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톨릭을 바로 알자
기독교인은 누구나가 다 교회에 대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으나 사람마다 교회에 대한 이미지가 다르다. 어느 교파이든 그 교파의 교회에서 자라온 사람은 그 교회가 교회의 전부인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해서 하나되어야 할 몸된 교회는 사실 종류가 너무나도 많은 것같다.
우리는 여러 종류의 교회들을 제대로 모르면서 자기가 속해 있는 교회만으로 교회를 정의하고 있다. 특히 개신교 교인들은 우리가 천주교라고 부르는 로마 가톨릭 교회 (Roman Catholic Church) 어느 교회보다 더 역사가 깊고 방대하고 영향력이 있는 교회지만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본의 아닌 오해도 하게 되고 그로 인해 피차가 함께 얻을 수 있는 유익도 많이 놓치게 되는 것같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를 바로 알기 위해서는 우리들에게는 베일로 가려져 왔던 가톨릭을 한번 집중적으로 살펴볼 필요를 느끼게 된다.
가톨릭은 이단(?)
우선 가톨릭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가기 위해 나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중학교 시절 성당에 다니던 친구와 교리논쟁을 한 이후로 가톨릭은 내게 있어서 기독교의 형태를 갖추기는 했으나 기독교로 인정할 수는 없는 종교단체였다. 어려서부터 전통적인 장로교회에서 자라난 나는 교회에서 듣는 설교나 혹은 어쩌다 접하게 되는 가톨릭에 관한 책을 통해서 가톨릭을 일종의 이단으로까지 여기게 되었다. 가톨릭의 나라인 프랑스에 잠깐 있는 동안에 내 눈에 비친 가톨릭은 그때까지의 내 생각을 확인시키기에 충분했었다. 전국 어디엘 가도 장엄한 성당이 우뚝우뚝 서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이 텅 비어 있었다. 마치 우리나라의 절처럼 어디서든지 볼 수 있기는 하나 예배드리러 오는 사람보다 관광하러 온 사람이 더 많다는 느낌이 들었다.
특히 가톨릭의 성지인 프랑스 남부의 루르드 (Lourde)에 가서는 가톨릭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가 더 짙어졌다. 성모 마리아가 나타난 적이 있다는 곳에 커다란 성당이 서 있는데. 이 성당에 있는 동굴 앞에는 병을 고치기 위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전국 각지에서 휠체어나 침대에 실려서 찾아오는 것을 보았다. 동굴 앞에 매달려 있는 수많은 목발들―이곳에서 병이 나아서 놓고 갔다고 하는을 보면서 그 신유의 기적을 굳이 부인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가톨릭은 이미 기독교가 아니라 미신종교화 되었다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일생을 통틀어 영세 받을 때 누워서 성당에 가고. 두번째는 결혼할 때 걸어서 가고. 죽은 후 장례식 때에 다시 누워서 세번째로 성당에 간다는 자칭 가톨릭 신자라는 사람들의 형식적인 신앙을 보면서 내가 그동안 가졌던 생각이 옳았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가톨릭과의 만남은 그 이후에도 간간이 계속되었다. 미국에서 유학생들과 성경공부를 하는 중에 어느 독실한 가톨릭 신자와 대화할 기회가 있었다. 바로 이 대화를 통해 가톨릭 신자들의 신앙의 허실을 볼
수가 있었다. 그는 지금 죽으면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있겠느냐는 질문에 “요즈음은 힘들 것같다”는 묘한 대답을 했다. 이유를 물은즉 “미국에 오기 전에는 고해성사를 꼬박꼬박했기 때문에 하나님께 갈 수 있었지만 미국에 온 이후로 영어로 의사소통이 불편해서 고해성사를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 갈 자신이 없다”는 것이었다. 물론 모든 가톨릭 신자가 다 이 사람과 똑같지 않을지 모른다고 생각은 했지만 그가 바로 가톨릭 신앙의 일면을 반영해 준다고 생각했었다.
몇 년이 지난 후 또 다른 가톨릭 신자인 여학생과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그녀와 대화를 나누면서 처음으로 가톨릭에 대한 긍정적인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녀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는데 내가 만났던 어떤 개신교 신자들보다도 더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같았다. 마리아와 교황에 대한 나의 비판에 별로 개의치 않으면서 “자기의 신앙의 기초는 마리아도 아니고 교황의 권위도 아니고 자기를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 라는 아주 분명한 신앙고백을 하는 것이었다. 너무나도 확실한 고백이었다. 그녀와 짧은 대화를 나누면서 가톨릭에 대한 그동안의 생각을 다시 한번 돌아보게 되었다가톨릭 안에도 이런 신앙이 있을 수 있구나 이런 생각을 하게 되면서 그때 이후로 나는 가톨릭 교인들과 가톨릭을 새롭게 바라보게 되었다.
제 2 차 바티칸 회의
사실 그때까지 내가 알고 있었던 천주교는 성베드로 성당을 짓기 위해 면죄부를 팔았던 물질의 욕심이 있었던 사람들의 집단이었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려던 사람들을 박해하고 죽이기까지 했던 잔인한 교회였다. 한 마디로 내가 안 가톨릭은 종교개혁자들의 눈에 비친 중세교회였다. 그런데 뒤늦게 1960년대에 두번째 바티칸 회의가 있었고 그로 인해 가톨릭이 새롭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이전의 회의들이 이단의 도전에 대응하기 위해 모여졌던 것에 비해 이 회의에서는 역사상 처음으로 가톨릭이 스스로를 돌아보면서 “교회가 무엇인가.”라고 질문을 던졌다는 사실이 가톨릭에 대한 나의 생각을 새롭게 만들었다.
이어서 남미의 가톨릭에서 나온 .해방신학.이라는 급진적인 신학을 대하면서 가톨릭의 또 다른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런 한편 오순절교파처럼 성령운동을 하는 가톨릭 신자들이 있다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이런 여러 소식들을 접하면서 이미 현대의 가톨릭은 내가 생각해왔던 가톨릭이 아닐 것이라는 짐작을 하게 되었다.
그러는 중에 한국 내의 가톨릭의 활동을 목격하게 되었다. 과거에는 술 담배의 제약을 받기 싫은 사람들이 편하게 신앙생활 하려고 가는 교회로만 알았던 한국의 가톨릭이 정치적인 혼란기에 오히려 고통을 받는 사람들 편에서 수고하며. 불의한 독재체제에 대항해서 훨씬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모습을 보게 된 것이다. 또 그로 인해 많은 사람들. 심지어는 개신교 교회에 있던 사람들까지 가톨릭의 문을 두드린다는 통계를 접하면서 가톨릭에 대한 호기심 이상의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가톨릭은 내가 생각해왔던 가톨릭과는 다를 것이라는 확신을 하게 되었다.
가톨릭이 지금까지 내가 이해했던 것과 다르다면 과연 가톨릭은 어떤 교회인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얻기 위해서는 우선 지금까지 가톨릭을 바라보는 눈으로 우리 자신을 바라보고. 가톨릭을 재
던 자로 우리 자신을 한번 재어보므로 우리의 편견을 시정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대부분의 복음주의 교회는 교파를 막론하고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정통교리를 강조하면서 가톨릭의 교리를 붙들고 그의 신앙을 점검해 보면 복음이나 구원문제에 대해서 제대로 모르고 때로는 이단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들의 신앙으로 그들이 속한 교회를 평가한다면 한국의 많은 복음주의 교회 가운데 이단이란 소리를 들을 교회가 적지 않을 것이다. 요즈음 개신교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대부분의 이단종파나 분파성있는 그룹들이 기성교회의 이런 약점을 꼬집고 있다. 그래서 구원의 확신이 없는 기존교회 교인들이 교회를 떠나 새로운 가르침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교리적인 문제 외에도 오늘날 우리 복음주의 교회 안에서 발견하게 되는 교역자들의 권위. 건물에 대한 지나친 투자 등을 보면 중세의 가톨릭을 비판할만한 자격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게도 된다. 이렇듯 복음주의 교회가 스스로를 돌아본 후 먼저 “우리 눈 속에 있는 들보”(마 7:3) 깨닫고 그 들보를 빼어낸 후 새로운 눈으로 가톨릭을 보게 된다면 훨씬 더 객관적으로 정확하게 이해하고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마7:5)를 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서 현재의 가톨릭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
바른 이해를 위한 자세
일반적으로 가톨릭이 바티칸의 권위 아래 있다고는 하지만 가톨릭을 한 모습으로 정의할 수는 없다. 그리 깊이 살펴보지 않아도 현대의 가톨릭은 제2의 바티칸 회의 이전으로 돌아가자고 하는 전통주의자들. 개신교의 자유주의자들처럼 전통도 성경도 무시하고 인간의 이성을 중시하는 진보주의자들. 개신교의 오순절교파와 비슷한 성령운동 그룹. 그리고 일요일마다 습관적으로 성당에 가서 미사에 참석하는 관습적인 신자들의 네 그룹으로 나눌 수 있다. 개신교를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없듯이 가톨릭 역시 다양한 모습을 지니고 있어 한 마디로 정의하기가 어렵다. 아마도 내가 알고 있는 가톨릭으로 가톨릭을 정의한다면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는 격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결국 우리가 보고 듣고 느낀 것만으로 가톨릭을 정의하고 비판한다는 것이 오류를 초래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
그래서 가톨릭을 바로 알기 위해서는 가톨릭을 우리가 이미 내린 제한된 정의에 끼워맞추려 하기보다는. 가톨릭이 스스로 내린 정의를 평가하고 그것을 받아들인 후 성경적인 입장에서 비판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와 동시에 가톨릭과의 대화를 통해 배울 것은 배우면서 가톨릭이 이미 범했던 우를 범하지 않으려는 겸손과 확신의 자세가 필요하다. 가톨릭의 실체를 좀더 객관적으로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단계가 필요하리라 생각된다.
첫째. 객관적인 역사에 대해서 알 필요가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가톨릭은 대체로 중세의 가톨릭이다. 그러나 현재의 가톨릭은 많이 변했다. 더구나 한국의 가톨릭은 다른 나라의 가톨릭과는 다른 독특함이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문화적인 배경이나 선교역사가 다르기 때문에 유럽이나 남미의 가톨릭과는 다른 한국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가톨릭의 일반적인 역사와 한국 가톨릭의 역사를 살펴볼 때 비로소 변화하는 가톨릭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가톨릭이 말하는
가톨릭에 대해서 알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 우리가 보고 들은 가톨릭은 개신교쪽에서 설명하고 비판하는 가톨릭이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그러한 설명이 다 틀렸다고 생각지는 않지만. 편견이나 오해의 소지가 다분히 있었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므로 그들의 소리를 겸손하게 들어보아야 한다. 들으면서 비판하기에 앞서 그들을 이해하는 마음자세를 가져야 한다. 동시에 비판을 할 때는 말씀의 진리에 기초를 두고 냉철하게 비판해야 할 것이다.
셋째. 피차가 대화하는 자세로 임해야 한다. 가톨릭과 개신교. 특히 복음주의 교회와는 갈등이 있거나 그렇지 않으면 피차가 무관심으로 일관해 왔다고 볼 수 있다. 종교개혁이 주는 역사적 의미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이제는 시대가 달라졌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렇다고 무조건 하나되기 위하여 교리적인 차이를 무시하고 타협하자는 말은 아니다. 단지 마음을 연 대화를 통해서 피차가 서로 배우고 서로간의 차이를 좁히는 일은 필요하리라고 생각된다. 이런 시도가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요17:11)라고 기도한 예수 그리스도의 뜻일 것이다.
그래서 .목회와 신학.은 이번호에 위와 같은 단계로 가톨릭에 대한 특집을 다루었다. 이어지는 가톨릭에 대한 몇편의 글들이 가톨릭을 바로 보고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방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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