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의 가려진 한쪽, 동방교회
김광수
기독교에 관하여 서양의 종교로만 아는 경향이 농후하다. 그렇지만 기독교는 불교나 이슬람교와 마찬가지로 동양의 일각에 그 모습을 나타냈고 또한 일찍부터 동양 전역에 널리 전파됐던 종교 중 하나이다.
서양에 전파된 기독교와 구별하여 동양에 퍼진 기독교를 동방기독교(Eastern Christianity)라고 부른다. 이 동방기독교는 국가종교로서의 첫 공인을 로마의 황제 콘스탄티누스의 공인보다 약1백년이 앞선 해에 동방의 나라인 에뎃사에서 받았다. 그후 페르시아로 옮겨진 동방기독교는 로마 치하에서 서방기독교가 당한 이상으로 심한 박해와 시련을 당하면서도 용하게 견뎠다.
뿐만 아니라 이 속에서 점화된 신앙의 열은 동양 각처로 향하는 선교로 뜨거워져 중앙 아시아를 비롯하여 인도, 실론, 마락카에 이르기까지, 다른 한편은 몽고를 지나 바이칼호 부근 시베리아에 이르기까지 도처에 타오른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 나아갔다.
제2세기에는 동방기독교의 정식 선교사단 일행이 중국에 도달하여 대륙 수십 곳에 교회당을 설립하였고 일본과 한국에도 자취를 남겨 놓았다.
그러나 그토록 융성하였던 동방기독교가 오늘날에는 극히 소수의 신도만이 잔존하고 있을 뿐으로 세인의 관심에 서 멀어지고 말았다. 본란은 이러한 동방기독교에 관하여 그 동점(東漸) 과정을 고찰함과 아울러 그의 종교적 특수성을 척결하고, 흥망성쇠의 전모를 분석 규명하여 오늘의 선교 사명을 수행하는데 도움을 제공하고자 배려하였다.
동방기독교의 발원지
(1) 에뎃사의 역사적 배경
동방기독교의 특징 가운데 하나인 선교의 열심과 확장된 교세의 이유를 알기 위하여 우선 동방기독교의 발원지로 알려진 에뎃사 교회의 형성부터 찾아봄이 좋을 것이다.
초기 기독교의 중심지가 예루살렘, 안디옥, 에베소, 콘스탄티노플, 로마, 칼테이지, 알렉산드리아, 에뎃사 등지 였다고 한다면 그 중에 에뎃사를 제외한 다른 지역은 소위 헬레니즘(Hellenism)에 의하여 지배되었고 그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나 에뎃사 지역만은 헬레니즘 문화의 상당한 영향에도 불구하고 시리아어를 그대로 사용한 시리아문화를 배경으로 한 기독교의 중심지였다.
에뎃사(Edessa)는 지리적으로 유프라테스강 동쪽에 위치하였고 안디옥의 동방으로 약60마일 지점에 자리잡은 도시였다. 현재는 시리아 국경을 넘어선 터어키 영내에 있으며 울파(Urfa)라고 부른다. 고래로 이곳은 서방과 동방을 연결하는 요로였으며 남방 시리아의 사막지방과 북방 아르메니아를 미봉하는 극히 중요한 지점이다.
에뎃사의 역사를 살펴보면 이곳은 바벨론 왕조 이래 이름있는 고장이었으며 아람족의 지배를 받아 아람어를 사용하였다. BC 332년 알렉산더 대왕에게 정복되어 헬라의 영토가 된 때가 있었지만 335년 시리아의 왕 셀키스 1세가 시리아왕국인 것을 선포한 이래 이 울파는 에뎃사라는 이름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BC 132년 이 지역이 로마의 영토와 팔티아(Parthia)와 오스로에네(Osrhoene) 왕국으로 분리되면서 에뎃사는 오스 로에네 왕국의 수도가 되었다. 오스로에네 왕국은 팔티아와 로마 사이의 완충지대와 같은 나라로 근근히 독립을 유지했다. 그러다 로마의 압박이 가중되어 216년에 드디어 로마제국의 식민지가 되었다. 기독교가 에뎃사에 전래된 해는 1세기말 또는 2세기 초로서 에뎃사가 독립 왕국의 수도였을 때라고 생각된다.
(2) 최초의 동방 교회
에뎃사 지방에 처음 어떻게 기독교가 전래되었는가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설들이 있다. 그 중에 하나가 최초로 이곳에 복음을 전한 사람은 사도 도마일 것이라고 하는 전설이다. 즉, 도마가 인도로 가는 도중에 에뎃사와 팔티아 에 들러 전도하였다고 하는 내용인 것이다. 이에 관하여 300년 경의 저술인 이방민족지(Adverse Gentes)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사도 중의 한 사람인 도마는 주 예수께서 승천하신 후 2년만에 인도와 극동으로 가는 도중 팔티아, 북하라, 박 토리아 등 지방에 들려 기독교 복음을 전하였다.그러나 이보다 더 신빙성 있는 전설로써 예수의 70문도 중의 한 사람인 다대오의 전도가 지적되고 있다. 이에 관하여 아다이의 교의(Doctrine of Addai) 중에 다대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고 또한 유세비우스의 교회사에도 그의 사적이 언급되어 있다. 오늘의 시리아 교인들은 대부분이 다대오에 의하여 이곳에 기독교가 전래되었다고 인식하고 있으며, 다대오의 다른 이름이 아다이(Addai)였다고 말하고 있다.
그 이야기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당시 에뎃사의 국왕 아부갈 우까마(Abgar Ukkama, A.D. 50)는 팔레스타인에 주재하고 있는 로마황제의 티베리우스의 대관인 사비너스에게 사절을 보냈따. 사절단 일행은 예루살렘에 10여일을 체재하는 동안에 예수가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광경을 목격하였고 또 예수를 살해하려고 하는 음모가 있다는 사실도 탐지하였다. 사절 중의 한 사람인 한난(Hannan)은 귀국하자 곧 아부갈 왕에게 이러한 예수에 관하여 보고하 였다. 중병을 앓고 있던 국왕은 한난에게 예수 앞으로 보내는 편지를 맡겨 예루사렘으로 다시 보내면서 그 편지 서두에 아부갈 우까마로부터 선한 의사 예수에게라고 기록하였고 예수께서 속히 와서 병을 고쳐달라고 간청하였다.
그리고 도중에 어려움과 박해가 있을 때는 안전하게 보호해 드리겠다는 약속의 말까지 첨부하였다.
이러한 편지를 받은 예수는 지상에서의 사업을 거의 다 마치시고 승천하기 직전이었으므로 그가 친히 에뎃사를 찾 아갈 사정이 도저히 못되었다. 예수께서 아부갈 왕에게 전달한 내용은 나를 보지 않고 믿는 자에게 더 복이 있다고 하는 말씀과 함께 나를 대신하여 제자 한 사람을 보낼 터이니 그로 인하여 병이 나을 것이라고 하였으며 당신의 나라에 축복이 임할 것이라고 하는 축원의 내용이었다. 결국 예수께서 승천하신 후 70문도 중의 다대오가 에뎃사에 들르게 되었고 아부갈 왕의 병은 곧 그를 통하여 치유함을 받았으며 이를 계기로 국왕을 비롯하여 많은 신하들이 기독교로 개종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계속하여 아다이의 교의의 기사는 다대오는 국왕의 존경을 받으면서 그 나라에서 평화스럽게 살았으며 뒤를 이어 그의 제자 아가이(Aggai)가 전도사업을 계승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아부갈 왕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기독교가 잘 보존되었으나 그의 아들 마누(Manu)는 기독교를 좋아하지 아니하여 아가이가 교회당에서 기도 드리고 있을때 부하를 시켜 다리를 꺾게 하였고 뒤에 살해하고 말았다고 한다. 그러나 같은 내용을 18세기 초에 편집된 앗세 마누스(Joseph Simonius Assemanus)의 동방문헌(BibliothecOrientalis)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적고있다. 즉 다대오는 에뎃사에서 아부갈 왕의 병을 고친 다음 친구인 아가이와 그리고 마리(Mari)와 함께 동방의 여러나라를 12년간이나 순방하여 전도하다가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며 다대오의 사후에는 아가이가 전도사업을 계승하였고 또 아가이의 사후에는 마리가 계승하였다는 것이다.
중세기의 교회사가 헤브라이우스(Hebraeus)의 교회 연대기(chronicon Ecclesiasticum)에 보면 약 15년이며 다대오의 별세 이후 불과 3년도 못되어 죽은 것으로 되어있다. 아가이의 사후 그의 후계자 마리는 에뎃사에 더 오래 머물러 있을 사정이 못되어 곧 동방으로 옮겨가 세나르(Senar) 지방에서 전도하였고 다시 셀키아(Seleucia)로 찾아가 그곳에서 병자를 고치면서 신앙을 고백하는 자에게 세례를 베풀었으며 15년 동안을 전도하다가 바다라자(Badaraja) 에서 33년간의 전도 생활을 막을 닫고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다.
위의 전설에 관하여 그 사실성 문제를 둘러싸고 찬반의 양론이 있다. 바깃드(F. C. Burkitt)는 사도 도마나 또는 다대오의 동방 전도설을 부인하고 있다. 그는 말하기를 가령 다대오가 에뎃사에 이르러 전도하였다고 해도 아부갈 왕의 팔레스타인 사절과는 전혀 무관하다는 주장을 내세우고 있다. 또한 아다이의 교의도 4세기말에 편집되었으므로 그 내용에 있어서 전설을 기초로 할 수 밖에 없었고 따라서 신빙성이 희박하다고 규정하고 있다. 또한 앗세마너스의 동방 문헌도 교황의 명을 받들어 일방적 입장과 잘못된 사실 위에서 편집되었을 가능성이 많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에 반하여 골든(E.A. Golden)은 이상의 전설을 전적으로 신임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또한 일본 의사헤끼(佐伯好郞)도 다소의 비판을 가하고 있기는 하면서도 실재에 관하여는 완전히 인정하는 견해를 발표하고 있다. 예수와 아부갈 왕의 전설에 관하여 그는 말하기를 다대오가 아부갈 왕의 병을 고쳤기 때문에 국왕과 국민이 기독교로 개종하였다는 전설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라고 하였으며 도마의 에뎃사 전도에 관하여는 에뎃사에서의 기독교와 관련된 전설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도마행전이다. 라고 말하면서 뒷받침하고 있으며 아가이와 마리의 사적에 관하여도 긍정적 태도를 취하고 있다.
장로회 신학대학에서 교회사를 교수한 마펫(Samuel H. Moffet)도 이러한 전설을 인정하면서도 다음과 같은 사실을 제시한 바 있다.
첫째로 에뎃사의 아부갈 왕이야말로 역사상 최초로 기독교인 왕이며 또한 이때 그의 국민까지 개종하였다는 사실 은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한 연대보다 약 1백년이나 앞선 200년 경으로 이는 이곳에서의 기독교가 세계 최초의 국가 종교가 되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자못 크다.
둘째로 에뎃사의 국왕이 예수에게 보낸 편지 가운데 예수를 박해로부터 보호하겠다는 약속의 말이 기재되어 있는 데 이것은 그후 로마제국의 박해를 피하려는 기독교인들에게 동방으로 이주하는데 하나의 요인이 되었다는 점이다.
세째로 에뎃사 교회의 개척 선교사로 사도 도마를 들고 있음은 기독교를 서방세계로 전파한 사도 바울을 서방교회의 위대한 사도로 추앙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동방교회는 사도 도마를 동방세계에 있어서의 위대한 사도로 높히고 있다는 상황을 알려주고 있다.
네째로는 이 에뎃사의 동방 최초의 교회가 설립된 사실은 자연적으로 이곳이 동방기독교의 발원지의 역할을 하도록 만들어주었고 또한 실제로 에뎃사는 티그리스강 연안의 여러 나라를 비롯하여 멀리는 인도와 중국에 이르기까지 복음을 전파하는 선교활동을 위한 시발지점이 되었다.
(3) 동방교회의 독특성
시리아의 기독교 고문서에 의하면 201년에 홍수가 났는데 에뎃사 교회가 그때 큰 피해를 입었다고 하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Mingana; Early Spread of Christianity, Vol. II, p. 300). 이 역사적 기록으로 보아 에뎃사 교회가 존재한 것은 201년 이전이라고 하는 사실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이때보다 조금 앞선 시대에 이름을 남긴 기독교 학자로 타티안과 바다이산과 바루토등 세 사람이 있다.
타티안(Tatian, 110180)은 자신의 글 헬라사람들에게 행한 연설(Address to the Greeks)에서 나타난 대로 시리아에서 출생하였고 어려서 헤레니즘 교육을 받았으며 그후 기독교로 개종하였다. 그는 상류 가정의 출신이었으며 문학적 소질이 풍부하였고 한때 소피스트가 된 일도 있었다. 그는 진리 탐구에 열중하여 헬라와 로마 등 여러 나라를 방문하였으나 만족을 얻지 못하고 고민하고 있던 중에 기독교 옹호론자 져스틴 마터(Justin Martyr)를 만나 기독교를 알게 되었고, 150년 경에 성령의 감동으로 완전히 기독교 신자로 입교하였다. 그는 져스틴의 순교 후 그의 후계자로 기독교 신앙의 변증을 위하여 열심히 뛰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강직한 논조가 당시 교회의 미움을 사게 되어 172년 로마교회로부터 파문을 당하였다. 이리하여 그는 로마를 떠날 수밖에 없었으며 시리아를 거 쳐 180년 경 에뎃사에 이르러 이곳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세상을 떠났다.
타티안이 남긴 사업 중에서 디아테싸론이란 복음서의 편찬이 가장 유명하다. 에뎃사교회는 옛날부터 신구약성서의 시리아역 성서를 사용하여 왔는데 이것을 페싯타(Peshitta)라고 불렀다. 타티안 때에 시리아역 성서로는 구약은 있었으나 신약은 없었다. 그러므로 예수의 교훈에 관하여 구전이나 설교를 통하여 만족할 수밖에 없는 사정이었다. 이러한 때, 타티안은 신약의 시리아어 번역에 착수하게 되었으며, 그의 생각은 복음서에 예수의 교훈과 생애 등이 차이가 있게 기록되어 있어 독자에게 혼란을 주고 있다는 느낌에서 복음서를 모두 묶어 가지고 하나의 복음서로 만들어 버리고 말았다. 이것이 소위 디아테사론이다. 이 편찬사업은 173년 이후 로마에서 했을 것이라고 추측되고 있다. 현재 이 복음서의 원본은 남은 것이 없으며 그 아라비아 원본만이 바티칸 도서관에 보존되어 있다(구약의 시리아역 성경이 작성된 연대는 분명하지 않으며 추측컨대 예루살렘에서 유대인의 국민적 생활이 붕괴된 후, 아디아베네왕가(Adiabene 王家)가 유대교를 향하여 호의를 베풀던 시기에 에뎃사에 사는 한 유대인에 의하여 번역되었을 것이라고 알려지고 있다(F.C. Burkitt; Early Eastern Christianity, p. 72).
타티안의 사상은 극단의 금욕주의적이었으며 결혼이나 육식, 음주 등을 일체 금지하였다. 성찬식에는 포도주를 사용하지 않고 물을 사용하게 하였다. 디아테싸론에는 예수의 족보가 삭제되어 있으며 기록으로 전혀 나타나 있지 않다. 금욕주의를 주장하는 그로서는 출산으로 되는 인간의 족보의 가치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하였다는 것이다. 그는 또한 기독교가 서양인의 종교라고 하기보다 동양인의 종교라고 하는점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그의 신학자로서의 일생은 오직 동방의 시리아적 기독교를 수립하는데 전부를 다 바쳤다.
타티안 다음으로 에뎃사 교회의 지도자가 된 사람이 바다이산(Bardaisan)이다. 그의 사상은 흔히 시리아적 노스틱주의(Syrian Gnosticism)란 말로 불려지고 있다. 그는 25세 경까지 이교도 교육을 받았으며, 우연한 기회에 다대오가 세운 교회에 출석하게 되었고 그곳에서 히스타프(Hystap)를 만나 기독교로 전향하게 되었다. 바다이산이야말로 시리아 교회에 있어서 이름있는 사상가요 권위있는 저술가였다. 그로부터 약 1세기 후에 유세비우스와 에피파니우스(Epiphanius)가 저술한 운명에 관한 대화(De Fato, the Dialogue on Fate)가 현재 대영제국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어 그 책을 통하여 바다이산의 사상의 일부나마 알게되는 것은 퍽 다행이라 하겠다.
이 저술에 나타난 대로 바다이산의 사상적 특징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논하였다는데 있다. 그는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완전한 선신이라고 한다면 어찌하여 사람들이 선이 아닌 다른 것은 할 수 없도록 규제하시어 악의 세력으로부터 보호하지 아니하셨는가 하는 의문을 던져주고 있다. 그는 이 물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대답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부여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으로 하여금 선을 행할 수도 있고 악을 행할 수도 있도록 만드셨다. 이것이야말로 인간이 기계가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는 중요한 진리라고 설파하였다.
그리고 인간의 생을 좌우하는 것으로 천성(Nature)과 운명(Fate)과 자유의지의 세 가지가 있다고 하면서 천성은 인간이나 동물에게 다 존재하고 있지만 동물은 천성에만 의지하여 행동하고 있고 인간은 그 위에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의지에 의하여 행동하고 있다라는 말로 설명하였다. 그러나인간의 자유의지라고 해서 절대 무한한 것은 아니며 인간은 만물의 때가 차기까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섭리하시는 경륜을 돕기 위하여 존재하고 있는것 뿐이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위에서 보는 대로 바다이산의 사상이 이단이 되기에는 너무나 거리가 멀며 다만 그의 지론이 당시 교계에 있어서 지나칠 정도로 지적이요 진보적이었고 또한 독립적이고 강력하였으며 타협이 없었기 때문에, 그리고 헬라 로마 계통이 아닌 시리아적 이었다고 하는 데서 로마교회의 노선과 대립을 일으켜 마침내 그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희생되고 말았다.
바다이산과 같은 시대에 살았던 또 하나의 지도자로 바루토(Baruto)가 있다. 그는 안디옥 교회의 감독인 세라피온(Serapion, 190213년)으로부터 성직의 안수를 받았다. 그런데 이 안수로 인하여 여러가지 문제점이 제기되고 있다. 그중에 가장 큰 문제는 어찌하여 더 독립된 기원을 갖고 있는 동방의 에뎃사 교회가 서방의 안디옥 교회의 감독으로부터 안수를 받았는가하는 의문이다. 그 때의 에뎃사 교회가 어느 정도 교회의 기반을 닦아 놓은 것만은 사실이었다. 그렇지만 아직까지 에뎃사 지역은 정치적으로 볼 때 독립을 유지하고 있기는 하면서도 로마 제국의 위협을 받고 있는 불안한 상태에 있었다. 그러기에 216년에는 로마 군대의 대거 침입을 받았고 그 결과 이 에뎃사지 역은 완전히 병합되고 말았다. 그러한 국가적 정세의 영향하에서 있으면서 바루토때의 에뎃사 교회가 로마 제국 안에 있는 안디옥 교회로부터의 지배와 견제를 전혀 받지 않기는 어려웠던 것이다.
위의 예로 보건대 서방교회의 권위가 국가적인 힘을 배경으로 동방교회 지역으로 침투하게 되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이러한 사정의 빠른 이해를 위하여는 에뎃사교회에서의 성서 번역의 과정을 살펴보면 도움이 될 것이다. 바루토 이전의 에뎃사 교회는 신구약성서의 시리아 번역인 페싯타와 타티안이 편찬한 디아테싸론의 두 가지를 사용해 왔다. 그런데 바루토는 디아테싸론의 사용을 반대하면서 4복음서를 하나로 묶어 번역하여 이를 사용하게 하였다. 이것이 소위 메파레쉐(Mepharreshe)이며 즉 4복음서의 시리아어역이란 것이다.
바루토는 이러한 것 외에 또 사도행전과 바울의 14서신을 시리아어로 번역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뎃사 교회는 여전히 타티안의 디아테싸론을 사용하였다. 그러다가 오랜 세월이 지나서야 라부라(Rabbula) 때에 이르러 겨우 이의 사용이 바뀌어졌다.
라부라는 411년부터 435년에 이르기까지 20여 년을 에뎃사 교회의 감독으로 있으면서 헬라어로 된 성서를 시리아 어로 번역하는데 성공한 인물이다. 그렇게 하여 만들어진 성서가 유명한 신약 페싯타(New Testament Peshita)이다.
이 성서는 다음란에 언급하겠지만 동방기독교 중의 으뜸이 되는 네스토리우스 교회를 비롯하여 야곱파, 마로나이트 파 등의 동방 계통의 교회전체에서 사용하게 되었다.
이로 보건대 기독교는 일찍부터 사도시대 이래 동방의 지역으로 그 어떠한 경로를 거쳤든지 간에 전파되어 확립 된 사실을 알게 되었다.
동방의 기독교는 나름대로의 독특한 동양적 특수성을 발휘하면서 교리적으로 사상적으로 신학을 확립하여 나아갔던 것이다. 금욕주의적인 사상이 예수의 족보까지 삭제하였다고 하는 데는 놀라지 아니할 수가 없으며 반면에 인간의 자유의지가 설파되었다고 하는데 흥미가 솟구쳐 오르기도 한다. 신학사상이나 신학노선 이상으로 교권의 발동이 이미 초기 교회 시대로부터 대두하여 선량한 신학자를 희생시켰다고 하는 데 씁쓸할 감정을 금할 길이 없다. 로마 제국을 중심한 서방교회는 에뎃사를 중심한 동방교회를 향하여 계속하여 주도권의 장악을 기대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방의 교회는 동양적 신앙의 설정을 기도하면서 독자적 걸음을 걷기 위하여 부단히 노력했다고 하는 자취를 남겨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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