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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가 본문 접근에서 범하기 쉬운 오류들 ①

지식창고지기 2011. 11. 12. 19:38

정창균 교수

합동신학대학원 대학교, 설교학

 

교인들 변화 없어 좌절에 빠지는가
 
서론적 논의:교리를 살리는 길


1. 변하지 않는 교인들과 좌절에 빠진 설교자들
설교자들을 가장 지치게 하고, 좌절하게 하는 현실은 우리의 설교로 교인들이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에, 다음 사항들을 점검해 보야야 한다.
첫째, 변화는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다만 우리가 원하는 시간에, 우리가 원하는 장소에서, 우리가 원하는 방식으로 일어나고 있지 않는 것뿐이다.
둘째, 우리의 설교를 들은 모든 사람이 다 변하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지나친 낙관임을 알아야 한다. 우리의 설교를 들은 200명 가운데 한두 사람 혹은 두세 사람이 변화를 일으키고, 그렇게 변한 소수의 사람들이 결국 큰 일들을 감당하게 되는 것이다.
셋째, 왜 내 설교로는 사람이 변하지 않는가를 고민하지 말고, 어떻게 하면 내 설교로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을까를 고민해야 한다. 긍정적인 고민은 우리의 설교에 변화를 이루어낼 것이다.
넷째, 우리의 설교로 우리 자신이 얼마나 변하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우리 자신을 변화시키지 못하는 설교는 다른 사람도 변화시킬 수 없다. 그러므로 설교자가 먼저 자신이 설교한대로 살아내기를 힘써야 한다. 그러면 우리의 설교로는 교인이 변하지 않아도, 우리의 설교로 변하는 우리로 말미암아 교인들이 변하기를 시작할 것이다.
다섯째, 왜 나의 설교로는 사람이 변하지 않는가라고 탄식하는 것이 나의 양심과 나의 그 말을 들으시는 하나님 앞에서 전혀 거리낌이 없을 만큼 그 설교에 전력을 기울였는지 다시 한번 살펴보아야 한다. 혹시, 내 양심과 하나님은, ‘그런 식으로 준비했으니 그 설교 듣고 사람이 변하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하지 않는지….


 2.교회의 동아리화 혹은 클럽화 현상과 설교
 포스트모던으로 특징지워지는 이 시대 교회들이 드러내는 두드러진 현상가운데 하나는 교회의 동아리化, 혹은 클럽化 현상이다. 이러한 추세 가운데 점차 설교는 목회에 있어서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닌 것이 되고, 설교는 동아리 대표나 클럽 대표를 중심으로 각각 깨달은 바를 함께 나누는 큐티 나눔(QT Sharing) 차원의 것으로 대체되거나 혹은 목회자로부터 미리 전달받은 바를 나름대로 함께 나누는 전달 교육의 차원에서 머무르게 될 가능성을 내포하게 되었다.
교회는 분명히 그 안에 친목과 동아리와 클럽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어야함이 사실이지만, 그러나 교회가 동아리이거나 친목클럽인 것은 아니다. 교회는 개인의 선호나 취향에 따라 모이는 기능 단체가 아니라, 진리가 선포되고, 진리에 대한 공동체적 고백이 이루어지고, 진리로부터 자유와 생명을 누리고, 진리의 권위가 인정되는 진리 공동체이다. 그리고 그러한 일들이 교회 안에서 지속적으로 그리고 일관성 있게 이루어지도록 하는 결정적인 역할이 설교가 감당해야 하는 몫인 것이다.


3. 우리를 그 교회의 설교자로 세우시는 성령님의 의도
이 시대 목회 환경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자료의 풍성함이다. 그리고 그 자료들의 뛰어난 완성도이다. 거의 모든 자료들이 아무런 보완이나, 보충없이 있는 그대로 각자의 목회현장에서 곧바로 사용할 수 있도록 완성도가 갖추어진 자료들이다.
 그러나 특히 설교와 관련하여서는 당장은 효과 있는 이러한 자료들의 사용이 장기적으로는 설교자 자신에게 그리고 교인들에게도 매우 위험한 요인이 될 수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성령께서 나를 그 강단에 세우신 의도는 어찌되었든 그 교회 교인들은 나를 통하여 말씀을 듣게하시려고 그렇게 하신 것이다. 비록 부족할찌라도, 비록 다른 분들의 설교나 설교 자료들에 비하여 효과가 덜해 보일찌라도 우리 교인들에게는 나를 통하여 말씀하시고자 하신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감상용으로, 혹은 감동용으로 인터넷이나 방송의 설교들을 들을 수는 있겠지만, 그러나 그 교인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그 교회의 설교자인 나 자신이 고민하고, 몸부림치고, 기도하면서 준비한 그 메시지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것이 성령께서 나를 그곳에 세운 의도이다.
*이 내용은 지난 5일 오후 1시 30분 성결대학교 신유관에서 가진 신학대학원 추계학술세미나에서 발제한 내용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