈이 농촌으로 흘러가게 된다.
모로코 경제상황을 감안하면 이 금액은 매우 큰 액수의 돈이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보아 모로코 농촌은 희생제를 기점으로 1년 간의 농촌경제를 자리 매김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이러한 현상이 모든 이슬람 국가에서 동시에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희생제는 농촌지역 경제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에 더하여 다른 많은 파급효과를 낳고 있다. 우선 도시지역의 분위기를 옛날의 농촌 분위기로 되돌리고 있다. 모든 도시의 각 집과 골목마다 심지어는 아파트의 옥상 위에서 희생제 2-3일 전부터 양 울음소리가 울려 퍼지게 된다. 미리 양을 구입하여 집에다 묶어두니 도대체 이곳이 도시인지 농촌인지 구별하기조차 힘들 정도의 상황이 되곤 한다. 어쩌면 번잡한 도시의 일상 속에 잊어버린 농촌의 아늑함을 맛보는 시간이랄 수 있다.
여기에 더하여 이 희생제는 도시 서민들에게도 많은 파급효과를 가져오고 있다. 우선 부유한 사람들은 여러 마리의 양을 잡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어 서민들과 더불어 희생제의 의미를 되새기며 무슬림이라는 공동체 의식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또한 도시 서민들에게는 짧은 시간에 목돈을 벌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시간이기도 한다. 왜냐하면 현대에 이르러 도시 사람들이 직접 양을 도살하는 경우는 많이 줄어들고 있다. 그래서 희생제 아침에는 골목마다 2인 1조를 이루어 양 잡는 사람들로 변신한 도시 서민들의 고함소리가 메아리친다. 이들이 양을 잡는 시간은 대략 30분 정도이므로 하루에 많은 수의 양을 잡을 수 있어 한 마리 당 5천 원의 수고비는 결코 적은 액수가 아니다.
오후에 이들은 또 다른 아르바이트로 바빠진다. 도시의 골목골목마다 불을 피워놓고 양의 머리나 다리의 털을 태워주는 일을 하는 것이다. 양털 타는 노린내가 진동하는 속에서 옹기종기 모여 앉아 구경하는 꼬마아이들 그리고 시커멓게 다 태운 양의 머리와 다리를 들고 가는 아이들과 그것을 태우기 위해 오는 아이들의 정겨운 모습(이희수, 이원삼외. 2001:196-197) 또한 축제를 통해 하나님의 풍요로운 축복을 함께 하는 이들의 모습이다.
워낙 많은 사람들이 좁은 공간에 밀집하여 축제를 치르다보니 육체적 고통은 말할 것도 없고 예기치 않은 불행한 사건들도 발생하기도 한다. 몇 년 전에는 미나에 있는 텐트촌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고 몇 년에 한번씩 이 하지 순례가 끝난 후 전염병이 돌기도 한다. 이러한 어려움 때문에 요즘은 한번 이상 순례를 했던 사람들은 되도록 다른 사람들을 위해 순례를 하지 말 것을 권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권장에도 불구하고 매년 순례자 수는 증가하고 있는 추세다. 경제적 신체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점점 더 많이 밀려드는 순례자들! 이들은 평생의 소원을 풀었다는 내면적 만족감과 신에게 좀더 다가갔다는 만족감을 이 축제를 통해 얻고 있는 것이다. 고통 속에서 피워 오르는 만족감이 경이롭고 신비로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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