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의 기독론
1. 마가복음 기독론의 동향
마가복음 기독론에서 가장 두드러진 주제는 메시야 은닉 이론이다. 이 이론은 1901년 윌리엄 브레데가 "Messianic Secret"라는 글을 출판하면서부터 였다. 찬성하든, 반대하든 브레데의 메시아 은닉 이론은 이후의 마가복음의 기독론을 이야기하는 모든 시도들의 출발점이었다.
그의 이론은 마가복음의 공동체에서 시작한다. 그는 마가복음을 기록하던 당시의 기독교 공동체가 예수님에 대한 긴장된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고 가정한다. 예수님은 빌2:5-11에서 말하고 있듯이 승귀하신 하나님의 아들의 모습이고, 또 다른 모습은 고난받는 종의 모습이다. 예수님의 부활 이후의 공동체적 신앙은 메시야 신앙이었다고 한다면, 예수님의 지상 사역 가운데서 만날 수 있는 예수님의 이미지는 자기의 메시야성을 숨기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문제는 부활하신 메시야적 예수님의 모습에 대한 강조가 예수님의 지상사역에서 비메시야적 성격을 현저하게 감소시키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마가는 복음서를 통해서 예수님은 자신의 메시야성을 숨기기를 원하는 것으로 그리고 있다. 마가복음 전체를 통해서 예수님이 메시야라는 사실이 철저하게 숨기워진다. 예수님은 자신에 대해서 귀신들, 그가 치유한 사람들, 제자들에게 까지 자신을 드러내지 말 것을 명령하신다.
이에 대한 첫 번째 대대적인 공격은 역사적 예수 연구를 하는 사람들에 의한 것이다. 기념비적인 공격을 한 사람은 슈바이쳐였다. 슈바이쳐는 예수님의 메시야성은 부활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자의식에 기초한다고 보았기 때문에 브레데를 배격하기 시작했다.(Von Reimarus zu Wrede, 1906) 그러므로 예수님의 메시야성은 부활 이전 곧 역사적 예수님 자신에게 기인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슈바이쳐의 의견에 기본적으로 동의하는 사람들이 케제만1)
과 보른캄2)
등이다.
그러나 브레데의 이론을 긍정적으로 수용한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디벨리우스, 불트만, 에벨링, 콘첼만 등의 양식 비평가들이다. 이들은 마가복음이 편집자의 편집물이라고 보기 때문에 편집자는 마가 자신이 살던 시대를 향한 복음 선포 형식이었고, 그 열쇠는 메시야 은닉에 있었다고 주장한다. 아무튼 브레데의 이론은 크게 반대와 지지의 양편에 의해서 1960년대까지 마가복음 기독론의 기준이 되었다.
메시야 은닉 이론에 대한 새로운 조망이 시작되었는데, 그것은 Ulrich Luz 로부터 시작한다. 브레데의 이론이 예수님의 침묵 명령, 비유로 말씀하심, 제자들의 무지함 등이 동일하게 메시야 은닉이론을 뒷받침하는 것이라고 주장한 반면 루즈는 예수님의 침묵 명령을 두 부류로 나눈다. 귀신들에게 침묵을 명하신 것, 그리고 치유한 사람들에게 침묵을 요구하신 것이다. 그러나 루즈가 지적하듯이 두 번째 부류에 의한 명령은 지켜지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들은 예수님의 이적을 체험하고는 그것을 온땅에 선포하지 않고는 견딜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첫 번째 부류와 두 번째 부류는 궁극적으로 동일한 메시야 은닉을 목표로 가지지 않는다. 오히려 후자는 그의 공적인 선포와 관련있다고 보는 것이 정당하다.
루즈가 침묵명령을 성공적으로 구분하였다면, Theodore Weeden은 제자들의 무지도 메시야 은닉 이론과 결별하게끔 하였다. 제자들의 이해 부족은 마가복음 서술의 지배적인 주제를 형성하고 있는 것으로 구체적으로 마가복음의 은닉이론과 관련이 없다고 말하였다.
"예수님의 비유는 하나님 나라의 비유와 관련이 있다. 그러므로 왕국의 비밀을 메시야 은닉 이론으로 제약시키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다" 라고 슈바이쳐가 주장하였다.
결국 이러한 새로운 연구로 인하여 70년대에 오면서 브레데의 이론은 더 이상 힘을 발휘하지 못하게 된다. 오히려 메시야 은닉의 주제는 마가복음의 주된 흐름이 아니라 여러 흐름중의 하나로만 인정이 되고 있으며, 메시야 은닉 이론은 귀신들과 제자들에게 명하신 그 내용에 한정된다.
새로운 접근이 필요하게 되었다. 예수님의 자기 은닉 사상은 마가복음에서 여전히 중요한 주제로 언급된다. 메시야 은닉은 특별히 예수님의 아들됨과 연관이 있다.3)
그러므로 예수님에 대한 여러 칭호들과 관련하여 예수님의 정체과 은닉의 특성들을 함께 고려해 보아야 할 것이다. 마가복음의 첫 서두부터 마지막에 이르기까지 중요하고, 가장 자주 언급되는 명칭은 "하나님의 아들"이다. 차라리 메시야 은닉이라는 말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의 아들되심에 대한 은닉이 더 정확할 것이다. 마가복음은 "하나님의 아들됨"의 비밀이 마지막까지 정확하게 드러나지 않고 있다. 몇몇 경우 그것들이 증언되기는 하지만, 정확한 개념을 가지지 못하기에 15:39에서 백부장이 그것을 증언하기 까지 그 비밀이 알려지는 것은 계속 보류된다.
2. 수정적 기독론
수정적 기독론의 기본적인 출발점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가 예수님의 지상 사역을 이해하는 데 방해가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마가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를 수정하기 위하여 복음서를 썼다는 것이다. 그리고 복음서 기자는 고난받는 메시야의 모습을 그리기 위해서 "인자"라는 칭호를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다고 주장된다.
이러한 수정적 기독론의 첫 번째 신학적 근거는 신적 인간(divine man; ? )에 대한 개념이다.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심으로 단순한 인간이 아니라 초자연적 존재가 되었다. 성령을 통해서 그는 초자연적 능력을 부여받게 되었고, 이로 인하여 이적을 행하고 복음을 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신적 인간은 고대 헬라적 개념이다. 신적인간은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신적인 것이 자신 속에 내재함에 따라 천재적인 사람이나 초인적인 사람이 된다.4)
그런데 이러한 개념이 예수님을 이해하는데 적용되었다. 그래서 바울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묘사할 때는 예수님의 선재가 강조되고 있지만, 마가복음에서는 예수님의 선재에 대한 힌트를 얻을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세례를 받음으로서 비로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사람들은 이렇게 예수님을 신적 인간으로 소개하고 있었고, 예수님의 지상 사역은 고난받는 종의 모습이 아니라, 오히려 영광받으신 존재로서 믿어야 한다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마가복음 기자는 제자들로 하여금 영광의 신학을 지지하는 존재들로 그리고, 예수님은 십자가의 신학을 지지하는 자로 기술하게 된 것이다. 결국 예수님을 신적 인간으로 그린 초대 교회의 잘못된 전승을 수정하기 위해서 메시야 은닉 이론과 함께 "인자"라는 칭호를 마가가 부각시키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에게 있어서 인자라는 칭호는 유일하게 합당한 기독론적 칭호로 받아들여 진다.
신적 인간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마가복음의 기독론을 규정할 수 있을까? 언어학자 von Martitz는 헬라문헌에 대한 연구를 통해서 신적 인간은 기독교 시대에 있어서 어떤 형태로든 전문적 용어 혹은 고정된 표현으로 사용되지 않았음을 밝혀내었다.5)
그리고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신적 인간 개념의 소개로 인하여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가 생겨났다는 수정적 기독론의 주장은 힘을 잃을 것이다. 그들은 너무 쉽게 헬라적 신적 인간 개념이 고정된 개념으로 초대 교회에 유입되었다고 가정해 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가가 복음서를 기록한 목적이 이단적인 신적 인간 기독론에 의해 왜곡된 개념들을 수정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인자"라는 용어를 통해서 이러한 왜곡된 개념들을 수정하기를 원했다면 복음서 기자는 이 사실을 복음서 자체에서 보다 명료하게 밝혔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도 용어는 오히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용어가 중심되는 위치에서 더 많이 사용되어진 것은 무슨 이유인가?6)
평가를 해보자. 브레데로부터 시작해서 양식비평가들은 마가복음을 전승 비평적으로 해석하여서 본문을 초대 기독교의 환경과 1세기의 환경에 기초해서 재구성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이렇게 전승 비평적인 접근 방법을 가지고 문헌 자체의 메시지를 결정하는 자리에 까지 나아가는 잘못을 범하였다. 그리고 이들에 의하면 신적 인간의 개념이 없이는 하나님의 아들의 개념이 설득력을 잃는다면 신적 인간 개념이 더 이상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는 현재에는 이들의 수정적 기독론도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하게 되었다. 또한 복음서 기자는 복음서 어디에서도 수정적인 의도를 보이지 않았으며, 하나님의 아들에 대해서 반대의 입장을 밝히지 않고 있음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신적 인간과 관련해서 1:10에 대한 해석적인 잘못을 범하고 있다. ? 이라는 말에 사용된 ?는 안으로의 뜻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이 예수님 안으로 들어갔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신적 인간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통상적으로 ?는 안으로의 의미도 있지만, 다른 많은 경우에 ? 혹은 의 의미를 가진다. 실제로 다른 복음서는 를 사용하고 있다.
3.마가의 기독론
관점의 문제를 먼저 지적해야 한다. 마가는 단순히 사건들만을 열거한 것이 아니라, 독자들이 그의 이야기에 몰두하여서 마가의 관점을 받아들이도록 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마가는 복음서 안에서 자신의 관점을 1:1에서 명확하게 밝혔고, 이러한 평가적 관점은 하나님의 평가적 관점(1:11,9:7)과 일치시키고 있다. 결국 저자로서의 마가는 자신의 평가적 관점을 예수님의 그것과 일치시키며, 더 나아가서 자신의 관점을 하나님의 관점과 동일시 한다는 것이다. 마가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음성(평가)은 그의 복음서의 절대적인 규범이 되는 것이다.
마가가 복음서를 통하여 끊임없이 묻고 있는 질문은 "예수님은 누구인가?"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에 대해서 그가 내리는 결론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다. 여러 가지 칭호들이 사용되었지만 오직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만이 초자연적인 존재들에 의해서 사용되어지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마가는 먼저 하나님의 아들 개념을 이야기할 것임을 천명하였다.(1:1) 그리고 그 칭호는 하나님에 의해서 계속적으로 규범으로써 확증되고 있다. 이로써 마가는 평가적 관점에서 그의 독자들이 자신이 말하고 있는 예수님에 대한 올바른 고백에 이르기를 바라고 있다. 그러므로 마가는 독자들에게 예수님 곧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깨달음을 가지도록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마가의 고백은 마가복음 전체의 틀이 된다. 그것은 하나님의 관점이기도 하고, 마가가 주장하는 것이기도 하다. 더 나아가서 그것은 독자들에게 요구되어 지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측면에서 "하나님의 아들" 개념은 마가복음에서 비밀로 나타나고 있다. 하나님의 아들에 대해서 몇몇 사람들이 고백하지만 15:39에서 백부장이 고백하기 까지 예수님의 하나님의 아들되심은 구체적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베드로가 비록 고백을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예수님의 고난에 대한 개념이 빠져있는 불충분한 개념이다. 하나님의 평가적 관점에 미치지 못하는 고백인 셈이다. 바디매오의 고백도, 악한 농부 비유에 나타난 이야기들(12:1-12)도, 또한 대제사장들이 요구한 " 찬송받을 자의 아들 그리스도냐?"라는 질문 속에서도 결국 예수님의 하나님의 아들됨은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의 순간에 외쳐진 백부장의 고백은 예수님의 하나님의 아들되심을 명확히 드러내는 것으로, 그리고 마가복음의 하나님 아들 은닉 사상을 종결 짓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리고 그의 고백의 확증은 예수님의 부활에 있다.
결국 메시야 은닉의 주제는 예수님의 이야기를 통해서 예수님에 대한 인간의 생각들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하나님의 평가적 관점 곧 하나님의 생각에 일치하도록 바꾸어 놓기 위한 것이었다.(8:33) 왜냐하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오직 그를 통해서만 그의 종말론적 통치 영역에서 구원과 생명을 제공하시기 때문이다.
인자
마가복음에서 인자라는 용어는 절대적으로 예수님 자신에 의해서만 사용되어 진다는 점에서 독특한 위치를 가진다. 다른 칭호들은 서로의 연관성 속에서 나타나지만 인자는 오직 독립적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마가복음의 가장 중요한 질문은 예수님은 누구신가?에 대한 어떠한 고백적 기능도 가지고 있지 않다.7)
확실히 인자는 다른 명칭들과 철저하게 구분되며, 전혀 다른 성격과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볼수 있다.
첫째, 마가는 인자라는 용어를 예수님의 정체성을 규명하는데 사용하지 않았다.
둘째, 예수님만이 이 용어를 사용하셨다.
셋째, 이 용어는 항상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성 속에서 언급되어 진다. 이것은 예수님에 대한 소개가 아니라, 예수님의 권세와 능력 역할을 규명하고 있다. 그 역할에는 예수님의 고난, 죽음과 부활, 그리고 재림에까지 관련된다.(2:10,28,8:38,13:26,14:62) 결국 이 용어는 예수님 자신에 의해 사용되어 졌으며 예수님의 위엄을 나타내는 용어로 쓰여지고 있다. 그래서 예수님을 다른 사람에게 공적으로 나타내거나 대적자들에게 신적인 권위를 드러내는데 사용하고 있다. 그러므로 인자 칭호는 예수님의 자기 은닉 주제와는 상관이 없고 오히려 세상과의 관계에 집중하고 있는 것이다.
4. 결 론
마가는 하나님의 아들과 관련해서 예수님의 은닉 주제를 통하여 예수님에 대해서 강조하는 것은 예수님을 올바로 이해하려면 반드시 하나님께서 정하신 운명인 십자가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또한 인자라는 칭호를 통하여 하나님의 아들 개념을 보충하고 돕는 기능을 하고 있다. 예수님의 인자되심은 예수님의 세상에 대한 관계에 주목하고 있으며, 예수님을 위엄의 인물로 묘사하고 재림주로까지 묘사함으로 하나님의 아들되신 예수님에 대한 올바른 평가적 관점을 가지지 않는 모든 사람들에게 경고하고 있다. 인자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그의 아버지의 영광과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세상에 나타나셔서 구약 예언의 인자의 역할을 수행하시어 심판을 행사하시고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를 가져오심으로 하나님의 아들되심을 입증한다.
하나님의 아들 개념이 예수님에 대한 올바른 판단, 즉 백부장과 부활이후의 제자들의 모습들처럼 올바르게 고백하도록 요청한다. 나아가서 인자의 개념은 독자들이 마가의 이야기를 듣고도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지 않는 자들은 " 이 죄많고 음란한 세대"에서 예수님을 부끄러워하는 자들과 같은 자들로서 재림의 때에 예수님께서도 저들을 부끄러워 하실 것임을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8:38,13:24-26,14:62)
결국 마가복음은 선포적 성격을 가지고 예수님이 왕적인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고백할 것을 구체적으로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1 케제만은 지상의 예수가 자신을 메시야로 드러냈든 안냈든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말씀에 나타난 비길데 없는 권위 주장이라고 말하였다. 권위에 대한 주장은 본질적으로 예수님의 메시야적 성격을 강조하게 된다.
2 그는 [나사렛 예수]라는 글에서 메시야적 칭호를 예수님께서 적용시키시지는 않았지만, 예수님은 분명한 의도를 가지고 따르는 사람들에게 메시야임을 깨우치려 하였다고 언급한다.
3 이것은 새로운 관찰은 아니다. 많은 학자들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4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헤라클레스와 같은 인물이 신적 인간으로 간주된다.
5 초대 교회에 고정된 개념으로 영입되었다는 전제가 여지없이 깨어진다. 초대 교회 당시는 신적 인간에 대한 개념이 고정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헬라에서는 기적을 행하는 것이 필수적인 조건은 아니다. 도덕적으로 선한 사람도, 혹은 힘이 좋은 사람도 모두가 신적인간의 개념에 포함되었다. 그러므로 신적 인간에 기초해서 영광의 기독론을 반대하기 위해 마가가 복음서를 썼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전제가 여지없이 무너지게 된 것이다.
6 하나님의 아들 칭호는 복음서의 첫 서두, 그리고 마지막 본문인 부활 기사, 그리고 첫 번째 서론적 문단인 예수님의 세례 장면, 베드로의 고백, 바디메오의 고백, 그리고 백부장의 고백 등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이 본문들은 마가복음을 문학적으로 구분할 때도 가장 핵심적인 위치에 있는 본문들이다.
7 나머지 모든 칭호는 호격으로도 사용되며, 예수님에 대한 고백으로 사용된다. 하나님의 아들, 다윗의 자손, 유대인의 왕, 메시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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