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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락 영웅 - 자파 (Jaffa) 공략전

지식창고지기 2011. 8. 29. 10:00

지난 편에서 오스만 제국이 프랑스의 이집트 침공에 대해 선전 포고를 하고 시리아와 로도스섬으로부터, 수륙 양면 공격을 펼치기 위해 대군을 모을 준비를 하는 것까지를 보셨습니다.  이 위기 상황에서 나폴레옹은 얼마나 근심 걱정이 많았을까요 ?




(18세기 말에 이스탄불이 한물 가서 그렇지... 16~17세기만 해도 이곳의 분노를 산 곳은 다들 덜덜 떨었지요)



사실은 이상할 정도로 태평했습니다.  나폴레옹은 빌어먹을 영국 해군 덕택에 외부와 완전히 고립되어, 오스만 제국이 정말 이집트를 침공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거든요.  또, 이스탄불에 있는 프랑스 대사관원들이 감옥에 쳐박힐 정도로 프랑스와 오스만 제국의 관계가 험악하게 흘러가 버렸다는 사실도 몰랐습니다.   시리아로 도망친 마멜룩들과 내통하는 이집트인들을 통해, 오스만이 선전포고를 했다는 것까지는 알고 있었으나, 아직 오스만과 진짜 전투를 벌여야 할 상황은 충분히 피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아직도 탈레랑이 이스탄불에 직접 가서 상황을 적절히 수습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지요.  실제로 오스만의 선전포고는 1798년 9월 13일이었으나, 그 해 말이 지나 새해가 될 때까지도, 정말 오스만이 쳐들어 올 것 같은 정황은 전혀 없었습니다.  실은, 오스만 제국이 워낙 크고 방대할 뿐만 아니라 그만큼 방만하게 경영되는 제국이라서, 침공에 필요한 병력을 끌어모으는데 시간이 엄청나게 오래 걸릴 뿐이었습니다.



(아, 이 정도면 로마 제국 부럽지 않죠..)



그러던 1799년 1월 어느날, 나폴레옹은 이번 이집트 침공의 주목적 중 하나였던, 수에즈 지협을 관통하는 운하의 적정성 여부를 파악하기 위해 홍해에 면한 수에즈까지 일단의 수행원들과 함께 원정을 갔다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이 원정에서 그는 밤 사이 들어온 밀물 때문에 빠져 죽을 뻔하기도 했지요.)  돌아오는 사막 길 중간에 사바-비야트 (Saba-Byat)라는 곳의 우물에서 나폴레옹 일행은 탁한 맛의 우물물을 마시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역시 이 우물을 찾아온 왠 아랍 전사가 하나 있었습니다.  이 아랍인은 재빨리 몸을 숨겼던 나폴레옹 일행들에게 사로 잡혔는데, 몸 수색을 해보니 이 아랍인은 시리아의 제자르(Jezzar) 파샤, 그리고 그에게로 도망쳤던 이브라힘 (Ibrahim) 베이가 상 이집트 지역에서 아직도 게릴라 활동 중이던 무라드 (Murad) 베이의 마멜룩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내용은 제자르 파샤가 이끄는 오스만 군이 이집트 침공을 개시하여, 이미 오스만 군이 시나이 반도의 오아시스 도시인 엘 아리쉬 (El Arish)를 점령하여 그 요새 수비를 강화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엘 아리쉬의 대략적인 위치를 확인하십시요.)



나폴레옹은 비로소 오스만 투르크와의 일전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는 거기에서 카이로로 돌아오기도 전에, 이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지 결정을 내립니다.  어떻게 ?  간단합니다.  나폴레옹의 사전에 수비란 없었지요.  오로지 공격 뿐 !  그는 제자르 파샤가 이집트 경계를 넘기 전에 아예 선제 공격을 가하기로 합니다.

나폴레옹은 서둘러 시리아 원정 준비에 들어갑니다.  원래 이집트에 데려왔던 병력 중 전투 및 질병으로 사망한 사람들을 빼면 약 3만 정도가 남았는데, 그 중 4천 정도는 드제 장군의 지휘 하에 상 이집트 지역에서 무라드 베이의 마멜룩들을 추격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남은 병력 중 일부는 알렉산드리아 및 다미에타, 로제타 등지의 나일 강 하구 지역을 수비해야 했고, 가장 중요한 카이로에는 두구아 (Dugua) 장군 지휘 하에 9천 명 정도를 남겨 두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남은 병력 약 1만 3천 (보병 1만, 포병 1천4백, 기병 8백, 낙타부대 1백)을 모조리 시리아 원정에 투입하기로 했지요.  그야말로 수중에 가용한 모든 병력을 총동원한 셈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잠깐, 모든 군사 행동에는 분명한 목적과 범위가 있어야 합니다.  뭐 해봐서 거기까지 갈 수 있으면 가고, 아니면 말고... 식은 정말 곤란하지요.  나폴레옹은 과연 시리아 원정에서 무엇을 원했고 어디까지가 목표였을까요 ?

당연히 1차 목표는 제자르 파샤가 이집트 침공을 위해 모으고 있다는 병력을 분쇄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할까요 ?  오스만 투르크는 유럽과 아시아, 그리고 아프리카의 3개 대륙에 걸친 광대한 제국이었습니다.  제자르 파샤가 끌어모아 놓은 시리아 내의 병력을 다 분쇄한다고 하면, 그것으로 끝일까요 ?  발칸 반도의 병력이 로도스 섬에 이미 집결하고 있었는데, 그 외에도 아나톨리아 (현재의 터키 본토, 즉 소아시아 지역), 북아프리카 등지에서도 추가로 병력을 끌어모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 식으로 전투가 계속 된다면 과연 1만 3천에 불과한 원정군이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요 ?  나폴레옹은 정말 오스만 투르크와 갈 때까지 가볼 생각이었을까요 ?  가진 병력에 비해 이건 너무 무모한 도전 아니었을까요 ?




(이 양반이 시리아의 기독교 성자이자, 마론교의 창시자(?)이신 Maroun이십니다.  기원후 4세기 경 순교하셨답니다.)



나폴레옹은 할 만하다고 믿었습니다.  그는 일단 제자르 파샤의 병력을 분쇄하고 나면, 레바논과 시리아에 흩어져 있는 마론(Maron)교 및 그리스 정교 계열의 기독교인들이 프랑스 군에 가담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지요.  나폴레옹은 그렇게 추가로 모을 수 있는 레반트 지역의 기독교 병력을 약 1만8천 정도로 보았습니다.  게다가 시리아를 점령하여 나폴레옹군의 무력이 오스만 제국을 압도한다는 것을 증명해 보인다면, 어차피 오스만 투르크의 압제하에 시달리는 처지였던 아랍인들도 프랑스 측에 가담하리라고 보았습니다.  일단 이렇게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보기 시작하니까, 상황이 점점 장미빛으로 보였습니다.   제자르 파샤가 시리아에 병력을 모으고 있다는 사실 자체도 프랑스 군에게 유리한 사실로 비추어졌습니다.  즉 병력을 모았다면 당연히 무기와 군수 물자도 잔뜩 모았을 것이니, 그것을 노획하여 이렇게 새로 모은 군대를 무장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지요.  게다가 드제 장군이 상 이집트 지역을 평정하고, 또 자신이 시리아까지 정복해 보인다면, 아직 프랑스에 완전히 복종하지 않은 이집트의 콥트(Copt) 기독교들과 심지어 마멜룩 잔당들도 프랑스군에 가담할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레바논에 많았다는 마론교 수도사와 그 사원의 모습입니다.)

 

나폴레옹이 이집트와 레반트 지역의 기독교 세력이 자신에게 적극적으로 가담할 것이라고 판단한 것도 완전히 망상만은 아니었습니다.  프랑스군의 상륙이 후 콥트 기독교인들은 어느 정도 중립적인 입장을 지키고 있었습니다만, 지난 10월 21일 카이로 대폭동 때는, 폭도들이 자신들의 가게나 집을 공격하기 시작하자 카이로 시내의 콥트 기독교인들은 무기를 들고 적극적으로 프랑스군의 편에 서는 것을 보았거든요.  그런 식으로 해서, 일단 시리아를 정복하고나면, 이집트에서 드제 장군이 프랑스군과 이집트군이 반반으로 구성된 약 2만명의 추가 지원 병력을 끌고 올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또 상황이 그렇게 되면, 나폴레옹은 이스탄불이 굴복하여 자신과 화평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지요.

나폴레옹의 망상은 끝이 없었습니다.  비록 아부키르 해전에서 함대를 잃고 프랑스와의 보급선이 끊겨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기는 했지만, 어차피 알렉산드로스 대왕도 본국으로부터의 보급 없이 육로로 인도까지 쳐들어갔는데 자신은 못하리라는 법은 없다고 보았습니다.  이론적으로 보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습니다.  특히 별 다른 이념도 없이 그냥 세계정복에 나섰던 알렉산드로스와는 달리, 자신은 자유 평등 박애라는 원대한 프랑스 혁명 정신으로 정복지의 민중을 전제정치의 압제에서 해방시켜 주고 계몽하여 자신의 대의에 따르게 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요.  게다가 알렉산드로스 대왕과는 달리, 자신은 광대한 페르시아, 즉 이란을 다 싸우며 지날 필요가 없으며, 오스만 투르크의 술탄와 전통적 적대 관계였던 페르시아의 샤(Shah)는 나폴레옹의 인도 원정을 인정하고 무사통과 시켜 줄 것이라고 (근거도 없이) 확신했습니다. 




(오스만 제국만 제국이 아니지요.  족보도 없는 투르크놈들과는 달리, 찬란한 전통을 가진 또 하나의 제국, 이란의 샤, 왕중의 왕인 팔레비 폐하이십니다.)



하지만 나폴레옹이 간과한 것이 두가지 있었습니다. 

첫째, 제해권없이는 아무것도 안된다는 것이지요.  알렉산드로스 대왕도 페니키아, 그러니까 현재의 이스라엘과 레바논 지역을 점령할 때는 제해권을 장악한 그리스 함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습니다.  유서깊은 항구도시인 티레(Tyre) 포위전에서는 육상 뿐만 아니라 바다로부터도 강력한 포위 공격을 했기 때문에 결국 함락시킬 수 있었지요.  그러나 이제 제해권은 영국에게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이 점을 나중에 아크레 포위전에서 뼈저리게 깨닫게 됩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티레 포위 공격은 알렉산드로스의 명성에 걸맞지 않게 치열한 소모전이었지요.  자고로 영웅호걸은 포위공성전에는 취약합니다.  나폴레옹도 예외는 아니었지요.)



둘째, 알렉산드로스 대왕도 결국은 인도 정복을 포기해야 했는데, 그 주된 이유는 전쟁에 지치고 낯설고 먼 이방으로 끝없이 가야 하는 병사들이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이었다는 점입니다.  지금 고작 지중해 너머에 있는 이집트에 온 것만으로도 병사들은 불만이 가득했는데, 정말 인도까지 간다고 하면, 병사들은 물론 장교들까지 반란을 일으킬 가능성이 아주 농후했습니다.  나폴레옹조차도 이 점을 인식은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폴레옹도 일단 시리아까지 점령해놓고, 구체적으로 그 다음에는 무엇을 할지는 그때 가서 결정하자라는 입장이었습니다.  인도 이야기는 적어도 병사들에게는 입도 뻥끗하지 않았지요.




(ㅎㅎㅎ  코끼리나 그 위에 올라탄 사람을 베기에는 알렉산드로스의 칼이 너무 짧군요)



자, 하지만 이 모든 일은 (심지어 나폴레옹의 대책없이 긍정적인 머리 속에서조차) 일단 시리아를 정복하고 난 다음의 이야기였습니다.  그리고 시리아를 정복하기 위해서는 시리아의 요충지인 아크레(Acre)와 다마스쿠스 (Damascus), 그리고 알레포(Aleppo)를 점령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곳으로 가기 위해서는, 시나이 반도 사막의 이집트-시리아 접경지역인 엘 아리쉬 (El Arish)부터 점령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러자면 먼저 시나이 반도의 사막 지대를 지나야 했지요.  이 사막 지대는 시리아와 메소포타미아의 제국들로부터 오랫동안 이집트 나일 지역을 지켜주던 천연 장애물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알렉산드리아 - 카이로 구간 이후 두번째로 사막 지대를 통과하게 된 것입니다.  그 처음 경험은 준비 부족으로 많은 희생자를 냈지만, 이번에는 이야기가 많이 다르겠지요 ?




(아 젠장, 또 사막이야)



글쎄요, 다르긴 달랐습니다만, 역시 준비 부족으로 생고생을 한 것은 마찬가지였습니다.  7월에는 그 찌는 듯한 더위 속의 사막을, 유럽 기후에나 알맞는 두꺼운 모직 군복을 입고 건너야 했던 프랑스군은, 카이로를 점령하고 나서 얼마 안 있어 이집트의 더운 날씨에 맞는 린넨 천으로 된 가벼운 군복을 새로 디자인하고 대량 생산하여 갈아 입었습니다.  그런데 나폴레옹이 드디어 카이로를 떠나 엘 아리쉬를 향해 출발할 때는 1799년 2월 10일로서, 겨울이었지요.  나폴레옹과 참모들은 잘 몰랐습니다만, 이집트도 겨울에는 해가 지고 나면 추웠습니다.  게다가 비도 왔지요.  사막에 비라니 !  그런데 왔습니다.  병사들은 추위에 벌벌 떨어야 했지요.  이건 그나마 좀 나았습니다.  더 나쁜 점은 식량이 부족했다는 점이었습니다.  말이고 낙타고 사람이고, 굶주림에 허덕였습니다.  이건 일부는 참모장이었던 베르티에(Berthier)가 이탈리아에 두고온 연인이 그리워 상사병이 나는 바람에 준비를 소홀히 한 탓도 있었지만, 제대로 걷히지 않던 이집트 내의 세금 문제가 컸습니다.  많은 이집트 농민들이 세금 내는 것을 끈질기게 거부했기 때문에, 많은 경우에 프랑스군이 출동하여 세금을 거부하는 마을을 붙살라 버리곤 했지만, 결국 돈은 걷히지 않았습니다.   결국 나폴레옹의 이집트 사업은 적자였던 것이지요.  덕택에 말과 낙타가 부족하여, 원정 준비도 빈약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나폴레옹은 말을 타고 낙타와 경주를 해보고,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자, '됐다, 배대신 낙타를 타고 인도로 가면 되겠다'라고 할 정도로 낙타의 매력에 흠뻑 빠져 낙타 부대를 새로 창설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돈이 없어 그 규모는 매우 작았지요.)



진짜 나쁜 점은, 나폴레옹이 2월 15일 고생 끝에 엘 아리쉬에 도착해보니, 예상과는 달리 1주일 먼저 선발대로 보냈던 클레베르(Kleber)와 레이니에(Reynier) 장군이 아직도 코딱지만한 엘 아리쉬를 점령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지도에서 찾아보기도 힘든 작은 오아시스 요새인 엘 아리쉬 하나를 점령하는데도 이렇게 오래 걸리다니, 그렇다면 십자군 시대의 전설적 요새인 아크레나 알레포를 점령하는데는 몇달이 걸릴 것 아닌가 ?"  (이건 나중에 사실로 드러납니다...)

클레베르와 레이니에가 엘 아리쉬 점령에 애를 먹었던 것은 그들이 무능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알고보니, 이 작은 요새에는 무려 3천3백에 달하는 투르크, 마멜룩, 모로코, 그리고 알바니아 병사들이 지키고 있었습니다.  제자르 파샤가 나름대로 전쟁 준비를 느리지만 충실히 수행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당연히 이들은 요새 방벽도 튼튼히 해놓았고, 식량도 충분히 확보해 놓고 있었습니다.  덕택에 보통의 포위전과는 전혀 다른 양상, 즉 포위된 수비대는 고기를 굽고 있고, 정작 포위군은 쫄쫄 굶고 있는 희한한 현상이 벌어졌습니다.  당시 나폴레옹군이 어느 정도로 굶주렸는가 하면, 어떤 소령이 아침에 일어나보니 병사들이 밤새 자기 말을 잡아먹었더랍니다.

상황이 이런지라, 나폴레옹은 하루라도 빨리 엘 아리쉬를 점령해야 했지만, 무거운 공성포를 도저히 사막의 모래 위로 끌고올 수가 없었기 때문에, 가진 것은 가벼운 경포 뿐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엘 아리쉬가 함락된 것은 나폴레옹의 본대가 도착하고 나서도 5일이나 지나서였습니다.  작은 대포나마 죽어라고 계속 쏘아대어 성벽에 작은 구멍을 뚫은 뒤, 공병대(sappeur)가 폭약을 설치한 뒤 폭발시켜 벽을 무너뜨린 것이지요.  이렇게 구멍이 뚫리고 나서도 오스만군은 정말 용감하게 저항하여 그 다음날까지 버틴 뒤, 나폴레옹이 포로고 뭐고 다 학살해버리겠다고 두번이나 협박한 뒤에야 오스만군은 마침내 항복했습니다. 

이 포로들 중 이집트의 마멜룩들은 모두 무장해제를 시킨 뒤 (물론 금품도 탈탈 털었지요) 호송대도 붙이지 않고 그냥 이집트로 보내버렸습니다.  이집트는 이미 프랑스 공화국의 영토였으므로, 이집트 출신의 마멜룩들은 이집트에 있는 이미 항복한 마멜룩들과 어울려 얌전히 지내라는 것이었지요.  그러나 기타 지역 출신의 오스만 군은 대우가 약간 달랐습니다.  먼저, 이들에게는 향후 최소 1년 동안은 프랑스군과의 전투에는 참전하지 않겠다는 맹세를 코란에 걸고 하게 했습니다.  그런 뒤에 역시 호송대도 붙이지 않고 동쪽의 다마스쿠스를 향해 그냥 걸어가도록 했습니다.  석방한 것입니다.  이건 유럽의 군대 사이에서 흔히 하던 가석방 제도를 적용한 것이지요. 




(오스만 투르크의 병사들은 결국 프랑스군의 적수가 될 수는 없었습니다만, 이집트의 마멜룩보다는 확실히 더 강인한 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실 이 가석방은 완전 사기였습니다.  그렇게 고작 몇백보를 걸어간 오스만군을 막아서는 이들이 있었으니, 바로 프랑스군이었습니다.  프랑스군은  2천에 가까운 오스만군 포로들을 도로 잡아들여 작은 단위로 나눈 뒤, 프랑스군의 각 보병부대에 강제 편입시켰습니다.  사실 이것도 유럽의 군대, 특히 영국 해군에서 흔히 행해지던 것이었습니다.  포로로서 선창에 쳐박혀 건빵과 물만 먹을래, 고기와 급료 뿐만 아니라 더 중요한 술과 담배 배급을 받을 수 있는 영국 해군에 입대할래라는 권유를 받으면, 몇몇 포로들은 이왕 버린 몸 하면서 입대를 택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던 거지요.  그러나 망망대해에서야 도망칠 곳이 없었지만, 육지에서는 이야기가 달랐지요.  특히 이교도 유럽 군대에 강제 편입된 독실한 무슬림 병사들에게, 이런 강제 편입의 결과는 당연히 탈영이었습니다.   프랑스군은 덕분에 1만3천에서 잠깐 1만5천으로 늘었다가, 불과 며칠만에 다시 1만3천으로 줄어들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굶주리던 프랑스군은 이 엘 아리쉬 요새를 점령하자마자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달려 들어갔는데, 거기서 발견한 것은 전투 중에 사망한 오스만군의 시체와 부상자들, 부서진 집기들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요새의 막사 중 하나는 페스트, 그러니까 흑사병으로 죽었거나 죽어가는 환자들 백여명으로 가득차 있었던 것입니다.  이 페스트는 쥐벼룩이 옮기는 병원균에 의해서 발병하는 것으로서 머리가 깨질듯한 두통과 고열을 동반하면서, 겨드랑이나 사타구니의 림프절에 큼직한 종기가 생기는 병이었습니다.  물론 사람끼리도 기침 등을 통해 전염되었습니다.  이 병은 사실 1798년 말에도 알렉산드리아에서 발병하여 프랑스군 몇십명과 알렉산드리아 주민 수백명의 목숨을 앗아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겁에 질린 프랑스군의 철저한 격리로 전염의 확산을 어느 정도 통제할 수 있었지요.  그런데, 한창 원정 중이라 위생이나 격리에 별로 신경쓸 수 없는 상황에서 이 병에 노출되게 된 것입니다.  이는 나중에 큰 재앙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몇백년 전 유럽을 휩쓸었던 바로 그 흑사병이 !!!)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일단 식량 부족 사태가 어느 정도 해결되었고, 특히 시나이 반도를 완전히 지나 시리아로 접어들자, 경치가 상당히 좋아졌다는 것입니다.  베르노이에(Bernoyer)라는 프랑스 보급관의 회고에 따르면, 그곳의 경치는 감귤나무 숲과 올리브 나무들이 우거진 것이, 마치 프랑스 시골 풍경과 비슷했다고 합니다.  그와 동시에, 프랑스군에게는 일이 잘 풀리기 시작했습니다.  2월 24일에는 주요 도시인 가자(Gaza)도 저항없이 점령할 수 있었고, 거기에 집적되어 있던 많은 탄약과 군수 물자도 손에 넣을 수 있었습니다.  특히 그 중에는 프랑스군의 포에 맞는 대포알도 4천발이나 포함되어 있어, 프랑스군에게는 큰 도움이 되었지요.  게다가 정말 나폴레옹의 생각대로, 시리아의 마론교 계통의 기독교인들은 프랑스군을 일종의 해방자로서 환영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추웠습니다.  당시 장교들의 회고록에 따르면 마치 1월의 파리만큼 추웠다고 합니다.  게다가 비도 자주 내려 프랑스 병사들의 고달픈 인생을 더욱 비참하게 만들었지요.  게다가, 이때 즈음에 이미 프랑스군 내에는 보고된 페스트 환자만도 31명이나 되는 상태였습니다.



(이건 훗날의 행정구역입니다만, 나폴레옹은 아직도 G 구역에서 헤매는 중... 이런식으로 언제 A 지역까지 가지요 ?)



그리고 3월 3일, 나폴레옹은 자파(Jaffa, 지금의 이스라엘 수도인 텔 아비브 지역)에 도착합니다.  이곳의 오스만 수비군은 무려 6천 정도로서, 가자에서와는 달리 맹렬한 저항을 합니다.  나폴레옹은 원래가 공성전에는 젬병인지라 엘 아리쉬에서 했던 것과 동일한 전법, 즉 딱총만한 경포로 며칠동안 죽어라고 포격을 가해 작은 구멍을 내고, 거기에 공병대가 폭약을 설치하는 방법으로, 마침내 3월 7일 어느 정도 큰 구멍을 뚫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역시 엘 아리쉬에서 했던 것처럼 오스만 수비대 지휘관에게 항복하라, 저항하면 모조리 살육하겠다고 협박했으나, 오스만 지휘관은 그 전령의 목을 잘라 효시하는 것으로 응답했습니다.  마침내 술을 잔뜩 마시게 한 프랑스 척탄병들이 많은 희생을 무릅쓰고 자파의 성벽에 난 구멍을 통해 난입했습니다.  오스만군은 용감히 싸웠으나, 결국 프랑스군에게 밀려 약 4천 정도는 내성(citadel)로 후퇴했고, 나머지 2천은 취한데다 그동안의 희생에 대한 복수심에 불탄 프랑스군에게 목숨을 잃었습니다.  병사들 뿐만 아니라 자파 시내의 무고한 시민들도 남자나 여자나, 노인이나 어린 아이들이나 가리지 않고 모두 프랑스군의 분노와 광기에 무참히 학살당했습니다.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 내부에 있는 요새를 내성, 또는 citadel이라고 부릅니다.)



물론 이건 아름다운 이야기는 아닙니다만, 끝까지 항복하지 않은 성이 무너졌을 때 죄없는 주민들까지 무참히 학살당하는 일은 일종의 불문률적인 전쟁 규칙으로서, 당시 유럽의 전쟁터에서도 종종 일어나는 일이었습니다.  십몇년 뒤의 일입니다만, 스페인에서 프랑스군이 끝까지 저항하던 바다호스 요새가 웰링턴의 영국군에게 함락되자, 영국군은 프랑스군은 물론이고 시내의 민간인들까지 대량 학살했는데, 그 민간인들은 영국의 동맹국인 스페인 국민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프랑스군이 벌인 참극은 물론 보기 흉한 일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나폴레옹의 명예를 (적어도 당시 관점에서는) 크게 실추시키는 일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문제는 그 다음날이었습니다.  이제 이 정도 털었으면 됐다 싶었던 나폴레옹은 크로지에르(Crosier)와 자신의 양아들 보아르네(Beauharnais), 즉 두 십대 장교를 성내로 들여보내 병사들을 집결시키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아직 내성에서 버티고 있던 약 4천명 정도의 오스만군은 밤새 벌어진 살륙을 보고 질렸던지, 마침 내성 앞을 지나가던 이 두 소년 장교를 불러 정당한 포로 취급을 해준다는 조건 하에 항복하겠다는 뜻을 밝혔습니다.  그리고 크로지에르라는 이 어린 장교는 그 요청을 수락하고, 줄줄이 무기를 버리고 나온 오스만 군을 인솔하여 나폴레옹 앞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과부였던 조세핀이 데려온 나폴레옹의 양아들 외젠 드 보아르네(Eugene de Beauharnais)입니다.  이집트에서 이름을 날린 것은 수단 출신의 흑인 미녀 노예를 1천8백 프랑이라는 엄청난 가격에 사들인 후, 6천 프랑의 돈을 더 들여 여왕처럼 꾸며서 정부로 자랑스럽게 데리고 다닌 행동 정도였습니다. 나폴레옹은 이집트에서 조세핀이 젊은 미남 장교와 바람이난 것을 알고 분노했으나,이 외젠에게는 아들로서 잘 대해주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정말 난처했습니다.  가뜩이나 식량이 부족한데 이들 포로들을 먹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프랑스 병사들의 감정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들 포로들에게 약간의 빵과 비스킷이 주어졌는데 그 모습을 보고 부족한 식량 배급에 불만이 많았던 프랑스 병사들은 노골적으로 툴툴거렸습니다.  그렇다고 이들을 호송하여 이집트로 보낼 수도 없었습니다.  이들 4천에 가까운 포로들을 호송하려면 적어도 수백명을 빼내어 호송대로 파견해야 했는데, 가뜩이나 병력이 부족한 상황에서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가장 간단한 것은 엘 아리쉬에서처럼 프랑스군과 싸우지 않는다는 맹세를 하게 하고 그냥 가석방하는 것이었겠지요.

그런데 그들 포로 중 약 1천명 정도가 엘 아리쉬에서 석방되었던 (실은 탈영했던) 포로들로 밝혀졌습니다.  (정확하게 뭘 보고 그렇게 밝혀냈다는 것인지는 불분명합니다.  지문 검사 ?  신분증 검사 ?  손에 도장이라도 찍어서 풀어줬었나 ?)  여기서 이들을 또 가석방시키면 이번에는 이들이 다음 목표인 아크레로 가서 프랑스군과 싸울 것이 뻔해 보였습니다.   이도저도 못하게 된 나폴레옹은 독한 마음을 먹고, 이들이 가석방 규정을 어겼다는 것을 구실로 삼아 이들을 모조리 처형하기로 합니다.  처음에는 이들을 해변으로 끌고 나가 총살하다가, 나중에는 총알이 부족하다고 총검으로 찔러 죽였습니다.  포로들은 살 길을 찾아 달아났지만 대부분은 도망치지 못하고 희생되었습니다. 




(유럽의 많은 예술가들도 이 불명예스러운 사건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켰는지, 아무리 구글을 뒤져봐도 관련 삽화는 고작 이 작은 것 하나...)



이건 변명의 여지가 없는 전쟁 범죄였고, 비신사적인 행위인데다, 도덕적으로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가령 나폴레옹 자신만 하더라도 아부키르 해전에서 영국군의 포로가 되었다가 가석방 조건으로 풀려 나온 프랑스 수병들을 제멋대로 보병이나 포병에 편입시켜 싸우게 했던 것입니다.  또 사실 엘 아리쉬에서 가석방 조건을 어긴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었지요.  풀어준다고 해놓고는 프랑스군에 강제 편입시켰으니까요.

나폴레옹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나중에 황제가 된 뒤에 당시의 공식 기록들은 모두 없애버렸습니다.  그리고 더 훗날 세인트 헬레나에서 회고록을 쓸 때는 엘 아리쉬의 포로였던 것으로 밝혀진 9백명 정도만 총살하고, 나머지는 이집트로 호송시켰다고 주장을 했습니다.  그러나 역사는 속이지 못하는 법입니다.  당시 프랑스군 장교들이 본국에 보내는 편지들을 보면 그 잔혹 행위에 대해 크게 우려하고 그에 대한 부작용과 보복을 걱정하는 내용들이 많습니다.  이런 편지들은 대개 프랑스에 도착하지 못하고 영국 해군에게 나포되어 영국이 국제 사회에 크게 떠벌이는 바람에 더욱 망신살을 샀지요.

문제는 그것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3월 10일, 나폴레옹군의 군의관인 데쥬네뜨(Desgenettes)의 기록에는 이미 많은 병사들이 림프절에 종기가 생겼다가 급사하는 병에 시달리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자파 성내에도 페스트가 이미 번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데쥬네뜨와 나폴레옹은 둘다 병사들의 공포에 질리는 것을 막기 위해 이건 페스트가 아니고 다른 병이며, 전염성도 없다고 병사들에게 알렸습니다.  그러나 프랑스군 수뇌부는 (공표한 바와는 모순되게도) 환자들을 격리시켰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병은 확실히 빠른 속도로 번져 나갔습니다.  


(이 풍자화에서는 나폴레옹이 위험하고 처리 곤란한 페스트 환자들을 독살하려고 음모를 꾸미고 있습니다.  이 음모에 대해서는 나중에...)


당연히 페스트 환자들을 격리 수용한 병원은 프랑스군 내에서 최악의 보직으로 뽑혔는데, 그레쥬(Grezieu)라는 참모 장교가 이 재수없는 병원 책임자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는 얼마나 겁에 질렸던지, 병원 안에는 들어가지도 않고 그 옆의 집을 자기 사무실로 정하고는, 창문을 통해서 명령서만 던져주는 식으로 운영을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이 양반도 이 병원 책임자로 임명된지 불과 24시간만에 페스트로 급사하고 말았습니다.  그 후임은 말뤼(Malus)라는 부관이었는데, 이 사람도 10일만에 병에 걸렸고, 환자 12명 중에 11명이 결국 사망한다는 이 병에서 살아남은 몇 안되는 행운아 중의 하나가 되는 영광을 누렸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사실은 병사들을 겁에 질리게 만들기에 충분했습니다.




(어우 저도 그림 좀 그릴 줄 알면 이런 그림 좀 자유자재로 그려 집어 넣고 싶어요...)



데쥬네뜨와 나폴레옹도 각각 병사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데쥬네뜨는 이것이 페스트라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페스트 환자를 진료하면서, 핀셋으로 그 환자의 종기를 찌른 뒤, 그대로 그 핀셋을 자신의 겨드랑이에 찔러 봄으로써 병이 옮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했습니다.  용감한 자는 살아남는다더니, 데쥬네뜨는 기적적으로 병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생긴 것은 저처럼 통통한 곰돌이같지만, 정말 용기있는 의사였던 데쥬네뜨 René-Nicolas Dufriche, baron Desgenettes 입니다.)



나폴레옹도 용기, 그리고 자신을 다스리는 운명을 믿는 점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지요.  나폴레옹도 역시 이것이 페스트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페스트 환자들을 직접 방문하여 환자들을 직접 맨손으로 만져주며 위로했습니다.  역시 나폴레옹도 병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이 사실은 물론 우쭐한 나폴레옹이 훗날 '자파에서 페스트 환자를 위로하는 나폴레옹'이라는 명작 그림으로 제작하게 할 정도로, 좋은 선전거리가 되었습니다.  실제로 나폴레옹이 환자들을 방문했는지 여부에 대해서는 이론도 있습니다만, 결코 나폴레옹을 좋아하지 않는 편이었던 데쥬네뜨도 그 방문을 증언하고 있으므로, 사실이었던 모양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병은 계속 번졌습니다. 



(제가 이런 그림까지는 바라지도 않지요...  그로 (Antoine-Jean Gros)의 작품입니다.  루브르 박물관에 걸려 있어요.)


그리고 마침내 3월 17일, 십자군 전쟁 당시 프랑스 기사들이 축성한 유서깊은 요새 도시 아크레, 즉 운명의 생 장 다크레 (Saint Jean d'Acre)에 나폴레옹이 도착합니다.  여기서, 나폴레옹은 자신의 인도행 꿈을 꺾을 각기 다른 국적의 인물 3명을 만나게 됩니다.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