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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선언을 한 33인 중 천도교인 15인, 기독교인 16인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지식창고지기 2011. 11. 11. 17:30

1. 들어가는 말

 

3․1운동은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의 이름으로 독립선언서를 발표하면서 시작된 이후, 이에 호응한 각계각층의 참여로 거의 1년간 지속된 거족적인 항일 민족 독립운동을 총칭하는 것이다. 3․1운동이 일어나게 된 기본적인 원인은 일제의 한국 주권침탈과 강점에 따른 민족적 모순의 증대에 있다. 일제는 제국주의 열강의 묵인 또는 지원하에 1905년 ‘을사5조약’을 강제하여 한국의 외교권을 빼앗아 국제적으로 고립시키고 한국민의 각종 국권회복운동을 탄압하여 식민 통치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그러다가 1910년 8월 '한일합병조약'을 강요하여 한국을 완전히 강점함으로써 총독부 설치와 헌병경찰제에 의한 무단적 통치로 직접적인 식민지 경영에 착수하였다. 1910년대의 이런 무단적 식민통치는 세계 역사상 그 유례를 찾을 수 없을 만큼 가혹한 것이었다. 따라서 한국인의 불만은 극에 달하게 되었으며, 이러한 폭압과 차별의 강도가 강하면 강할수록 이에 저항하는 식민지 민중들의 반일의식과 항일 에너지는 누적되고 증폭되어 분출을 기다리게 마련이었다. 그리고 기회만 오면 독립해야 한다는 생각이 넓은 공감대를 형성하였다.

 

2. 3․1운동의 종교적 배경과 전개과정

 

 

일제 식민지배 초기의 일반적인 상황과 함께 3․1운동의 종교적 배경으로 고려해야 할 것은 이 시기 일제의 종교탄압과 민족적 종교세력의 성장이다. 일반적으로 현실에 대한 불만은 종교확산의 좋은 토양이 되며, 종교는 시련과 탄압 속에서 더 든든히 연단되어 힘을 갖는 것이다. 일제의 종교에 대한 기본적인 정책은 회유, 이용과 탄압, 박멸이라는 기만적인 이중 탄압정책이었다. 즉, 그들의 식민통치에 유익한 방향으로 종교를 회유, 이용하든가 이에 방해가 되거나 저항할 경우 가차없이 탄압 박멸하는 정책을 구사하였다. 대종교와 천도교는 정식 종교로 인정받지 못하고 유사종교로 분류되어 탄압을 받았으며, 기독교도 외래종교이긴 하지만 한말부터의 국권회복운동과 관련한 애국적 민족적 성향 때문에 일제의 극심한 탄압과 간섭을 받았다. 일제 총독부는 탄압과 함께 신도나 조합교회 등 일본 종교의 한국 포교를 지원 장려하여, 기독교를 포함한 한국인의 민족적 종교세력을 약화시키려는 견제정책도 병행하였다. 3․1운동에서 기독교․ 천도교 등 종교계가 대거 참여하여 주도한 데는, 당시의 유일한 조직체가 종교계뿐이었고 종교인의 신뢰를 바탕으로 한 신앙 공동체적 특성이 작용한 것 외에, 일제의 이러한 종교 탄압정책과도 무관하지 않다.

이러한 일제의 탄압과 박해속에서도 한국 교회는 꾸준히 성장하고 조직화되어 갔다. 한말부터 자주독립과 반봉건․반침략, 나아가서 항일의식을 분명히 나타내고 있던 기독교의 한 교단이 전국적인 조직을 결성하였다는 것은 민족사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즉 일제의 침략으로 국가와 사회의 여러 가지 조직이 와해되는 1910년 전후에 전국적인 교단조직을 가짐으로써 민족적 종교적 역량을 편제화할 수 있었으며, 이것이 뒷날 기독교 조직이 3․1운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는 통로 구실을 하였던 점과 무관하지 않다.

 

 

1860년 최제우는 동학이라는 새로운 종교를 창도하였는데 그는 접주제도를 마련하여 보다 조직적으로 포교에 임하게 되었으며, 2대 교주가 된 최시형은 신도들을 모아들이고 교단조직을 정비하는데 진력하게 되고 동학이 전국으로 펴져나가는데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 최시형은 이러한 동학의 교세를 발판으로 교조의 억울한 죽음에 대한 교조신원운동을 전개하였는데, 이것은 당시 우리 나라를 침략하려는 외세에 반대하는 반외세운동으로, 그리고 다시 동학 혁명으로 발전하였다. 처음에는 관리의 폭정에 항거하는 수준이었지만, 곧이어 반외세, 반봉건, 제폭구민의 기치를 들고 궐기하였다. 일본군의 침략사실을 알게 된 최시형은 전국의 모든 동학교도들에게 총동원령을 내려 일본군과 일전을 벌이게 되었다. 전국에서 모여든 동학군의 숫자는 수십만에 달했지만, 일본군의 우세한 화력에 밀려 패하였다. 그리하여 전봉준을 비롯한 동학의 지도자들은 모두 처형되었으며, 교조인 최시형도 1898년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3세 교조 손병희를 중심으로 다시 뭉치기 시작한 동학은 1900년대 초에 이르러 교단의 기틀을 새로이 형성해 나갔다. 1905년 말 손병희는 동학을 천도교로 새롭게 교단을 정비해 나갔으며 1911년 당시 천도교의 신도수는 300만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3․1운동 계획은 천도교측과 기독교측에 의해 거의 같은 시기에 각각 별도로 진행되고 있었다. 3․1운동의 준비단계에서는 이렇게 기독교측과 천도교측에서 각각 추진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1919년 2월 초순에 이르자, 양측에서는 이 운동을 거족적인 차원으로 끌어올리기 위해서 연합전선을 펴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판단하고 의견 교환이 오가기 시작하였다. 연합을 위한 좀더 적극적인 움직임은 천도교측에 의해서 이루어졌던 것 같다. 천도교측의 운동계획자들은 기독교측의 몇몇 운동계획이 구체화되어 가는 것을 파악하고 연합운동을 서두르게 되었다. 양측에서는 3회 정도의 회합을 가진 후에야 제휴에 성공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양측에서는 몇가지 사전 준비상의 책임을 분담하기로 합의하여 기미독립선언에 이르렀다.

 

3. 기미독립선언을 한 천도교인과 기독교인은 무엇을 의미하나?

 

 

천도교와 기독교의 국내외의 조직이 3.1운동을 국내 전지역으로 확산시키는 것은 물론 국제화시키는 데에도 커다란 역할을 감당하였다. 이 점은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의 민족대표 가운데 16명이 기독교인이었고, 15명이 천도교인, 2명이 불교인 이었다는 점에서 3.1·운동의 전개 과정에서 종교의 역할이 그 조직력을 축으로 크게 활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3.1운동의 전국적 확산되는 단계에서 천도교와 기독교의 역할과 관련시켜 보면 대체로 다음과 같이 설명될 수 있다. 즉 교회나 기독교계 학교가 있으면 대부분 기독교인들이 주동이 되어 만세운동을 주도하였고, 그곳에 천도교회가 있으면 기독교인과 천도교인이 제휴하여 만세 운동을 일으켰으며, 기독교회나 기독교계 학교가 없는 지역에서는 천도교회 단독으로 혹은 유생, 농민들이 중심이 되어 만세운동이 일어났던 것으로 보인다.

 

 

3.1운동의 전체적 역량의 20퍼센트 이상이 당시 한국 인구의 1.3퍼센트에 불과한 기독교인들에 해서 추진되었다. 당시 천도교인은 명부에 등재된 수가 300만명 가량이라고 하여 숫자적으로 기독교인의 거의 10배에 해당하였으나 그 민중 동원 역량은 기독교에 미치지 못하였다. 여하튼 3.1운동에 바친 천도교인들과 기독교인들의 민족적 정열과 항일투쟁은 매우 놀라운 것이었다. 이것은 한말 천도교와 기독교의 전래 때부터 성장시키기 시작한 반봉건적 사회개혁 의지와 반외세적 민족 자주의식이 항일 민족의식으로 결집, 발전한 데서 가능하였다. 3․1운동은 독립선언문에 나타난 비폭력 정신으로 볼 때 일부 종교적 색채가 보이는 듯하나, 분명히 종교운동은 아니다. 그러나 여기에 참여한 종교인들은 민족독립운동에 행동으로 뛰어 들었다.

 

 

기독교인에게 있어서 3․1운동 참여의미는 그들의 종교적 신앙심은 민족의식을 강화시켰고, 민족의식은 신앙심을 더욱 심화시켰으리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일제 강점하의 고난 속에서 연단되고 심화된 불가분의 신앙과 민족의식은 민족독립의 기회가 도래하였을 때 밖으로 표출되어, 비록 하나님 나라에 소망을 둔 기독교인들이라 할지라도 민족을 위해서 대규모의 독립운동을 계획하고 자발적으로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천도교인에게 있어서도 3․1독립운동은 후천개벽, 보국안민이라는 천도교의 이념이 적용된 민족운동이었다. 3․1운동은 외세를 물리치고 민중들의 자치를 실현하려한 동학혁명, 그리고 보다 발전된 나라를 만들기 위한 개혁과 신 문화운동을 잇는 민족의 자주독립을 추구한 것이었다. 3․1운동은 천도교와 기독교가 주축이 되었지만, 전 민족이 참여하는 민족투쟁이었다. 민족의 이름으로 종파를 초월해서 독립운동을 했다는 것은 인류 역사에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없는 사건이다.

 

4. 나가는 말

 

 

천도교와 기독교의 3․1 운동의 제휴과정에서 나타난 문제점은 거국적인 항일운동을 앞두고, 천도교측과의 제휴에 소극적인 자세를 취한 기독교 지도자들의 자세이다. 어떤 지도자는 기독교 교리상 천도교와는 부합할 수 없으며 또 지금까지 양교간에 아무 교류가 없어 행동 통일에 원할을 기할 수 없다는 것을 이유로, 어떤 사람은 천도교의 위험성을 들어 반대하였다고 하며 이로 인하여 한 때 천도교측과의 제휴가 어렵게 된 적도 있었다고 한다. 물론 당시 근본주의와 정교분리의 신학 교육을 받아 극단적인 보수주의의 입장을 견지하고 있던 이들 기독교 지도자들의 고민은 인정하더라도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한 민족적 대사를 두고 편협한 분리주의를 내세우는 것을 예나 지금이나 한국 기독교가 민족 앞에 갖고 있는 떳떳하지 못한 일면이라고 본다. 기독교인으로서 종교 다원주의는 허용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국가적 큰일을 당해서는 한 민족이라는 차원에서 서로 협력할 수 있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이 기미독립선언을 한 천도교인과 기독교인이 의미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자료출처 박철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