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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의 만인사제주의와 근대

지식창고지기 2012. 1. 24. 09:55

루터의 만인사제주의와 근대
개인주의는 근대 완성의 전제조건


루터의 종교개혁
1517년 10월 31일 마틴 루터(Martin Luther)는 카톨릭의 면죄부 판매를 반박하는 95개조 논제를 비텐베르크(Wittenberg) 성(城) 교회 대문에 내걸었다. 이 사건을 시작으로 루터는 그 자신이 전혀 예기치 못했던 거대한 역사적 흐름을 이끌게 됐다.

1519년 수많은 군중이 운집한 가운데 벌어진 라이프치히(Leipzig) 토론에서 루터는 대담하게 교황도 오류를 범할 수 있는 일개 인간에 불과하며, 한 개인의 양심을 지배하는 최고의 권위는 성경의 진리뿐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교황 레오(Leo) 10세는 이 수도사를 이단자로 기소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루터의 생애에서 가장 창조적인 시기는 1520년이었다. 이 해에 그는 자신의 종교개혁 이념의 기초가 될 세 편의 중대한 팜플렛을 작성했다. 이 저술들에서 그는 자신의 세 가지 신학적 전제, 즉 믿음지상주의(sola fide), 성경지상주의(sola script-xura), 그리고 만인사제주의(universal priesthood of believers)를 주장했다.

1520년의 저술들은 인쇄술의 힘으로 널리 유포됐고, 루터는 대중으로부터 광범하고도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이 독일인 반란자는 1520년 말에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라는 레오 10세의 교서를 받자, 수많은 군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 교서를 불 속에 집어 던졌다. 이 일을 계기로 사태는 급진전했다.

루터는 1521년 초 보름스(Worms) 시에서 개최된 신성로마제국 제후들의 국회에서 심문을 받게 됐다. 보름스 국회의 의장이자 신성로마 황제인 카를 5세 앞에서 루터는 감히 이렇게 선언했다.

“나의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나는 아무 것도 취소할 수 없고 또 취소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양심에 어긋난 행동을 한다는 것은 안전하지도 않고 옳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나는 달리 어찌 할 수 없습니다. 여기 내가 있나이다. 하나님이시여 이 몸을 도우소서, 아멘.”

믿음지상주의
믿음지상주의란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는 전제로부터 출발한다. 비유로써 설명해보기로 하자. 인간이 죄인이라 하고, 무거운 벌금을 물어야만 자유를 얻을 수 있다고 하자. 아무리 벌금이 무겁다 해도, 인간에게 있어서 자유란 그 벌금보다도 훨씬 더 큰 가치를 갖는 것이며, 따라서 인간은 매우 헐값에 제의를 받은 셈이다. 따라서 그 벌금을 지불할 능력이 있는 한 인간은 아무런 어려움도 겪을 필요가 없다.

그러나 루터는 (아우구스티누스와 마찬가지로) 자신에게 벌금을 낼 능력이 전무하다고 생각했다. 여기에 루터의 실존적 고민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루터는 1515년경 “믿음만에 의한 의인(義認)”의 원리를 깨닫게 되면서 절망으로부터 탈출했다. 루터에 의하면, 인간은 자유를 사는데 필요한 돈을 신으로부터 제공받았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의인에 필요한 모든 것을 제공했으며, 인간은 단지 그것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의인에 있어서 하나님은 적극적이고 인간은 수동적이다. 하나님은 베풀고 제공하며, 인간은 이를 받아들이고 향유한다. 루터의 “믿음만에 의한 의인”의 교리는 신이 인간의 구원에 필요한 모든 일을 한다는 사실의 확인이었다. 믿음 그 자체마저도 인간의 행위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은혜였다. 그러므로 참된 회개란 은혜를 얻기 위한 “전제 조건”이라기보다는, 은혜에 대한 감사의 마음으로 자연스럽게 우러나는 “결과”인 셈이다.

성경지상주의
믿음지상주의가 종교개혁의 질료적 원리(material principle)라면, 성경지상주의는 종교개혁의 형상적 원리(formal principle)에 해당한다. 루터는 교황을 제위에서 끌어내리고 그 자리에 성경을 올려놓았다. 루터에게 종교적 진리의 유일한 근원은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성경만이 권위를 갖는 이유는,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 책이며,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을 부여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과 서로 소통할 수 있는 통로였기 때문이다.

만인사제주의
루터는 모든 개혁이 신자 개개인의 가슴속에서 시작해야만 한다고 선언했다. 신자와 그리스도를 결합시키는 것은 믿음뿐이었다. 인간의 영혼은 믿음에 의해, 성경에 드러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비로소 의롭다 여김을 얻고 하나님의 참된 자녀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과 한 인간의 영혼 사이에는 다른 인간이 개입할 수 없었다. 영적인 지위 면에서 평신도는 성직자와 대등했다. 평신도와 성직자 모두 오직 믿음을 통해 하나님에게 직접 나아갈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모든 평신도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자격이 있으며, 서로 기도할 수 있고, 하나님에 관한 것을 서로 가르칠 수 있다”는 것이 루터의 생각이었다. 영적인 평등사상이 주창된 것이다.

만인사제주의의 역사적 전개
종교개혁의 주요 원리 중 하나로서 제시된 만인사제주의는 흔히 정치적 의미에서의 개인의 권리를 옹호하고 자유주의의 원리를 만들어낸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사실 종교개혁은 양심의 자유와 관용의 미덕을 확립해 민주주의와 자유주의의 발전에 기여할 목적을 가진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정작 루터 자신은 자유주의에도 민주주의에도 관심이 없었다. 종교개혁과 자유주의와의 긍정적인 관계는 루터가 전혀 예기치 않았던 결과로의 발전이었다.

그러나 루터가 제시한 만인사제주의는 그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근대 유럽의 정치적·사회적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루터는 만인사제주의가 민주주의적 정치 구조를 의미한다고는 전혀 생각한 바가 없었다. 독일 농민전쟁에 대한 루터의 태도에서도 볼 수 있듯이, 그는 사회적 불평등은 필요하다고 믿었고, 농노제의 폐지를 주장하는 자들은 도둑질을 부채질하는 자들이라고 비난했다. 그가 주장한 것은 어디까지나 영적 평등이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터의 만인사제주의는 훗날 개인주의의 성장을 크게 자극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영감을 얻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하나님의 뜻에 대한 자신의 이해가 다른 사람보다 정확하다고 주장할 수 있었고, 모두 다 제각기 성경을 독자적으로 해석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인식론적 개인주의
성경 해석상의 이러한 인식론적 개인주의(認識論的 個人主義)는 그 후 17세기 잉글랜드의 시인이자 급진적 프로테스탄트인 존 밀턴(John Milton)에 이르러 논리적 철저성을 갖추게 됐다. 밀턴은 성경 해석에서 양심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시금석이라고 주장했다. 밀턴에 의하면, 어떤 신학자도 평신도에게 성경을 일방적으로 해석해 줄 수 없었다.

오직 신학자의 해석이 그 평신도의 양심(올바른 이성)에 입각한 해석과 일치될 때에만 그 해석은 평신도에게 유용한 것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밀턴의 인식론적 개인주의는 필연적으로 개개인이 파악한 성경 진리의 자유로운 표현과 토론을 옹호하는 주장으로 이어졌다. 그 후 그것은 근대의 세속화 과정과 더불어 종교적 특징이 탈색됐고, 19세기에 이르러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이 <자유론>에서 사상과 언론의 자유를 주장함으로써 절정에 이르게 됐다.

종교개혁의 개인주의는 또한 평등주의 사상을 불러 일으켰다. 루터는 “만일 성직자가 살해되면 나라 전체가 파문 당하는데, 농부가 살해되면 왜 그렇지 않은가? 두 사람은 똑같은 기독교인인데 어째서 그토록 큰 차이가 발생하는가”라고 물었다.

루터는 이 평등론을 영적인 세계에 국한시키려 했을지 모르나 영적 세계와 현실의 세계를 분리시킨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사실 카톨릭 교회의 계서제(hierarchy)에 대한 공격에서 세속적 불평등에 대한 공격까지의 거리는 오십보 백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급진적 종교개혁을 주장한 재세례파는 1520년대 이후 세속적 불평등에 대한 공격을 개시했다. 종교개혁의 민주주의적 함의(含意)는 근대 초기의 급진주의 정치사상의 주요한 원천이었다.

만인사제주의와 자유주의
루터의 종교개혁에서 천명된 만인사제주의는 종교문제에 대한 개인적 판단(private judgement)을 행사할 수 있는 자각적이고 지적으로 성숙한 프로테스탄트 개인들을 전제로 했다. 그리고 만인사제주의에 내포된 인식론적 개인주의는 세속주의의 물결에 의해 종교적 색채가 씻겨나가기만 하면 곧장 정치적·사회적 영역에 적용될 수 있었다.

개인주의는 일견 사회적 결속력의 약화와 파편화를 초래할 것처럼 보일지 모르나, 그것은 개인의 자아 성숙과 도덕적 건강성에 통합의 기반을 갖고 있었다. 자유주의는 바로 이러한 개인주의의 철학적 토대 위에 구축된 것이었다.

1980년대 이후 우리 사회 일각에서 확산된 포스트모더니즘 담론을 검토해 볼 때, 이제 막 근대 초입에 들어선 우리 사회의 역사적 단계에 비해 담론이 지나치게 앞서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금할 수 없다. 여전히 기세 등등한 망국적이고 전근대적인 지역 감정, 그리고 정치인·관료·언론인 사이에 팽배해 있는 불합리와 부정부패를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이런 의미에서 이성과 합리성 등 우리 사회에 가장 필요한 내용들을 이미 낡은 것이라고 비판해온 포스트모더니즘 담론에는 명백히 시대착오적인 측면이 있다. 적어도 현 시점에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근대성의 착실한 완성이지 탈근대로의 경박한 미끄러짐이 아닌 것이다. 불행한 일이지만(!), 루터의 메시지는 종교적으로나 세속적으로 우리 사회에서 여전히 타당하다.

우석대학교 인문학부 교수(서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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