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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고대이집트이야기

지식창고지기 2009. 6. 10. 11:51
 
 
 
이집트이야기 

 

아래 내용은 이집트에 관심이 많은 분들에게 조금 이라도 도움이 될까 하여,제가 아는 약간의 想識과 참고문헌을 拔萃(발췌)하여 記述 하였으니,다소 부족한 점이 있더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나일 강이 흐르고 피라미드와 스핑크스, 그리고 크레오파트라의 사랑이 있는 神秘의 나라 이집트는 아마 저뿐만 아니고 지구촌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꼭 한번쯤 가보고 싶은 憧景(동경)의 나라 好奇心의 나라일 것입니다. 필자도 호기심이 발동하여 나의 內慈(내자)와 함께11박 12일 페키지 코스로 고대 이집트 文化探訪을 다녀왔습니다.나를 압도하는 거대한 遺跡(유적)과 遺物 (피라밋트, 카르나크신전의 大列柱式 기둥, 아부심벨의 람세스신전) 앞에서 나는 나의 외소 함과 수 천년 전의 파라오들의 절대 權力의 힘을 느꼈고, 미라를 만났을 때에는 인간의 慾求가 낳은 부질없는 집착의 虛妄(허망) 함을 느꼈습니다. 死後 세계에 永生 할수 있다는 죽음과 來世에 대한 그들의 독특한 믿음과 생각, 그리고 사람도 아니고 동물도 아닌 무어라고 表現 할 수 없는 附彫物과 壁畵속의 신기한 수많은 神話속의 神들을 보면서 신과 인간의 삶이 共存했던 고대 이집트사람들의 생활상을 상상해보면,수 천년의 時間的 거리를 뛰어넘어 지금 다시 한번 나에게 믿음이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많은 생각을 하게 했습니다, 

인류 역사상 수 많은 主役들이 이 땅을 밟았고, 그들 중 많은 영웅들이 이곳을 점령하고 위대한 帝國을 세웠습니다. 이 땅의 주인이었던  파라오들이 세운 고대 이집트 파라오 제국은  물론이거니와 외부에서 침입해 들어온 알렉산드로스, 로마, 비잔틴, 이슬람, 오스만제국들은 나일 문명의 土臺(토대) 위에서 대 帝國을 건설하였고, 나일문명의 토대위에서 그들 文明의 꽃을 활짝 피웠던 것입니다. 아무리 서구인들이 서양문화의 뿌리를 그리스, 로마 문명에 두고 정체성을 분리하려 하지만,筆者가 보기에는 아마 그 뿌리가 나일문명에 있지 않을까 생각됩니다(神話, 宗敎, 彫刻등)

              

                             바하리아 사막 -1                                                                바하리아 사막-2         

 

지형 및 기후

이집트는 아프리카 북부의 사하라 사막에서 사우디아라비아까지  뻗어 있는 乾燥(건조) 사막지대의 중앙에 위치해있고, 지중해연안 지역에만 겨울에 약 200mm정도 비가내릴 뿐 그외 전 지역은  전혀 비가 내리지 않는다. 기온 상으로는 온대에서 아열대에 속하며,  2월과 5월 사이에 캄신(khamsin) 이라는 계절풍의 모래바람이 불어오고, 겨울철(12월~2월)을 제외 하면 언제나 덥고 건조하다. 지중해 연안의 여름 기온은 31도 지만 南端의 아스완은 50도에 달하는 暴炎(폭염)이 계속되기도 한다. 사막 기후로서 日較差가 심하며 겨울에는 밤의 온도가 5도까지 떨어진다,

인구는 약 8000만 명(2007년)이고, 국토면적은 우리 南韓 땅의 10배 정도 이지만 耕作 할 수 있고 사람이 살아 갈수 있는 지역은 나일 강 유역으로써 이집트 전체면적의 약 5%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종교는 91%정도가 이슬람 수니파이고, 9%정도가 그리스정교의 곱트 기독교이다.고대 이집트인들의 人種은 알 수가 없고,오늘날의 이집트인들은 셈족과 햄족의 混血이고,언어는 아랍어를 公式言語로 史用 하고 있다.

地形의 特性은 아프리카중부 고원지대에서 發原하여 이집트를 가로질러 지중해로 흐르는 나일 강으로써 장장 6700km 에 달하며, 세계에서 제일 긴 강이다. 고대 이집트 시대 나일 강은 단순한 강이 아니라 하나의 神이었고 絶對者였다. 7월 중순경 시리우스(sirius)별이 솟아오르는 세벽녁이 되면 어김없이 나일 강 홍수가 시작 되었으며, 9월 이면  물이 빠졌다. 이때 물속에 잠겼든 나일 강변의 비옥한 堆積層(퇴적층)은 겨울과 봄철에 따사로운 햇볕을 받아 農作物을 무성하게 자라게 했다

               

                          아스완 하이댐 하류                                                                    나일강 선상에서

 

고대이집트의 신화와 신앙

古代 이집트인들은 자신들의 삶은 수많은 自然現象에 의해 左 右 된다고 믿었고. 이 自然現象은 超越的인 어떤 存在의 힘에 의해 이루어 진다고 생각했다. 또 그들은  太陽이 지고 다음날 뜨는 現像그리고 나일강이 범람하여 죽은 땅에 다시 생명을 가져다주는 것 처럼 인간도 죽었다가 다시復活 한다고 믿었다. 이러한 認識(인식)을 바탕으로 그들의  想象力을 동원하여 超自然的인 能力을 가진 수많은 신들을 창조하여 神話를 만들어 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런 神話들은 점점 발전하여 그들이 믿는 信仰이 되었다.

이집트 神話들은 그리스 로마 神話와는 다르게, 體系가 없고 상당히 복잡하고 混亂(혼란)스럽다,그러나 누트 女神이나 이시스 女神처럼 그리스 神話를 聯想시키는 神들을 갖고 있기도 하고,復活의 神 오시리스와 같은 신은 기독교를 聯想(연상) 시키기도 한다

1) 이집트의 중요신들

(1) 天地創造의 신   

 1, 눈(Nun)   

눈은 카오스, 즉 混沌(혼돈)이며 그 형상은 암흑의 바다이다. 모든 창조는 이 바다에서 시작 되었고  모든 事物은 이 바다 속에 있었다고 믿었다. 原始信仰에서는 全 우주를 채우고 있는 것이 물이었기 때문에 이 신은 특정한 形像을 하고 있지 않았다. 오직 知的인 觀念에 그치고 神殿과 崇拜者도 없었다. 이 混沌의 바다 위 “太初의 언덕“에서 太陽神 레(Re)가 나타나면서 時間이 시작되었다.

2, 레(Re), 라(Ra)

레는 太陽을 의미하는 太陽神이며, 머리에 항상 太陽을 이고 있다. 고대 이집트 인들은 만약 이 태양이 사라지면 세상의 終末이오고, 다시 宇宙(우주)는 물로 가득 찬 눈(Nun)의 상태로 다시 돌아 간다고 믿었다. 古王國時代 때는 파라오는 레(Re)의 아들 호루스(Horus)로써 파라오의 이름 뒤에 항상 호루스를 붙여 파라오의 神聖을 강조했다. 파라오만 레를 崇拜 할 수 있었고, 죽어서는 레가 되는 것으로 생각했다.즉 파라오, 호루스, 레를 同一한 存在로 變化했다 (파라오=호루스=레).  태양신은 고 왕국시대 헬리오폴리스의 守護神 이었고 신들의 아버지로 推仰(추앙) 받았다. 이후 新王國時代 때는  테베의 守護神인 아몬신과 結合되어 아몬 레 神이 되었다. 

               

                           카이로의 한과일가게                                                                  아케나톤의 두상

3, 케프리(Khepri)

케프리는 太陽神을 나타내는 레의 한 모습이다. 풍뎅이 머리를 한 男子의 모습이나, 태양의 圓盤을 밀고 가는 풍뎅이의 모습으로 表現되었다. 이는 식량으로 쓸 둥근 瓊團(경단)을 굴리며 앞으로 나아가는 풍뎅이의 모습과 태양이 유사하다고 보았고 또 둥글게 만든 풍뎅이의 排泄物(배설물)에서 알이 다시 태어나기 때문에  풍뎅이를 太陽神의 자기 生殖 능력을 보여주는 再生의 상징으로 받아 들였다.

4, 슈(Shou) 

슈는 宇宙空間의 神이다.슈는 太陽神 레에서 테프누트(습기의신)와 쌍둥이로 태어 났으며. 以後 이들 두 신은 결혼하여 게브(Geb)와 누트(Nout)를 탄생 시켰다.게브와 누트는 태어날 때부터 서로 붙어 있었지만 슈가 이들 둘 사이를 질투하여 서로 불리시켜 하늘과 땅을 만들었다. 슈 는 누트 위에서 게브를 떠 바치고 있거나 무릎을 꿇고 있는 形象을 하고 있으며, 머리에는 자기 이름을 뜻하는 象形文字 모양인  타조의 깃털 장식을 하고있다. 그리고 슈가 들고 있는 뱀 장식의 지팡이는 復活을 상징 한다. (뱀이 허물을 벗기 때문).

                        

          오시리스에게 연꽃을바 침                 대기의신(슈)가 누트와 게브를 갈라놓음              제트기둥(왕권)과 앙크 (생명)  

 

5, 누트(Nout)       

누트는 하늘의 女神이고 슈의 딸이다. 누트는 아치모양으로 길게 늘어난 몸을 둥글게 구부리고 손가락  끝과 발가락으로 슈를 짚고 있는 모습으로 表現되었다. 누트는 낮에는 떨어져 있지만 밤에는 게브에게 내려와 어둠을 만들었다. 누트의 腹部(복부)에는 수많은 별들이 그려지기도 하는데, 이는 누트가 하늘의 여신이기 때문이다. 매일 아침 太陽은 여러 가지 모습으로 누트의 자궁에서 다시 태어난다. 棺 두껑 內部에는 죽은 자의 靈魂이 축복을 받고 죽은 자의 미라와 합쳐 질수 있도록 누트의 몸인 하늘이 그려져 있다.

6, 게브(Geb)

게브는 垈地의 신이고 男神이며 이 세상의 基盤이었다. 게브는 거위모습 또는 머리에 거위가 있는 모습으로 表現 되었다. 이는 거위가 알 에서 孵化(부화)하기 때문이다. 게브는 쌍둥이 누이인 누트와 結婚 하여 이집트 神話에서 가장 많은 역할을 하는 오시리스, 이시스, 세트, 네프티스, 호루스의 目(눈) 을 誕生(탄생) 시켰다.

               

                                사막의 낙타                                                                         코옴보 신전( 세베크, 호루스)

 

(2) 오시리스 신화에 등장하는신

 

오시리스 신화에 나오는 이시스, 오시리스, 호루스는 이집트의 3 대신 이다.

1. 이시스(Isis)  

이시스는 魔法과 사랑의 女神으로 이집트 3대신( 이시스, 오시리스, 호루스) 중의 한신이다,女神의 머리에는 암소의 뿔 사이에 太陽이 들어가 있는데, 이는 호루스부인인 하토르의 상징이었다, 종종 두 女神의 모습이 混同되곤 한다.“오시리스神話”에서의 역할 때문에  충실한 아내이면서 哀悼者(애도자)로, 어린 호루스에게 젖을 먹이고 있는 女人像으로 表現 되었으며, 이 역할을 할 때는 솔개의 모습으로 表現 되었다. 대개 동생이며 세트의 아내인 네프티스 여신과 함께 모습을 보이곤 했다. 新王國 時代 때에는 이시스가 깃털로 덮여 있는 긴 날개로 죽은 자를 保護하는 모습으로 표현 되었으며, 民衆들에게는 어린 아이들을 죽음으로부터 保護하는 여성으로 崇拜 되었다.

2. 오시리스(Osiris)

오시리스는 저승세계의 王으로 죽은자의 神이며, 사람들에게 농사짓는 方法을 가르쳐준 神이다  오시리스는 양손으로 최고의 權力을 상징하는 지팡이와 신의 膺懲(응징)을 나타내는 체찍을 들고있는 모습을 하고있다. 그의 몸에는 垈地를 象徵하는 붉은색과 植物을 상징하는 초록색을 칠 했으며, 수염을 기른 머리에는 上 이집트를 象徵하는 백색 왕관과 또는 2개의 깃털로 이루어진 王冠을 섰다. 오시리스신은 이집트 3신 중의 한 신이며 “오시리스 신화” 에서의 역할과 죽은 자의 왕이기 때문에 民衆들에게 널리 퍼져 있었으며, 復活의 象徵으로 太陽이 뜨고 지는 것과, 나일 강이 매년 홍수가 지는 것은 오시리스의 역할이라 생각했다. 主要崇拜地로는 델타 지역에 있는 아비도스로써 이는 오시리스가 악의 神 세트에게 殺害된 지역이기 때문이다

                 

         람세스3세가 하토르,라 신을 영접                              이시스 여신                             호렘해브가 오시리스신을 경배               

3, 호루스(Horus)

호루스는 戰爭의 신과 勝利를 거둔 지도자를 象徵하는 신으로 왕의 守護者였다, 이신은  매의 形像을 하고 있다. 탁월한 能力을 가진 매가 파라오로 변신해 地上으로 나타난 것으로 확대 해석하여 파라오들은 호루스를 자신들의 이름 뒤에 사용하여 호루스와 同一視 했으며, 동시에 파라오들은  太陽神 레의 아들인 호루스 또는 太陽神 레와 同等한 위치에 있기 때문에 호루스를  太陽神과 同一한 存在로 생각했다. 호루스는 太陽神이면서도 오시리스와 이시스의 아들이라는 二重的 성격으로 인해 호루스는 다양한 신화를 構成하게 되어 崇拜地마다 서로 다른 이름을 갖게 되고 形像도 혼란스럽다 (호루스=베데티=하라크테=하르마키스=하르시에시스).이와 같이 이집트 神話는 體系가 없고 복잡하다.

4, 세트(Seth)

세트는 惡의 신으로서 누트의 아들로 태어나 姉妹支干(자매지간)인 누이 네프티스와 결혼했다. 호루스와 王權爭奪戰(왕권쟁탈전)의 상대역으로 세트는 항상 惡의 색인 붉은 눈과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으며 붉은 存在라고 생각했다.

5, 네프티스(Nephtys)

네프티스는 이시스의 여동생이다. 그녀의 역할은 죽은 자의 肺(폐)를 보호하는 일이다. 네프티스는 이시스처럼 깃털이 달린 자신의 긴 날개로 죽은 자를 품에 안아 보호했으며, 棺에는 네프티스의 그런 모습이 자주 表現되어 있다. 세트와 결혼했지만 오시리스에 忠誠한다. 네프티스의 가장 큰 희망은 오시리스의 아이를 갖는 것이었다. 그래서 오시리스를 속이기 위해 취하게 하거나 자신을 이시스로 착각 하도록 했다. 결국 그는 성공하여 오시리스와 바람을 피워 아누비스를 낳았다. 그러나 세트가 무서워 아누비스를 버렸다. (이시스, 하토르. 네프티스여신은 하는 역활은 다소 차이가 나지만, 母性愛 즉 어머니의 이미지로 表現될 때는 모습이 그의 같다.)

6, 아누비스(Anubis)

아누비스는 미라 만들기와 墓地를 守護하는 神이다. 아누비스는 자칼의 머리를 한 男子의 모습이나이시스를 동반한 개의 모습 또는 탁자나 무덤 위에 웅크리고 있는 자칼의 모습 등으로 표현 되었다아누비스의 임무 중 가장 중요한 것은 靈魂의 무게를 재는 것을 監督하는 일이다.아누비스는 인간의 운명을 豫測(예측) 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魔法이나 占術(점술)과 결합 되었다. 아누비스는 藥과 毒을 관장하는 신이고 그 藥物을 이용해서 오시리스의 시체를 미이라로 만들었다.

                   

             아몬레 신                      멘카우라왕과 하토르신(왼쪽)          오시리스와 이시스 신            아크나톤이 아톰을 숭배함

 

오시리스신화--- 垈地의신 게브가 최초로 이 세상을 다렸다. 그는 하늘의 신 누트와 結婚하여 오시리스, 이시스, 세트 네프티스, 호루스의 눈 등 5명의 자식을 두었고,이 세상의 統治權을 장남인 오시리스에게 물려주었다. 오시리스는 왕이 되자 서기인 토트신의 도움을 받아 백성들에게 農作物 栽培法(재배법), 나일 강 홍수를 조절하는 方法, 그리고  神을 섬기는 방법 등 많은 것을 가르치며 善政을 베풀었다, 이후 오시리스는 사람들의 信望을 얻어며 점점 人氣를 더해가자,동생 세트는 오시리스에게 질투를 느끼며 점점 미워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세트의 부인 네프티스가 오시리스를 짝사랑하여 어느 날 오시리스를 유혹하여 바람을 피웠다( 이들 두 사람 사이에서 아누비스가 태어났다 ).이를 목격한 세트는 오시리스를 除去할 決心을 하고 계획을 세웠다. 세트는 오시리스의 키에 맞는 아주 호화로운 상자를 미리 만들어 準備(준비)한 다음, 어느 날 오시리스를 宴會에 초대했다. 연회장에서 세트는 “이 상자와 키가 맞는 사람에게 이 호화로운 이상자를 주겠노라고” 여러 신들에 提案(제안)을 한다. 오시리스가 상자 안에 들어가자, 세트 一堂들은 키를 잠그고 나일 강에 그 상자를 던져 버렸다. 이 쿠데타로 세트는 왕이 되었다. 그러자 오시리스의 부인인 이시스가 갖은 고생을 다하며 미친 듯이 남편인 오시리스를 찾아 나섰다. 고생한 보람이 있어서  비블로스 왕궁에서 그 상자를 찾았다. 그렇지만 이시스가 防心한  틈을 타서 다시 상자를 훔친 세트는 오시리스를 殺害한 후 시신을 14토막을 내어 이집트 각지에 흩어놓았다. 그러나 포기할 줄 모르는 이시스는 세트의 부인인 네프티스와 함께 토막 난 남편의 屍身을 긴 시간을 두고 모두 찾았다. 이시스는 찾은 장소에서 장례식을 거행하고 祭檀(제단)을 세웠다. 그리고 아누비스 의 도움을 받아 조각 조각난 遺骸(유해)를 연결하고香油(향유)를 발랐다 (성기는 가짜를 만들어 연결), 그리고 아누비스가 붕대를 감아 미라로 만들었다.  이시스가 토트신에게서 배운 魔法의 주문을 외우자, 마침내 오시리스는 復活하였다. 그렇지만 불완전한 오시리스는 地上에서 상태가 좋지 않았는지 死者世界에서 살게 되었다. 그리고 이시스는 다시 토트의 도움을 받아 오시리스와의 사이에서 遺腹子(유복자)인 호루스를 낳았다. 그 때부터 이시스는 호루스가 자기 아버지의 복수를 하고 世習權을 주장 할 수 있을 나이가 될 때를 기다리며 살았다. 어느 날 호루스를 갈대숲에 남겨두고 하루 종일 밖에 있다 돌아온 이시스는 호루스가 무엇인가에 대해 글을 써 놓고 昏睡狀態(혼수상태)에 빠진 것을 발견하였다. 세트는 自己實際의 모습으로는 濕池(습지)에 들어 갈수 없었기 때문에 毒巳(독사)로 변신하여 호루스를 물었던 것이었다. 이시스는 절망감에 빠졌다. 자기아버지, 어머니 남편인 오시리스 모두 죽었고, 게다가 작은 오빠인 세트는 무자비한 적이고, 자매인 네프티스는 세트의 아내였다. 그래서 이시스는 모든 사람에게 呼訴(호소)했다. 하지만 그 사람들 중에는 온몸에 독이 퍼진 호루스를 치료 할 수 있는 魔法의 주문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제 이시스는 더 높은 신에게 도움을 청해야 했다. 이시스의 歎願(탄원)은 수 백 만년의 돛단배 에서도 들렸으며, 그 太陽의 배가  이시스가 있는 곳에 이르자  이시스의 歎願(탄원)이 배의 航路를 막았다. 토트신은 태양의 배에서 내려와 이시스와 대화를 나누었고, 이시스는 願하는 대로 레의 힘을 사용해도 좋다는 허락을 토트로부터 받았다. 태양의 배가 멈추자 빛도 멈췄다. 그러자 토트는 이시스에게 호루스가 치료될 때까지 暗黑이 계속 될 것이라 했다. 그 외에 불행이 세상에서 살아지지 않을 것이며 永劫(영급)의 暗黑이 지배할 것이고, 우물은 말라 있을 것이며, 어떤 作物이나 식물도 자라지 않을 것이라 했다. 이렇게 해서 태양신 레의 강력한 魔法의 주문으로 호루스의 독은 사라졌으며 이시스와 습지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기뻐 했다. 以後 호루스가 자라 세트의 왕권에 도전 할 수 있는 成人이 되었다.*************** 以後 이야기는 호루스와 세트 사이의 權力鬪爭(권력투쟁)으로 신들도 호루스를 지지하는 勢力과 세트를 지지하는 세력으로 나누어진다. 이야기가 너무 길어서 생략 한다. (에드푸에 있는 호루스 大 神殿에는 호루스와 세트의 전투장면이 전 벽체를 매우고 있다. 여기서 세트는 악어와 물소로 변신해서 레와 호루스에게 쫓기는데, 결국 세트는 목을 잘린다.)***********

              

                  에드푸에있는 호루스 신전앞( 매의형상)                   에드푸에있는 호루스신전내( 호루스와 세트의 전투장면)

  

(3) 그외에 중요한 신들

1, 마아트(Maat)

마아트 는 宇宙의 절대 眞理, 正義, 秩序, 均衡과 같은 보편적인 善의 女神이고, 레가 눈(Nun)의  "太初의 언덕" 에 나타날 때 태양 돛단배를 타고 데리고 온 딸이다. 마아트는  태양 돛단배에 서 있거나,심판의 殿堂(전당)에서 王座에 않아 머리에 깃털 모양의 장식을 쓰고 있는 女人으로 表現된다.마아트는 천칭의 저울과 같이 對立的인 두 요소들 사이에서 調和를 도모 한다.마아트는 後日 최후의 심판이 내려지는 오시리스의 심판의 殿堂에서의 역할로 중요한 存在가 된다. 죽은 자의 심장무게를 천칭 저울로 젤 때 均衡(균형)을 象徵하는 저울의 한쪽 접시에 마아트를 상징하는 깃털을 놓았으며, 다른 쪽에는 죽은 자의 심장을 놓았다.

2, 토트(Thot)

토트는 知慧와 知性을 象徵하는 神이며, 따오기(새)의 머리를 한 인간으로 表現 되었다.  그러나 출생은 확실하지 않다. 태양신 레는 자신의 目(눈) 을 찾아준 보답으로 토트에게 時間을 알수있는달을 創造해 주었다. 그래서 토트는 時間의 측정자로서 눈금이 새겨진 종려나무 가지를 손에 쥐고 있다.그 외 토트는 數學,天文學,工學,言語 발명자로 여겨졌다.그리고 토트는 신의 書記로 神들의 日常的인 결정을 기록하고 전달하는 神의 傳令이라고 생각했다. 

               

                            세티1세왕 과 오시리스신                                                        네페르타리왕비

3, 아몬(Amun)

古王國時代 때 테베의 守護神이고 거위의 모습 또는 多産의 짐승인 숫양으로 表現되기도 했다. 아몬은 다른 어떤 신보다도 政治的 성격이 강한 신이다. 다른 部族을 정복하면 그 지역의 신을 흡수하여 새로운 特徵을 갖게 되었고, 초기의 아몬 崇拜者들은 權力을 잡으면 아몬神에 附與(부여)된 힘을 이용해 자신의 權威(권위)를 강화했다. 이후 헬리오 폴리스의 守護神인 레 신과 結合하여 아몬 레神이 되었다.

4, 하토르(Hathor)

하토르는 사랑과 기쁨의 女神으로 호루스의 아내다. 호루스가 왕의 守護者인 반면 하토르는 왕비의 守護者 역할을 하였다. 하토르는 암소의 머리를 한 人間으로 표현 되었다. 암소의 두뿔 사이에 太陽圓盤(태양원반)모양의  머리장식을 하고 있는데 이 머리장식은 후에 이시스 女神에게도 이어진다. 宇宙的 觀點에서 하토로는 太陽이 지고 죽은 자가 埋葬(매장)되는 서쪽과 관련되지만 또한 逆說的으로 誕生과 聯關(연관)되기도 한다. 죽은 파라오들은 종종 암소의 모양을 한 하토르의 젓을 빠는 모습으로 그려지는데 이는 여신들의 養育的 側面을 象徵한다. 古代 이집트인들은 암소는 養育과 젓을 내는 女性的 성향을 象徵하고, 황소는 生殖力(생식력)과 生命維持(생명유지)의 남성적 성향을 상징했다.

5, 프타(Phta)

프타는 創造와 技術의 男神으로 건축사와 匠人(장인)들의 守護神으로 推仰(추앙) 받았다. 이신은 이집트에서 가장 强力하고 영향력 있는 신들 중 하나이다. 토트의 가르침에 따라 눈에 보이는 세계와 태양과 별을 비롯해 人間 및 모든 生物을 創造했다. 이것은 그가 레보다 더욱 오래전부터 存在 했던 것을 意味한다. 처음에는 멤피스의 創造神이었고,소(아피스)를 프타신의 使者로 생각하여 神聖視 하였으며 멤피스의 프타 神殿에서 소중하게 많이 키웠다. 形像은 수염이달린 男子로 표현 되었다. 

              

             아누비스의 가면을 쓴 사제의 장례 집전                                아누비스가 심장의 무게를 달기위하여 死者를 데리고감    

6, 세크메트 (Sekhmet)

세크메트는 破壞(파괴)와 再生의 女神이고 프타의 아내이다.이신은 멤피스의 3神중의 한신이고. 암사자의 形像을 하고있다.

7, 네폐르템

네폐르템은 세크메트의 아들이고 疾病治療(질병치료)의 神이다. 자주 사자의 머리를 가진 神으로 描寫(묘사)된다. 이신은 테베의 3신중의 한 神인 콘수와 같은 才能을 가지고 있다.

8, 네이트(Neith)

네이트는 狩獵(수렵), 戰爭의 女神이다. 그는 王趙時代 이전까지 올라가는 가장 오래된 女神중의 한신이다. 그녀는 꽤 오랫동안 下 이집트 사이스지역의 主神이었고 네트라는 오래된 붉은 왕관을 쓰고 활과 두 개의 화살을 움켜진 모습으로 描寫되었다. 제26왕조 시대에 특히 推仰(추앙)받았다

9, 베스(Bes)

베스는 惡靈을 쫓아내고 행복을 가져다주는 神이다. 그는 항상 흉측한 모습의 난쟁이로 描寫되었다 이신은 가장 大衆的인 신이었으며 平民들이 열광적으로 崇拜했다. 베스는 여자들의 화장대, 裝身具, 부부침대의 머리 밑, 거울 손잡이, 향수병 등에 묘사되어있다

              

                 라호라크티(태양신)에게 음식을 바침                              네타네보1세가 비비형상의 토트신에게 마아트여신을 바침

 

10, 크눔(Khnum)

크눔은 물의 神 즉 나일 강의 신이다. 古代 이집트인들은 나일 강이 地下世界에 있는  두 개의 동굴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으로 생각 했다. 크눔신은 손을 내뻗어 손에서 물이 흘러나가도록 하는 모습으로 나타났다. 처음에는 와스완 지역의 創造神 이었다.

11, 민(Min)

민은 비를 내리게 하는 번개와 多産의 神이며, 性的 能力의 神으로 남자들의 崇拜를 받았다. 또 비를 내려 곡식을 자라게 하는 신 이었다. 수확기에 거행된 민 祝祭 때는 파라오가 곡식을 수확하는 儀式을 보여주었다.

12, 바스테트(Bastet)

바스테트는 고양이의 神이고 女神이다. 多産性, 민첩함 등의 屬性(속성)이 崇拜의 대상이었다. 이신의 모습은 고양이의 머리를 한 여자로 표현되었다. 고대에는 고양이를 미라로 만들어 무덤에 埋葬(매장)하기도 했다.

               

                     에드푸에서 마차를 타고                                                                 카르나크 신전내

 

2),신화의 특징

이집트 신화의 特徵은 첫째로 多神敎이다. 지방의 守護神까지 합치면  어느 시기에나 수백 개를 넘었다. 18왕조시대 때는 崇拜하는 신의 수가 무려 740개가 있었다고 한다. 또 神과 人間의 중간 지점에는 인간과 동물이 결합된 伴人伴獸(반인반수)의 모습을 가진 妖精(요정)이나 精靈(정령) 같은  存在들도 있었다.

두 번째 特徵은 신화가 規則(규칙)이 없다. 이집트 신들은  장소와 시대의 변화에 따라 전혀 다른 형태의 이름과  모습으로 變形 되기도 하고, 또 權力을 장악한 지역의 신이 다른 지역의 신을 흡수하여 하나의 새로운 신으로 創造되기도 하였다. 예를 들면 원래의 創造神은 아툼이었지만, 太陽神 레가 浮刻(부각)되고 主神이 되었을때 오래된 神 아툼을 차지한 것이다.그리고 레는 호루스와 合體해 레 헤라크티 神이된다. 그렇치만 더욱 복잡한 것은 合體前의 모습으로도 각각 활동 한다. 또 매의 모습으로 表現되는 신의 形像도 이렇게많다( 레. 호루스. 멘투신. 콘수). 太陽神 레와 테베의 守護神 아몬 과 合體하여 아몬 레신이 되었다.

세 번째 특징은 신화와 정치는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 神들의 地上 대리인이고 死後에는 神이 된다고 생각했던 파라오와 神을 모시는 司祭들은 서로 완전히 별개의 계급을 形成하여 서로 共存하고  때론 葛藤(갈등)을 겪기도 했다.

내 번째 특징은  知的인 내용을 갖고 있기 보다는 視覺的 표현에 置重(치중) 했다. 死者의 書와 같이 기록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記錄 마저도 文章으로 기록된 것이 아니라 이미지로 描寫(묘사)된 기록이다. 따라서 이집트 神話에서는 무엇보다  彫角, 繪畵(회화), 建築이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다섯 번째 特徵은 사제들의 신화다. 司祭들은 각 神들에게 地上에서 할 일을 附與하고, 각 신들 사이에 形成 되어있는 旣存(기존)의  질서와 序列을 維持(유지) 관리하는 것이었다. 매일 아침 밤의 混亂(혼란)을 除去하기 위해 香을 피우고  聖水를 뿌리는 儀式(의식)을 치렀다. 이후 神象을 닦고 香油(향유)를 바르며  신들에게 敬拜(경배)를 드렸다. 그리고 이 神象들은 오직 파라오와 司祭들 만이 볼 수 있었고 일반인들은 볼수 없었다.

               

                             바하리아 사막-3                                                                룩소르신전앞 람세스2세 두상 

 

이집트역사

모든 동물은 生存 하기위해 먹으며, 또 生存을 위해서는 먹을 것이 풍부한 곳을 찾아다닌다. 인간도 그런 조건에서 例外일 수는 없다. 나일 강 유역은 肥沃(비옥)하고 풍요로운 땅으로써 물이 풍부하고 인간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식량을 확보하기에 더없이 좋은 장소였다.紀元前 6000년 경부터 이 나일 강 유역에서 狩獵體輯(수렵체집) 생할을 하며 인간이 살기 시작 했고,記元前 4000년 경 부터 農耕社會로 부족들이 定着하면서 고대이집트 文明이 삭트기 시작 했다. 이후 이들 部族들은  서로 聯合하여 小王國을 形成 하였으며 이들 소왕국들은 저마다 守護神을 내세웠다. 

이집트의 古王國들은 강이 좁고 긴 나일계곡이 있는 테베를 중심으로 한 上 이집트와, 廣闊(광활)한 坪野地帶인 델타지역의 下 이집트로 크게 두 지역으로 나누어진다. 일반적으로上 이집트의 支配權은 中心地인 테베와 그 주변 지역에 몰려 사는 테베 인이  쥐고 있었고, 下 이집트는 權力의 중심이 한 도시에서 다른 도시로 자꾸 옮겨 다녔다.(타니스,사이스.헬리오폴리스,알렉산드리아, 멤피스등) 이것은  農耕中心의 上 이집트가 統合이 잘되고 안정된 사회였던 데 반해  平野地帶인  下 이집트의 도시중심의 지배 優位權(우위권)은 쉽게 깨지고 變했다는 것을 意味한다.이런 政治的 背景과 자연환경은 이집트가 최초로 統一王國을 이룰 때에도 영향을 미쳤다.

마네토의 王名 表에 의하면 파라오 시대는 대략 BC3150년 경 부터 시작 되었고, 총 31왕 에 154명의 파라오가 있었다.

1)마네토의 왕명표

초기왕조시대 (BC3150~2686) : 제1王趙~제2王趙.

고 왕국 시대  (BC2686~2181) :제3왕조~제6왕조.피라미드시대,王들을 神格化 後代王들의 귀감이됨

제1중간기(BC2181~2040) : 제7왕조~제11왕조 중간기.가뭄과 饑饉(기근)으로 混亂(혼란)하여 제7왕

                         조는 70명의이 70일간다스림 

중왕국시대(BC2040~1782) :제11왕조 中間期~제12왕조,야곱의가족 70명이 가나안에서 이집트로이주

                         함 (BC1876).

제2중간기 (BC1782~1570) :제13왕조~제17왕조, 힉소스가 侵入하여 제15,16왕조를 세워 약150년간

                         이집트를 支配(지배)

신왕국시대(BC1570~1060) :제18왕조~제20왕조. 제18,19왕조시대 이집트 역사상 가장 繁榮(번영)

                         을 누림(람세스2세).

제3중간기 (BC1060~747) :제21왕~제24왕조. 권력이 上, 下 이집트로 갈라져 각각 군인과 大司祭가

                         統治함 .

말기왕조시대(BC747~332) :제25왕조~제31왕조. 누비아 흑인왕조가  제25왕조를 세움,以後 이집트

                         인의 왕조 및 페르시아왕조

포톨레마이오스시대(BC332~30) :포톨레마이오스왕조, 마케토니아의 알랙산드로스가 지배. 마지막

                              왕은 클레오파트라7세.

                  

                                                                           고대 이집트 도시들

 

2) 초기왕조 및 고 왕국시대

初期王趙 (BC3150~2686) 는 제1왕조부터 제2왕조까지이다. 제1왕조의 始祖는 나르메르(메네스)왕이고, 나일 삼각주에 위치한 멤피스에 首都를 建設하였다, 그의 遺物인 附彫石板(부조석판)에 붉은 王官과 흰 王冠을 쓰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 統一된 王國인 것으로 추측된다. (上 이집트: 흰 왕관, 下 이집트: 붉은 왕관). 이시대에는 왕이 죽으면 신하들도 따라 묻는 殉葬(순장)풍습이 있었는지, 3 대 제르왕 무덤주위엔 殉葬한 신하들 무덤이 300개나있다. 그리고 제2왕조 라네브왕시대부터 처음으로 왕 이름에 太陽神을 結合하여 사용하기 시작했다.

古王國時代 (BC2686~2181) 는 제3왕조부터 제6왕조까지이다, 이 시대를 피라미드시대라 부르기도 한다 이집트 역사상 가장 찬란한 번영을 謳歌(구가)하던 시대로 後日 모든 王趙의 모범으로 간주 되었으며, 秩序와 正義 의 神인 마아트신을 중심으로 파라오를 神으로 인정하는 이집트인들의 世界觀이 확립되었다. 傳說的인 건축가인 임호테프 宰相이 제3왕조시대의 제세르왕 피라미드를 사카라에 계단식으로 처음으로 피라미드를 건설하기 시작하였고. 그는 멘피스의 신 프타의 아들로 推仰(추앙)받았으며 죽어서는 왕이 아니면서도 醫術의 神 대접을 받았다. 제세르왕 피라미드 통로에는 무려 30구의 미라가 발견 되었는데, 이 미라는 말기왕조 시대 제26왕조 사이스왕이 다른 곳에 있는 미라들을 이곳으로 옮겨 감추어놓은 것으로 推定(추정)한다. 가장 큰 피라미드는 기자에 있는 제4왕조 쿠푸왕의 피라미드이고. 쿠푸왕의 宰相 헬몬이 약 20년동안 建設하였다.

기자에 있는스핑크스는 카프라왕(BC2500) 피라미드를 지키는 守護神으로 上部는 파라오의 모습으로 知慧를 상징하고 下部는 사자의 몸통으로 힘을 상징한다고 한다, 이것은 그곳에 있는 하나의 큰 바위를 조각해서 만들어 졌다고 한다.(오스만터키 점령당시 인근에 있는 야포사격장 때문에 현재 코를 비롯한 얼굴이 심하게 손상되어있음),

제6왕조의 페피2세는 이집트역사상 가장 긴 94년 동안 長基執權 하여 王族 및 神官들의 부정부폐가 심했다 .고왕국의 파라오들은 대대로 來世가 있음을 믿었고, 來世에 永生하기 위해 자신의 遺骸(유해)를 지키는 일에 엄청난 시간과 財貨를 투자하여 무덤을 건설하였다. 고 왕국 중기 이후부터 파라오는 태양신 래의 아들로 惡의 神 세트와 맞서 싸우는 호루스로 神政 정치를 펼쳤다. 6 왕조시대부터 헬리오폴리스의 태양신 래의 司祭들의 세력이 점점 커져 래의 신전은 화려하고 복잡하게 되었다. 末期 때는 지방 諸侯(제후)들에 밀려 王權이 沒落(몰락)하기 시작했다

                

                               기자의 피라미드                                                             수령 2000 년 된 나무와 함께

 

 *** 피라미드 건설 ***

기자 지구에는 3개의 거대한 피라미드 (쿠푸왕, 카프라, 멘카우라왕)가 있다. 우선 피라미미드를 건설한 돌의 양을 計算하자면, 라폴레옹이 말하기를 3개 피라미드 돌의 양은 높이3m,두께1m의 벽으로 프랑스 전체를 둘러 쌀 수 있는 量이라고 말했다.  이들 중 쿠푸왕의 피라미드가 세계7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가장 크고 웅장하다. 4개의 모서리는 정확한 4방향을 가르치고 밑변의 길이는230m, 높이는 146m 한 개의 돌 무게가 무려 2.5톤이나 되는 석회암 돌덩어리 230만개를 삼각형 뿔로 쌓아올려, 처음에는 表面에 하얀 석회석으로 美裝 처리를 하였다 한다.( 지금은 없음), 

그 당시 파라오들은 이것을 사막에 세우기 위해서는 수십만 명의 인부 또는 노예들을  동원하여 石材의 採堀(채굴) 과 다듬기  그리고 운반에 이르기까지 모든 계획을 주도면밀하게 진행되어야 했을 것이다. 이 건설은  잔혹한 파라오의 鐵權統治(철권통치)도 읽을수 있고 건축가 개인의 野望을  짐작할 수 있지만 필자의 생각으로는 지상세계와  超越的 세계(오시리스 세계)를 연결하려는 파라오의 야망과 파라오를 神格化 하는 백성들의 신앙심이 없이는 절대 건설이 불가능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무엇보다  저 무모한 건축을 하겠다고 나선 당시 인간들의 욕망을 느낄 때 敬意(경의)를 느낀다. 무엇이 4500년 전의 인간들로 하여금 이 거대한 피라미드를 사막에 건설하게 했을까? 그 답은 하나 超越的세계인 오시리스의 세계로 들어가는 죽음이다. (이 피라미드 建設時代에  우리나라는 檀君이 古趙鮮을 設立하던 時代다)

                

                            쿠푸왕 피라미드                                                                        길 옆 타조 농장에서

 

피라미드를 건설한 방법을 간단하게 설명하면  지금으로부터 4500년 전 그 당시에는 鐵器文化가 擡頭(대두)되지 않아 鐵로 된 道具(도구)를 전연 사용할 수 없는 시대이다. 우선 돌을 자를 때에는 먼저 돌의 눈을 유심히 注目한 다음에 돌망치로 돌 눈의 방향에 구멍을 깊게 파고, 그 구멍에 단단한 나무쇄기를 박았다. 그런 다음 위에서 가만히 물을 부우면 나무가 膨脹(팽창)하면서 그 힘에 의해 돌 눈이 쪼개진다. 돌을 아름답게  각고 다듬는 데에는 돌망치와 돌 보다 부드러운 구리로 만든 과 톱을 사용했으며 구리 톱으로 돌을 자르면 톱날은 쉽게 못쓰게 되고 만다, 그래서 자르는 부분에 수정가루와 특수한 모래를 바르고 물을 뿌려가면서 잘랐다 한다. 필자는 아스완의 古代 石山에서 돌을 萃取(췌취)하다 그만둔 未完成 오벨리스크를 보고 이해가 되었으며, 이는 인간의 限界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했다, 피라미드 돌을 쌓는 방법은, 먼저 피라미드의 위쪽에 돌을 쌓아 올리기 위해 피라미드의 4면을 따라 石材를 운반하기 좋게 벽돌과 나일 강의 진흙을 이용하여 완만한 비탈길을 닦으면서 꼭대기까지 돌을 쌓았다 한다. 그리고 피라미드가  완전히 완성된  후 피라미드 주변의 비탈길을 除去 했다고 한다.

 *** 피라미드 目的에 대한 다양한 說이 있다. 1) 왕의무덤 설,  2) 천문대 설, 4) 銳知(예지)의 보물 상자 說, 4) 해시계 說, 5) 지구에 관한 여러 가지 數値를 나타내고 있다는 說 **

                

                    미완성 오벨리스크(석제췌취 현장)                                                          사막에서

                                

***  죽음과 저승세계 ***  

고대 이집트인들은 다른 문명 세계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죽음과 來世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다, 그들은 서쪽 산 넘어에 死後에 永生하여 靈魂(영혼)이 머무를 수 있는 삶과 죽음의 神 오시리스가 관장하는 超越的인 세계(죽음의 세계)가 있다고 믿었다. 죽음의 세계에 대한 믿음과 死後에영생 할 수 있다는 생각은 고대 이집트인들로 하여금 죽음에 대한 독특한 문화적 신앙을 가지게 했다. 葬祭殿(장제전)에서 죽음을 집전하는 神官들은 성스러운 임무를 부여받은 영혼의 守護者로써 죽음의 신 오시리스에게 죽은 자가 生前에 어떤 행동을 했는지를 考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 그들은 이승의 삶이란 단지 死後세계를 준비 하는 짧은 순간이라 여기게 했고. 그리고 인간의 영혼은 육체(미라)와 함께  있지 않으면 오시리스의 세계에 들어 갈수 없다고 믿게 만들었다.

이집트인들의 무덤은(영원한집) 죽은 자가 오시리스의 세계에서 살아 갈수 있는 하나의 완벽한 생활공간으로써 무덤 속에는 미라, 死者의 書, 죽은 자가 저승에서 생 할 하는데 필요한 물품들과 시중 들 사람들의 銅像, 그리고 死者가 지루한 시간을 보내는 데 쓸 만한 오락기구와 악기들도 갖추어 넣었다, 죽은 자가 부자일수록 값나가는 보석들을 함께 묻었으며, 심지어 死者를 위한 화장실까지 마련하였다. 死者의 書란 死者가 오시리스의 세계( 죽음의 세계)에 들어가는데 필요한  여러  가지 단계를 기록해놓은 呪術的(주술적) 주문형식의 글이다. 처음에 이집트인들은 死後에 인간의 영혼이 오시리스 신 곁으로 갈수 있는 자는 죽어서 신이 될 수 있는 자 즉 왕만이 갈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점차 귀족들에게도 그 特權이 허락되었으며, 이후 모든 이집트인들에게도 주어졌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인간은 다섯요소 (1,육체, 2,바, 3,카, 4,이름, 5, 그림자)로 만들어져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사람이 죽으면 그 육체에서 "바"와 "카"와 같은 2개의 靈魂이 나온다고 생각했다 " 바"는 사람의 마음이나 個性(개성)과 같은 것으로서 무엇으로도 變身이 가능하며, 죽음과 동시에 육체에서 날아간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카"는 단순한 生命力의 에너지로 미라 옆에서 음식물을 섭취하면서 살아간다고 생각 했다 .

 

 *** 고대 이집트인들의 이름 ***

古代 이집트인들은 言語나 文字의 힘을 상당히 중요시했다. 특히 사람의 이름에는 그 사람의 전부가 담겨져 있다고 믿었다. 부모는 자식에게 이름을 두 개 지어 주었다. 하나는 일반 사람들 에게 알려진이름, 다른 하나는 본인과 부모 외에는 아무도 모르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이것은 이름이 惡用 당하여 저주에 사용되지 않도록 비밀은 철저하게 지켰다. 이처럼 사람들은 이름이 힘을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따라서 파라오가 건축물에 자신의 이름을 세겨 남기는 것은 육체를 미라로 만들어 남기는 것처럼 자신의 存在를 남기는 行爲, 즉 영원한 삶을 얻으려는 행위였다. 따라서 建築物에 쓴 이름을 지우는 것은 상당한 憎惡(증오)가 없으면 할 수 없는 무서운 報復(보복)이었다. 고대 왕들의 이름은 5개나 가지고 있었다.

 

*** 마아트(Maat) 신에 대한 고대 이집트인의 생각 ***

고대 이집트 사람들의 마음에 확실하게 자리 잡은 마아트신,  마아트는 우주의 절대 眞理, 절대 正義, 秩序, 均衡(균형)과  같은 것으로써, 시대에 따라 바뀌는 것이 아니라 완전하고 보편적인 善으로 여겻다. 고대 이집트 사람들은 마아트에 따라 살아가고자 노력 했다 .  파라오 역시 이 도덕 觀念에 완전히 얽매여 있었기 때문에 폭군은 그의 없었을 것으로 추측 된다. 살아 있는 동안 이 마아트를 잘 지켰느냐,또는 못 지켰느냐에 따라  죽은 후의 運命도 달라진다. 이것을 평가하기 위해 死後 재판에서 천칭저울을 사용한다.  死者의 심장을 천칭저울 한 쪽에 얹고, 나머지 한 쪽에는 마아트의 깃틀이나 마아트 女神像을 올려 놓는다. 그래서 같은 무게면 합격, 합격한 자는 야르의 들판 이라는 樂園(낙원)에서 영원히 즐거운 삶을 누리게 된다. 심장 속에 죄가 들어 있어서 무거운 나머지 천칭이 기울어져 버린 사람은 아메미트라는 괴물에게 심장을 먹히게 된다.그렇게 되면 영원히 復活하지 못하게 되는데, 이는 이집트인들에게 몸서리치게 무서운 벌 이다.

                

                                  누비아 박물관 앞                                                                아스완 댐 둑 단면도

 

3) 제1중간기시대

제 7왕조시대에서 10왕조시대까지는 제 1중간기 (BC2181~2040) 로 고앙국의 왕권이 몰락하고 地方諸侯(지방제후)들의 세력이 강화되면서 地方分權의 각 제후들이 각 지역을 統治했다, 

마네토에 의하면 7왕조는 가뭄과 饑饉(기근)에 의한 심각한 政治的 혼란기로 70명의 왕이 70일간 在位 했다고 한다. 7왕조와 같은 時期에 8왕조는 멤피스를 據點(거점)으로 統治했다. 7,8 왕조가 崩壞(붕괴)되자, 同時代에 9,10 왕조와 11왕조가 대두되었다. 9.10왕조는  헤라 클레오포리스 (下 이집트) 를 거점으로 하여 통치했고, 11왕조는 테베 (상 이집트) 를 據點으로 統治했다.

이시대의 혼란은 심각했으며 고왕국시대의 모든 피라미드가 盜堀(도굴) 당했다. 그리고 神的인 존재였던 파라오의 신성한 특권이 小君主에게 넘어가면서 파라오도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어서며, 평민들은 인간의 존엄성을 발견하고 自由 平等 思想이 움트기 시작했다. 즉 平民들도 저승의 위험과 두려움으로 부터 신들에 의해 보호받고 파라오처럼 특별한 영향력과 능력이 附與되기를 원했다.

4) 중 왕국시대  

中王國時代 (BC2040~1782) 는 제11왕조의 중간기부터 제12왕조까지다.  제11왕조 테베의  맨투호테프 (멘투신은 전쟁의 신이고, 맨투호테프의 뜻은 멘투신은 만족한다 란 뜻) 2세가 혼란하던 제1중간기의 地方分權의 小 君主들을 통합 하여 중 왕국시대를 열었다. 12왕조의 첫 번째 파라오인 아이넴하트 1세는 11왕조의 재상으로 쿠데타로 왕이 되어, 항상 불안한 마음과 의심으로 마음편한 날이 없었다, 그래서 항상 방어태세인 자세로 그의 큰아들 세누스레트 1세에게 다음과 같은 敎訓을 남겼다  " 모든 부하에 대해서 내 자신의 몸을 지켜라,  한사람의 형제에게도 마음을 허락하지 말라,  한사람의 친구도 깊이사귀지 말라,  네가 잠들 때에도 네 스스로 너의 심장을 지켜라, 災厄(재액)이 닥치는 날 너를 아껴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결국 그도 그의侍從(시종)에 의해 살해된다. 12왕조 세누스레트 1,2,3세(BC1917~1817)시대 때 농토의 계발 과 무역의 증대로 가장 繁英을 누렸다. 특히 세누스레트 3세는 철저한 內政改革을 단행하여 지방제후들의 世習制를 금지하였고,  領土도 남부 수단까지 넓혔다. 해로도토스 이야기에 나오는3000개의 방이 있는 迷宮(미궁) 이야기 는 아이넴하트3세 시대에 건설된 하와라에 있는 피라미드 葬祭殿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리고 성서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후손 야곱이 70명의 가족을 이끌고 나일 삼각주의 고센 땅에 이주한 시기 (BC1876) 도 이시대이다. 야곱이 파라오의 꿈 해몽으로 총리대신이 된 시대는 세누스레트2세 시대 였다.

5),제2중간기시대                                                     

제2중간기 (BC1782~1570) 는 제13왕조시대부터 17왕조 시대까지이다. 중 왕국시대 말부터  팔레스타인 지역의 饑饉(기근)으로  아시아계 셈족의 혈통인 힉소스민족들이 혼란한 이집에 정착하면서 점점 세력을 확장하여 델타지역 아바리스에 힉소스왕조 (제15,16왕조) 를 수립하여 약 150년 동안 이집트를 통치했다, 같은 시기에 아바리스에서 800km떨어진 테베에서는 이집트인의 왕조 (제17왕조) 가 힉소스에 조공을 바치면서 再起를 노리고 있었다. 이 시대는 異邦王朝 (이방왕조)시대로, 아시아의 전차와 같은 청동기문화 와 말, 수직 배틀기 등의 유입으로 후일 이집트가 군사강국이 된다. 再起를 노리고 있던 테배의 세켄엔레카 왕이 독립을 위하여 힉소스와 한바탕 전쟁을 일으켰지만 반역자들에 의해 전투에서 극심한 상처를 입고 그만 비참하게 죽고 말았다.  統治權을 임시 委任(위임)받은 세켄엔라카의 부인 아흐호트페가 흗어진 병사를 불러 모아 반역자들과 그들의 陰謨(음모)를 制去한다.以後 세켄엔레카의 아들 카모세가 힉소스의 수도 아바리스를 侵攻해서 승리하지만  병으로 退却(퇴각)하여 곧 사망한다. 

세켄엔라의 미라를 보면 주검에는 短劍이 귀 뒤로 뚫고 들어갔으며  철퇴가 얼굴을 짖이겨 버렸고 전투용 도끼가 이마에 커다란 구멍을 내놓았다. 그뿐만 아니라 턱뼈는 부서지고 비틀어진 입은 죽는 순간 고통이 얼마나 컸든가를 말해주고 있다. 이 미라는 현재 카이로 박물관에 그 상태로 保存되어 있다.

               

                              루소르 신전 내                                                                 아스완의 이시스호텔 앞

 

6) 신 왕국시대 

신 왕국 (BC1570~1060) 은 제18왕조부터 제20왕조까지이다. 세켄엔레카의 아들 아흐모세가 아버지의 有志를 이어받아 힉소스 군주들을 서 아시아로  완전히 몰아내고 (BC1539) 이집트를 통일하여 新王國의 18왕조를 세웠다,이집트 역사상 신왕국의 제18,19왕조시대가 가장 번영을 누렸고 유적과 유물 등 문화유적이 제일 많다.그리고 18왕조는 왕가의 여성들이 두각을 나타내었다.

하트셉수트 (BC1473~1458) 는 투트모시스1세의 장녀로서 여자이기 때문에 왕위 계승권이 없는지라 이복동생인 투트모시스 2세와 결혼한다, 병약한 투트모시스 2세는 後宮에서 난 아들 투트모시스 3세를 남기고 病死해 버린다. 이후 하트셉수트는 아직 왕의 역할을 할 수 없는 어린나이의 투트모시스 3세의 섭정 자로써 공동통치의 파라오가 되었고, 항상 남자같이 수염을 달고 男裝을 했다, 이 시대에는 파라오가 아몬 레 신의 아들로써 오늘날의 예수와 같이 童貞誕生(동정탄생)을 한 神的 存在로 추앙 받았으며,자신의 아들인 투트모시스 3세의 몸에 자신의 생명인 카(영혼)가 들어가 있다고 믿고, 아직 죽지도 않은 어린 아들을 경배하는 "永遠無窮宮殿"(영원무궁궁전)이라는 이름의 神殿을 짓기도 했다. 그리고 측근 중의 측근인 세넨무트 (하트셉수트의 딸 네페르라의 가정교사) 로 하여금  피라밋 모양의 뿔에 황금이 세워진 오벨리스크를 카르나크 신전에 세우게 하고, 하트셉수트 葬祭殿이라 불리는 葬祭祠院(장제사원)과 하토르신전을  왕가의 계곡에 짓게 했다. 이 장제전은 이집트에서 가장 크고 정교한 祠院(사원) 중의 하나로 기둥의 配列과 모양을 巧妙(교묘)하게 변화를 加味해 200개가 넘는 오시리스 조각상들과 하트셉수트의 帝位 중에 일어났던 주요 사건 및 자신의 誕生神話를 陽刻浮彫物(양각부조물)로 기록해 놓았다.

하트셉수트 밑에서 이름뿐인 왕 노릇을 하던 투트모시스3세 (BC1479~1425) 는 54년간 統治했으며 征服王(정복왕) 으로 하트셉수트 死後 무려 17번의 정복전쟁으로  북으로는 현재 이스라엘 땅에 있는 머깃도 (요한 계시록에 세상의 종말이 오면 예수와 사탄 사이에 최후의 아마겟돈 전쟁이 벌어진다고  언급된 곳), 와 유프라테스 강 건너까지 그리고 남으로는 현재의 수단인 누비아까지 영토를 擴場(확장) 하였으며 자신이 정복한 시리아와 누비아의 도시이름을 카르나크 神殿 제6탑문과 제7탑문에 새겨 놓았다. 오늘날 史家들은 그를 고대이집트의 나폴레옹 이라고 부른다. 以後 탁월한 스포츠 멘으로 유명한 아문호텝 2세 (BC1450~1425) 와, 투트모시스4세 (BC1425~1417) 그리고 아멘호테프3세가 왕위를 이어받는다. 아멘 호텝2세 무덤 안에는 제21왕조가 미라를 숨기는 장소로 사용하여 아멘호텝2세 미라 외 8구의 다른 파라오 미라가 발견되었다. 그리고 아멘호테프3세는 그의 장제전과 함께 그 유명한 멤논의 巨像(거상)을 건설하였고( 현재 장제전은 파괴되어 없음). 룩소르 신전 중앙정원 부분을 건설하여 아멘레신의 아들로 탄생했다는 壁畵(벽화)를 그려넣었다.

하트셉수트 여왕부터 투트모시스 4세 까지는 성경에 나오는 모세와 직접 관련이 있는 왕들이다. 하트셉수트 女王은 요게벳 (모세의 어머니) 이 이집트 병사의 눈을 피해 강물에 띄운 모세를 구하여 養育(양육)한 어머니 여왕이고, 투트모세 3세는 어린 시절부터 모세와 함께 왕궁에서 자랐다. 아문호텝프 2세는 모세와 10가지 재앙으로 마지막 대결한 出애굽 당시의 왕이고, 투트모시스 4세는 모세가 그의 아버지 아문호테프 2세와 대결했을 때 마지막 災殃(재앙)인 長子의 죽음사건으로 인하여 次男임에도 불구하고 왕위를 繼承(계승)했다한다.

               

                                 룩소르 신전앞                                                                         나일강 선상 위

 

신왕국의 중기시대에 접어들면서 아몬 레신의 權威(권위)는 최고조에 달했고, 이 신은 司祭階級(사제계급)을 위한 종교로 전락해 버렸다. 사제계급의 세력이 지나치게 크지 면서 왕권을 제한하고 통치에 부담을 주기 시작했다. 이에 파라오는 나름대로 對應策이 필요했다,

紀元前 1350년 제18왕조의 아메노피스(아멘호텝) 4세는 일종의 宗敎改革을 단행 했다.그 때까지의 아몬 레 신의 太陽崇拜와는 다른 形態의 태양숭배신앙 즉 아톤 (태양의원반) 이라고 부른 有一神을 숭배하게 하고 다른 신은 일체 허락하지 않았다 . 그는 우선 아몬 사제들을 단번에 눌러버리기 위해 아몬 사제들의 아성인 테베를 버리고 현재의 아비도스에 수도를 이전하여 아케나톤 (아톤의지평선) 이라는 新首都를 건설했다. 그리고 자신의 이름도 아메노피스에서 아톤의 빛 이라는 의미를 지닌 아케나톤으로 변경했다. 그의 이와 같은 종교개혁으로  司祭의 수가 크게 줄었고, 사제의 임무도 대폭 축소되면서 과거 아몬신이 가지고 있든 實權을 다시 파라오가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예술가들도 아케나톤의 이런 改革을 받아 들여 과거의 形式主義的인 靜的(정적)이고 定形的 이었든 그림이나 조각을 事實的이고 動的인 作風으로 바뀌었다. 이른바 아마르나 예술이다. 아마르나 예술은 이집트예술사상 특이한 樣式으로 많은 예술가로 부터 至大한 觀心을 모우고 있다. 有一神인 아톤 신 이외에는 어떠한 신도 허락되지 않았으며 점 과 呪術(주술)도 허락되지 않았다. 아몬 신에 속한 모든 土地와 재산을  농민에게 나누워 주었으며 귀족이나 부자도 자기에 필요한 만큼의 토지만 가져야했다. 그러자 旣得權(기득권)을 喪失(상실)한 아몬신의 사제계급 세력들이 일제히 왕의 失政을 규탄하고 일어나 아케나톤의 종교개혁은 실패하고  비참하게 죽었다.

그 이후 그의 아들 투탄카텐 (BC1327~1318) 이 8살의 어린나이에 왕위에 올랐지만 황태후 네페르티티가 攝政(섭정)을 한다. 즉위 후 아몬 사제들의 壓力으로 수도를 다시 아몬 신전이 있는 테베로 옮기고, 이름도 투탄카멘 (아몬의 살아있는 상) 으로 고친다. 아몬신 사제들의 권위에 눌려 실권 없는 파라오 노릇을 하다가, 18세에 사망한다. 그의 죽음은  他殺이냐, 病死냐,  지금도 의문이 많은데 현대의 法醫學的 조사로 타살로 간주 하고 있다. 후계자 없이 숨을 거둔 후, 그의 젊은 부인인 안케센나멘은 히타이트 왕에게 편지를 쓰서 아들을 하나 보내주면 자신과 결혼한 후 이집트를 통치하게 하겠다는 堤案(제안)을 傳 한다 그러나 왕자를 보낸다는 답장은 왔지만 왕자는 이집트에 오지 않았다, 중간에 암살당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어쨌든 이후 황테후 네페르티티의 아버지인 늙은 신관 아위Ay가  투탄카멘의 부인이자, 자신의 외손녀인 안케센나멘과  결혼하고 왕위를 계승한다. 아이가 죽은 다음 장군이던 호렘헤브가 그의 뒤를 잇지만, 호렘헤브도 자식이 없자, 람세스 장군에게 왕위를 물려준다. 그 당시 이집트에서는家門의 보존과 血統의 순수성을  보존하기 위해 近親 결혼하는 것이 王家의 풍습이었다.

                

                          루소르 신전앞 람세스상                                                         카르나크 신전내 람세스상 앞

 

고대 이집트 왕 중 가장 유명한 파라오는 람세스2세 (BC1279~1213) 다. 그는 19왕조의 시조인 람세스1세의 손자 이고, 세티1세의 아들로 팔레스타인 지역을 정복했고, 유명한 카데시 (지금의 시리아 오론테스 강 상류에 있는 알레포) 전투 (BC1275) 에서 히타이트의왕 무와탈리스와의 對戰에서 히타이트왕의 계략에 말려들어 위기에 몰렸으나,천부적인 武人기질을 타고난 람세스는 소수의 전차대를 이끌고 무모할 정도로 적을 6차례나 공격하여 위기에 빠진 이집트 군을 구하게 된다. 이 장면이 수많은 신전과 기념물 벽에 附彫(부조)로 조각 되어있는 장면이다 (그러나 이 전쟁은 람세스2세가  진 전쟁). 兩國 간 평화조약으로 평온을 유지하는 가운데 기원전 1254년에는 히타이트의 王女를 왕비로 삼았다. 그는 67년 동안 이집트를 통치했으며 餘生을 각지의 신전 건축에 바치고 델타 동북부에 王道 페르라메스를 만들었으며, 아비도스, 테베, 누비아의 아부심벨, 등에 신전 및 葬祭殿(장제전)을 세웠다. 람세스2세 시대에 이집트 왕조는 가장 융성했으며, 대표적인 전제군주로, 자신을 상징하는 거대한 석상들을 전국 각지에 남기며 왕권을 과시했다. 후손들도 가장 많아 79명의 아들과 59명의 딸을 남겼으며. 특히 그는 왕비 네페르타리를 지극히 사랑하여 왕비를 위한 네페르타리 신전을 아부심벨에 건설하였다.

제20왕조 람세스3세 때 (BC1774년)  히타이트 제국을 멸망시킬 정도로 강력해진 북쪽의 海洋民族들이 서로 연합하여 이집트 델타지역을 침범 했지만 람세스3세가 擊退(격퇴)하였다 (람세스3세의 장례사원 벽에 전투장면이 묘사되어있음).그들의 침략은 단순한 군사적 침략이 아니라 中近東地域(중근동지역)의 기후변화에 기인한 疫病(역병)과 가뭄이 계속되자 가족과 가축을 데리고 비옥한 땅을 찾아 정착하기 위해서 이집트로 처 들어왔었다. 이 왕조 말기 때는 勢力이 크진 테베의  아멘-레신의 神官들이 政權을 장악하여 허수아비 파라오를 델타지역으로 몰아  내었다.

                 

                                     아스완 댐                                                                         사막에서의 켐핑

 

 *** 왕들의 계곡 ***

고 왕국과 중 왕국 시대의 파라오들은 하나의 葬禮(장례) 기념물 안에 왕의 무덤과 예배 실을 함께 마련하였다. 그러나 왕의 무덤이 예배실과 함께 있으므로 인해 後代 사람들 중 누구라도 무덤의 위치와 모습을 잘 알 수 있었으며, 그것은 왕조의 힘이 약해졌을 때 여지없이 盜掘꾼의 標的이 되었다. 이를 방지 하기위해서 신왕국의 18왕조 투트모시스 1세 때 (BC1493~1481) 부터 테베의 나일 강 서쪽 계곡 절벽에 암반을 뚫고 내려가 왕들의 비밀분묘를 만들고, 예배신전 및 葬祭殿은 다른 곳에 짓기 시작했다, 墳墓內部(분묘내부)의 실내장식은 주로 파라오가 죽음과 부활의 신인 오시리스를 만나기 위해 저승을 향하는 모습과 신들을 경배하는 모습 그리고 死者의 書가 묘사 되어있다,  死者의書란  망자가 저승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최후의 심판을 거쳐야  하는데 이때 여러 가지의 과정을 단계적으로 기록한 呪術的(주술적) 주문 형식의 글과 그림이다. 파라오가 숨을 거두면 70일 동안 屍身을 미라로 만든 다음 관례에 따라 다시 생명을 불어 넣기 위해 미라의 입을 여는 의식을 거행한 후 石館에 안장했다, 그리고  관 옆에는 內腸(내장)을 꺼내 防腐(방부) 처리한 4개의 腸器(장기)단지와 死後세계에서 계속되는 生을 살아갈 때 필요한 생활용품도 함께 安葬했다. 이 왕들의 계곡에는 新王國時代 부터 제3중간기까지 파라오와 그 가족들 그리고 귀족들의 무덤이 있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나일 강을 경계로 하여 태양이 지는 서쪽은 死者의 마을로 무덤을 만드는 장소로, 태양이 떠오르는 동쪽은 神殿이나 王宮을 지었다.

왕가의 계곡을 발견하고 공식적으로 보존하게 된 실제의 사건은 1870, 80년대에 고대 이집트 물품들을 전문적으로 사고, 파는 암시장에 언제부터인가 출처불명의 보기 드문 학술적으로도 대단히 가치가 있는 귀중한 보물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그러한 유물들이 나돌게 된 출처를 밝히기 위해 행동에 나선  결과 한 아랍인이 잡혔다, 그의 이름은 압둘라술 이라는 사람이었다, 조사가 진행되는 동안 놀라운 實狀(실상)이 밝혀지기 시작했다. 그가 살고 있는 쿠르나 마을 주민들 전부가 도굴꾼 이었으며 그의 집안은 도굴꾼 가문 중에도 명문가로  기원 전 13세기부터 도굴을 生業으로 삼고 살아왔든 집안 이었다. 테베의 한 공동묘지 중앙에 자리 잡고 있는 쿠르나 마을은 아주 오래된 마을로 고대 선조들은 미라를 만드는 기술자나 묘지를 지키는 사람들 이었다. 이들은 이슬람교도 였지만 지금 까지도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종교와 慣習(관습)을 그대로 유지 계승하고 있었다. 그와 그의 두 형제 아흐마드 와 후세인은  검거되었다. 이후 그와 그의 형제들이 조상대대로 傳受(전수)받은 특수한 기능을 그대로 썩히는 것이 너무 아깝다고 생각하여 이집트 정부는 그를 유물보존국에 근무 하게했다, 그러자 압둘라술은 改心하여 이미 발견해 놓았든 왕가의 계곡 다이르알바리 절벽에 있는 어떤 장소로 안내했다. 이곳은 제21왕조 피네젬2세의 무덤으로써 그 당시미라를 숨기는 장소로 사용되었다. 여기서 람세스2세를 비롯한 10구의 파라오 미라와 이름을 알 수없는 30구의 미라가 발견되었다. 그것은 숨이 막힐 정도의 놀라운 발견이었으며 신 왕국 시대의 수많은 파라오의 미라와 함께 수천 년간 비밀 속에 감추워져 있던 왕들의 계곡이 세상에 드러난  순간이었다.

                        

                 하토르신                         투탕카멘의 황금마스크                                           死者의 서

 

***투탄카멘의 무덤 *** 

來世를 믿는 이집트인의 神話的, 宗敎的, 信念에 따라 죽은 자들의 무덤에는 내세의 삶에 필요한 개인적 물건과 장례용품이 들어갔다. 관속에도 符籍(부적) 역할을 하는 사자의 서 및 각종 금 은 보화물이 들어갔다. 이런 이유로 아주 오랜 고 왕국 시대부터 파라오의 고분은  수많은 도굴꾼의 약탈의 대상이 되어왔고 정치 사회적인 혼란기만 되면 이런 현상은 극에 달했다. 도굴꾼들의 손이 그의 미치지 않은 고분이 없을 정도였다. 이런 상황에서 거의 약탈자의 손이 닿지 않은 원래 상태대로 발굴된 고분이 바로 그 유명한 투탕카멘의 古墳(고분)이다. 약 3000년 동안 망각되어 왔던 황금 가면의 주인, 소년 왕 투탕카멘의 墳墓(분묘)가 20세기 초 전 세계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發掘者(발굴자)인 하워드 카트는 대학에서 考古學을 전공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놀라운 觀察力(관찰력)의 소유자로 뛰어난 데생 실력을 兼備(겸비)하고 있었다. 오랫동안 고고학자들 곁에서 일을 하며 누구 보다 現場을 잘 꿰둘고 있던 그는 이집트를 방문한 영국 부호인 케너번 경을 만난다. 우여곡절 끝에, 케너번 경의 後援(후원)을 받으며 발굴 6년째 되던 해인 1922년, 투탕카멘 死後 200년 후에 조성된 람세스6세의 무덤을 발굴하던 노무자들의 숙소 밑을 파내려 가다가 우연히 투탕카멘의 무덤을 발견하게 되었다 . 후원자인 케너번 경과 함께  墓(묘)의 출입문을 열었다. 墓는 前室 附屬室 玄室(현실) 보물창고로 구성되어 있으며 엄청난 양의 금으로 장식된 관, 미라의 케이스, 호화로운 침대, 황금옥좌, 호화로운 가구, 什器(집기), 수많은 인형과 神像들 로 꽉 차 있었다. 5중으로 된 棺을 차례차례 열어보니 미라를 담은 관이 나왔다. 온몸을 아마포로 칭칭 감은 미라의 얼굴에는 눈부시게 빛나는 황금 가면이 씌워져 있었으며. 가면을 벋기고 겹겹이 둘러싼 아마포를 헤치니 무려 143개나 되는 보석들이 쏟아져 나왔다. 투탕카멘은 어린 나이에 즉위했고 왕권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하고 갑자기 죽었기 때문에 다른 왕들의 무덤에 비해 초라하다, 그러나 이렇게 허약한 왕의 묘에서 나온 호화스러운 副葬品들이 세계를 놀라게 할 정도였으니, 강력한 權力을 휘둘렀던  람세스2세의 부장품의 규모는 과연 어떠했을까, 豫測(예측)하기가 쉽지 않다. 투탄카멘의 이 모든 遺物은 카이로에 있는 이집트 박물관 2층에 展示되어 있다.

               

                      아스완 댐안의 어느섬에서                                                  카르나크 신전내의 하트셉슈트 오벨리스크

 

*** 하트셉수트 장제전 ***

하트셉수트 딸의 가정교사였고 總理(총리)인 세넨무트가 설계 施工(시공)한  이 葬祭殿은  左右에 하토로 신전과  아누비스 신전으로 구성되어있다. 이신전은 이집트에서 가장 크고 정교한 사원 중의 하나로 기둥의 배열과 모양을 교묘하게 變化를 가미해 200개가 넘는 오시리스 조각상들과 하트셉수트의 제위 중에 일어났던 주요 사건 및 자신의 탄생신화, 교육, 대관식 장면들을 양각부조 물로 기록해 놓았다. 아누비스신전에는 투트모시스3세가 태양신 레 하라크테스에게 封物(봉물)을 바치는 장면이 描寫(묘사) 되어 있고. 하토르신전은 그의 부서진 상태이고 벽에 생명과 안정을 상징하는 열쇠모양의 앙크 등이 묘사 되어있다. 그 당시에는 葬祭殿 앞까지 나일 강과  연결된 運河가 있었고 운하 양쪽 옆 스핑크스 뒤로는 향기를 발산하는 나무들이 심어져있는 아름다운 정원이 있었다고 한다. 로마지배 시기에는 한때 요양원처럼 곱틱교의 수도원이 있었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조각상들이 한쪽 발을 힘차게 앞으로 내민 形像은 살아있음을 상징하고. 오시리스상과 같이 양팔을 가슴에 십자로 포개져 있는 형상은 죽은 자를 상징 한다***

               

                  하트셉슈트 장제전의 피로티 위에서                                                     하트셉슈트 장제전

 

*** 카르나크의 대열주실 *** 

카르나크 신전에 있는 대 열주 실은 세티1세 때 시작하여 람세스2세 때 완공 하였으며, 높이가 23m인134개의 거대한 기둥들이 숲처럼 빽빽 히 들어서 있다. 벽과 기둥  머리에는 테배의 3신 ( 오시리스,이시스 호루스) 에게 바치는 頌歌(송가)가 기록되어 있고, 제2 탑문의 벽에는 무릅을 꿇은 파라오가 아멘레 신과 무트 신에게 마아트를 바치는 장면과 삭발한 神官들이 神像을 태우고 도착한 배를 옮기는 장면이 묘사 되어 있다. 그리고 세티1세의 벽과 람세스2세의 벽에는 전쟁에서 勝戰하는 장면이 描寫되어 있다

                 

                  룩소르신전내 파피루스 다발 모양의 기둥                                                     나일강 선상에서

 

*** 아부심벨의 람세스신전 *** 

아스완 하이댐 상류에 있는 아부심벨 대신전은 람세스 2세가 崇拜했던 주요 도시를 守護하는 신들에게 바친 신전으로, 태베의 아몬 레, 멤피스의 프타, 헤리오폴리스의 레 호라크티 ( 정오의 태양신) 를 모신 곳이다. 높이 33m, 폭38m의 암벽을 직접파서 만든 정면에는 높이 22m에 달하는 4개의 람세스 2세 坐像(좌상)이 있고, 그 가운데 호루스 신의 작은 상이 있다. 4개의 상이 같은 자세와 形像을 하고 있지만, 그 명칭은 다 다르다. 이는 각각의 숭배하는 신이 다르기 때문인데, "군주들의 태양 람세스", "두 땅의 주인 람세스 "아몬신이 사랑하는 자 람세스", "아톤신이 사랑하는 자 람세스", 라는 象形文字가 表記되어 있다. 람세스 2세가 머리에 쓰고 있는 왕관은 上下 이집트의 통일을 의미하는 이중 冠인데, 원래 델타 지역의 下 이집트의 파라오는 붉은 冠을 썼고, 上 이집트는 백색 관을 썼다. 조각상의 두 발 사이와 좌우에는 람세스 2세의 어머니, 부인, 딸들이 작은 크기로 묘사되어 있다. 입구 위의 벽에는 정오의 태양신인 레 호라크티가 호루스의 형상을 하고 있고, 양옆으로는 람세스 2세가 신전의 주인인 태양신 레에게 奉獻(봉헌)하는 장면이 들어가 있다. 신전 내부는 암벽을 62m 깊이로 파서 列柱式복도, 奉獻物(봉헌물) 보관창고, 聖所 등을 만들어 놓았다. 복도에는 오시리스 자세 (죽은 자의 자세) 를 취하고 있는 8개의 람세스 巨像들이 천정을 받치고 있다. 천정에는 하늘을 상징하는 날개를 펼친 독수리들이 그려져 있고, 벽에는 히타이트 족을 상대로 전쟁을 치른 카데쉬 전투 장면이 부조 처리 되어있다. 신전 가장 깊은 곳 聖所에는 프타, 아몬 레, 람세스 2세, 레 호라크티 등 개의 座像이 위치해 있다. 이 聖所에는 1년에 2번 춘분과 추분 때 햇빛이 들어와 神像들을 비춘다

                

                        아부심벨의 람세스신전앞                                                           아부심벨의 람세스신전 

 

大神殿 옆에 있는 하토르 神殿은 람세스 2세가 왕비 네페르타리를 위해 지은 신전이다. 하토르 여신은 매일 태양을 낳는 여신으로, 암소의 形像을 하고, 두 뿔 사이에 태양을 상징하는 원반이 들어가 있다. 신전외부는 람세스 2세의 대 신전보다 규모는 작지만 아름다움은 그에 못지않다,  람세스 2세 巨像 사이에 왕비 네페르타리의 거상이 서있는 배치를 보여 준다. 높이가 9.5m에 달하는 각 거상은 왼발을 앞으로 내민 形像을 하고 있는데, 이는 인물이 살아있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암반을 21m 깊이로 파서 만든 신전 내부에서는 6개의 기둥이 바치고 있는 多柱式 복도, 하토르 여신에게 奉獻物(봉헌물)을 바치고 있는 네페르타리 왕비, 女神을 敬拜할 때 연주하는 시스트럼 등이 附彫物로 描寫 되어있다

                 

            아부심벨의 네페르타리 왕비를 위한하토르신전                                             피라미드와 모리형상 

 

아부심벨 신전 (람세스 대 신전, 하토르신전) 은 아스완 하이댐 건설로 인근의 다른 유적지와 함께 水沒될 위기에 처해지자, 이집트와 유네스코는 이 遺産(유산)을 지키자는 운동을 전개하여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등 각국의 연구자들이 다양한 해결책을 내놓았고 論難(론란) 끝에 원래 위치에서 60m 높고 210m 내륙 쪽으로 들어간 위치에 신전을 移轉 하기로 결정했다. 신전을 1036개의 블록으로 絶斷하여, 이미 만들어 놓은 人工 시멘트 암벽에 원래 방향을 유지한 채 차래대로 조립 하였다. 전체 무게는 15,000 ton이였고, 大神殿만11,500 ton으로 대부분을 차지했다.

*** 꿈의 비석 ***

기자에 있는 거대한 스핑커스 양발 앞에, 이른바 "꿈의 碑石" 이라 부르는 조그마한 비석 (높이21cm,길이57cm) 하나가 있다. 이 碑石은 투트모시스 4세가 세운 비석으로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투트모시스 4세가 어느날 피라미드 근처에서 낮잠을 자다가 꿈을 꾸게 되었는데 꿈속에 천사가 나타나서 누워있는 곳을 파며는 왕관을 씌어준다고 한다. 투트모시스 4세가 급히 인부를 데리고 와서 누운 곳을 팠더니 오늘날 볼 수 있는 이 거대한 스핑크스를 발견하였다고 한다. 그 당시 투트모시스 4세는 次男으로써 왕이 될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모세가 그의 아버지 아문호텝 2세와 대결했을 때 마지막 災殃(재앙)인 長子의 죽음 사건으로 인하여 왕이 되었다고 한다(믿거나, 말거나). 카이로 박물관에 가면 아문호테프 2세와 장자 시체가 한 관 안에 두 구의 시체가 들어가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7) 제3중간기시대

제3중간 (BC1069~747) 기는 제21왕조부터 24왕조까지이다. 제21왕조 (BC1069~945) 시대 는 上,下 이집트로 權力이 나누어져,上 이집트는 테베를 중심으로 한 아멘 神官 들이 다스렸고, 下 이집트는 타니스(아바리스) 지역을 거점으로  軍人들이 다스렸다. 이후 파라오의 총사령관으로 있던  리비아인 소센크가 下 이집트의 프수센네스2세가 血統을 남기지 않고 죽자 그의 딸과 결혼하여 제22 왕조(BC945~715) 를 세웠다. 그는 上 下 이집트를 통일하고 기원전 925년 팔레스타인 지역에 있는 남유다왕국을 侵入하여 솔로몬성전과 王宮을 掠奪(약탈)하여 테베에 있는 카르나크 아멘신전을 增築하였다. 그는 구약성경에 시삭이라는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다. 소센크 王趙는 司祭階級의 지지로 왕조를 이루었기에 신전이 있는 도시 (테베, 헤르모폴리스, 타니스, 헤라클레오폴리스, 레온토폴리스, 사이스 등)마다  신관들에게 自治權을 附與하였고. 이것이 王趙末期 때 각 지역 諸侯(제후)들의 亂立으로 無政府 상태가 된다

                 

           포톨레마이오스4세가 부기스신(황소)에게 경배                                               무덤주인의 가족들 

      

8) 말기왕조시대 

末期王趙時代 (BC747~332) 는 제25왕조부터 31왕조까지이다. 22왕조 말기 테베의 王族들이 全國을 휩쓸고 있던 無政府 상태를 수습하기위해 쿠시의 왕 피예 (에디오피아의 왕) 를 불러 들였지만. 피예는 여러 지역 諸侯(제후)들을  平政하여 이집트를 쿠시의 屬國으로 만들어, 초대 흑인파라오가 되었다. 그리고 以後 쿠시왕조 (제25왕조) 는 이집트와 팔레스타인 지역의 支配權을 놓고, 이미 팔레스타인 지역에 세력을 뻗쳐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킨 (기원전722) 앗시리아와 수차례 전투를 치루었지만, 결국 이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喪失(상실)하고 자신들의 영토인 쿠시로 돌아가 버렸다.

곧이어 나일 삼각주지역 사이스의 帝后(제후) 프삼테크가 앗시리아를 몰아내고 제26왕조 상인왕조를 세운다. 그의 아들 네코2세는 팔레스타인 지역에 있는 남유다왕국 (요시아왕시대) 을 침범하여 한때 지배하기도 했다, 상인왕조시대는 고왕국의 행정체제를 본받아 世習制가 아닌 능력에 基盤을 둔 다양한 人才들을 여러 민족 (그리스, 리디아, 이오니아, 페니키아인) 에서 뽑아 登用 시켰다. 특히 여러 민족으로 구성된 해군을 創設하여 무역로를 보호하였고, 그리스인들의 영향을 받아 처음으로 화폐제도를 도입 하였다.이후 메소포타미아의 大帝國 페르시아가 發興(발흥)하여 기원전 538년 신바빌로니아 왕국을 滅亡시키고 곧 이어  이집트를 침략하여 제27왕조를 세운다. 페르시아 왕 캄세스2세는 이전의 다른 침입자와 다르게 이집트를 하나의 屬州로 전락시켜  총독을 파견하여 직접 통치했다. 

그리스와 마라톤 전투 및 살라미스 海戰에서의 敗배 등을 계기로  페르시아의 국력이 약해진 틈을 타고 이집트는 끊임없는  蜂起(봉기)를 일으켜 독립하여 사이스지역 아미르타에우스가 제28왕조를 세운다. 이후 이집트인의 왕조는 29,30왕조까지 계속 이어지다가 기원전 358년 넥타네보 2세를 끝으로 이집트인의 마지막 土着王趙 파라오는 끝을 맺는다. 다시 페르시아가 침략하여 31왕조를 세우지만 곧이어 이집트는 알랙산드로스 대왕의 침략으로 헬레니즘세계의 일부로 編入(편입)되어 버린다. 以後 이집트는 약 2000년 동안 이 민족의 지배를 받는다. 제3중간기와 말기왕조시대는 주변의 여러 제국들이 興亡成歲(흥망성쇄)를 거듭하면서  이집트에 영향을 주어  왕조가 짧고  자주 바뀌었다.

                 

                                  룩소르 신전내                                                                     알렉잔드리아 몬타자궁전내

 

9) 포톨레마이오스 왕조시대

紀元前 332년부터 마케도니아 알렉산드로스가 그 당시 페르시아의 屬國이었든 이집트를 征服(정복)하고 지배하기 시작하여  이후 알렉산드로스대왕의 장군출신인 포톨레마이오스왕조가 약300년 동안(BC305~30) 이집트를 다스렸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이집트 臣民들에게 자기는 침략을 위해서 이집트에 온 것이 아니라 해방자로 왔다고 말하면서 멤피스의 아피스 신전에 엎드려 敬意를 표했고 또한 리비아 사막에 위치한 시와의 아멘신전에 신성한 제사를 지낸 후 자신은 이집트통치에 대한 神託(신탁)을 아멘신으로 부여받았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그는 그리스의 제우스신과 이집트의 오시리스신의 混合된 세라피스신전을 세라피온에 세웠다 이후 헬레니즘문화의 産室이 된 알렉산드리아 도시를 지중해 연안에 건설하도록 부하들에게 명령하고 페르시아 정복에 나섰다. 

포톨레마이오스는 알렉산드 대왕의 가장 측근중의 한 장군으로써  대왕과 함께 페르시아 정복과  東邦遠征(동방원정)을 10년간 함께하였다, 동방원정 후 귀한하는 중에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熱病으로 바빌로니아에서 죽자 (알렉산드로스의나이 32세).이후 알렉산드로스 帝國은 3 개 지역으로 分割(분할)하여 각 장군들이 統治하게 된다. 그중 이집트 지역을 포톨레마이오스가 통치하게 되었고 이왕조를 포톨레마이오스 왕조 (BC305~30) 라 한다.이 왕조는 알렉산드 대왕이 이룩한 業績을 繼承하여 알렉산드리아를 당대 지중해 권에서 제일가는 도시로 건설 하였다.그 당시 알렉산드리아는 全 헬레니즘 문화의 중심지로 화려한 大理石宮殿, 극장, 圓形競技場, 祠院(사원) 등 세계최고의 문화도시로 발전했으며, 70만권이 소장된 當代 최고의 도서관과 세계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파로스 등대를 건설하였다. 포톨레마이오스1세는 이집트의 旣成勢力(기성세력)과 傳統宗敎를 존중했고 祠院과 司祭에 대한 특권도 그대로 인정해 주었으며 이집트인들도 그리스인 유대인들과 함께 고위 행정관리로 採用(채용)했다. 포톨레마이오스3세 (BC246~222) 는 시리아까지 영토를 擴場 했으며 에드푸에 있는 호루스 신전을 건설 하였다.

이후 포톨레마이오스4세 (BC225~205) 부터  포톨레마이오스15세까지 약190년 간 동안 피 비린내 나는 宮庭內部의 王權爭奪戰(왕권쟁탈전)에 그 당시 마케도니아및 시리아를 掌握(장악)한 로마 勢力을 끌어드리면서 왕조는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하더니 기원전 30년 포톨레마이오스 왕조는 크레오파트라 여왕을 끝으로 로마에 合倂(합병)되고 말았다.  원래 고대 매소포타미아 에서는 近親間의 결혼은 요즘처럼 禁忌(금기)사항이었지만 이집트의 영향을 받아 이 왕조 중반기 이후부터 왕권의 보호와  正統性을 인정받기 위해서 요즘 우리가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매우 심하게 近親相姦(근친상간)의 결혼이 이루어졌다. 예를 들면 형 재들끼리의 결혼은 기본이고, 심지어 아버지와 딸과의 결혼, 어머니와 아들간의  결혼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이러한 근친혼은 서로 죽이고 죽는 왕권 쟁탈전에 이용되었으며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았을때는 도덕적으로 매우 타락한  왕조였다

                  

                                   아스완 공항에서                                                            룩소르신전앞 스핑크스의 길

             

*** 클레오파트라여왕 ***

처세술의 달인 클레오파트라는 포톨레마이오스12세의 딸로써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18세 때 어린동생 포톨레마이오스13세와 결혼하여 이집트를 共同統治한다. 그러나 포톨레마이오스13세와 王權爭奪戰에 밀려 왕궁을 脫出한다.그 당시 로마의 봄페이우스가 카이사르와의 權力鬪爭에 밀려 이집트로 도망쳐와 求援(구원)을 요청 한다.그러나 포톨레마이오스13세는 환영한다면서 그를 殺害해버린다. 그를 뒤 쫓아 이집트에 온 카이사르는 고마워 하기는 커녕 흐느껴 울면서 크게 激怒(격노)한다 (추측: 자기가 죽여야 되는데).이러한 사실을 눈치 첸 클레오파트라는 카이사르가 내 運命의 열쇠를 쥔 남자라고 판단하고 밤에 몰래 궁정에 숨어들어가 매혹적인 몸매와 뛰어난 言辯으로  카이사르의 마음을 사로잡는다.이후 카이사르는 클레오파트라의 사랑의 노예가 되었고 통 크게 10년 전 이집트에서 빼앗은 키프로스섬을 사랑의 선물로 클레오파트라에게 주기도 한다. 포톨레마이오스13세의 군사령관 아킬라스는 시민군을 동원하여 카이사르에 대항하지만. 4개월간의 전쟁은 곧 카이사르의 승리로 끝나고 포톨레마이오스13세 일당은 除去된다.이 전쟁으로 70만권의 책을 소장한 알렉산드로스 도서관 대부분이 불타버렸다. 그녀의 野望은 카이사르와의 協力 하에 그녀의 반대파였든 동생일당을 제거하여 統治權을 쥔 다음 이집트를 이집트인에 의한 독립적인 强性한 왕국을 만들고자 했다.이후 카이사르는 로마 國內問題로 로마로 돌아가 버린다.

기다리다 지친 클레오파트라는 카이사르를 만나러 로마시민에게 줄 선물을 배에 가득실고 로마에 들어갔다. 두 사람은 카이사르의 庭院에 머물면서 다시 사랑의 불꽃을 태우면서 생활한다. 로마시민과 원로원은 카이사르가 東邦化(동방화) 되어가는 것을 싫어하지만 반대를 무릅쓰고 클레오파트라를 위하여 로마의 비너스신전 안에 클레오파트라 황금 상을 세워 女王에게 공식적인 讚辭(찬사)를 보내기도 하였다. 기원전 44년 카이사르가 원로원에서 암살 되고, 곧 이어 權力鬪爭이 일어나자 클레오파트라는 이집트로 도망쳤다

권력 투쟁의 결과  안토니우스가 카이사르의 暗殺者들을 처단하고 새로운 영웅으로 急 浮上(부상)한다.이후 안토니우스는 이집트가 자신의 統治領域으로 配定되자, 클레오파트라가 카이사르의 愛妾(애첩)으로 로마에 머물고 있을 당시부터 그녀에게 魅力(매력)을 느낀 안토니우스는 자신이 머물고 있던 터어키의 타르소스로 클레오파트라를 초대한다. 이것이 기회라고 생각한 클레오파트라는 일부러 안토니우스를 오래 기다리게 해서 초초하게 만든 다음. 호화로운 배를 타고 아름다운 선율의 風樂을 울리며 등장하여 檻上(함상)의 宴會에 그를 초대한다. 클레오파트라는 뛰어난 言辯과 25살의 매혹적인 몸으로 안토니우스를 腦殺(뇌살) 시키기 시작했다. 결국 안토니우스는 그녀의 사랑의 노예가 되어 로마제국의 일은 까맣게 잊은 채 거대한 領地를 비롯한 막대한 선물을 주면서 그녀의 품을 벋어나지 못한다. 반면 로마에 머물고 있던 안토니우스의 부인 풀비아는 갑자기 남편의 출세를 위협하는 옥타비아누스에게 도전한다.안토니우스가 급히 귀국하여 이일을 수습하고 (풀비아 사망)和解를 위해 옥타비아누스의 여동생 옥타비아와 결혼하여 3년간 로마에서 생활 한다

로마생활 3년 후 안토니우스는 파르티아 遠征을 위해 지금의 터어키와 레바논 국경에 위치한 안디옥으로 떠난다. 거기서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를 다시 불러들인다. 다른 사람과 결혼하고 난후 클레오파트라의 眞價를 알았는지 안토니우스는 정식으로 결혼을 맹세하고. 쌍둥이 아이들도 받아드린다 그리고 그 아이들에게 영토를 나누어줄 것을 公言 하고 자신이 죽으면 클레오파트라와 함께 이집트에 묻어달라는 유언장까지 만든다. 그 당시 터키의 베르가몬 도서관에 있는 20만권의 책도 이집트로 가져갔다. 파르티아 원정에서 완전 실패한 안토니우스는 로마로 돌아가지 않고 이집트로 돌아간다. 로마 중앙정부의 방침을 어기고 로마의 威信(위신)을 깍아 내린 두 사람의 사랑행각은 안토니우스의 군사력과 그의 정치적 影響力(영향력)을 급격히 弱化 시켰다.

그당시 로마의 실력자 옥타비아누스 (카이사르의 양자) 는 共和國을 지키는 守護者로 자처하면서 로마시민에게 不利益(불이익)을 초래한 안토니우스를 처벌해야 한다며 명 제독 아그리파와 함께 기원전31년 대군을 이끌고 그리스 해의 악티움으로 進擊(진격)한다.이 전투에서 안토니우스 軍團은 大破하고 이집트로 도망 쳤다. 옥타비아누스는 클레오파트라에게 안토니오누스를 넘겨주면 목숨을 살려주겠다며 協商을 要請했으나 클레오파트라는 이를 거절하고 코브라로 하여금 자신의 유방을 물게 만들어 自殺한다. 적의공격에 負傷을 당한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의 품에서 죽고 싶다는 일념으로 王宮으로 뛰어 들어 왔으나 여왕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스스로 칼로 찔러 자살 한다. 클레오파트라여왕을 마지막으로 포톨레마이오스 왕조는 기원전 30년 막을 내린다.

플루타르코스가 말하기를 클레오파트라의 魅力은, 첫번째 줄이 많이 달린 현악기가 울리는듯한 아름다운 音色을 가졌고. 두번째 지중해지역 각국의 언어를 자유자제로 구사 할 수 있는 언어의 達人이었고. 세번째 역사와 문학의 달인으로 이야기할 때 어떤 주제도 문제가 없었고. 네번째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기술이 뛰어났다 고 말 하였다. “과연 매력적인여성”

                

                           바하리아 사막에서 한장면                                                            맴논의 거상앞에서 

*** 파라오등대 ***

고대무명의 7대불가사의 중의 하나인 파라오 등대는 기원전 279년 포톨레마이오스2세 시대 때 소스트라테스가 건설하였다. 외부 모양은 높이130m 3층 석탑으로 빛나는 白色 대리석으로 치장되어 있지만, 실제 건물 내부는 16층으로 당시에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물 이었다. 등대 꼭대기에는 바다의 신 포세이돈의 거대한 靑銅象과 커다란 이동식 거울이 달려있었다 한다, 그리고 거울에서 반사되는 빛을  50km 밖에서도 불빛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이후 7세기중엽 우마이아의 이슬람왕조시절, 파라오 등대 밑에 엄청난 보물이 숨겨져 있다는 소문이 퍼져, 칼리프 알 알리드가 보물을 찾기 위해서 등대를 반쯤 撤去하였다. 그러나 이소문은 뜬소문이라는 것을 알고 철거를 중단하고 복구했지만 완벽하게는 복구하지 못하여 등대로서의 기능을 살리지 못했다.이후 서기1308년과 1349년에 있었던 大地震으로 완전히 파괴되어 바다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이후 고고학탐사 팀들이 海底에서 12개의 스핑크스와 약 60ton이나 되는 石物 수천 개를 引揚하였다

*** 알렉산드로스도서관 ***

포톨레마이오스1세가 아테네에 있는 아리스토텔레스학파의 학원과 플라톤학파의 학원을 능가하는 시설을 갖추기 위해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을 짓기 시작하였다. 당시 이 도서관은 知識과 學術을 연구, 育成시키는 문화의 중심센터로써 헬레니즘 문하가 개화 하는데 가장 중요한 기반이 되어 주었고. 그리고 이 도서관에서 72명의 유대인 학자들을 構成(구성)하여 구약성서의 히브리어를 그리스어로 번역하여,이후 복음의 역사에 일대 전기를 마련해 주었다.이 시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을 거쳐 간 사람들은  유클리트 기하학의 아버지인 에우클레이데스, 아르키메데스, 그리고 당시 정확한 지구둘레를 計算한 지리학자 에라토스테니스 등이다. 포톨레마이오스3세 때는 두루마리로 만들어진 서적이 약20만권이 소장 되어있었고. 크레오파트라 시대 초기 때에는 무려 70만권의 두루마리 책을 所藏(소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포톨레마이오스13세와 로마의 카이사르와의 알렉산드리아 전투에서 화제로  도서관 대부분이 불타 버렸다. 이후 안토니우스가 페르가몬 도서관에 있든 20만권의 책을 沒收(몰수)하여  클레오파트라에게 선물로 주었지만. 이 귀중한 보물들은 계속된 침략자들의 放火로 모두 타버리고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지중해 해변에서                                          알렉잔드리아 카이트베이포트 앞(옛날파라오 등대자리) 

          

*** 구약성경의 히브리인들의 행적 ***

이집트는 우리나라 기독교인들이 聖地巡禮(성지순례)를 많이 가는 곳이다, 참고삼아 구약성경에 나오는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인 아브라함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의 조상) 시대부터 유대교의 母胎(모태)가 된 모세시대까지 히브리인들의 行跡(행적)에 대해 참고문헌 (기독교인이 쓴책) 을  발체하여 간략하게 기술해보겠다. (참고삼아 저는 기독교인, 이슬람교인, 유대교인도 아닌 종교에 관심이 많은 無神論者 입니다)

(1),아브라함의 생애, 아브라함은 고대 수메르문명이 形成된 갈대아 우르 (유프라테스강 下流) 에서  데라의 나이 130세에 그의 아들로 태어났다 (BC2166), 이복 누이인 사라와 결혼---사르곤제국  제3왕조   우르 남무왕 시대 때 아브라함의 나이 70살 때 (BC2096) 데라, 사라, 롯(조카)과 함께 하란( 터키 우르파 지역)) 으로 移住함. 여기서 아버지 데라가 죽는다 (향년205세)---아브라함의 나이 75세 때(BC2091) 여호아의 말씀을 좇아 조카 롯을 데리고 가나안 땅으로 이주함 --- 나이 86세 때 첩 하갈(하녀)의 소생이며, 오늘날 아랍인들의 조상인 이스마엘  출생---나이100세 때 이삭 出生---137세 때 부인 사라 죽음--- 향년175세 때 사망 (BC1991) 하여 헤브론 지역 헷족속 소알의 아들  밭에 있는 막베라 굴에 묻힘, 아브라함은 이집트를 왕래 하면서 가나안땅에서 100년간 생활했다.

(2),이삭의 생애가나안 땅에서 아브라함의 나이100세 때 이삭출생 (BC2066)---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모리아 산에서 이삭을 燔祭(번제) 드릴려고 함, 그러나 하나님이 이삭 대신 숫양을 번제 드리게 함---이삭의 나이 40세 때 리브가(하란출신)와 결혼함--- 나이 60세 때, 에서 야곱 쌍둥이 낳음--- 향년 180세 때 사망 (BC1886) 하여 헤브론의 막벨라 굴에 묻힘.

(3), 야곱의생애, 가나안의 브엘셀바에서 이삭의 나이60살 때 (BC2066) 에서 야곱 쌍둥이로 태어남 ( 온몸이 붉고 털이 많아서 에서라 하였고 후에 나온 아우는 에서의 발꿈치를 잡았으므로 그 이름을 야곱이라 함) ---에서가 팥죽 한 그릇에 長子權을 야곱에게 팜, 그 사건으로 야곱의 나이 77세 때, 兄 에서가 자기를 미워하는 줄 알고 화란에 있는 밧단 아람족의 조상인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망을 간다 (BC1929)---84세때 하란에서 외삼촌 라반의 딸인 레아와 결혼하고, 91세 때에는 레아의 동생 라헬과 결혼하여 20년동안 하란에서 생활함, 여기서 7명의 아들 ( 르우벤, 시므온, 레위, 유다, 잇시갈, 스불론, 요셉 ,) 과 1명의 딸(디나)을 얻는다---도피 20년후 야곱의 나이 97세 때 (BC1909) 가족을 데리고 하란에서 가나안의 얍북 강을 건너 헤브론으로 돌아옴, 라헬이 베냐민 을 낳고 길에서 죽음,  천사와 환도 뼈가 삘 정도로 겨루워 이겨 하나님으로 부터 이스라엘 이라는 이름을 얻음,  그리고 첩인 실바와 빌하에서 4명의 아들(갓, 아셀, 단. 납달리)을 낳음, 헤브론에서 33년간 생활함---야곱의 나이 130세 때 (BC1876) 가족 70명을 거느리고 요셉이 있는 애굽(이집트)의 고센 땅에 移住하여 17년간 생활한다---향년 174세 때(BC1859) 애굽에서 사망함, 야곱의 아들들이 그를 가나안 땅으로 메어다가 막베라 굴에 묻는다.

(4),요셉의 생애, 하란에서 야곱의 나이 91세 때(BC1915) 요셉이 태어남---요셉의 나이 6세때 (BC1909) 아버지를따라 하란에서 이스라엘의 헤브론으로 이주하여,  17세때 까지 헤브론에서 살아감--- 야곱이 노년에 얻은 요셉을 편애 하자, 다른 형들이 요셉을 미워하였음. 요셉이 꾼 꿈을 형들에게 말하기를 " 밭에서 곡식을 묶을때  내단은 일어서고, 형들의 곡식 단들은 둘러서서 절하더라" 하니 형들이 요셉을 미워하였음. 야곱이 아들 요셉을 세겜에 보내어 양때를 치는 형들이 잘있는지보고 돌아오라 했으나 형들은 도단으로 가 있었다, 요셉이 도단에 도착하자,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미디안 商賈(상고)들 에게 銀 20개에 팔아버림--- 이집트 왕의 侍衛隊將(시위대장) 보디발이 商賈로부터 요셉을 사서 그의 집 가정총무로 雇用(고용)함, 그당시 요셉의 나이17세 (BC1898) 였다---요셉이 파라오의 꿈 解夢(해몽)을 잘해서 7년간의 흉년을 對備(대비)하게 하여 이집트의 총리대신이됨---아버지 야곱과 가족 70명을 이집트로 移住하게함 (BC1876), 그당시 아버지 야곱의 나이 70세였다---요셉의나이 110세때 (BC1805) 이집트에서 사망함, 93년간 이집트에서 생활함. 이후 약430년 동안 아브라함의 후손들은 모세가 출 애굽을 이끌 때까지 이집트에서 생활함.

                 

                                    사막에서 켐핑                                                                   몬타자 궁전 다리위

 

(5),모세의생애---18왕조 핫트셉수트 여왕시대 때 모세의 어머니(요게벳)가 이집트 군사들을  피해 모세를 강물에 버림 (BC1527)--- 이집트 제18왕조의 핫트셉수트 여왕이 구하여 왕가에서 모세를 養育 함 (40년동안) ---이집트 파라오를 피하여 미디안 ( 시나이반도) 땅으로 피난옴, 미디안의 祭司長 이드로의딸 십보라와 결혼하여 자녀를 낳고, 丈人(장인)의 양때를 치면서 시내산 일대에서 생활 함 (40년 동안), 이집트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꿀과 젓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引渡(인도) 하라는 하나님의 啓示를 받음. --- 기원 전 1446년 모세의 나이 80세 때 12지파 (르우벤, 시므온, 유다, 잇사갈, 스블론, 베냐민, 갓, 아셀, 단, 납달리, 요셉의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를 이끌고 티나스(아바리스)에서 出 애굽한다,  出애굽당시 10가지 災殃(재앙)을 가지고 아문호텝2세와 대결 한다.  하나님이 홍해 바다를 갈라지게 하여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引渡 하도록 도와준다 (출 애굽 당시 장정만 60만명 이었다고 함) --- 시나이 반도 신내산에서 모세가  十 誡命(십계명)의 돌판과 律法(율법)을 하나님으로부터 받는다. 여기서 十 誡命을 넣을 법궤를 만들어 法櫃(법궤) 안에는 십 계명의 두 돌판, 廣野(광야)에서 먹었던 만나의 금 항아리. 아론 (모세의 형인 제사장) 의 싹난 지팡이를 넣는다 --- 바란 광야에서 38년 동안을 방황하며 활동 한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盤石을 명하여 물을 내라 하였지만,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의 命令을 거역하여 (화를 내며) 盤石을 지팡로 2번 쳐서 물을 솟게 한다. 12지파의 偵探(정탐)꾼 12명을 간나안 땅에 보낸다, 40일간을 偵探(정탐)을 하고 돌아온 12명 중 여호수와 아말렉을 제외한 10명은 가나안 땅은 이스라엘 백성이 살기에는 좋지 않은 땅이라고 보고한다, 이 보고를 듣고 백성들이 모세와 제사장인 아론을 죽이려고 할때 하나님께서 막으셨다 --- 모세는 모압과 애돔땅의 왕들과 많은 전투를 치르면서 요단강  통편 11km지점에 있는 싯딤 지역에 있는 느보산에 도착한다.싯딤 지역의 마지막 전투로 사실상 모세의 使命은 종료 되었다. 모세는 여호수아를 12지파의 지도자로任命 한다. 모세는 하느님의 榮光을 가렸기 때문에 (하느님이 盤石에 명하여 물을 내라 한 것을, 그러나 모세는 命 하지 않고 지팡이로 두번 쳐서 물을 솟게 함), 안타깝게도 약속의 땅 가나안(이스라엘)에 들어가지 못하고 기원  전 1406년 향년 120살의 나이로 느보산에서 生을 마감한다. 모세는 出 애굽 후 40년 동안을 바란 廣野에서 생활 했다.이후 여호수아는 모세의 遺業(유업)을 이어받아 12지파를 이끌고 여리고를 통하여 가나안땅으로 들어갔다.

구약성경에 모세가 出애굽 당시 出애굽을 저지하려 했던 파라오에게 행한 10가지 災怏(재앙)과 홍해물이 갈라진 사건, 그리고 60만의 노예인 장정이 이집트를 탈출 했다 한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살아있는 이집트의 모든 동물의 첫 胎生(태생)은 모두 죽었을 것이고. 홍해 바다가 갈라져 파라오의 精銳軍隊(정예군대)가 沒殺 당 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집트의 경제는 致命的인 打擊(타격)을 입었을 것이다. 이러한 事件은 그 당시 이집트의 입장에서 보면 沈默(침묵)으로 넘어갈 수없는 엄청난 사건이다, 그러나 이집트의 역사 기록에는 단 한 줄의 기록도 없다.

나는 이러한 歷史的인 事實 (구약성경의 기록) 들을 神들은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다는 宗敎的인 시각에서 바라 보아야 할까 ?, 아니면  事實에 입각한 客觀的인 입장에서 바라 보아야 할까 ?  사실 나도 햇갈린다     

                 

                         요르단 느보산모세교회 내부                                                  요르단 느보산 모세교회

출처 : 세계문화탐방
글쓴이 : 세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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