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민족 영토

중국 조선족의 지역분포와 그 특징

지식창고지기 2009. 6. 22. 16:02

중국 조선족의 지역분포와 그 특징

 

 

조선족의 이주과정은 곧 조선족의 분포과정이다. 동북아지역의 조선족은 이주, 재이주, 분포, 재분포의 복잡한 과정을 거쳤다. 일본투항이후 미군이 일본과 한국을 점령하였다. 그때 미군점령군당국은 주로 재한국일본교민과 재일본한국교민 문제를 처리하였다. 통계에 따르면 전후 재한일본교민은 거의 귀국하였다. 그때 상당부분의 재일교포들은 조선반도로 되돌아갈것을 요구했었다. 1945년 10월부터 1947년 9월까지 이태사이에 미국은 조선남부로 재일교포 110여만인을 되돌려보냈다.

그외 약 70~80만인은 그냥 일본에 남아 있었다. 이부분 사람들의 《법률지위》문제에 대하여 한국과 일본은 장기간 단판하여 왔으나 1965년 쌍방이 《관계정상화》를 실현해서야 해결은 받았다. 재일조선족들은 일본경내에 쫙 널려 있는데 주로 서해안지역과 혹가이도에 분포되여있다. 이를테면 돗또리, 오까야마, 야마구찌, 후꾸오가, 나가사끼, 가나자와, 후꾸이, 이시까와, 도야마, 니이가다, 아끼다 등지이다.

구쏘련 인구통계에 따른면 전후 구쏘련의 조선족인구는 1959년에 31만 3,000여인; 1970년에 35만 7,000여인; 1979년에 38만 9,000여인이다. 구쏘련과학원 민족연구소의 쓰 이 쁘로끄의 저작《세계인구》에 따르면 1983년 재구쏘련 조선족인구는 40만인에 달한다. 1970년의 통계에 따르면 쏘련의 조선족이 로씨야에 10만 3,100여인, 까자흐스딴에 8만 5,000여인, 우즈베끼스딴에 14만 7,500여인, 끼르끼쯔끼스딴에 9,400여인, 따쥐끼스딴에 8,400여인, 뚜르메니끼스딴에 3,500여인이 있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창건된후 민족압박을 제거하고 민족평등을 실현하고 또 민족구역자치를 실시했기에 조선족은 중화민족의 일원으로 되여 사회주의 혁명과 건설에 적극 뛰여들었었다.1953년(제1차인구조사) 중국족선족의 인구는 112만 569인이고 1982년(제3차인구조사)에는 176만 5,204인이였다. 1982년은 1953년에 비해 57.5% 장성했다.

우리나라 조선족인구는 주로 동북3성과 내몰골자치구에 분포되여있다.

1982년 동북3성의 조선족인구는 도합 173만 3,970인(료녕성 19만 8,252인, 길림성 110만 4,074인, 흑룡강성 43만 1,644인)으로서 전국 조선족총수의 98.2%를 차지했다. 그중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조선족인구는 75만 4,567인으로서 전국조선족인구의 42.77%를 차지했다. 내몽골자치구의 조선족인구는 1만 7,580인, 기타 성, 구의 조선족인구는 1만 3,367인이다.

1990년 제4차 인구조사에 따르면 전국 조선족인구는 192만 597인으로서 전국 총인구의 0.169%를 차지, 그 절대치는 전국 56개 민족가운데서 17위를 차지했다. 제1차인구조사때부터 제4차인구조사때까지 37년간 조선족인구의 평균성장률은 1.5%로서 전국 평균장성속도인 1.8%보다 낮았다.

동북3성의 조선족인구는 186만 4,760인(그중 료녕 23만 378인, 길림 118만 1,964인, 흑룡강 45만 398인)으로서 전국조선족총인구의 97.09%를 차지했다. 내몽골자치구의 조선족인구는 2만 2,641인으로서 전국의

1. 178%를 차지하고 기타성,


구의 조선족인구는 2만 2,641인으로서 전국의 1.178%를 차지했다. 동북3성에 조선족이 1만인이상인 시, 지구(인구에 따라 배렬)로는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길림성 길림시, 흑룡강성 목단강시, 길림성 통화지구, 흑룡강성 송화강지구, 료녕성 심양시, 흑룡가성 가목사시, 료녕성 무순지구, 흑룡강성 계서시, 길림성 백산시, 료녕성 철령지구, 흑룡강성 이춘시, 료녕성 본계시 등 19개이다.

연변조선족자치주는 우리나라 조선족의 가장 큰 집거구이다. 1990년 전 주 조선족인구는 82만 1,479인으로서 전 주 인구의 39.5% 차지, 전국 조선족총인구의 42.77%이다. 전 주 8개 시, 현의 조선족인구분포(인구에 따라 배열)를 보면 룡정시 18만 3,994인, 연길시 17만 7,547인, 화룡시 13만 6,894인, 훈춘시 9만 2,100인, 왕청현 8만 5,049인, 도문시 6만 9,166인, 안도시 2만 4,745인이다. 다른 한 조선족자치지방인 장백조선족자치현의 1990년 조선족인구는 1만 4,508인으로서 전 현 총 인구의 16.7%를 차지한다.

이상 분석으로부터 볼수 있다싶이 동북아지역 조선족 인구분포는 다음과 같은 몇가지 특점이 있다.

1. 인구가 상대적으로 집중되였다.

중국조선족은 98%이상의 인구가 동북3성과 내몽골자치구에 집중되여있고 구쏘련의 조선족은 99.5%의 인구가 로씨아와 중아세아 4개 나라에 분포되여있다. 재일조선인은 주로 서해안지역과 혹까이도에 분포되여있다.

조선족인구가 상대적으로 집중되여 있는것은 조선족의 벼농사를 짓는것과 밀접한 련관이 있다. 조선인들은 이주해들어 온후 논 관개와 개발에 유리한 대소하천류역과 평원지역을 찾아 자리를 잡았던것이다. 비교적 집중하여 거주했기에 조선족들은 민족 향심력과 응집력이 매우 강하다.

2. 대부분이 변계에 거주하고 있다.

우리나라 조선족이 비교적 집중된 지구, 시, 현은 대다수가 중, 로, 조 3국변계에 위치했다. 이를테면 연변조선족자치주는 중, 로, 조 3국변계에, 길림성 장백조선족자치현, 집안현, 료녕성의 단동시는 중조변계에, 흑룡강성 목단강시, 가목사시, 계서시와 내몽골자치구, 만주리시는 중로변계에 위치해있다. 상술한 지역의 조선족인구는 동북조선족총인구의 62%좌우 차지한다.

조선족은 또 다수가 철도연선과 철도와 가까운 주위에 거주, 인구는 변계로부터 내지로 들어오면서 점차 줄어들었다. 구쏘련의 조선족은 당초 구쏘련의 극동지역에 분포되여있었는데 후에 우리나라와 린접한 지역과 중아시아지역에로 확장되였다. 그것은 10월혁명후와 제2차세계대전전야에 국제국내형세의 핍박에 못이겨 대량의 조선족들이 구쏘련의 내지로 재차 이전했기 때문이다.

중, 로, 조 3국 조선족들이 이웃하여 가까이 거주하고 교통이 편리한데다가 또 바다를 사이두고 일본과 마주하고있기에 변계 민간사이의 상호래왕은 100여년 력사를 갖고있다. 구역경제협력이 발전됨에 따라 각국 조선족지간의 련계는 더한층 발전하게 될 것이다.

3. 특수한 인적관계가 있다.

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 조선족의 가장 큰 집거구인 연변조선족자치주에는 아직도 교포, 교포가족, 친족들이 5,000여인 있다. 조선족가운데는 조선, 구쏘련, 일본 등 나라인들과 친밀한 관계가 있는 사람들이 적지않다. 중, 로, 조 3국 교접점에 있는 훈춘시에는 조선과 혈연관계가 있는 사람이 1만 5,000여인, 일본과 혈연관계가 있는 사람이 1,000여인, 로씨야교포가 5,000여인 된다.

실천이 증명하다싶이 이런 특수한 인적 관계는 구역 경제협력발전을 추진하는 홀시할 수 없는 중요한 요소이다.

4. 전문가 학자 사회명인과 갑부들이 적지 않다.

구쏘련의 조선족학자가운데는 학술계에서 명망이 높은 원사(院士)와 통신원사들이 있다. 이를테면 막씸 빠블로위치 김은 구쏘련문화를 전공한 력사학자로서 1979년 구쏘련과학원 원사칭호를 수여받았다. 끄오끼 빼뜨로위티 김은 력사학자이자 교수로서 1976년 통신원사 칭호를 받았다. 그는 구쏘련과학원 동방학연구소 소장대리이며 《구쏘련대백과전서》(1980년 로어판)에 수록되였다.

통계에 따르면 연변조선족 가운데서 각종 전문가 인재가 도합 5만 3,528명 되는데 그중 고급 직함을 갖고 있는 분만도 2,281명 된다. 어떤분들은 과학연구면에서 조예가 매우 깊어 국내외의 공인을 받고 있다.

길림성에는 박문일, 정판룡, 조봉빈 등 조선족박사생도사와 같은 저명한 전문가, 학자들이 나타났다. 목하 동북아 각국 조선족지간의 과학기술, 문화 교류의 발전은 구역경제협력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