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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시대 홍수심판 사건과 기독교 세계관

지식창고지기 2012. 1. 13. 09:49

노아시대 홍수심판 사건과 기독교 세계관
노천상 목사

1. 들어가는 말
우리시대는 다양한 대중 매체의 발달로 인해 많은 부분에서 정보의 격차가 해소되었다. 이와 함께 대중 매체의 영향력은 날이 갈수록 확대되고 있으며 사람들의 사고를 지배하고 있다. 또한 이러한 매체들로 인해 이제는 공간적 차이나 지리적 거리가 무의미 할 정도로 전 세계가 이웃과 같이 가까워져 있다. 사람들은 이런 환경 속에서 대중 매체에 대한 의존도가 점점 심해지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매체들을 통해서 전파되는 세속적 가치관이 역사상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광범위한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더욱이 이런 매체들을 통해서 전 지구적인 이벤트가 정치, 경제를 비롯하여, 문화와 스포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이슈들을 제시하며 홍수처럼 범람하고 있다. 이러한 대형 이벤트들은 대중 매체들의 힘을 이용하여 세상의 가치관과 세계관들을 밀물처럼 쏟아 내고 있다. 그래서 그러한 세계관들이 사람들의 사고와 삶을 장악해 들어가고 있다. 이러한 홍수 속에서 현대인들은 자신의 인생의 목적과 의미를 상실한 채, 현세적이고 유물론적이며 쾌락추구적인 세계관을 따라 정처 없이 표류하고 있다.

더 심각한 것은 교회가 이러한 사회 문화 현상 속에 담겨져 있는 위험을 직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러한 대중 매체들을 통해 전파되는 대형 이벤트에 함께 열광하거나, 그들의 메시지들을 여과 없이 전달하거나, 묵인하고 있는 실정이다. 현세적이고 유물론적이며 쾌락주의적인 이 시대의 세계관이 대중 매체들과 전 지구적인 대형 이벤트들 속에 교묘히 감추어져서 교회 안으로 스며들고 있음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매체들을 통해서 들어오는 세계관들은 교회와 성경적 세계관에 반할 뿐만 아니라, 교회를 무너뜨리고 성도들의 마음과 삶을 마비시키며 타락시키는 아주 위험한 것들이다.

이런 세속주의에 포로가 된 우리시대는 노아시대와 이런 면에서 비슷한 상황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창세기 6, 7, 8장에 나타난 노아시대에 사람들의 타락상과 홍수 심판, 그리고 노아와 그의 일곱 식구의 구원 기사를 통해서 우리시대를 점검해 볼 수 있다. 먼저 본문을 간단히 개관하고 그 구속사적 의미와 기독교 세계관적인 적용과 말씀 사역자들의 시대적 사명을 제시하고자 한다.

2. 본문 개관
6:1-2절은 노아 시대에 사람들의 타락상을 지적하신 것이다.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들”이란 5장에서 소개된 아벨 계통의 복 받은(선택 된) 백성들을 가리킨다. “사람의 딸들”이란 가인 계통의 유기된 백성의 계열에서 난 여자들을 가리킨다. 하나님은 선택된 하나님의 백성들이 유기된 백성의 여자들과 통혼하는 것을 큰 죄악으로 여기셨다.

6:3절은 여호와께서 모든 사람을 지면에서 진멸하실 것을 예고하신다.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 하리니” 이 말씀은 여호와께서 그 당시의 모든 사람을 진멸하실 것을 뜻한다. 이 땅에 살고 있는 모든 인류는 하나님의 힘을 입어 살며 기동하는 것이다(행 17:28). 그런데 하나님의 신(영)이 함께 하지 아니하시면, 사람은 곧장 영혼과 육의 분리가 발생하고 육신적 사망이 오게 된다(약 2:26).

진멸의 원인은 그들이 육체임으로 범과함이었다. 여기서 육체가 되었다는 의미는 단순히 육신적 차원의 활동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모든 활동이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고 자신의 타락한 육체의 정욕대로 살았음을 말한다. “그러나 그들의 날은 일백 이십년이 되리라”이는 진멸하실 때까지의 유예기간이 120년이라는 뜻이다.

6:4절은 하나님의 엄중한 경고가 있은 후에도 그들은 하나님을 배반하고 막무가내로 통혼하였고, 그렇게 해서 태어난 자들이 특히 체격이 크고 용사가 많았고, 특히 고대의 유명한 자였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이렇게 하나님의 뜻을 무시한 사람들의 세상적인 형통은 더 많은 사람들이 죄악에 빠지게 했다. 따라서 그들의 죄악은 더 담대해졌고, 더 권장할 만한 것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6:5-7절; 5절은 그 당시 사람들의 죄악상을 직설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당시 사람들이 어떤 괴악하고 특별한 죄악들을 많이 행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으나, 지금 우리시대의 사람들처럼 하나님이 없이 잘 살고자 하는 일상적인 삶을 다 포괄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하나님이 없는 사람들은 고대나 지금이나 그들의 일상적인 활동이 아무리 선하고 자신들의 윤리 도덕의 기준에 따라서 살았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이런 평가밖에는 받을 수 없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따라서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의 마음에서 나오는 모든 것은 항상 악할 뿐임을 우리는 알아야한다. 6절은 5절의 사람들의 죄악상의 어떠함이 잘 표현된 것이다. 하나님께서도 무슨 계획이 무산되거나 역부족의 경우가 발생하거나 시행착오를 거치는 경우로 인해 한탄하시고 근심하시는 일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이는 다만 사람들의 죄악의 관영의 상태가 극에 달했음을 시사해 주시기 위하여 인간 감정의 표현을 사용하신 것이다. 이를 우리는‘신인동형동성론적 표현’이라고 한다. 반복해서 7절이 이를 잘 반영한다. 하나님은 사람들의 죄로 말미암아 사람들은 물론 육지에 있어 코로 호흡하는 모든 것을 진멸하실 것을 예고하신다.

6:8-10절;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모든 인간이 육체(영적으로 죽은 인간)임으로 범죄 하는 중에서 노아는 하나님께 특별한 은혜를 입었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노아를 간섭하시고 인도하시자, 그는 의인이고 당세에 완전한 자며,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성경은 강조한다.

6:11-22절; 11-13에서 다시 하나님은 그 당시 사람들의 하나님 앞에서 패괴함과 강포가 땅에 충만하였음을 지적하고 이로 인하여 홍수로 그들을 진멸하실 것을 예고하신다. 동시에 14-21절에서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노아와는 구원의 언약을 세우신다. 또 실제적인 구원의 방도로써 방주를 지을 것을 지시하신다. 방주를 완벽하게 지을 수 있도록 그것의 크기, 재료, 제도 등등을 일러주신다. 또 노아와 함께 보존될 사람들과 혈육 있는 생물들을 정하여 주셨다. 방주 안에 있는 동안 방주 안에 있는 사람들과 생물들을 위한 식물을 저축하게 하셨다. 22절에 노아는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다.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고,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었던 것이다(히 11:7).

7:1-5절; 이제 드디어 진멸의 시간이 다가왔다. 홍수 심판이 시작되기 7일전에 여호와께서 노아에게 방주에 들어가서 홍수로 인한 진멸 중에서 보존될 사람들과 생물들을 다시 지정하셨다. 그 세대에 하나님 앞에서 노아의 의로움이 노아와 그의 온 집으로 하여금 홍수 심판을 면하게 했다. 홍수는 하나님께서 40주야를 땅에 비가 내리게 하심으로 발생했다. 노아는 역시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다. 그런데 7장 2절의 “너는 모든 정결한 짐승은 암수 일곱씩, 부정한 것은 암 수 둘씩을 네게로 취하며”와 6장 20절의 “새가 그 종류대로, 육축이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것이 그 종류대로 각기 둘씩 네게로 나아오리니”가 숫자에 있어서 차이가 난다. 그러나 전자는 방주에 들어갈 각 종류별 총수를 말씀하신 것이고, 후자는 방주에 들어갈 지구상의 모든 생물이 노아를 향해 나아오는 형태를 말씀하신 것이다.

정결한 짐승은 암수 일곱씩이고 부정한 짐승은 암수 둘씩 네게로 취하라고 지시하셨는데, 이의 구별은 정결한 짐승은 하나님께로 번제로 드릴 수 있는 것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후에 번제로 드릴 수 있게 또 종족 보존 용도로 충분히 취하게 하신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부정한 짐승은 제물로 쓰일 수 없는 것으로써 이것은 다만 종족 보존용도로 쓰시려고 방주 안에 취하여 들이게 하셨다(창 8:20).

7:6-24절;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예고하신 대로 모든 것이 다 되어졌음을 말해준다. 홍수는 노아의 나이 육백세 때 발생했다. 노아가 아들들과 아내와 자부들과 함께 홍수를 피하여 방주에 들어갔고,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과 새와 땅에 기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명하신대로 암 수 둘씩 노아에게 나아와 방주로 들어갔다. 그리고 7일 후에 홍수가 땅에 덮이게 되었다. 땅에서 솟아오르는 샘들과 하늘에서 40주야 동안 비가 쏟아짐으로 홍수가 되었다. 13-16절은 6-12절을 재차 설명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예고하신대로 되었음을 강조한다.

홍수가 나자 방주는 물 위에 떠 다녔으며, 물이 땅에 더욱 창일하자 천하에 높은 산이 다 덮였는데, 가장 높은 산 위에 덮인 물 깊이는 십 오 규빗, 즉 7.5m이었다. 그러므로 지구상 어느 한 곳도 물에 덮이지 않은 곳은 없었다. 이로 인해 땅위에 움직이는 생물이 다 죽었으니 곧 새와 육축과 들짐승과 땅에 기는 모든 것과 모든 사람이었다. 물은 150일 동안 땅에 창일하였다.

8:1-5절; 하나님께서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는 모든 들짐승과 육축을 기억하사, 바람으로 땅 위에 불게 하시자 물이 감하였고 깊음의 샘과 하늘의 창이 막히고 하늘에서 비가 그쳤고, 물이 땅에서 물러가고 점점 물러가서 150일 후에 감하고 7월 17일에 방주가 아라랏 산에 머물렀으며 물이 점점 감하여 10월 1일에 산들의 봉우리가 보였다.

8:6-12절; 노아는 까마귀와 비둘기를 내어 보내어 땅의 물이 감한 여부를 알아 볼 수 있었다.

8:13-19절; 홍수는 노아가 600세 되던 해, 2월 17일에 시작하여 이듬해 정월 1일에 물이 지면에서 걷히고 완전히 끝났다. 홍수의 기간은 10개월 13일 동안이었다. 그리고 2월 27일에 땅이 완전히 마르자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방주에서 나올 것과 방주 안에 있었던 모든 것들을 이끌어 낼 것을 명하셨고, 이것들이 땅에서 생육하고 번성하게 될 것을 약속하셨다. 그래서 노아는 방주에서 나왔다.

8:20-22절; 노아가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 중에서와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취하여 번제로 단에 드렸다.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않으실 것과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항상 어려서부터 악할 뿐인 인간들을 일정기간 동안, 역사의 종결 시까지는 보존하실 것을 약속하신다.

3. 노아 시대 홍수 심판 사건의 구속사적인 의미
1) 노아 시대 홍수 심판의 원인: 인간의 타락과 죄의 관영이 하나님의 홍수 심판을 초래하였다(6:1-7). 특별히 선택된 계보의 사람들(하나님의 아들들)이 유기된 계통의 사람들의 딸들(사람의 딸들)과의 통혼이 가장 큰 죄악이었고, 이것이 다른 모든 죄들을 불러들인 것이다. 그리고 다른 죄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언약과 말씀을 버린 것으로부터 발생하는 이차적인 죄악들이다. 환언하면 하나님의 아들들이 세상의 딸들을 택하여 결혼했다는 것은 세상의 가치관을 철저하게 수용했음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백성은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해서는 안 된다(고후 6:14). 멍에를 함께 한다는 것은 세상의 가치관을 공유하면서 그들과 같은 목표를 갖고 같은 방식의 삶을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세상 어떤 일보다 결혼만큼 하나의 가치관과 세계관으로 철저하게 통합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사람들이 사람의 딸들과 아무 거리낌 없이 통혼했다는 것은 그 만큼 세상 사람들과 차이가 없이 살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로 인해서 당시의 세상에는 죄악이 관영하게 된 것이다. 여기서 죄악이 관영하다는 것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특별하고 괘악한 죄악들이 만연 했던 것뿐만 아니라, 하나님 없이 자신들의 힘으로 이 땅에 낙원을 건설하고자 하는 모든 인본주의적인 노력들을 다 포괄한다고 볼 수 있다(마 24:37). 즉 인간이 하나님 없이 인본주의적인 노력으로 잘 살겠다고 하는 모든 노력들(윤리도덕 선행을 포함하여 문화를 발전시키고, 학문을 발전시키는 모든 것 등)이 다 여기에 포함된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시대에도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계시해 주신 세계관을 거부하거나, 불신하면서 세상의 세계관을 수용하는 것이야 말로 죄악의 관영한 상태임을 알아야 한다. 자기 추구 적이고 인본주의적인 모든 노력들이 가상하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심판받을 죄임을 경고해 주는 것이다.

2) 홍수 심판의 범위: 지구 전체 온 지면에 걸친 것이었다.

3) 노아와 그의 일곱 식구는 어떻게 구원을 받았는가?

첫째로 노아와 그의 일곱 식구가 구원 받은 원인은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베푸신 은혜 때문이었다. 노아는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기 때문에 패역한 그 시대정신을 거부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의인이었고 당세에 완전한 자일 수 있었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이다.

둘째로 노아와 그의 일곱 식구가 구원 받은 실제적인 방편은 노아가 만든 방주였다. 노아는 그의 믿음에 따라 순종하는 삶을 살았는데 이것이 120여년에 걸쳐서 방주를 예비한 것으로 드러났다.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말씀과 경고를 무시하고 노아를 조롱하며 경멸하던 모든 자들이 노아에 의해 정죄를 당한 셈이며, 노아는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었다(히 11:7). 이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는 노아의 구원의 원인이었고, 노아가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한 것은 그 원인으로 말미암은 믿음의 행위였다(참조. 엡 2:8-10).

4) 노아시대 홍수 심판 사건의 구속사적인 의미
이 사건은 세상 끝 날에 있을 악인에 대한 심판을 경고함과 동시에,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인의 구원을 약속하는 것이다(벧전 3:20; 벧후 2:5; 마 24:37-39). 하나님께서는 역사의 방관자가 아니시다. 하나님은 이 사건을 통해서 천지의 대주재로서 일반은혜와 특별은혜를 베푸시며, 이렇게 섭리 하시는 중에 구원하실 자는 구원하시고, 종국에 가서 심판을 행하신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명백하게 계시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일반 은혜 언약으로 말미암아 어려서부터 항상 악할 뿐인 인간들에게 오히려 인생의 분복을 주셔서 살게 하시고, 이 세상 역사를 일정 기간 동안 존속시키시지만 정하신 때가 되면 하나님의 진리대로 되는(성경의 예언대로 되는), 심판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신 것이다. “의인은 영생의 부활로, 악인은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 5:29; 행 24:15) 그러므로 지금 우리는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경륜을 깨닫고 믿음으로 순종하는 삶을 통해서, 노아처럼 주님 오실 날을 준비해야 한다. 교회의 말씀 사역자들은 이 시대를 따라가는 배교의 흐름을 정확히 분별하여 더 늦기 전에 성경적 세계관을 회복시켜야 한다. 그래서 이 패역한 세대를 거슬러서 믿음으로 순종하도록 하나님의 백성들을 준비시켜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모든 시대 모든 사람에게 이와 같이 동일하게 심판하실 것을 보여 주시며 경고하셨기 때문이다.

4. 기독교세계관을 통해서 본 노아시대와 우리시대
우리는 노아시대 사람들의 가장 큰 문제와 죄는 하나님의 백성들마저 세상의 세계관을 수용하여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추구한 것이다(요일 2:16). 따라서 우리는 노아시대 사람들과 비교를 통해서 우리 시대의 교회와 성도들의 세계관을 점검해 볼 수 있다. 이 일은 그렇게 유쾌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영적인 전쟁은 언제나 세계관의 전쟁이었다. 우리가 기독교 세계관을 정립하여 영적으로 무장해 있지 않다면, 우리의 영적 생활은 처참한 패배의 연속일 것이다. 따라서 구원받은 성도가 하나님 백성답게 승리하며 사는 길은 세속적 세계관을 허물고 기독교 세계관을 정립했을 때 가능한 것이다.

노아시대의 선택된 사람들의 문제는 첫째로 자신들의 육신의 정욕에 따라 살았다는 것이다. 그들은“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았다(6:2). 하나님의 사람들은 이 세상의 정욕에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참된 것을 분별하여 진리를 따라 살아야 한다. 그러나 노아 시대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가치기준을 버리고, 정욕에 따라 세상의 가치관에 편승하여 살았음을 보여 주고 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영적인 정결함보다는 외형적인 아름다움과 육신적인 쾌락이 더 중요했던 것이다. 더욱이 이들은 일부일처제를 버리고, 가인의 후손 라멕처럼 중혼이나, 축첩도 서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6:2) 노아시대 사람들의 주된 죄악의 중심에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거룩한 세계관과 복된 사명을 집어 던진 채, 현세에서 육신의 정욕을 만족시키는 것을 자신의 인생의 목적으로 삼고 있었다는 것이다.

우리시대의 세상의 정신도 이와 똑같은 상황임을 재론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노아시대와 같이 오늘날의 교회에서도 이와 같은 세상의 정욕을 추구하는 것이 죄라는 인식이 점점 희박해져 가고 있다는 것이다. 더욱이 성도들이 세상 사람들과 같이 더 많은 육신적 안락과 쾌락을 즐기는 것이 마치 하나님의 축복처럼 생각하고 있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하나님의 말씀의 인도를 받기 보다는 세상의 세계관과 정욕의 부추김을 따라 사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 너무나 많다는 것이다.

둘째로, 노아 시대 사람들은 또한 안목의 정욕에 포로가 되어 있었다. 안목의 정욕이란 잘못된 가치관에 따라 사는 것의 총체라고 말 할 수 있다. 이런 사람들은 외적으로 드러나는 것들을 중요하게 여기고, 외모로 판단하며, 그것을 따라 사는 것이다. 노아시대 사람들은 육신적 아름다움을 중요시 했고, 그러기에 더 크고 웅장하고 그럴듯해 보이는 것들에 열광하는 허영심이 가득했다. 마태복음 24장에 나타난 예수님의 경고를 통해서 보면 그들은 늘 먹고 마시고 장가가는 일에만 매진했다고 하셨다. 단지 먹고 마시고 장가가는 일 자체가 죄 된 일은 아니다. 그것은 인류가 존재하기 위해서 일상적으로 하는 일인 것이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 마지막 때에 대한 경고로 그것을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의 사람들조차도 하나님 나라에 대한 자신의 사명을 망각한 채, 세상의 화려함을 추구하고, 항상 더 좋은 음식과 더 좋은 집과, 더 많은 세상의 것들을 추구하는 것에 매몰되어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즉 그들의 모든 관심은 세상을 추구하는 안목의 정욕에 사로잡혀서, 예수님께서 경고하시고 예언하신 대로 구속역사를 완성하시는 심판의 날이 다가오고 있음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노아시대 사람들은 네피림(대장부)을 당시 사회에서 중요한 인물로 여겼고, 그들을 영웅시했다. 이는 하나님의 백성들조차도 하나님보다 사람들을 더 높이고, 사람의 영광을 추구 하는 풍토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세상 사람들의 가치관을 수용하면서 더 수월하게 안목의 정욕을 채울 수 있었다면 더 빨리 그러한 죄악으로 빠져 들었을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사람들이 세상을 추구하고 세상의 영광을 얻는 것이 더 중요하고 가치 있는 일처럼 여겨지게 된 것이다. 오늘날도 교회 안에서 사람의 영광이 하나님보다 중요시되는 풍조는 이미 죄악이 관영한 상태, 즉 배교의 시대임을 반증하는 것이다. 성경은 여기서 이러한 인간적인 영웅주의는 심판의 대상되는 심각한 죄임을 경고하여 주고 있다.

우리시대의 교회는 어떤가? 우리시대의 다수의 교회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사는 거룩하고 정결함을 추구하는 열망이 점점 찾아보기 힘들어 지고 있다. 반면에 외적으로 화려하고 성공하는 그리스도인이 높임을 받는다. 또한 웅장한 예배당이나 목회자의 화려한 웅변술이나 학력과 경력 등이 과도하게 중요시 되고 있다. 이렇게 외형적 화려함을 추구하는 교회에서는 성도들이 지녀야할 영적인 아름다움과 거룩함은 실제 삶에서는 기대할 수 없는 단지 성경 안에만 갇혀 있는 힘없는 메아리일 뿐이다. 더 나아가서 교회 안에서 조차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의 원리 보다는 사람들의 주의주장이 강하고, 하나님의 능력보다 사람들의 세상적인 능력과 힘을 더 중요시하는 시대가 되었다. 이는 오늘날 개 교회를 소개하는 책자나 전도지, 그리고 인터넷 홈페이지에 잘 나타난다. 그것들의 대부분은 그 교회의 담임 목사의 학력과 경력이 다른 어떤 것보다 두드러지게 강조되고 있다. 이는 사람을 구원할 능력이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목사)로부터 나오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아무리 사람의 외적인 능력과 영광이 탁월하다 해도 그는 그 자신도 구원할 수 없는 자라는 것을 망각한 듯이 보인다. 사람의 구원과 교회의 교회됨은 오직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에 달려 있음을 우리는 명심해야 한다.

셋째로, 노아 시대 사람들은 이생의 자랑을 추구하였다. 이생의 자랑은 “그들이 용사라 고대에 유명한 사람이었더라.”(6:4)에서 볼 수 있다. 즉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해야 할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광이 아닌 자기 자신의 영광을 추구하는 것이 이생의 자랑인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힘과 능력을 자랑했고, 출신과 가족에 대한 자랑, 자신들의 성취한 것에 대한 자랑을 중요하게 여겼다.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특별한 명성이나 학위, 그리고 사회적 지위나 영향력 등을 자랑했다. 물론 당시에도 모든 사람이 그러한 지위나 영향력을 갖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회분위기가 이러한 이생의 자랑을 추구하는 것으로 몰려가면서 하나님의 사람들마저도 그들의 삶의 목적이 하나님의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생의 자랑을 더 많이 얻는 것에 집중하고 살았던 것이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그럴듯한 명분을 내걸고, 사회적 엘리트를 키우고 교인들이 사회적인 영향력을 더 많이 갖는 것이 교회의 복음 전도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처럼 떠들고 있다. 그래서 어떤 목회자들은 청소년들과 청년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회적으로 성공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심어주는 것이 자신들의 사명인양 생각하고 가르친다. 이는 매우 선한 열심으로 포장되고 있으나 하나님을 빙자하여 이생의 자랑을 추구하도록 하는 것이 아닌지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오늘날 비교적 건전하다고 하는 교회들에서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에 대해서는 비교적 죄임을 잘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사악하고 간교한 죄인 이생의 자랑에 대해서는 오히려 부추기는 것을 볼 수 있다. 따라서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이생의 자랑이 죄라는 의식마저 사라져 가고 있다. 이는 현대 교회가 무기력증에 빠져 있는 주된 원인이며 매우 고통스러운 현실이다.

5. 나오는 말 - 말씀 사역자들의 시대적 사명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의 정신과 풍조를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분별해야 한다. 그것을 달리 표현하면 기독교 세계관을 통해서 자신과 이웃과 사회와 국가를 보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말처럼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기존에 갖고 있는 세상 추구적인 세계관을 먼저 허물어야 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러한 세상추구적인 세계관이 교회에 출석한다고 해서 결코 그냥 허물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진리의 말씀으로 세상의 정신의 허구와 자기 파멸적 운명을 정확하게 보여 주는 말씀 사역자의 용기 있는 수고와 말씀을 깨닫게 하시는 성령님의 역사하심으로 되는 것이다. 그리고 성도 각자가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의 원리에 순종함으로써 뼈아픈 자기 부정의 과정을 통해서 기독교 세계관을 정립할 수 있는 것이다.

야고보는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약 4:4)고 했다.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의 정신을 수용하고 그것을 추구하는 것은 자기가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들 전부를 사실상 부인하는 것이다. 노아시대 사람들, 특히 하나님의 사람들(하나님의 아들들)은 우리시대와 같이 하나님께 대한 외형적 예배를 전적으로 부인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정신과 세계관을 지배한 것은 세상의 가치들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하나님의 경고하심과 노아의 전파에도 불구하고 자기 추구 적이며 세속적인 세계관을 고집함으로써 예기치 않은 날에 홍수로 멸망을 당한 것이다(벧후 2:5).

이 사건은 우리시대에도 큰 경고가 된다(참고. 고전 10:11). 우리시대의 교회와 성도들이, 하나님의 구속의 경륜과 하나님 나라의 윤리인 기독교 세계관을 정립하지 못하고, 세상 사람들의 세계관을 따라 세상을 추구하느라 여념이 없다. 그렇다면 노아시대와 같이 예기치 않은 날에 주께서 다시 오셔서 심판하실 때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지 못하고 멸망당하게 되는 심히 두려운 일이 발생할 것이다(마 24:37-44).

교회가 세상의 물질주의적이고 현세적이며 쾌락주의적인 반신국(反神國)적인 세계관을 수용하게 되면, 그 교회는 이미 배교의 상태에 빠져 있음을 알아야 한다. 참된 교회는 오늘날 유행하고 있는 지배적인 세상의 세계관의 허구성을 폭로해 주어야 한다(참고. 요 7:7). 그리고 그것들을 따라 살 때 피할 수 없는 자기 파멸적 결과들을 분명하게 경고해 주어야 한다. 그래서 불신자들에게는 오직 복음만이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고 현세와 내세까지 영원한 생명을 주는 진리임을 증거 해야 한다. 그리고 성도들에게는 세상의 세계관을 따라 살게 될 때의 위험을 지속적으로 경고하면서 성도들이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을 따라서 기독교 세계관을 정립하여 거룩한 길을 가도록 인도해야 한다.

우리 시대의 교회의 문제를 다양한 각도에서 조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근본적인 문제는 교회와 성도들이 기독교세계관을 정립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교회에는 나오지만 여전히 세상 추구적인 세계관에 매몰 된 채,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고 분명하게 선포하되, 한 사람 한 사람의 세계관의 변화를 목표에 두고 그것을 위해 교리적이고 체계적인 가르침이 필요하다(참조. 골 1:28-29). 따라서 교회의 말씀 사역자들이 집중해야 할 일은 바로 성경을 체계적으로 가르치고 그 진리를 실제 생활에 적용할 수 있도록 성도들을 훈련시켜야 한다. 그래서 성도들이 세상의 세계관을 거부하고 진정한 기독교 세계관을 따라 살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이것이 제대로 되어질 때 진정한 부흥이 올 것이다. 그리고 교회가 참되게 개혁되어질 것이다. 말씀 사역자들은 이 일을 위해 최선을 다하면서도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간구하는 기도를 계속 해야 한다. 왜냐하면 오직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만이 교회와 성도들에게서 참된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 2:15-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