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교회, 처음 사랑을 회복하라
요즘 우리는 교회란 무엇인가, 라는 근본적인 질문에 직면하지 않을 수 없다. 절망스럽다. 이유는 간단하다. 교회가 교회로서의 참된 모습을 보여 주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러한 질문에 우리는 절망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절망감은 혼란스러움으로 진화한다. 교회의 모습에 대한 혼란스러움이다. 비정상적인 모습이 정상적인 것처럼 활개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럴 때일수록 더욱 성경으로 돌아가 성령이 하시는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교회의 본질에 대한 가장 적절한 답을 성경 안에서만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특별히 요한계시록 2-3장의 과거 역사에 실존해 있던 일곱 교회를 향해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경청함으로써 그 해답을 찾아보는 것은 우리에게 신선한 통찰력을 제공해 줄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에베소 지역에 있는 교회를 향해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어 보자.
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예수님
에베소교회를 향해 말씀하시는 예수님은 '오른손에 일곱 별을 가지고 금 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로 묘사되고 있다(1절). 계 1:20에 의하면 일곱 별이란 일곱 교회의 천사들(새번역)이고,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들이라고 해석된다.
예수님은 천상적 존재뿐만 아니라 지상의 일곱 교회들을 주관하시는 분이시다. 우주적인 교회 공동체뿐만 아니라 구체적으로 지역 교회인 에베소교회를 주관하는 분이시다. 예수님은 교회의 주인이시다. 교회에 대한 예수님의 소유권을 대신할 존재는 아무도 없다. 그러므로 어떤 한 개인이나 집단이 교회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다.
교회는 그 소유권이 예수님께 있으므로 한 개인의 뜻이나 계획이 관철되도록 하는 대상이 아닌 것이다. 소유권이 예수님께 있다는 것을 인식한다면 그 인식은 교회 공동체를 이루는 구성원들의 의견을 존중하는 것으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
말씀하시는 예수님
그분이 에베소교회를 향하여 말씀하신다.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은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하시는 형식을 취한다. 그것은 에베소교회를 향해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권위가 하나님과 동등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권위 앞에 선 에베소교회 성도들이 느꼈을 두려움을 짐작할 수 있다.
교회에 대한 소유권에 대한 배타성처럼 교회를 주관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의 권위를 능가할 존재는 교회 안에 존재하지 않는다. 담임목사도, 당회도 이 권위를 대신할 수 없다. 모두가 이 권위 앞에 두렵고 떨림으로 서야 할 것이다. 만일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 권위를 대신하려고 한다거나 위임된 권위를 남용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과 예수님께 도전하는 격이 되고 마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이 말씀의 권위 앞에 엎드려야 할 존재에 예외가 있을 수 없다. 대부분의 경우에 이 말씀을 전하는 주체가 강단에서 목사이므로 목사 자신은 이 말씀을 들어야 하는 대상에서 예외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 에베소교회를 향하여 선포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에는 목사 자신도 예외일 수 없다. 목사도 그 말씀 앞에 엎드려야 하는 존재인 것이다.
그런데 슬픈 것은 성도들이 목사에 반대하는 것은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이라고 하지만 정작 목사 자신은 온갖 병폐적 행위를 일삼으면서도 하나님의 권위를 손상시키는 존재라는 점에 있어서는 매우 너그럽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목사들 자신은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는 입장이 아닌지를 심각하게 되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교회 안에서 어떤 중요한 일을 결정할 때 목사의 독단적 결정은 예수님의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될 수 있다. 예수님의 권위 앞에 동등한 입장에 서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예수님께서 교회 공동체를 통해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가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예수님의 권위를 인정하는 모습일 것이다.
모든 것을 아시는 예수님=칭찬하시는 예수님
예수님은 에베소교회 공동체의 모든 것을 아신다고 하신다(2절). 일곱 금 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예수님께서 그 교회를 모른다고 할 수 없다. 이 말씀에 비추어 볼 때 예수님은 분명 한국교회를 알고 계실 것이다.
예수님께서 알고 계신다고 할 때 한쪽은 환희와 기쁨, 그리고 다른 한쪽에서는 두려움과 부끄러움으로 확연하게 갈리고 말 것이다. 한국교회는 어떠할까? 이 대목에서 다들 '나는 예수님께 기쁜 일을 했으니 부끄러울 것이 없다'고 할 것이다.
기준이 없어 보인다. 누구든지 자신은 예수님께 칭찬 받을 일 했다고 만천하에 외쳐 댈 수 있을 것이다. 누구는 초호화 초대형 예배당을 건축해 놓고 나는 예수님 앞에 자랑스러운 일을 했다고 감격해 할 것이다. 그래서 그 기준을 성경을 기준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다.
예수님께서 아신다고 한 것은 무엇일까? 먼저 그것은 그들의 행위, 수고와 인내이다(2a). 이것은 3절에서 쉽게 풀어서 반복 언급되고 있다. 먼저 '인내'는 '너희가 인내를 가지고 있다'라는 문구로 반복되고. '수고'는 '나의 이름을 인하여 견디다'라는 말로 반복된다. 그리고 그들의 수고는 '피곤해 하지 않는다'는 말과 연결된다(우리말 번역에 '게으르지 않다'라는 번역은 '피곤해 하지 않다'라는 것으로 번역하는 것이 적절하다. 이 두 단어는 서로 동일한 어근을 가지고 있다. '수고'라는 단어에 해당되는 원어를 음역하면 '코포스'이고 '피곤하다'는 단어의 어근의 음역은 '코피아오'이다).
에베소교회의 성도들은 주님을 위해 수고했지만 피곤해하지 않았다. 끝으로 2절의 '행위'는 3절의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었다'라는 것과 연결된다. 그들의 행위는 주님의 이름을 위해 세상의 도전 앞에 끝까지 버티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행위, 수고 그리고 인내는 교회에서 하는 일들을 두고 하는 표현들이 아니다. 그것들은 예수님 앞에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초래되는 모습들에 대한 표현들이다.
2a와 3절의 이러한 의도적 연결의 중간에 2b에서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 자칭 사도라 하는 자들을 시험하여 거짓된 것을 드러낸 것을 말하고 있다. 이것은 A(2a)-B(2b)-A'(3절)의 구조를 형성한다. 곧 에베소 성도들의 행위와 수고와 인내의 핵심에는 바로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하고 자칭 사도라 하는 자들을 시험하여 거짓된 것을 드러낸 그들의 행위가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그들의 행위와 수고와 인내 가운데 그래도 평가할 만한 것들이 바로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않고 자칭 사도라 하는 자들을 시험하여 거짓된 것을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악한 자들'이란 도덕적으로 악한 자들이라기보다는 바로 이어져 나오는 '자칭 사도'라 하는 자들을 가리키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자칭 사도라 하는 자들은 다른 말로 '거짓 사도'라고 불리기도 한다. 이러한 자들은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다(참조 고후 11:13-15). 그러므로 분별하기가 매우 어렵다.
그들은 거짓된 교훈을 가지고 교회를 어지럽히는 자들이다. 에베소교회 성도들은 바로 이러한 자들을 시험하여 밝혀냈을 뿐만 아니라 용납하지 않았다. 바로 그들의 수고에는 분명한 목표가 있었다. 그것은 거짓된 가르침을 걸러내고 교회의 순수성을 지켜내는 것이다. 에베소교회의 성도들은 결코 쉽지 않은 그 일을 해냈고 예수님은 그들의 수고를 아시고 아낌없이 칭찬하신다.
우리 한국교회는 이처럼 에베소교회가 했던 일 가운데 교회의 순수성을 지켜 내기 위해 잘못된 가르침을 시험하여 분별해 내야 하는 것이 시급하다. 자칭 사도라 하는 자들을 요즘 말로 바꾸어 말하면 자칭 목사라 하는 자들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들은 거짓된 가르침으로 교회를 어지럽히고 있다.
특별히 기독교 TV에 나와 설교하는 목회자들 중에 어떤 경우에 교회를 어지럽히는 가르침들이 난무한다. 이러한 현상의 결과는 당장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다. 나타나도 눈에 띄지 않을 수 있다. 그렇다고 아무 문제가 없다고 말할 수 없는 노릇이다.
우리는 성경으로 돌아가 성경의 가르침을 통해 교회의 순수성을 회복해야 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예수님이 그 상태를 아시고 그 회복을 원하시기 때문이다.
책망하시는 예수님
다음 4-5절에서는 반전이 일어난다. 이러한 반전은 '그러나'라는 접속사에 의해 예고된다. 그 반전은 칭찬으로부터 책망으로의 반전이다. 책망의 내용은 이러하다: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다.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그들이 처음 사랑을 '버렸다'는 것이다(4절). 이러한 단어의 사용에 의해 처음 사랑을 무의식 중에 상실한 것이 아니라 의도적인 유기라고 보인다.
그렇다면 처음 사랑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독자들은 쉽게 그 처음 사랑을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라고 단정할 가능성이 많다. 과연 그러한가? 그렇다고 보기가 어렵다. 왜냐하면 에베소교회 성도들이 하나님에 대한 열정을 상실하지 않았다는 증거가 본문(2-3절)에 잘 나타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들의 행위와 수고와 인내를 알고 계신다. 그들은 자칭 사도라 하는 자들의 거짓된 가르침을 분별해 낸 자들이다. 이것만큼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살아 있는 모습이 또 있겠는가? 이들이 하나님에 대한 처음 사랑을 버렸다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 표현이다. 그렇다면 처음 사랑이란 무엇이겠는가?
이것을 추적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하나님에 대한 사랑 말고 상실했을 가능성이 있는 '처음 사랑'을 생각해 보는 것이다. 그렇게 볼 때 여기에서 말하는 처음 사랑이란 성도들 사이에 존재했던 사랑을 가리킬 가능성이 많다. 에베소교회 성도들은 올바른 교훈을 세우기 위해 거짓 교훈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사랑 없이 바른 것만을 주장한다면 얼마든지 사랑이 없는 공동체로 전락할 수 있다.
처음부터 가지고 있었던 형제자매들 간의 사랑을 상실한 에베소교회 공동체의 실상은 예수님께 책망을 받는 처지가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처음 사랑을 그렇게 규정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의미를 철저하게 배제할 수만은 없다. 왜냐하면 이들은 매우 유기적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하나가 없이 다른 하나가 정상적으로 작동하기 힘들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처음 사랑을 버렸다고 말하는 것을 주저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교회 안에서 처음 사랑을 찾아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더 문제는 그러한 처음 사랑을 버린 것이 바른 교훈을 찾는 과정에서 일어난 결과가 아니라는 것에 있다.
한국교회는 차라리 바른 것을 추구하다가 처음 사랑을 버렸다는 예수님의 이러한 책망을 받기라도 했으면 좋겠다. 한국교회에 과연 바른 신학이 있기라도 한 것인가? 분명한 것은 한국교회가 처음부터 가지고 있었던 사랑을 버린 것은 그러한 이유가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에베소교회 성도들에게 어디에서 떨어졌는가를 기억하고 회개하고 처음 행위들을 행할 것을 촉구하신다(5a). 당연하다. 예수님께서 지적하신 문제를 그냥 넘어 갈 수 없지 않은가?
여기에서 세 개의 중요한 동사가 주목된다: 기억하라; 회개하라; 행하라. 회개의 행위는 분명하게 어디에서 문제가 발생했는가를 보여주는 과거를 기억하는데서 출발한다. 과거를 기억할 때 회개의 출구를 발견한다. 그리고 처음의 행위들을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 상상 속에서 회개는 없다. 행동으로 나타날 때 비로소 회개의 열매가 열린다.
그런데 이 문제는 예수님께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여지나 보다. 예수님은 에베소교회 성도들이 회개하지 아니하면(이 '회개하지 아니하면'이라는 문구는 두 번 반복되어 강조된다) '촛대를 옮겨 버릴 것이다'라고 말씀하신다(5b). 촛대를 옮긴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촛대는 교회 공동체를 의미한다고 했다. 그러므로 촛대를 옮긴다는 것은 교회 공동체의 정체성을 소멸시켜 버리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곧 처음 사랑을 회복하지 않으면 교회로서의 본질을 상실케 하시겠다는 경고이다. 사랑이 없는 교회 공동체는 교회로서의 본질을 갖고 있을 수 없다. 사랑 없는 교회 공동체는 그 자체가 심판일 수 있다.
이러한 예수님의 경고에 대해 한국교회는 자유로운가? 한국교회에 처음 사랑은 버리지는 않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부정적이다. 그렇다면 지금 한국교회는 교회로서의 정체성을 잃어버릴 수 있는 위험에 처해 있다고 할 수 있다. 처음 사랑을 잃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처음 사랑을 버리게 된 것은 에베소교회와는 좀 다른 이유 때문이다. 그것은 바른 교훈을 세우려고 하다가 그렇게 된 것이 아닌 것이 더욱 안타깝다. 차라리 그러했으면 바른 교훈이라도 얻어 위로라도 삼을 수 있을 터인데. 어느새 우리 한국교회에는 교회의 대형화가 큰 경향으로 자리 잡아 버렸다. 그래서 작은 교회들도 대형 교회가 되고자 하는 경쟁 대열에 합류한다.
거의 모든 교회의 시스템이 성도들의 성경적 삶의 증진보다는 교회의 부흥을 위해 존재한다. 대형 교회들은 그들대로 서로 경쟁심을 갖는다. 그래서 더 크고 더 화려한 예배당을 지으려고 한다. 이러한 크고 화려한 예배당 속에서 군중들은 고독해 한다. 역으로 대형 교회는 간섭 받기 싫은 사람들의 천국이다. 사람의 관심이 못 미치니 편안하게 교회를 다닐 수 있다. 그래서 처음 사랑을 회복하라는 예수님의 도전은 이래저래 오늘날 한국교회 성도들에게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요청이다. 그래서 교회의 대형화는 처음 사랑을 버리게 된 상황을 초래한 중요한 이유이면서 처음 사랑을 회복하는 데 큰 걸림돌이 되고 있다.
칭찬하시는 예수님
6절은 또 다른 반전이 일어난다. 이 반전 또한 4절의 경우처럼 '그러나'라는 접속사로 시작된다. 이 반전의 내용은 책망에서 다시 칭찬으로 돌아선다. 그래서 칭찬-책망-칭찬의 구조를 이룬다. 칭찬의 내용은 니골라당의 행위를 미워했다는 것이다. 이 니골라당은 2:14-15에 의하면 발람의 교훈과 관련된다. 그리고 이 발람의 교훈은 2:20-23에 의하면 이세벨과 관련된다. 곧 니골라당의 가르침은 발람과 이세벨과 같은 인물들이 자행했던 우상숭배와 음행과 관련된 것들이라고 할 수 있다.
에베소교회가 위치한 에베소라는 도시는 황제 숭배를 비롯한 각종 우상숭배가 성행되었던 곳이었다. 이를 감안한다면 니골라당이란 에베소교회 안에 이러한 가르침을 교묘하게 도입하려 했던 자들이었을 것이다. 특별히 이들이 2:2-3의 거짓 사도와 관련된다면 그들은 우상숭배와 같은 이교적 행위를 적당하게 기독교적 진리와 혼합하려는 시도를 했다고 볼 수 있다. 예수님은 이것을 미워하신다고 하시면서 이러한 자들의 교훈을 미워한 에베소교회 성도들을 칭찬하신다.
에베소교회 공동체도 찬란한 이교 문화의 영향하에 있었다. 그리스-로마 시대의 문화적 업적은 오늘날도 널리 인정되고 그 영향은 모든 인간의 생활과 사고방식에 깊숙이 파급되어 있다. 그런데 그러한 문화적 결과물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을 더럽히려 할 때, 혹은 그리스도의 권세를 침범할 때 그들은 과감하게 그것을 미워한 것이다. 예수님은 바로 그 점을 높이 평가한 것이다.
한국교회 안에 기독교 진리와 세속적 물결이 문화라는 이름으로 교묘하게 혼합되어 잠입해 있다. 우리 한국교회는 세상은 무조건 악한 것이고 교회 안은 무조건 선한 것이라는 이교적 이원론에 사로 잡혀 있어 이러한 세속적 문화를 분별할 능력이 취약하다고 판단된다. 그러나 세속적 문화를 접하지 않고 살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것을 등지고 살 때 결과는 둘 중의 하나이다. 완전 고립된 삶을 살게 되든지, 아니면 세속적 문화를 이해하지 못하므로 그것에 저항할 방법에 대한 무지로 말미암아 완전히 물들게 되든지, 둘 중의 하나이다.
어쩌면 우리 한국교회는 이 양 극단의 경우를 모두 경험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문제는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주권을 내세워 그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이 그러한 세속적 문화를 활용하는 데 취해야 할 것과 버려야 할 것을 분별하는 시금석이 되는 것이다. 그러할 때 니골라당의 교훈 같은 교묘한 경우들을 분별해 내어 내칠 수 있는 내성이 생길 수 있는 것이다.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이상은 에베소교회 성도들에게만 하시는 말씀이 아니다. 그것은 지상의 모든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이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의 말이 아니라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귀가 있는 자들이라면 누구든지 이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누구든지 예외가 있을 수 없다. 사도들도, 목사들도, 장도들도, 신학교 교수들도 예외 없이 이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이기는 자에게는…
이기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로부터 과실을 먹게 하실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직접 약속하신다(7절). 여기에서 '이기는 자'라는 문구는 왜 등장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예수님께서 에베소교회 성도들에게 요청하고 있는 것들이 바로 치열한 투쟁 가운데서 얻어지고 지켜질 수 있다는 의식 때문이다.
그냥 적당히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에베소교회 성도들은 이기느냐 패배하느냐의 기로에 서 있다. 예수님의 경고의 말씀에 순종하여 회개하고 처음 사랑을 회복하면 이기는 자가 되고 그렇지 않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패배하는 자가 되고 마는 것이다.
요한계시록은 성도들의 신앙생활을 전투적으로 묘사하는 경향이 있다(물론 다른 성경에서도 이러한 경향이 존재한다). 이러한 요한계시록 말씀의 경향을 따라 한국교회가 직면한 이 현실을 영적 전투의 현장으로 선포해 보자.
이기는 자에게 주어지는 보상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먹게 하시겠다는 것이다. 이것은 실제로 생명나무를 먹게 하시겠다는 것이 아니라 생명나무 열매가 가지는 의미로 '생명으로 충만한 하나님의 임재'의 지속적인 체험을 허락하시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영원한 구원으로 말미암은 충만한 생명에의 동참에 대한 표현과 다름 아니다. 이러한 약속은 22:2-4에서 미래적 종말의 시점에 주어지는 것으로 묘사된다. 결국 요한계시록 내에서 이러한 약속과 성취의 관계를 긴밀하게 보여준다. 이것은 이기는 자에게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심을 강변해주고 있다.
우리 한국교회의 성도들에게 이러한 영원한 구원의 소망을 바라보며 매일 매일 삶의 현장에서 주어지는 도전 앞에 굴하지 않고 패배하지 않고 이기는 자로서 살아가는 삶이 주어졌으면 참 좋겠다.
이필찬 /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신약학 교수·성경적종말론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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