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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계인은 사각형으로 싸운다 - 피라미드 전투

지식창고지기 2011. 8. 29. 10:04

여태까지 전투 장면이 거의 없는 전쟁사를 보시느라 다소 지루하셨을 여러분께서 기다리시던 피라미드 전투에 드디어 도달했습니다. 




(오래도 기다리셨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꼭 죽어야 재미가 있으신 건 설마 아니시겠지요 ?  그림은 Louis Lejeune 이 그린 피라미드 전투입니다.)



나폴레옹이 이탈리아에서 연전연승할 수 있었던 것은 적이 무엇을 상상하던 그 이상의 스피드를 보여주었던 바로 그 기동력 덕분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여기 이집트에서도 바로 그 점을 십분 활용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요새 도시라는 뜻의 카이로에서 적군이 농성이라도 하면 큰 일이었으므로, 방어 준비를 할 시간을 주면 곤란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7월 2일 알렉산드리아를 점령한 후, 바로 그 다음날 드제(Desaix) 장군의 사단을 전위대로서, 서둘러 카이로로 진격시킵니다.  그것도 알렉산드리아에서 카이로를 향하는 지름길을 택해서 말입니다. 

초행길일텐데 어떻게 지름길까지 아느냐고요 ?  나폴레옹은 지난 6개월간 밀라노와 교황청 등 곳곳의 도서관에서 이집트에 관련된 도서를 모두 압수해서 분석할 정도로 이집트 관련 정보 수집에 정성을 들였습니다.  나폴레옹과 그의 참모진들은 나일강으로부터 알렉산드리아로 물을 공급하기 위해 건설된 운하가 있다는 것을 이미 파악하고 있었고, 이 운하를 따라 나일강에 도달할 예정이었습니다.

드제 장군이 1개 사단과 2문의 대포를 끌고 터덜터덜 사막 저쪽으로 사라져 간 이후, 나폴레옹은 알렉산드리아에서 몇가지 일로 며칠간을 더 지체했습니다.  대부분이 문맹인 알렉산드리아 주민들에게 프랑스어, 그리스어, 그리고 엉터리 사투리가 많이 섞인 아랍어로 인쇄된 포고문을 발행하여 뿌리며 주민들의 지지를 기대했습니다.  (이미 무슬림 주민들 중 상당수는 도주하고 난 뒤였습니다.)  그리고 두구아(Dugua) 장군에게 동쪽의 부유한 항구 도시 로제타(Rosetta)를 점령하게 하고, 부상당한 클레베르 장군에게 알렉산드리아를 지키게 한 뒤, 자신도 약 3만의 병력과 군대를 따라다니는 여인네들을 끌고 드제 장군이 사라져간 길을 따라 걸어갔습니다.




(저 Desaix 장군을 선두로 하여, Damanhur 또는 Demenhur를 향해 사막을 가로지르는 경로에서, 나중에 벌어지는 전투에서보다 훨씬 더 많은 희생자가 생겼습니다.  아무튼 군대는 지휘관을 잘 만나야 고생을 안하는 법입니다.)



하지만 무조건 서두르는 것이 좋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먼저, '책으로 배운 이집트'가 현실의 이집트와는 차이가 난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습니다.  이미 출발할 때부터, 예상과는 달리 나일강과 알렉산드리아를 잇는 운하가, 바싹 말라있다는 사실에 프랑스인들은 다소 의아해했습니다.  아직 8월 이전이라서, 유명한 나일강의 범람이 시작되기 전이기 때문이라는 설명을 듣고 이해는 되었습니다만, 더 중요한 것은 잊고 있었습니다.  바로 물이지요.




(나일강에 연결된 운하에 물이 없다는 것이 말이 되는 일입니까 ?  그런데 그런 일이 생기고야 말았네요.)



기원전 6세기 경 이집트를 최초로 정복했던 페르시아의 왕 캄비세스(Cambyses)도, 더 나아가 남부의 수단 및 에티오피아 지역을 정복하러 군대를 보냈다가, 그 군대가 전멸당한 적이 있었습니다.  에티오피아군이 강해서라기보다는, 물이 없어서 전멸했던 것이지요.  알렉산드로스 대왕도 시리아에서 이집트를 정복하러 오다가 물 때문에 큰 고생을 겪지요. 



(이집트의 파라오 Psamtik 3세를 사로 잡은 페르시아의 캄비세스)



(페르시아의 캄비세스가 이집트에서 거대한 모래 폭풍으로 그의 군대를 잃는 장면입니다.)



이 정도의 역사적 문헌이 있다면 당연히 물에 대해서 준비가 있었어야 할 것 같은데, 나폴레옹 생각에는 그건 다 옛날 이야기고, 요즘엔 무슬림들이 파 놓은 운하가 있으니 괜찮다고 생각을 했었나 봅니다.  하지만 이해가 안가는 부분은 현장에 와서 운하가 말라 있는 것을 보고서도 그대로 출발했다는 것이고, 더욱 이해가 안가는 부분은, 프랑스군이 항해 이전에 챙겨온 군수품 중에 개인용 수통이나 이동 물탱크가 없었다는 점입니다.




(위 수통들은 1860년대에 생산된, 미국 남북 전쟁 당시의 수통입니다.  왼쪽은 북군의 금속제 수통이고, 오른쪽은 남군의 목제 수통입니다.  당연히 나폴레옹 시대에는 목제 수통을 썼습니다.)



믿어지지 않는다고요 ?  그런데 사실이었습니다.  나폴레옹과 그의 젊은 참모들은 그리 길지 않은 군 생활을 모두 온화한 기후의 풍요의 땅 남부 프랑스 및 북부 이탈리아에서 보냈으므로, 전장에 물이 없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도저히 생각하지 못했던 모양입니다.  하긴 당시의 그 무거운 목제 수통에 무거운 물을 담아 병사들의 허리에 매달아놓으면 그 중요한 행군 속도가 느려질테니, 영국군과 달리 프랑스군은 적어도 북부 이탈리아에서는 수통을 휴대하지 않았었나 봅니다.  생각해보면 이집트와 리비아를 정복한 로마군도 개인용 수통따위는 없었지요.



(이 황실 근위대 척탄병 병사의 허리에 수통이 달려 있다면 조금 우습겠지요 ?)



이렇게 아무 준비없이 사하라 사막으로 떠난 프랑스의 대군은 정말 끔찍한 고통을 겪습니다.  심각한 갈증, 그리고 부질없이 물을 구하려 땅을 팠다가 새어나온 더러운 물을 마시고 얻은 이질과 설사, 그에 의한 더 심각한 탈수, 저 멀리 오아시스를 보고 힘겹게 달려갔더니 흔적도 없는 신기루 현상 등등이 이들을 괴롭혔습니다.  또 가끔씩 우물이 발견되면, 빈약한 우물 물이 바닥나기 전에 한모금이라도 마시려는 병사들이 마구잡이로 덤벼드는 바람에 (아마 지진이 나도 줄을 서는 일본인들 같은 심성이 혁명 프랑스군에게는 없었던 듯) 우물이 발견될 때마다 압사자가 상당수 발생했다고 합니다. 이때 어느 정도의 병력이 상실되었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한 기록이 없습니다.  다만 일부 학자들에 따르면 아마 약 1천5백명 정도의 사람들이 희생되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나폴레옹군의 기록에도 많은 낙오자 뿐만 아니라, 이런 불볕 지옥을 견디지 못한 일부 병사들의 자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낙오자들은 어찌 되었을까요 ?  그대로 말라 죽어 사막에서 미이라가 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겠으나, 일부 병사들은 그 뒤를 따르던 유목민 베두인 산적들에게 붙잡혀 온갖 능욕을 당한 뒤 본대에 합류하기도 했습니다.  무슨 능욕이냐고요 ?  남자로서 당할 수 있는 최대 치욕, 그러니까... 흠... 미국 교도소에 들어가면 흔히 덩치가 산만한 흑형들에게 당한다는 그걸 당했다고 합니다.  보통 인간은 물 없이 3일을 견딜 수 있다고 하는데, 정말 신의 가호로, 드제 장군, 이어서 나폴레옹의 본대는 알렉산드리아를 출발한지 정확하게 3일만에 디메누르(Demenhour)라는 오아시스 지역에 도착합니다.  알렉산드리아로부터 24km 정도 떨어진 곳이었지요.  까딱하면 나폴레옹의 전설이 사하라 사막의 비극적 전설로 끝날 뻔 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병력을 정비한 나폴레옹 군은 조금 더 전진하여 나일 강변에 위치한 라마니에(Rahmanie)라는 마을에 도착하여, 비로소 물 걱정에서 벗어납니다.  이 나일강변에 도착하자, 물 뿐만 아니라 강변에서 재배 중인 수박이 잔뜩 있었습니다.  병사들은 이 수박을 실컷 먹고 또 이질 설사에 많이 시달렸습니다.  프랑스군 군의관들은 이때 '호박과 수박은 익혀 먹지 않으면 위험하다'라는 조언을 날려서 병사들을 어이없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대체 수박을 어떻게 익혀 먹으라는 이야기일까요 ?  아무튼 나폴레옹은 여기서 프랑스군의 작은 포함 및 갤리선으로 이루어진 소함대가 나일강을 거슬러 날라올 식량과 탄약을 기다렸습니다.




(이들이 프랑스 병사들에게 붕가붕가를 자행한 베두인들입니다.  흔히 우리들은 중동사람 = 아랍인 정도로 여기지만, 전통적으로 중동 지방에서도 아랍인, 특히 베두인들은 야만인으로 취급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가령 십자군 전쟁 때도 십자군 기사들은 투르크 전사들은 명예로운 전사들로 생각했으나, 베두인들은 그냥 산적들로 취급했지요.  지금도 이란인들은 자신들 보고 아랍인이라고 부르면 무척 화를 낸다고 하네요.)



한편, 카이로의 통치자인 마멜룩 수뇌부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습니다.  푸른 제복에 삼각모를 쓰고 삼색기를 휘두르는 외계인들이 잔뜩 상륙했다는 소식은 카이로를 초긴장 상태로 몰아갔습니다.  특히 나폴레옹이 4천부를 인쇄하여 뿌린 포고문은, 카이로에서 나폴레옹이 의도하지 않았던 효과를 일으켰습니다.  마멜룩의 두 수장인 이브라힘 베이와 무라드 베이 사이에 갈등이 벌어진 것입니다.  나폴레옹의 포고문 내용을 요약하면, '프랑스군은 이스탄불의 오스만 정부를 무시하고 이집트에서 프랑스 상인들을 포함한 무역상들을 학대한 마멜룩 정권을 징벌하러 왔다'였습니다.  원래 이브라힘(Ibrahim) 베이는 온건파였고, 무라드(Mourad)는 강경파였는데, 온건파 이브라힘 베이가 이 포고문을 보고 '무라드 너 때문에 이런 일이 발생했다 !  그러게 내가 자중하자고 했쟎냐 !' 라며 무라드를 비난한 것입니다.  이브라힘은 무라드에게 사태에 대한 책임을 지고 프랑스군을 해결하라고 요구했습니다.  덕택에 나폴레옹은 7월 13일 전투에서, 마멜룩 전체 병력이 아닌, 무라드의 병력만을 상대로 전투를 벌일 수 있었습니다.



(이미 언급드렸듯이, 이 그림 속의 무라드 베이를 비롯한 마멜룩들은 이집트 국민들이 아니라 주로 코카서스 지방에서 온 백인종이었습니다.  특히 이 무라드는 그 스펠링을 프랑스식으로 읽으면 '뮈라'로서, 프랑스 병사들은 이 무라드와 자신들의 장군 뮈라(Murat)가 발음이 같다는 사실을 놓고 농담거리를 자주 삼았다고 합니다.  '뮈라 그 색희 언제 잡히기만 해봐 !')



무라드 베이는 이제 곧 구경도 못해본 최신 무기들로 무장한 외계인 군대와 맞서 싸워야 하는 것에 대해 겁이 났을까요 ?  그렇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정반대였습니다.  일단, 마멜룩들은 자신들이 엘리트 기병으로서, 이집트 사막에서 자신들을 능가하는 부대는 없다는 것을 자신하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그들의 기병총이나 권총 등은 대부분 영국제로서, 프랑스군의 소화기에 비해 결코 뒤떨어지는 성능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포병의 장비들은 현대식이 아닌 다소 낡은 투르크제 대포였는데, 어차피 폭발탄이 아닌 쇳덩어리 구형탄을 쏘아댄다는 점에 있어서는 그다지 큰 차이가 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원래 바람처럼 달리는 기병들은 무겁고 거추장스러운 대포에 연연하면 안되는 법이었거든요.




(이집트 마멜룩들이 보유하고 있었을 대포는 아마도 이런 투르크제 구식 대포였을 것입니다.)



게다가, 이미 마멜룩들은 정찰병을 풀기도 하고, 평소 박멸 대상이었던 베두인 유목민들에게도 손을 벌려 프랑스군에 대한 정보 수집에 열을 올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정보에 따르면 걱정할 것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들이 수집한 정보에 따르면, 프랑스군은 일단 대부분이 보병이었습니다.  원래 툴롱 항구를 출발할 때는 기병이 약 2천8백이었으나, 열악한 항해 도중 말들이 많이 죽었는지, 알렉산드리아를 출발한 프랑스군에게는 말이 200~300필 밖에 없었거든요.  그 메마른 사막을 아장아장 비틀비틀 걷는 보병들이라니 !  아니나다를까, 베두인들이 가져다준 정보에 따르면 프랑스군은 사막에서 지글지글 볶이느라 정신이 없는 상태였고, 갈증에 의한 낙오자 및 사망자가 속출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마멜룩들은 웃었습니다.  외계인이라고 해서 '프레데터'인줄 알고 놀랐더니 그냥 'ET' 였나보다.  그대로 카이로 코 앞까지 비틀비틀거리며 오도록 내버려 두었다가 기진맥진했을 때 한꺼번에 소탕하자 !




(맙소사, 정말 ET vs. Predator라는 영화가 있었네요 !!  영화 카피가 '여러분은 누가 이길 것인지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욱 보게 되는 것이지요.' 라고 되어 있네요.  대체 누가 이길거라는 걸까요 ?)



하지만 프랑스군이나 마멜룩군이나, 저들이 과연 프레데터인지 ET인지 서로를 확인해볼 필요는 있었습니다.  피라미드 전투 전의 서전은 7월 13일, 쇼브라킷(Chobrakit 또는 Shubrakhit) 이라는 나일 강변의 작은 마을에서 벌어집니다.  당시 마멜룩군의 전통은 야간 전투는 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그 전날부터 모여든 마멜룩 기병들은 프랑스군이 다 집결하지 않았는데도, 7월 12일 밤을 편히 쉬도록 내버려 두었습니다.  아침이 되자 마멜룩군은 나일 강변부터 시작하여 길게 횡대로 늘어서기 시작했는데, 그 수는 프랑스군 관측자에 따라 4천부터 1만2천까지 종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마도 실제 마멜룩 기병의 수는 4천이고, 나머지는 그 기병들의 하인으로 따라나온 농부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프랑스군이 보기에도, 그 보병들(...이라기보다는 농부들) 중 일부는 총을 쥐고 있었으나, 대부분은 칼이나 창도 아니고 몽둥이들 들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들의 위협에 대해, 나폴레옹은 각 사단을 하나의 거대한 직사각형 방진으로 구성하도록 했습니다.  이 방진은 (영국군의 경우는 대개 3열이었는데) 6열로 이루어져 있었고, 가운데 부분은 텅 비워 놓아 이 공간에 각종 장비나 군수품, 그리고 기병들이 들어가 숨어있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총 5개로 이루어진 방진들은 사다리꼴로 배치되었고, 방진의 가장 취약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 모퉁이 부분에는 대포를 배치하여 보강했습니다. 

이 보병 방진은 (보병 방진에 대해서는 1812년, 기병대 영광의 순간  참조) 그다지 획기적인 전술이 아니었고, 유럽에서는 화승총이 발명되기 전부터 이미 오래 전부터 사용되어오던 것이었습니다.  백년전쟁 당시에도 네덜란드 반란군이 프랑스 기사단에 대항하여 훌륭하게 써먹은 적이 있었고, 화승총이 발명된 이후에는 스페인이 테르치오(tercio)라는 창총 혼합 방진으로 무적의 이름을 날렸습니다. 




(거장 벨라스케즈가 그린 걸작, 1625년 네덜란드의 도시 브레다가 스페인 합스부르크 군대에게 항복하는 장면입니다.  여기에도 장창을 앞세운 테르치오 부대의 모습이 보입니다.)



잘 짜여진 보병 방진이라면 기병대의 공격에 대해 거의 99% 안전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경이 사막이었으니, 상황이 어찌 돌아갈지는 모르는 일이었지요.  특히, 잘 훈련된 보병 방진이 사막에서 기병대와 대적했다가 무참히 박살난 유명한 사례 하나를 나폴레옹도 어릴 때부터 읽어서 잘 알고 있었습니다.  케사르, 폼페이우스와 함께 로마 삼두 정치 드라마 시즌 1을 이끌었던 거물, 바로 크라수스(Crasssus)의 경우였습니다.  그는 당대 최고 수준으로 훈련된 보병 방진, 즉 전설적인 로마 군단(legion)을 이끌고 파르티아(Parthia), 즉 오늘날의 이란을 공격했다가 오늘날 터키 지방인 카르하이(Carrhae) 전투에서 전멸을 당하고 자신도 목이 잘리고 말았습니다.  이 카르하이 전투는 사실 로마군의 수자가 파르티아군보다 더 많았었고, 누구도 로마군의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았었습니다.  그러나 크라수스는 적의 이간책에 말려들어 며칠동안 물도 없는 사막을 헤매며 병사들을 기진맥진하게 만들어놓았습니다.  (프랑스군처럼 로마군도 개인 수통이 없었습니다.)  드디어 적을 만나 전투가 벌어지자, 파르티아의 궁기병들은 로마군의 방진을 향해 달려들어 화살을 퍼붓고 말을 돌려 후퇴하는 전법을 반복했지요.  처음에는 로마군의 크고 튼튼한 방패 진형에 가로막혀 그런 전법이 별 효과를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바로 그 환경, 바로 사막이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무거운 방패를 들고 굳센 보병 방진을 짜고 버티는 것은 나름 꽤 힘들고 짜증나는 일이었습니다.  보통은 그런 화살 사례를 몇번 퍼붓다보면 기병들의 화살이 다 떨어지므로, 그 다음에 방진을 풀고 전투 대형으로 전진하여 적을 쫓아버리면 전투는 승리로 이어졌지요.  그러나 파르티아군도 준비를 잘 해와서, 낙타를 통해 화살을 끊임없이 보급해왔습니다. 하루종일 기다려도 화살 세례가 그치지 않자, 이제 다급한 것은 로마군이 되어버렸습니다.  무엇보다 햇빛은 지글지글 내리쬐는데, 갈증 때문에라도 언제까지 보병 방진을 유지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보병 방진을 풀면 그는 곧 죽음을 뜻했으므로 로마군은 스스로 만든 감옥에 갇힌 꼴이 되어 버렸던 것입니다.  결국 지치고 목이 마른 로마군은 파르티아군과 협상하라고 반란에 가까운 소요를 일으켰고, 울며 겨자먹기로 파르티아 진영에 갔던 크라수스는 그 길로 목이 잘리고 말았습니다.  패닉을 일으킨 로마군도 결국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지요. 




(루브르 박물관의 크라수스 두상입니다.  당대 최고의 부자이자 돈벌레였던 그를 조롱하기 위해, 파르티아인들은 목이 잘린 그의 입에 녹인 금을 부어 넣어주었다고 합니다.)



이 쇼브라킷 전투에서도 그런 일이 벌어졌을까요 ?  아시다시피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일단 이 전투는 마멜룩 쪽이나 프랑스군 쪽이나 모두 탐색전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전투가 벌어지자, 마멜룩 기병들은 말을 달려나와 사막에서는 보기 힘든 장관인 프랑스군의 희한한 보병 방진 주위를 빙빙 돌며 기회를 노렸습니다.   마멜룩들도 이 방진이 의미하는 것을 쉽게 눈치챘으므로, 이 방진에 대해 무작정 대규모로 달려드는 바보짓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괴상한 고슴도치 진형에 조금만 더 가까이 가면 군데군데 배치된 프랑스군 저격병의 머스켓 사격이 마멜룩 기병을 한두명씩 낚아챘습니다.  게다가 모퉁이를 돌 때마다 프랑스군의 포병대가 포격을 가해 두세명씩의 기병들을 피떡으로 만들어놓았고요.  일이 이렇게 되자 짜증이 나는 것은 프랑스군이 아니라 마멜룩들이었습니다.  적에게 제대로 접근조차 할 수 없었으니까요.  어쩌면 마멜룩들이 좀더 끈기를 가지고 계속 프랑스군의 사정거리 밖에서 하루 종일 서성거렸다면 프랑스군도 그 옛날 로마군처럼 무너졌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먼저 끈기의 한계를 보인 것은 마멜룩 측이었습니다.  그들은 이 고슴도치같은 괴상한 방진에 대한 공격을 포기하고, 프랑스군이 점령하고 있던 메니에-살라메(Meniet-Salameh)라는 이름의 인근 마을을 공격하러 몰려갔습니다.  그러나 마을 건물을 장애물로 삼은 머스켓 보병들에 대한 공격은 더욱 의미가 없었습니다.  이들은 여기서도 프랑스 보병들의 일제 사격을 받고 물러서야 했습니다.  결국 마멜룩 기병들은 좌절하여 물러섰고, 수백구의 시체를 남기고 물러섰습니다.




(1815년 워털루 전투 직전의 콰트르-브라 전투에서 프랑스 기병대에 대항하여 방진을 짠 영국군의 모습입니다.  19세기 후반의 여자 밀덕이라고 할 수 있는, 레이디 버틀러의 작품입니다.)



한편, 쇼브라킷 전투는 육상 뿐만 아니라 나일강 위에서도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수륙양용전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식량과 탄약 등 무거운 군수품을 나일강을 통해 쉽게 운송하기 위해 작은 포함 및 말타 섬에서 빼앗아 온 갤리선 등을 모아서 작은 함대를 구성해놓고 있었습니다.  이에 맞서, 마멜룩군도 나일강 상류로부터 대포를 장착한 대형 보트들을 몰고 내려와 나일강 위에서 수전을 벌였던 것입니다.  실은 쇼브라킷 전투 자체도, 육전보다는 수전이 먼저 벌어졌다가, 그것을 응원하기 위해 육군 부대들이 출동했다가 대규모 전투로 발전했던 것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의 정식 보고서에 따르면 이 미니 해전에서 프랑스 포함들이 발사한 포탄만 1500발 정도였을 정도로, 상당히 격렬한 전투였습니다.  하지만 육상 전투의 전황이 프랑스군의 일방적인 우세로 끝났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프랑스 수군(?)은 여기서 포함 2척과 갤리선 1척을 빼앗기는 등 꽤 고전을 치릅니다.  무엇보다 마멜룩 수군의 군함 수나 병력이 더 많았던데다, 특히 마멜룩들은 강변에도 여러 문의 구식 대포를 포진시켜 놓고 여기서 프랑스 수군을 행해 포격을 가했기 때문입니다.  이 나포된 포함들에 탔던 프랑스 병사들은 배가 강변에 좌초됨과 동시에 일제히 강변으로 뛰어내려 포로가 되지는 않았고, 나중에 다시 이 배들을 되찾을 수 있었으므로, 결국 이 수상전에서는 프랑스군과 마멜룩군이 무승부를 기록했다고 보는 것이 맞을 듯 합니다.

이 쇼브라킷 전투에서 마멜룩 기병들을 상대해본 프랑스군의 평가는 간단했습니다.  '이대로라면 문제없다'.  즉 이날의 전투로, 마멜룩들의 전술이나 습성에 대해서는 완전히 파악이 끝났고, 전통적인 유럽식 보병 방진이 사막의 마멜룩들에게도 잘 먹힌다는 판단을 내렸던 것입니다.  한편, 마멜룩들이 이날 쇼브라킷 전투에서 프랑스군의 보병 방진에 대해 어떤 평가를 내렸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아마도 생각보다는 그다지 좌절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일단 쇼브라킷 전투에서 마멜룩 기병들이 얼마나 손실을 입었는지가 의문인데, 그에 대해서는 명확한 시체 머리수에 대한 기록도 없고, 또 그 시체들이 정말 마멜룩 기병들이었는지 아니면 그들을 보조하러 나온 인근 농부들이었는지에 대해서도 명확하지가 않습니다.  마멜룩 기병들이 프랑스 보병들을 건드리지 못했던 것 못지 않게, 저 멀리서 왔다갔다 하기만 하는 마멜룩 기병들에 대해 프랑스군도 그다지 큰 피해를 입힐 수는 없었던 것은 확실합니다.  따라서, 만약 파르티아군이 2천년 전에 로마군단에 대해 했던 것처럼, 사막 한가운데에 프랑스 보병 방진을 묶어두고 하루 종일 빙글빙글 돌기만 했다면, 어쩌면 프랑스군도 갈증에 지쳐 스스로 무너졌을지도 모르는 일지요.  또는 좀더 현대적으로 생각하여, 저렇게 빽빽히 늘어선 보병들에게는 그저 대포알이 최고라고 구식이나마 대포를 좀더 끌고 왔다면 이야기가 확 달라졌을 수도 있습니다.




(피라미드 전투를 그린 또 다른 작품입니다.  Wojciech Kossak 이 그렸습니다.)



소크라테스인지 아리스토텔레스인지가 이렇게 말했지요.  '모른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배우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 정말 부끄러운 일이다.'  마멜룩에 대해서는 딱 이 말을 해주어야 할 것 같습니다.  쇼브라킷 전투가 있은지 약 1주일 뒤, 프랑스군은 나일강을 따라 남진하여 (이번에는 나일강 덕택에 식수로 인한 고통을 겪지 않았습니다) 가자(Gaza) 지구의 피라미드가 보이는 곳, 즉 엠바베(Embabeh)라는 마을까지 도달했고, 무라드 베이의 마멜룩들은 여기서 프랑스군과 한판 뜨기로 결정했습니다.  이 곳은 카이로에서 불과 6km 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이라서, 더 이상 전투를 회피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마멜룩들이 여기서 보여준 전법은 쇼브라킷 전투에서 보여준 것과 동일한 전법이었습니다.  자신들이 자랑하는 기병들로, 아장아장 걷는 보병들을 쓸어버리겠다는 것이었지요.  대체 1주일전 전투에서 배운 것이 아무것도 없었던 것일까요 ? 

어쩌면 이것이 숙명일 수도 있습니다.  마멜룩은 근 5백년 동안을 말을 타고 이집트를 지배해온 이민족 특권 집단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현대전에서는 더 이상 기병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는 순간, 자신들의 존립 기반 자체가 허물어질지도 모르는 일이었지요.  그런 생각 때문에, 1주일전 쇼브라킷 전투와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같은 전법으로 도전했는지도 모릅니다.




(기병이 아닌 마멜룩은 더 이상 마멜룩이 아니지 !  대포나 보병 따위에게 의지할 수는 없어 !)



결과적으로 7월 21일, 엠바베에서 벌어진 일명 피라미드 전투는 쇼브라킷 전투의 확대판 정도였습니다.   프랑스군은 전과 동일하게, 사단별로 대형 방진을 만들고 그 사각형의 모서리마다  대포를 배열했으며, 마멜룩들은 대규모로 프랑스군 방진을 향해 돌격해가며 기병총과 권총을 쏘아대고는 프랑스군 전열에 충돌하기 전에 멋지게 말을 틀어 회피해 돌아나가는 전법을 구사했습니다.  탐색전 성격이 강했던 지난번과는 달리, 여기서 프랑스군을 막지 못하면 카이로를 내줘야 할 판이었으므로, 마멜룩들은 좀더 프랑스군 전열에 접근하여 사격을 퍼부었습니다.  그러나 두다리로 대지를 굳게 딛고 서서 긴 샤를롸 머스켓 소총으로 일제 사격을 가하는 프랑스 보병에 비해, 흔들리는 말 위에서 권총을 산발적으로 쏘아대는 마멜룩 기병들간의 사격전의 결과는 뻔했습니다.  거기에다 회피 동작으로 빠져나가는 마멜룩 기병들의 측면을 프랑스 포병들이 쏘아대는 캐니스터탄과 포도탄이 강타했지요. 




(르죈의 피라미드 전투 중 프랑스 보병 방진을 확대한 부분입니다.  그 앞에 포병대가 사격하는 모습이 보이시지요 ?)



적에게 아무런 피해를 입히지도 못하고, 반대로 돌격해 들어갈 때마다 많은 사상자를 내야 했던 마멜룩들은 좌절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장사를 계속하다간 끝장이라는 생각에, 그들은 목표를 바꾸어 프랑스군의 우익이라고 할 수 있는, 서쪽의 빅틸(Biktil)이라는 마을을 공격했습니다.  이 마저도 쇼브라킷 전투와 동일한 과정이었고, 당연히 동일한 결과를 낳았습니다.  드제 장군의 일부 파견대가 장악하고 있던 그 마을에서는 침착한 일제 사격이 퍼부어졌고, 역시 마멜룩들은 여기서도 시체만을 남기고 돌아서야 했습니다. 

한편, 반대편인 프랑스군 좌익은 나일강에 바짝 붙어있었는데, 여기서는 반대로 봉(Bon) 장군의 부대가 마멜룩의 우익이라고 할 수 있는 나일강변 엠바베(Embabeh) 마을을 습격했습니다.  마을을 지키고 있던 것은 일부 마멜룩과 보병들이었는데, 사실 이 보병들은 앞서와 마찬가지로 몽둥이같은 조잡한 무기로 무장된 이집트 농민들이었습니다.  당연히 일방적으로 밀렸고, 특히 나일강을 등지고 있던 특성상 도망칠 곳이 없어서, 많은 수의 이집트 농민병들이 물에 빠져 죽어야 했습니다.




(역시 르죈의 그림 확대 부분입니다.  저 원경에 물에 빠지는 이집트 보병들의 모습이 애처롭습니다.)




(엠바베 마을 지키고 있던 이집트 농민병들의 피해가 가장 컸겠군요...)



전투가 끝났을 때, 프랑스군은 불과 29명의 사망자와 약 260명의 부상자를 기록했고, 벌판에는 약 3천구의 적병이 시체가 되어 쓰려져 있었습니다.  7월 24일자로 된, 그 나일강에서 작전 중이었던 소함대의 지휘관 페레(Emmanuel Perree) 장군이 프랑스 함대 사령관 브뤼에(Bruyes)제독에게 보낸 편지에는, 프랑스군 사망자가 20명, 부상자는 약 150명이며, 마멜룩의 사망자는 1천5백명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를 바탕으로 추정해보면 전체 전사자의 약 절반 정도가 마멜룩이고 나머지는 농민병들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어쨌거나 1주일전 쇼브라킷 전투에서보다는 진짜 마멜룩 전사들의 시체 비율이 더 많았던 것이 확실합니다.  왜냐하면 쇼브라킷 전투 직후에는 마멜룩 전사들의 시체로부터 약탈한 금은 이야기가 별로 없었던 것에 비해, 이 피라미드 전투에서는 병사들의 탐욕이 어느 정도 충족될 정도로 많은 금화 및 은화를 시체들로부터 약탈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마멜룩 전사들은 전통적으로 몸에 전재산을 다 들고 싸운다고 알려져 있었습니다.  혹시 싸움에 질 경우 미련없이 근거지를 버리고 달아나 훗날을 기약하기 위한 모양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이 파리의 총재 정부에 보낸 편지에 따르면, 전장에 쓰러진 마멜룩 전사의 시체에서 최소한 3백 루이(louis), 어떤 시체에서는 무려 5백 루이의 금화를 찾을 수 있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같은 편지에서는 쓰러진 마멜룩 전사들의 시체 수가 2천구에 달한다고 되어 있으니, 이날 프랑스군은 마멜룩 시체 1구당 평균 4백 루이를 회수했다고 하면 총 80만 루이의 금화를 손에 넣은 것입니다.   전에 언급했듯이, 나폴레옹이 1797년 찢어지게 가난했던 이탈리아 방면군 사령관으로 부임하면서 파리에서 들고 온 군자금의 전체 금액이 불과 2천 루이였습니다.  80만 루이라고 하면 (설마 마멜룩들이 프랑스의 Louis d'Or 금화를 들고 있었던 것은 아니겠지만 동일한 가치의 금화라고 하면) 현재 가치로 무려 2천7백억원의 금액입니다 ! 




(1786년 주조된 루이 금화입니다. 개당 약 7.01g의 금을 함유하고 있습니다.  500 루이라고 해도 약 3.5 kg이니까, 휴대가 불가능한 건 아니겠네요.)



여기서 한가지 더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이때 피라미드 전투에 참전했던 마멜룩 기병의 수는 대략 6천으로 추정되었는데, 죽은 것이 2천이면 살아 달아난 것은 4천이고, 그 4천의 마멜룩도 1인당 비슷한 금액의 금화를 소지하고 있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즉, 달아난 마멜룩을 모두 잡는다면 (죽이든 살리든) 총 5천4백억원 어치의 금화를 추가로 얻을 수 있다는 뜻이었습니다.  게다가, 전투가 벌어진 나일강 서안 건너편, 나일강의 동쪽 강변에는 무라드 베이와 사이가 벌어진 또다른 마멜룩 수장 이브라힘 베이가 거느린 약 3만명의 군대가 추가로 있었습니다.  이들 중 마멜룩 전사의 수자가 몇명인지는 불분명했습니다만, 이집트 전체의 마멜룩 전사들의 수가 약 1만명에 달한다고 알려져 있으니, 최소한 그 중 4천명은 역시 그 정도의 금은보화를 말안장에 가지고 있는 것으로 생각되었습니다.  프랑스군은 드디어 지글지글 타오르는 사막을 건넌 보람을 찾은 듯 했습니다.  실제로 드제 장군과 그의 부대는, 신기루처럼 잡히지 않는 무라드 베이의 부대를 쫓아 몇개월 동안 나일강 상류를 헤매고 다녔지요.

다만, 이 마멜룩 전사들은 말을 탄 전사답게, 요새 도시 카이로에 들어가 성벽 안에 숨어 농성전을 펼칠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사각형으로 싸우는 괴상한 외계인들이 일방적으로 승리하는 것을 본 이브라힘은 마멜룩 전사들을 끌고 (아마 대다수를 이루는 농민병들은 내팽개치고) 시리아를 향해 도주했고, 피라미드 전투에서 패배한 무라드 베이는 패잔병들을 끌고 그대로 상이집트(Upper Egypt), 즉 나일강 상류 쪽으로 달아났습니다.  아마도 그럴 목적으로, 마멜룩들은 수중에 전 재산을 들고 다녔던 모양입니다.

덕택에 나폴레옹은 카이로에 무혈입성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비로소 프랑스군은 풍요로운 이집트의 산물을 즐길 수 있었습니다.




(피라미드 전투라는 이름에 너무 집착하면 이런 현실과 동떨어진 그림이 나옵니다.  Francois-Louis-Joseph Watteau가 그린 피라미드 전투입니다.)



아, 사족을 달자면, 이 전투의 이름이 피라미드 전투이고, 또 나폴레옹이 '저 피라미드를 보라, 저 위에서 4천년의 역사가 그대들을 내려다보고 있다 !'라고 외치며 병사들을 독려했다고 합니다만, 정작 전투가 벌어진 엠바베 평원은 가자의 피라미드와는 15km 정도 떨어져 있어서, 공기가 맑은 날도 피라미드 꼭대기 부분만 아슬아슬 희미하게 보일 정도라서, 아마 그 전투 당일날 피라미드 꼭대기라도 맨눈으로 목격할 수 있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이라는 것이 정설이라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