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9년 3월 17일, 마침내 나폴레옹은 제자르 파샤가 전전긍긍하고 있는 작은 요새 도시 생 장 다크레(Saint Jean d'Acre)를 저 멀리에서 내려다 보는 카르멜(Carmel) 산에 도달합니다. 카르멜 산은 그 이름이 '신의 포도밭'이라는 뜻이고, 또 성서에서도 엘리야가 바알 신의 예언자들에 맞서 여호와와 바알 중 누가 진정한 신인지 겨루었던 유서 깊은 산이었습니다. 나폴레옹에게는 그 산의 역사적 의의같은 것은 별로 중요치 않았습니다. 그에게는 카르멜 산은 450m 정도 높이의 고지로서, 생 장 다크레 포위 작전의 본부 역할을 하기에 딱 좋은 장소였지요.
(카르멜 산의 모습입니다. 산이라기보다는 고원처럼 생겼네요.)
그렇게 카르멜 산에 올라 망원경을 아크레로 돌린 나폴레옹은 깜짝 놀랐습니다. 아크레 항구 앞바다에는 영국 해군 전함 테세우스 (HMS Theseus)와 티그르(HMS Tigre)를 주축으로 소형 영국 선박들과 오스만 투르크 해군 함정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주변 주민들로부터 입수한 정보에 따르면 저 영국 배들은 이틀 전에 아크레에 입항했다는 것입니다. 나폴레옹의 머리 속에 떠오른 첫번째 생각은 '어익후 내 대포 !' 였습니다. 아크레는 비록 규모는 작지만 매우 견고한 요새 도시였기에, 여태까지처럼 작은 8파운드 짜리 작은 소구경 포로는 공략이 어렵다고 보고, 영국 해군의 봉쇄가 느슨해진 틈을 타 이집트 다미에타(Damietta)에서 배에 중포들을 싣고 하이파 항구로 오라고 지시를 해놓았던 것입니다.
(이곳이 아크레의 현재 모습입니다. 이스라엘의 현재 지명으로는 아코 Akko입니다. 저 위쪽 항구의 위치나 방파제의 모습은 나폴레옹 시대에서 별로 바뀌지 않았다고 합니다.)
아니나 다를까, 프랑스군이 카르멜 산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가운데에, 3척의 소형 호위함과 6척의 수송선으로 구성된 프랑스 해군 소함대가 나타났습니다. 스탕델레(Standelet) 함장이 지휘하는 이 소함대에게는 불운이 겹쳤는지, 하필 그때 아크레 및 하이파 앞바다에는 안개가 자욱했습니다. 이 때문에 프랑스 해군은 하이파 코 앞에 이를 때까지도 영국 해군 함대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던 것입니다. 지근거리에서야 서로의 존재를 눈치챈 영국 및 프랑스 해군은 허둥지둥 움직여, 스탕델레의 소함대 중 호위함 3척은 영국 전함들의 추격을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호위함과는 달리 느리고 둔했던 수송선 6척은 고스란히 영국 해군에게 나포되고 말았습니다. 나폴레옹의 소중한 공성포대는 바로 이 6척의 수송선에 실려 있었고, 이 공성포들은 원래 목적과는 정반대로, 제자르 파샤와 펠리포의 손에 들어가 프랑스군 공격에 사용되어지도록 아크레 성내로 하역됩니다. 이 모든 것은 나폴레옹이 카르멜 산에서 망원경으로 내려다보는 가운데 벌어졌다고 합니다.
(Royal Navy... 앞으로도 이들은 나폴레옹의 발목을 계속 붙잡고 늘어집니다.)
이런 씁쓸한 시작이 있긴 했지만, 다음날인 3월 18일부터 프랑스군은 아크레 포위 진지를 구축하기 시작합니다. 당시 공성전은 예전 나폴레옹 시대의 공성전 편에서 소개드린 바와 같이, 공성포로 벽에 구멍을 뚫고 그 구멍으로 돌격을 하든가, 아니면 사다리를 놓고 가는 방식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십자군 시대에 지어졌던 생 장 다크레의 성벽은 총안 (crenellation, battlement)까지 뚫린 중세식 성벽으로서, 아무래도 사다리를 놓고 올라가기는 너무 높았지요. 나폴레옹은 비록 대구경 공성포는 없다고 하더라도, 엘 아리쉬나 자파에서 했던 것과 동일한 방식대로 아크레를 공략하기로 합니다. 즉, 8파운드 소구경 포로 열심히 포격을 가해도 성벽에 돌격이 가능할 정도로 큰 구멍을 뚫을 수는 없었으므로, 일단 작은 구멍을 뚫은 뒤 거기에 폭약을 설치 및 폭파하여 더 큰 구멍을 뚫을 생각이었습니다.
(이건 유럽의 아주 모범적인 성채입니다만, 아크레의 성벽도 - 비록 이런 수준까지는 아니지만 - 대략 이런 구조였다고 합니다.)
이런 방식의 전법은 필연적으로 긴 지그재그 참호를 필요로 했습니다. 수비 측에서도 대포를 쏘며 방어를 할텐데, 같은 포라면 더 높은 성벽에서 쏘는 것이 더 멀리 날아갔거든요. 따라서 수비군의 포화로부터 이쪽 공성포 및 성내로 돌격할 보병들을 보호하기 위한 참호가 필요했지요. 프랑스 병사들은 저 멀리서부터 지그재그로 아크레를 항해 나아가는 긴 참호들을 파기 시작합니다. 이런 참호 굴착 작업은 당연히 매우 긴, 통상 1주일 정도의 시간을 필요로 했습니다. 그러나 참을성이 부족했던 나폴레옹은 그저 빨리 팔 것을 강요하여, 참호가 좀 앝았나 봅니다. 모든 면에서 이 젊은 장군을 못마땅하게 여겼던 거구의 클레베르(Klerber) 장군은 이 참호도 마음에 안들었는지, 이렇게 나폴레옹에게 대놓고 따졌다고 합니다.
"무슨 놈의 참호가 이 모양입니까 ? 장군에게는 충분할지 몰라도 제게는 배까지 밖에 안 올라오는군요."
(나폴레옹보다 13살이나 더 많았던 클레베르 장군의 이름은 Clerbert가 아니라 Kleber입니다. 즉, 알사스 출신으로서, 독일인의 피가 많이 섞여서 그랬는지 키가 아주 큰 위너였다고 합니다.)
이렇게 날림 공사를 했건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사는 나폴레옹의 성에 차지 않을 정도로 느리게 진행되었습니다. 결국 10일이나 지난 3월 28일 새벽에야 프랑스군은 대포들을 참호 속에 제대로 방열한 뒤 첫 포격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프랑스군이 포격을 시작하자, 성벽에서도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격렬한 포격이 시작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크레 항구 좌우에 정박하고 있던 영국 전함들과 오스만 프리깃함들로부터도 비오듯 포탄이 날아오기 시작했지요. 포격 개시 후 2시간 만에, 프랑스군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합니다. 프랑스군 포병대는 아예 성탑 하나에만 모든 화력을 집중시키고 있었는데, 거기에 드디어 구멍이 뚫린 것입니다. 하지만 역시 나폴레옹의 참호는 너무 얕았는지, 이 2시간 동안의 포격 끝에 프랑스 포병대는 40명의 전사자와 함께, 단 3문을 제외한 전체 대포가 모두 적의 포탄에 부서져 버리는 피해를 입습니다. (물론 나중에 포가와 바퀴만 새로 만들면 대부분의 대포는 다시 포좌에 올려 놓고 사용이 가능했습니다. 뭐니뭐니 해도 당시 대포의 본체는 단순한 무쇠 튜브에 불과했으니까요.)
(보방 가라사대, 참호는 지그재그로)
이때 나폴레옹은 직접 망원경을 들고 최전방 참호까지 나와 적진을 살피고 있었습니다. 이제 공격이 가능하다고 본 나폴레옹은 돌격 명령을 내렸고, 곧 정예병인 척탄병들을 앞세운 프랑스군은 그 구멍이 뚫린 성탑을 향해 돌격했습니다. 다만 프랑스 포병대가 뚫은 구멍이 지면으로부터 약 3m 높은 곳에 있었기 때문에, 이 선두에 선 척탄병들은 그 지방의 드루즈(Druze)파 기독교인들이 만들어준 사다리 몇개를 들고 가야 했습니다. 그런데, 천만뜻밖에도, 성벽 바로 코 앞까지 다다른 척탄병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장애물에 부딪힙니다. 바로 성벽 앞에 깊은 해자(moat)가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에 해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던 것은 확실히 나폴레옹을 비롯한 프랑스 지휘관들의 잘못이었습니다. 물론 당시에는 비행기가 없었고, 가장 가까운 고지인 카르멜 산에서는 망원경으로 열심히 봐도 그 해자의 존재를 알기 어려웠다고는 하지만, 돌격 지점으로 삼고 10일 간이나 준비를 했는데도 그런 장애물의 존재를 몰랐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실수였지요.
(여길 그냥 뛰어내리기엔... 특히 위에서 적군이 총을 쏘아대는 상황에서 괜히 객기 부렸다가 발목이라도 부러지면 ?)
특히, 프랑스군이 완전히 고립된 상황도 아니었고, 그 지방의 토착민들과 활발한 교류를 하고 있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 해자의 존재를 몰랐다는 것은 정말 놀랄 만한 일입니다. 즉 프랑스군은 포위 진지를 구축하면서 그 주변의 드루즈 기독교 계통의 주민들로부터 풍부한 식량을 (비싼 가격에) 공급받고 있었습니다. 당시 프랑스군의 경리 책임자였던 페뤼즈(Peyrusse)의 기록에 따르면, 프랑스군은 드루즈파 기독교인들로부터 납작한 중동식 빵, 버터, 포도, 무화과 등 식량 뿐만 아니라 포도주와 증류주까지 모든 것을 풍족하게 공급받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프랑스군은 그들로부터 식량만을 구했을 뿐, 정작 중요한 아크레의 지형 지물이나 방어 태세에 대한 정보는 묻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지금이야 항공 사진이라는 것이 있으니, 적의 진지 상황 파악이 쉽지요. 사진은 현대의 아코 시의 모습입니다. 과거 아크레 시절의 모습을 거의 그대로 간직하고 있습니다. 아크레는 상당히 작은 규모로서, 저 북쪽 성벽의 한쪽면이 약 500m 정도에 불과합니다.)
이렇게 예상치 못한 해자를 발견한 척탄병들은 순간 당황했으나, 정예병답게 거기서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원래 성벽 위에 난 포탄 구멍까지 기어오르기 위해 가져 왔던 사다리를 타고 해자 바닥으로 내려갔지요. 문제는 그 다음이었습니다. 사다리를 타고 내려온 해자에서 기어 나가려면 다시 그 사다리가 필요했습니다. 선두를 맡았던 척탄병들은 자기들이 타고 내려온 사다리를 해자 반대편에 걸쳐세우고 성벽 아래에 도달했습니다. 이러다보니, 약간의 거리를 두고 척탄병들의 뒤를 따르던 다른 보병 연대들은 해자에 다다랐을 때, 더 이상 진격할 방법을 찾지 못했습니다. 척탄병들이 가져온 사다리는 이미 해자 건너편 지면에서 탑에 뚫린 구멍에 세워져 있었던 것입니다. 해자를 건너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던 프랑스 보병들은 빗발치듯 날아오는 오스만 수비군의 사격에 결국 움츠러들어 후퇴하고 말았습니다.
(1793년 당시 척탄병의 모습. 이 곰가죽 모자는 아무나 쓰는 것이 아니랍니다.)
하지만 스스로를 후위 부대와 고립시켜버린 척탄병들은 (이것이 사다리 수자가 부족해서 어쩔 수 없었기 때문인지, 또는 일반 보병들 따위 없어도 된다고 생각해서인지, 그냥 단순히 머리가 나빠서였는지는 불분명합니다) 성벽 위 총안에서 쏟아지는 총알과 돌덩어리, 수류탄 등에도 불구하고 용감히 포탄 구멍을 향해 기어올랐습니다. 가장 먼저 올라갔던 참모 장교 샤또르노(Chateaurenault)가 적탄을 맞고 떨어져 죽었음에도, 프랑스 척탄병들은 굴하지 않고 용감하게 기어올라 그 성탑 안으로 침투, 그곳을 거의 장악하는데 성공할 뻔 했습니다.
(저 무너진 구멍을 향하여 !!!)
당시의 부싯돌 격발 방식 머스켓 소총의 명중률이나 발사 속도는 사실 그리 대단한 것이 못되었기 때문에, 공격군이 불굴의 용기를 가지고 성벽에 한쪽 발을 디디는 순간, 그 성벽은 거의 함락되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아무래도 맹렬히 공격하는 공격군의 사기에 비해, 초조하게 지키는 수비군의 사기가 쉽게 꺾이고 공포에 사로잡히기 마련이었거든요. 실제로 그 성탑을 지키던 오스만 병사들 중 일부는 지키던 위치를 포기하고 성안으로 달아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이때 제자르 파샤의 리더쉽(?)이 오스만 병사들을 압도했습니다. 프랑스군의 프랑소와(Francois) 대위의 기록에 따르면 (다소 믿기 어렵지만) 제자르 파샤는 친히 현장에 나타나 도망치는 오스만 병사들을 후려갈기며 다시 돌려세워 프랑스군에게 내몰았고, 심지어 도망치는 오스만 병사들에게 권총을 2발 발사했다고 합니다. 어쨌거나 그는 도망치던 수비군을 돌려세우는데 성공했고, 오스만 병사들은 탑 아래에서 사다리에 매달린 프랑스 병사들에게 돌과 불붙은 나무토막, 끓는 기름, 수류탄 등을 던지며 맹렬히 저항했습니다. 결국 프랑스 척탄병들도 빗발처럼 쏟아지는 총탄과 돌덩어리에 제압되어 다시 사다리를 해자에 내려놓고 후퇴해야 했습니다.
(사다리 기어오르는 것도 힘들어 죽겠는데 위에서 끓는 기름을 부어대면 정말 짜증나지요)
공격하던 프랑스 척탄병들이 부상자들을 남기고 후퇴하자, 이번에는 오스만 병사들이 성탑 아래로 내려와 그 일대에 쓰러진 프랑스 부상자들 및 사망자들의 목을 베어갔습니다. 제자르 파샤가 프랑스군의 목 하나하나에 꽤 큰 상금을 걸었기 때문이었지요. 제자르 파샤는 이렇게 프랑스군의 1차 공격을 물리친 뒤 의기양양하여, 부하들이 가져온 프랑스군의 머리들을 말뚝에 꽂아 성벽 위에 주욱 진열하는 기염을 토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또다시 이슬람을 모욕하는 더러운 기독교인들에 대한 분노가 새록새록 솟아나 성내에 있던 프랑스군 포로들은 물론, 꽤 많은 수가 있었던 기독교 계통 주민들까지도 모조리 죽여 바다 쪽 성벽으로 던져버리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이 시체들 중 상당수가 해류를 타고 프랑스군이 장악한 해변까지도 떠내려 왔으므로, 프랑스군도 이 사실을 알게 되었지요.
물론 프랑스군은 이런 끔찍한 만행에 분노했습니다만, 사실 뭐 자신들이 화를 낼 입장인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불과 한달이 지나기도 전에, 자신들은 훨씬 더 큰 규모로 포로들을 학살했기 때문이었지요. 하지만 나폴레옹은 정말 뻔뻔하기가 이를데가 없어, '이 모든 참변의 책임은 전적으로 영국측 지휘관인 스미스 함장 때문이다' 라고 결론을 내리고 스미스에 대한 증오에 불타올랐습니다. 이는 사실 그다지 정당한 비난은 아니었습니다. 스미스는 프랑스군의 포위 작전이 시작되기 직전, 제자르 파샤를 설득하여 프랑스군 포로들을 영국군 포로들과 교환하도록 해주었고, 또 포로 교환의 대상이 되지 못한데다 제자르 파샤의 끔찍한 고문에 큰 부상을 입은 프랑스 장교를 자신의 배에 손님 자격으로 데려와 극진한 치료와 간호를 해주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어쨌거나 오스만 술탄의 칙령에 따른 형식적으로, 또 스미스 본인의 주장으로도 아크레 방위군의 총지휘관은 제자르 파샤가 아니라 바로 스미스 본인이었으므로, 나폴레옹이 이 참변에 대해 스미스를 비난한 것도 꼭 틀린 것만은 아니었지요.
(당시의 32파운드짜리 거포입니다. 오스만-영국 연합군에는 이런 것이 꽤 많았지요. 일부는 시드니 경이 제공한 영국제, 일부는 나폴레옹이 갖다바친 프랑스제...)
어쨌거나 프랑스군은 이를 갈며 다시 참호를 팠습니다. 이번에는 좀더 준비를 철저히 하여 다시 공격을 하려던 것이었지요. 하지만 계속되는 화력전에서의 우열은 너무나 명백했습니다. 이미 강력했던 포병 전력에다, 영국 해군으로부터 막대한 양의 포탄과 화약 지원까지 받고, 또 영국 해군 전함들의 함포 사격 지원까지 받는 오스만 수비군이 맹렬한 포격을 시원시원하게 날려대는 것에 비해, 프랑스군은 몇 문 남지도 않은 8파운드짜리 딱총같은 대포로 드문드문 반격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렇게 오스만 군의 포격을 뒤집어 써가며 힘들게 참호를 파던 프랑스군에게, 성벽 위의 오스만 군은 투르크어와 아랍어, 알바니아어, 영어, 프랑스어 등으로 온갖 욕설과 조롱을 퍼붓고 있었습니다. 그중 포병 장교 출신 나폴레옹의 속을 가장 긁은 조롱은 바로 이거였다고 합니다.
"술탄 셀림 붐붐붐 !~ 보나파르트 핑핑핑 !~ (Sultan Selim boom boom boom !~ Bonarparte ping ping ping !~)
(핑핑핑 ! 아우~ 귀여워 ! 당시의 8파운드 짜리 경포입니다.)
이런 조롱에 부글부글 끓던 나폴레옹은 아크레에 오기 직전에 점령했던 항구도시 하이파(Haifa)에서 노획했던 32 파운드 포 1문과, 24 파운드 포 1문을 기억해냈습니다. 곧 병사들이 파견되어 4월 1일, 마침내 그 무거운 대포들을 힘겹게 끌고 왔습니다만, 이번에는 그런 중포들에 맞는 대포알이 없다는 것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머리 좋은 나폴레옹에게 그 정도는 문제가 아니었지요. 그는 병사들에게, 오스만 군이 쏘아대는 포탄을 포병대에 들고 오면 꽤 짭짤한 보상을 해준다고 발표했습니다. 30 파운드 이상되는 대구경 포탄은 20수(sous), 그리고 10파운드 이하의 소구경 포탄은 10수(sous)를 준다고 했지요. 당시 프랑스 병사들의 하루 급료가 약 10수 정도였으니, 이는 결코 작은 액수가 아니었습니다. 만약 32 파운드짜리 포탄 하나를 발견하여 굴려오든 들쳐매고 오든 가지고만 오면, 장교들의 칭찬도 받고 나폴레옹이 데려온 젊은 학자들이 받던 하루 일당에 해당하는 돈을 받을 수 있었으니, 결코 나쁜 장사가 아니었지요.
(32 파운드 포탄 = 약 14.5kg짜리 쇳덩어리입니다. 이걸 끌고 1km 걷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요.)
과연 인센티브 제도의 성과는 놀라워, 곧 프랑스 포병대는 32파운드 포와 24파운드 포를 위한 충분한 포탄을 확보하게 되었습니다. 이 두 문의 중포를 앞세워 나폴레옹은 다시 아크레의 성벽을 강타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전과는 다르게 나폴레옹도 핑핑핑이 아니라 붐붐붐을 시작하자, 오스만 수비군도 바짝 긴장하게 되었지요. 4월 8일, 아무래도 안되겠다 싶었던 오스만 수비군은 마침내 성문을 열고 보병대를 출격시켜 나폴레옹의 붐붐붐을 잠재우려 했습니다. 하지만 그 정도를 예상하지 못할 나폴레옹이 아니었습니다. 용감하게 뛰쳐 나왔던 오스만 군은 기다리고 있던 프랑스군 보병에게 철저히 유린당하여 약 800명의 전사자를 냈는데, 그 사망자 중에는 약 60명의 영국군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사로잡힌 영국군 부상병들을 '마치 프랑스군 부상자를 치료하듯' 치료해주었다고 훗날 자랑스럽게 회고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어지는 문장에서, '우리 두 나라 국민들은 이 머나먼 땅의 야만인들 사이에서 그 라이벌 관계를 잠시 접었다'고 표현했습니다. 즉, 영국군과 프랑스군만 문명국 군대이고, 오스만 투르크의 군대는 야만의 군대로 표현한 것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나폴레옹의 회고록에도 (영국군 부상자보다 숫자가 훨씬 더 많았을) 오스만 투르크군의 부상자들을 어떻게 처리했는지는 전혀 언급이 없습니다. 하긴, 당시 투르크군의 전통은 전장의 적군 부상자들은 보는 즉시 목을 베는 것이었으니, 프랑스군이 따라 한다고 딱히 비난할 일은 아니었겠지요.
(유럽계통의 군대가 중동출신 포로들을 개처럼 대하는 것은 오늘날도 여전한 듯...)
이제 다시 주도권은 나폴레옹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분위기가 확 역전된 것은 나폴레옹의 손에 딱 대포 2문이 더 들어왔기 때문이었지요. 당시 오스만-영국 연합군에게는 이런 중포가 백여문이나 있었던 점을 생각하면, 확실히 나폴레옹의 재주가 뛰어나긴 했던 모양입니다. 하지만 나폴레옹의 포위전에 다시 먹구름이 끼게 됩니다. 애초에 나폴레옹이 시리아 원정을 떠나게 되었던 원래의 원인, 즉 제자르 파샤가 시리아에서 모으고 있다던 약 수만명 규모의 '다마스커스 군'이 아크레의 구원을 위해 접근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이야기는 다음 기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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