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1798년 7월 1일, 프랑스 함대는 알렉산드리아 외항에 도착합니다. BC 332년, 그러니까 약 2100년 전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건설한, 책에서나 읽던 전설의 도시에 도착한 나폴레옹의 심정은 정말 두근두근 쿵쿵이었을 것입니다. 목적지가 어디인지도 모르고 출발했다가, 말타를 떠난 다음에야 이집트로 간다는 발표를 전해들은 병사들과 장교들, 그리고 학자들의 심정은 어땠을까요 ? 먼저, 당시에는 TV나 인터넷 등도 없고 사진기도 없었던데다, 오스만 투르크로 인해 이집트와 유럽의 왕래가 그다지 많지 않았기 때문에, 일반적인 유럽인들의 이집트에 대한 지식은 그리 많지 않았다는 점을 생각하셔야 합니다. 이는 문맹이 태반이었던 일반 병사들은 물론이고, 장교들이나 많은 학자들에게도 공통된 사항이었습니다.
(당시 유럽인들의 기억하는 이집트는 이런 모습 ? 그림은 '나일강에서 사냥하는 클레오파트라' 입니다.)
현대 학문 중에는 이집트학(Egyptology)라는 학문이 아예 따로 있습니다. 그만큼 이집트의 역사와 문명은 방대하고 또 역사학적인 가치가 있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 단어는 당시에는 존재하지 않았고, 이 이집트학이라는 학문은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 덕택에 생겨난 것이었습니다. 그렇다고 나폴레옹을 비롯한 프랑스인들이 1798년 당시 이집트의 현황에 대해 완전히 무지한 상태였을까요 ? 물론 그렇지 않았습니다. 당시 이집트와 거래를 하는 프랑스 상인들이 적은 수자나마 있었고, 또 이집트에는 프랑스 영사까지 주재하고 있었습니다. 또 나폴레옹 본인만 하더라도, 유럽 최초의 이집트학 학자라고 할 수 있던 볼네 (Constantin Francois de Chasseboeuf, comte de Volney)와 자주 이야기를 나누면서 당시 이집트의 현황에 대해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원래 성이 드 샤스뵈프였던 볼네는, 볼테르와 푸르네의 이름을 합성하여 새로운 성 볼네를 만들 정도의 자유주의자였습니다. 이 양반은 이집트 여행은 물론 미국 여행도 했었으나 루이지애나 관련 프랑스 스파이로 오인받아 미국에서 추방되기도 했습니다. 자유주의자답게 나폴레옹의 쿠데타나 황제 취임에는 반감을 가졌으나, 후에 나폴레옹에 의해 억지로 입각하여 원로원 의원에도 임명되었습니다. 물론 백일천하 때에는 나폴레옹에 가담하지 않았지요.)
하지만 이런 정보들은 정말 관심있던 몇몇 지식인들이나 가지고 있었고, 학자들을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집트의 현황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었습니다. 당시 프랑스에는 이집트 관련 최신 서적이 두권 출간되어 있었는데, 하나는 나폴레옹에게 직접 이집트에 대한 정보를 제공했던 볼네가 쓴 이집트와 시리아 여행 (Voyages en Egypte et en Syrie) 이라는 책이었고, 나머지는 클로드 사바리 (Claude Savary)의 이집트 편지 (Lettres sur Egypte) 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볼네라는 사람은 원래 귀족으로서 혁명 직전 삼부회 멤버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 양반은 일찍부터 '예수는 실존 인물인가 ?'라는 질문을 역사학적으로 고찰하는 등 시대를 앞서 나가는 자유주의자였으므로, 혁명기에도 국민공회 멤버로서 활동했지요. 이 양반은 또 여행가로서, 1782년부터 1785년까지 이집트와 시리아를 여행하며 아랍어를 배우는 등, 이집트에 대해서는 정말 최고 권위자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이 이집트에 대해 제대로 배우고 싶었다면 정말 사람을 제대로 고른 셈이었습니다. 당연히 이 사람의 책 속에 그려진 이집트는 흥미롭기는 하지만 그다지 낭만적이지 못했습니다. 그에 비해 사바리가 쓴 책에는 반나체로 나일강에서 목욕하는 여인들이 등장하는 등 이집트가 좀더 매혹적인 모습으로 그려져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당연히 볼네의 책보다는 사바리의 책이 좀더 현실에 가깝기를 기대했지요. 물론 사바리도 코란을 프랑스어로 번역하는 등 볼네 못지 않은 동양학자이긴 했습니다만, 최근에 이집트를 여행한 것은 사바리가 아니라 볼네였습니다.
(사바리가 이집트를 좀 아름답게 묘사하기는 했지만, 그는 싸구려 출판 낚시꾼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아랍어 지식을 보여주는 증거, 코란 번역본입니다.)
7월 1일, 드디어 도착한 알렉산드리아 앞에 도착한 프랑스인들 눈에 들어온 것은 고대의 찬란한 도시 알렉산드리아의 웅장한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황량한 모래 백사장만 펼쳐진, 허름한 어촌 마을에 불과했습니다. 병사들은 동요했습니다. 이런 황량한 동네에 뭐하러 온 것인가 ? 그런데, 함대의 입항을 조율하기 위해 먼저 입항했던 프리깃함으로부터 더 안좋은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바로 이틀 전, 강력한 영국 함대가 자신들을 찾아왔다가 허탕을 치고 북쪽 어디론가 가버렸다는 것입니다. 이는 언제라도 영국 함대가 되돌아올 수 있다는 것을 뜻하는 것과 동시에, 이집트 마멜룩들에게 곧 프랑스 원정군이 침공해 올 것이라는 것을 알려주었다는 것을 뜻하는 소식이었습니다.
원래 프랑스 함대는 나일강 하구의 로제타에 기항할 예정이었습니다. 알렉산드리아는 수심이 너무 얕아서 프랑스군의 큰 배들이 해안 가까이 갈 수 없기 때문이었지요. 하지만, 마음이 급했던 나폴레옹은 당장 알렉산드리아에 병력을 내려놓기를 원했습니다. 이미 해가 지고 있었고 또 게센 바람이 부는 날씨여서, 브뤼예 제독은 이런 환경에서의 병력 하역 작업이 얼마나 위험한지 나폴레옹에게 설명했습니다. 물론 나폴레옹이 그런 말에 귀 기울일 리가 없었지요. 결국 백여명의 병사들이 보트 전복 사고로 개죽음을 하는 불상사를 겪으며, 6천명의 병력이 밤사이 알렉산드리아의 서쪽 알 무라비트(Al Mourabit, 프랑스어로는 마라부 Marabout)에 상륙했습니다. 상륙 자체에 대한 저항은 이 거센 바람과 파도 외에는 전혀 없었습니다.
(보나파르트 장군의 알렉산드리아 상륙. 다른 병사들에게 업혀서 보트에서 내렸어도, 마른 발로 상륙할 수는 없었을 것 같네요. 샤를 르미르의 작품입니다.)
프랑스군은 아직 포병대를 상륙시키지 못한 상황이었으나, 정오가 되자, 총검과 급조한 사다리만 들고 알렉산드리아 시내로 쳐들어갔습니다. 알렉산드리아의 방어는 나름 치열했습니다만, 아무래도 당시 알렉산드리아는 전체 인구 수가 6천명 밖에 안되는 황폐한 도시라서 지키는 병사의 수도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성벽에서 잠시 머스켓 사격 및 돌덩어리 투척이 있었으나, 프랑스군의 대부대가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제압했고, 텅빈 거리를 따라 전진하는 프랑스군에게 이곳저곳의 창문으로부터 총탄 몇발이 날아들었으나, 대세에는 지장이 없었지요. 공격을 시작한지 세시간 만에 알렉산드리아의 중앙 성채도 함락되었습니다. 이 시시한 공성전은 클레베르(Kleber) 장군과 므누(Menou) 장군이 이끌었는데, 클레베르는 머리에 머스켓 총탄에 의한 가벼운 상처를, 므누는 성벽에서 던져진 돌덩어리에 허벅다리를 얻어맞는 정도의 부상을 입었습니다.
(클레베르 장군. 그는 비록 나폴레옹 라인을 타지는 못했습니다만, 무척 유능하고 인덕이 있는 장군이라서, 나폴레옹이 이집트를 떠난 뒤에도 훌륭하게 상황을 유지해 나갔습니다.)
이렇게 알렉산드리아 점령은 손쉽게 완료되었습니다만, 프랑스군의 실망은 여전했습니다. 비록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발자취와 (사실 정작 알렉산드로스는 기초 공사가 마무리되기도 전에 3개월 정도만 현지에 머물렀고 두번 다시 이 도시로는 돌아오지 않았지요) 프톨레메우스 왕조의 영광, 로마의 문명까지는 바라지 않았을지 몰라도, 프랑스인들이 눈으로 확인한 알렉산드리아는 너무나도 초라했던 것입니다. 7월 4일 비로소 상륙했던 학자들 중 하나인 20세의 젊은 건축가 샤를 노리(Charles Norry)의 기록은 그들의 실망감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역시 '나폴레옹의 학자들'에서 그대로 인용합니다.)
"우리는 건축가 디노카레스(Dinochares, 알렉산드로스의 명령에 따라 도시의 터를 닦은 고대 그리스의 건축가)가 설계한 알렉산드로스의 알렉산드리아를, 그리고 수많은 위인들이 태어나고 교육받은 알렉산드리아를, 프롤레마이오스 왕조가 인간의 지식의 유산을 집결시킨 도서관을, 시민은 활기넘치고 산업은 고도로 발달한 상업도시를 찾고 있었다. 그러나 그곳을 채우고 있는 것은 오직 폐허, 야만, 굴종, 가난 뿐이었다."
(샤를 노리의 작품입니다. '로마 성 바울 성당의 빛나는 십자가')
왜 고대 프롵레메우스 왕조의 수도이자 수백년에 걸친 찬란한 문명도시 알렉산드리아가 이렇게까지 허름한 어촌 마을로 전락했을까요 ? 비극은 로마 제국의 몰락과 함께 교역량이 줄어들면서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다 로마가 기독교화되면서 도서관을 포함한 기존의 이교도적인 그리스 로마 문명의 잔재들이 파괴되기 시작했고, 인근 교회 도시들이 발달하면서 인구와 교역량 모두가 크게 줄어듭니다. 이미 기울어가던 알렉산드리아의 운명은 AD 641년 동로마 제국이 이슬람을 앞세운 아랍인들에게 이 도시를 빼앗기면서 결정타를 먹습니다. 아랍인들은 이 점령 이후, 이교도들의 도시이자 다른 지중해 문명과의 교류를 위한 도시였던 알렉산드리아를 버리고, 나일강의 혜택을 직접 받을 수 있도록 나일강가에 새로운 이슬람 도시 푸스타트(Fustat)를 건설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푸스타트는 12세기 들어 인구가 20만명에 이르는 대도시로 성장했으나, 유럽에서 십자군들이 쳐들어오자 그들에게 도시를 약탈당할 것을 두려워한 이슬람 군주에 의해 소각되어 버렸습니다. 그 이후, 인근에 있던 카이로(Cairo)가 이집트의 중심지로 부각되면서 푸스타트는 수백년 동안 쓰레기장으로 이용되는 수난을 겪었습니다. 자신들이 건설한 신도시 푸스타트조차 이런 홀대를 당하는 와중에, 수천년 전의 고대 도시 알렉산드리아가 망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노릇이었습니다.
(12세기 번성하던 도시 푸스타트의 모습입니다. 이 도시는 카이로 인근에 위치하고 있었지요.)
하지만 프랑스인들은 실망감에 젖어 있을 시간이 없었습니다. 유명한 나일강의 범람은 바로 다음달, 8월이면 시작하는데다가, 알렉산드리아의 부귀영화가 옮겨간 진짜 목적지, 카이로로의 진격을 준비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백여명의 병사들을 개죽음 시킬 정도로 상륙을 서둘렀던 이유, 즉 영국 함대가 언제 되돌아올지 모른다는 사실 때문에, 병력과 물자를 내려 놓은 프랑스 함대를 빨리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켜야 했습니다. 나폴레옹은 필요한 소형 함선 및 일부 수송선을 제외한 나머지 수송 함대는 프랑스로 돌려보내고, 전열함들로 이루어진 함대는 아부키르 만에 정박시켜 놓고 필요시 지원을 해주던가, 만약 그것이 어렵다면 캄포 포르미오 조약 때 프랑스령으로 받아 놓은 그리스 서해안의 코르푸(Corfu) 섬으로 대피해 있으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브뤼예는 아부키르 만에 남기로 합니다.
(브뤼예 Francois-Paul Brueys d'Aigalliers 제독. 그는 판단력도 있고 용감한 해군 제독이었습니다.)
또 전쟁을 하려면 돈이 필요했습니다. 아무래도 모든 것을 약탈에 의존할 수는 없었고, 원활한 생필품 공급을 위해서는 현지 상인들과 협력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지요. 여기서는 말타 섬의 기사들로부터 강탈해온, 온갖 성물을 녹여 만든 금괴와 은괴가 그 역할을 톡톡히 했습니다. 나중에 카이로를 점령한 뒤, 알렉산드리아에 남아있던 클레베르에게 나폴레옹이 7월 27일에 쓴 편지 내용을 보면 이렇습니다.
"장군 동무(Citoyen General, 당시 혁명 정부답게 모든 호칭은 무슈 등이 아닌, 시톼앵, 즉 시민으로 불렸습니다)
여기에는 훌륭한 조폐국이 있소. 우리가 현지 금화 및 은화(specie, 정금이라고 하지요)를 얻기 위해 알렉산드리아의 상인들에게 넘겨주었던 모든 금은괴를 다시 찾아야 할 것 같소. 그러니 우리가 금은괴를 넘겨 주었던 상인들을 모두 소환하여 그것들을 회수하도록 장군께 요청을 드리오. 그들에게는 대신 밀과 쌀로 그 대가를 지급하겠소. 여기 카이로에는 곡물이 아주 풍부하오. 우리에게 금화나 은화가 부족한 만큼, 현물은 아주 풍부하오. 이런 정황에서는 가능한 많은 금은괴를 상인들로부터 회수하고 대신 곡물을 지급하는 수 밖에 없소."
(현재 전 세계에서 가장 신용있는 금화로 쳐주는 아메리칸 이글입니다. 현재 1온스의 금 가치는 약 1400 달러 정도지만, 이 이글 금화를 사려면 약 2200 달러 정도를 내야 합니다. 액면가는 50달러라구요 ? 님같으면 이걸 50달러에 넘겨주시겠습니까 ? 제게는 저 IN GOD WE TRUST 라는 글자가 처음에는 IN GOLD WE TRUST 로 보이더군요.)
즉, 무겁고 커다란 금괴 덩어리를 들고 행군하면서 필요할 때마다 줄톱으로 잘라서 필요 물품의 소액 대금을 지급할 수는 없었으므로, 급한 대로 현지 상인들에게 금괴 덩어리를 내주고 그 가치에 못미치는 금화나 은화를 받았던 것입니다. (요즘도 10만원 짜리 금화를 사면, 그 속에 든 금은 6~7만원 정도 밖에 안됩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카이로를 점령하고 조폐국을 손에 넣은 뒤에는, 자기들이 직접 금은괴를 녹여 금화나 은화를 만들 수 있었으므로, 그 손해 보는 장사가 마음에 아팠던 것입니다. 나중에 (아마도 총검을 들이대고) 곡물을 줄테니 지난번 그 금괴를 돌려달라고 요구받은 알렉산드리아의 상인들은 정말 강도질을 당한 기분이었을 것입니다. 앞으로도 나폴레옹과 거래했던 많은 이들은 (이집트인이든 유럽인이든 상인이든 정치가이든) 이런 식의 어이없는 거래를 많이 당하게 됩니다.
요즘 생업이 좀 바쁩니다. 피라미드 전투는 다음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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