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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흐

지식창고지기 2012. 1. 24. 09:56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흐
Friedrich Schleiemacher, 1768∼1834
종교적 감정 안에 내재하시는 하나님


19세기의 신학자들은 계몽사상에 의해 초래되었던 곤경을 넘어서고자 했으며, 또한 그 결과로 초월성과 내재성 사이의 새로운 관계를 정립하려고 했다. 이러한 목적을 위하여 칸트는 윤리와 도덕을 종교라는 특정차원의 초점으로 제시하였다. 헤겔은 이 초점을 지적 또는 사변적 영역으로 이동시켰다. 보다 훨씬 더 혁신적인 것은 금세기 초 수십 년간을 대표하는 세 번째로 위대한 사상가였던 프리드리히 다니엘 에른스트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흐의 제안이었다.
그의 제안은 그가 '감정'이라고 부르는 인간의 특별한 경험, 곧 직관적 삶을 종교의 중심으로 격상시키는 것이었다. 그는 신학의 근거를 찾기 위하여 감정에 주목했다. 현대 기독교 학자들은 거의 보편적으로 슐라이어마흐를 현대신학의 아버지로서 인정한다.

슐라이어마흐의 삶과 그의 경력
슐라이어마흐는 기독교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설교자의 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뿐만 아니라 슐라이어마흐는 19세기 전반기 동안 독일의 종교, 문화의 지도자였다. 슐라이어마흐의 삶의 경험은 그가 기독교사상을 독특하게 재구성하는게 크게 기여하였다,
슐라이어마흐는 프러시아의 브레스라우에서 1768년 1월 21일에 태어났다. 그의 아머지는 개혁교회의 목사로서 프러시아 부대의 군목으로 시무하고 있었다. 그의 가정은 프러시아 개혁교회를 떠나지 않았지만, 매우 열정적이고 복음적이며 신앙적인 생활을 했다. 열네살 때 프리드리히는 경건주의풍의 학교로 보내져 그곳에서 기숙사 생활을 했고, 후에는 목회생활을 위하여 경건주의 신학교에 갔다. 한편 그는 언젠가부터 정통개신교의 핵심적 교리들 가운데 어떤 부분에 대하여 의심을 품기 시작헸다. 그는 속죄의 대속교리에 대해 회의를 피력했으나, 그럼에고 불구하고 '기독교적 감동' 또는 신앙의 감정들을 강조하는 경건주의 감정을 결코 잃어버리지 않았다. 슐라이어마흐는 정통적인 개신교 신학으로부터 이탈해 칸트의 회의주의에 심취하며 계몽주의 철학을 널리 섭렵해 갔다.
1790년 슐라이어마흐는 개혁교회의 목사로서 안수를 받았고, 이후 그는 교회기관의 여러 직책과 귀족 명가의 직임을 맡았다. 그는 몇 년 동안 새로운 운동인 로만시티즘에 매료되었다. 로만시티즘(혹은 낭만주의)은 계몽주의 철학의 냉랭한 합리주의에 대한 반작용이었다. 그것은 인간의 감정과 상상력, 직관 등을 매우 강조하였다.
슐라이어마흐는 사교성이 풍부하고 매력적이며 영리한 화술가였다. 그가 최초의 역작「신앙에 관하여 : 신앙을 멸히사는 교양인들에게 쓰는 담화(On Religion : Speeches to Its Cultured Despisers, 1799)」를 쓴 것은 친구들에게 신앙이라는 것이 그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과는 다르다는 것을 설득하려는 의도 때문이었다. 이 책은 '계몽주의화한 경건주의'와 로만티시즘을 섞어서 진정한 신앙은 '하나님에 관한 교리적이거나 신조적 명령에 복종하는 것과는 다른,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관계'라는 점을 입증하려고 한다.
그의 대작은 1821 - 1822년에 처음 나오고 1831년에 개정한「기독교 신앙(Christian Theology)」이라는 제목의 조직신학이었다. 이 거대한 작품 속에서 슐라이어마흐는 현대를 위한 기독교 교리의 체계를 제시했다. 전통주의자들에게 이「기독교 신앙」은 계몽주의 시대의 반 초자연주의적 정신을 요인한다는 합의 각서와 같은 것으로 마치 하나님에 대하여 말하는 것 같으나 슬쩍 위장하여 인간에 대하여 말하려는 시도의 표현이었다. 진보주의자들에게 그것은 유행이 다 지난 권위주의적 교의서로 부터의 해방이며 동시에 과학과 갈등하지 않는 진정한 의미의 현대적 기독교 신앙 형태로의 전이를 뜻했다. 그 책이 출판되자 범신론 운운하는 비난과 함께 가혹한 비판의 폭풍이 터져 나왔다.
슐라이어마흐는 1834년 2월 12일 폐렴으로 사망했는데, 그는 가족과 함께 성찬식에 참여하는 중에 임종을 맞았다.

계몽주의에 대한 슐라이어마흐의 반응
슐라이어마흐의 신학은 주로 그가 살던 때의 문화적 상황과 지적 상황에 대한 반응으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지적인 측면에서 보면, 18세기는 인간의 이성을 격상시키고 이성에게 거의 무한한 권위를 부여하여 전통적 신념들을 비판하고 그 신념들 대신 새로운 진리들을 확립하게 했다. 계몽주의 시대에는 역사비평이라고 하는 새로운 학문이, 성경 및 그 밖의 기독교 권위있는 문서들의 기원에 대한 질문들을 제기 했다. 그러나 슐라이어마흐 신학의 문화적 맥락을 형성시켜 주었던 새로운 상황은 낭만주의 운동이었다. 감정을 강조하는 낭만주의로부터 슐라이어마흐는 현대 문화의 근본정신과 갈등을 빚지 않을 기독교 재편의 단서를 발견했다.

신학적 방법
그는 ― 종교라고 하는 것이 진정한 인간에게 필연적으로 있게 마련인 어떤 경험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며, 심지어는 그것과 동일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 인간의 경험에 기초하는 신학을 시도하려고 했다. 그래서 그는 인간을 희생시키고 하나님만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양자 모두를 어떤 고유의 방법으로 묶을 수 있도록 어떤 기독교 교리의 재편을 시도하였다. 그의 이러한 시도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의 기초를 실천이성에 두려 했던 칸트의 시도나 절대정신이 역사를 통하여 진행하는 것을 탐색하는 새로운 사변적 합리주의에 신학의 기초를 놓으려고 했던 헤겔의 노력과 함께 직관을 통하여 하나의 접근방법을 제공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근본적이며 보편적인 인간의 감정, 곧 실재 전체에 대한 의존감정에 주목했다.
슐라이어마흐 이전에는 신학이 주로 두 가지 방식으로 이해되었다. 정통주의는 이 학문을 초자연적으로 계시된 진리들에 대한 성찰로 보았기 때문에 '위로부터'의 신학이었다. 한편 계몽주의 신학은 그 작업을 하나님에 대한 합리적 사고에 관한 성찰이라고 보고, 일종의 '아래로부터'의 신학을 했다. 슐라이어마흐는 이 두 가지 대안들을 대신하여, 신학을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경험의 인간적 성찰로 간주함으로써 신학의 전혀 새로운 길을 개척하였다. 이렇게 됨으로써 영원하고 권위적인 명제들이 아닌 종교적 경험이 신학적 성찰의 진정한 근거가 되었다.
슐라이어마흐가 종교를 '감정'과 동일시하고 있는 것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독일어의 Gefuhl이라는 말은 영어로 감정(sensation)이라는 말의 뜻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깊고 심오한 의식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그가 말하는 느낌이라는 말은 의식 중에 '성찰-이전적'상태, 곧 뚜렷한 사고나 감정 이전 혹은 그 밑에서 발견되는 것이다. 슐라이어마흐는 그런 종교적 감정(그것을 그는 종종 '경건'이라고 불렀다)이 인간의 경험 안에 근본적으로 존재하며 보편적인 것이라고 믿었다. 그것은 인간의 본성 중 이성이라든지 양심과 같은 다른 양상으로 환원될 수 없는 것이다. 그는 경건과 종교를 과학과 도덕과는 다는 것으로 구분하려고 했을 뿐 아니라, 그것이 교의들이나 신학의 체계들과 구분됨을 보이고자 했다. 종교는 교의나 신학적 개념들이 없이도 큰 탈이 없으나 종교적 감정에 대한 성찰을 하기 위해서는 그것들을 필요로 하며 또 종교적 성찰은 그것들을 창출한다.
「기독교 신앙」에서 슐라이어마흐가 이룬 혁신은 이른바 "믿는 주체로 돌아가라(turn to the believing subject)"는 데 있다. 슐라이어마흐는 종교적 경험이 주된 것이고, 신학은 그 다음으로 이차적인 것이기 때문에 반드시 기독교공동체들의 변화하는 양상과 관련하여 항시 개혁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모든 교리의 형태는 어떤 특정의 시기에 국한된 것이므로 그것에 대한 영속적 가치를 주장할 수 없다. 어느 시대에건 살아있는 종교적 의식의 함의를 비판적 성찰에 의거하여 새로이 표현하는 것이 신학의 과제이다.
슐라이어마흐의 신학적 방법은 계몽주의에 의한 진취적 사상을 흡수하는 한편 그것을 넘어서려는 시도였다. 그의 신학적 방법은 감정과 직관적 지식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비록 로만티시즘의 주관주의와 비이성주의를 피하고는 있으나, 낭만주의 운동에 호소한 것이었다. 종교를 인간경험에 있어서 환원될 수 없는 한 요소로서 보아 그 독특성을 주장했고,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식'의 지고한 표현으로 보아 그의 독특성을 주장하고 있는 점에서 계몽주의와 결정적으로 결별하고 있다.

교리의 혁신
슐라이어마흐 신학에 있어서 성경은, 중심적 위치는 아닐지 몰라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성경이 특별한 것은 그것이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종교적 경험을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의 권위는 절대적이지 않다. 오히려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이 특정의 역사적 상황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의미를 해석하는 모든 시도들에 대한 모범으로서의 역할을 한다. 성경이 초자연적으로 영감되었거나 무오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성경은 그것이 그리스도 자신의 '하나님­의식'의 순수한 모델이 나타날 때마다, 기독교 신학을 위한 하나의 상대적 권위를 가진다.

하나님
슐라이어마흐가 재구성한 신론은 그리스도인들의 경건한 하나님­의식, 곧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절대 의존감정에 의해 결정된 것이었다.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는 항상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경험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이다. 그러한 진술은 하나님-그 자체(God-in himself)를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험하는 어떤 방식을 묘사하는 것이다. 슐라이어마흐는 기적의 현실성을 단호하게 거부하였다. 절대 의존 감정은 자연의 모든 것, 그것이 부분적이든 전체적이든, 하나님이 의도하시고 정하신 것이며, 하나님이 그 원인이 되고 있는 것임을 전제한다. 자연의 질서를 폐기하는 특별한 행동이라는 뜻에서 볼 때, 기적은 이러한 사실과 상반된다.
마찬가지 이유에서, 슐라이어마흐는 중보 기도의 효과를 부정했다. 슐라이어마흐가 초자연이라는 범주를 제거하게 되니까 과학 시대의 기독교가 당면하는 문제에 대한 편리한 해결책이 마련되었다.이러므로 과학과 기독교는 원칙적으로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전자는 근인(近因, proximate cause)만을 다루는 데 반해, 후자는 궁극적인 원인을 다룬다.
끝으로, 슐라이어마흐는 삼위일체의 교리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다. 슐라이어마흐는 하나님을 이 세상으로부터, 혹은 세상을 하나님으로부터 분리하기를 거절했다. 하나님이 인격적이라고 하지만, 신인동형론(神人同形論)적으로 그런 것은 아니다. 즉 하나님을 멀리서 이 세계를 다스리는 어떤 위대한 인간과 같은 존재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훨씬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어떤 객체처럼 취급해서도 안된다는 것이다.

기독론
슐라이어마르는 전통적인 성육신 교리를 거부하고 그 대신 '하나님-의식'이라는 경험에 기초한 기독론으로 그것을 대치했다. 그는 예수의 두 가지 본성(인성과 신성)에 대한 고전적 교리가 비논리적이라고 비판했다. 한 개인 안에 두 '본성'이 동시에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 교리 대신 슐라이어마흐는 예수의 이상성(ideality, Urbildlichkeit)과 그것을 다른 사람들 속에 재생시킬 수 있는 그의 능력(Vorbildlichkeit)이 있다는 뜻의 개념으로 대치했다. 예수 그리스도는 "애초부터 절대적으로 막강한 '하나님­의식'을 가지고 있는 존재"라는 사실 외에는 나머지 인간들과 완전히 같다.
슐라이어마흐에 의하며, 예수가 소유했던 이 이상적인 '하나님­의식'은 그리스도인들이 그의 '신성'이라고 하는 것을 표현하기에 충분한 것이다. 이것이 그의 이상성이다. 곧 그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식'의 이상이며, 완전한 경건의 궁극적인 모습이라는 것이다.

평가
그가 제시한 신학적 재구성은 논쟁을 자아냈다. 그의 동시대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그가 범신론자라거나 심지어는 무신론자라고 비난했다. 그에 대한 가장 막강한 혹평을 가했던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은 칼 바르트였다. 바르트는 그의 신학적 신조가 신학을 지나치게 인간 중심적으로 만들었고, 결국 20세기 중반의 어떤 신학자들이 나서서 하나님은 죽었다고까지 선포해 버리게 하는 노선을 설정했다고 비난했다. 바르트가 가한 비판의 대부분은 잘 받아들여지고 있다. 전적으로 인간적인 것을 내세워서 신학적 진리의 근원이며 표준이 되게 할 수 있을까? 슐라이어마흐의 신학적 방법의 약점은 그의 신론에 심각한 결과들을 가져왔다. 슐라이어마흐의 신론은 내재성에 대해 지나치게 강조하는 문제를 안고 있다. 만일 슐라이어마흐가 제시한 하나니과 세계의 관계에 대한 비전은 은총론에 심각한 문제들을 제기한다. 만일 이 세계가 절대적으로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면 하나님이 이 세상을 구속한 것이 어떻게 은혜로운 것이겠는가?
슐라이어마흐는 그의 사상 체계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독특성을 위한 여지를 남겨놓기 위하여 크게 노력했다. 그가 말하는 예수의 '신성'에 대한 설명은 예수를 다른 인간들과 그 정도에 있어서는 몰라도 본질에 있어서는 다르지 않은, 인간의 수준에 그를 두는 것이었다. 이러한 주장은 예수의 신성이 그의 본질적 존재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행동이라고 보는, 오늘날 '기능적 기독론'으로 알려져 있는 사상의 원형이 되고 있다. 그것이 기능적 기독론이므로 하나님의 '자기표현'인 예수의 궁극성과 최고성에 대한 설명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만일 예수가 존재론적으로(본질적으로) 인간 이상의 존재가 아니라고 한다면, 그와 맞먹는 다른 사람, 혹은 그보다 더 위대한 이가 올 수는 없는 것인가?

결론
슐라이어마흐의 신학자적 위대성은 부인할 수 없다. 좋든 싫든, 그의 영향은 현대 신학에 고루 퍼져 있다. 그것은 19세기 말엽쯤에 가서 개신교 사상을 장악하게 된 '자유주의'라고 명명할 수 있는 신학의 학파들에게서 명백하게 나타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