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유리는 고주몽의 후손이 아닌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왕
유리가 진정 고주몽의 아들일까.....?
해유리가 고구려 주몽을 찾아온 후 불과 1년도 않되 주몽의 부인인 소서노와 주몽의 아들들인 비류와 온조는 쫒겨 나고 오이, 마리는 죽고 협보는 쫒겨 난다. 그리고 주몽 또한 불과 1년도 지나지 않아서 41세 젊은 나이에 급사한다.
해유리는 왕에 오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수도를 졸본에서 국내성으로 천도를 한다.
이러한 일들이 해유리가 주몽의 아들이며 정통성이 있었다면 과연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일까...........?
해유리가 고주몽을 찾아 왔을 때 굳이 칼을 가지고 왔던 이유는 무엇일까......?
칼은 무력을 상징한다.
해유리가 가지고 왔던 칼은 온전한 칼이 아닌 부러진 칼이라 한다.
부러진 칼........., 쿠데타를 일으키며 싸우다 부러진 칼.........?
해유리가 고주몽을 찾아 올 때 굳이 칼이 없어도 어머니 예씨부인이 있기 때문에 아들임을 증명하고 남는다.
또한 칼이 아니라 다른 증표를 주어서 훗날 찾아오라 하면 될 것을 보관하기도 힘든 부런진 칼의 의미는 무엇일까........?
해유리는 쿠데타로 집권한 후 고구려 다른 지역들의 반발을 무마하고 자신의 정통성을 위해 자신이 고주몽의 아들이라 하며 고주몽이 부여를 떠날 때 태중에 있었다 말을 꾸민다.
고주몽의 후손이라 주장함으로 해서 정통성은 생기고 반발도 어느 정도 무마함으로써 권력을 완전히 장악한다.
그리고 보다 구체적인 고주몽의 아들이라는 증거를 만들기 위해 고주몽이 떠나기 전에 칼을 반으로 쪼개 주었다는 증거물도 만들어 고구려 백성들로 하여금 믿게 만든다.
하지만 반발이 너무 커 결국은 수도를 졸본에서 국내성으로 옮기고 만다.
예컨대, 해유리가 고주몽을 찾아오고 난 후......,
주몽이 40세가 되었을 때에야 유리가 찾아오지만 유리가 찾아오고 난 후 고구려의 정세는 급변한다.
유리가 찾아오고 난 후 얼마 있지 않아 유리가 태자가 되고 소서노는 고구려를 떠나고......, 또 얼마 지나지 않아 체 1년도 되지 않아서 고주몽은 급사한다.
또한 주몽의 심복이며 개국공신인 오이, 마리는 죽고 협보는 쫒겨 난다.
유리가 고구려에 오고 난 후 불과 1년만에 벌어진 일들이다.
졸본에서 쿠데타로 집권한 해유리는 자신의 취약한 권력 때문에 외부의 힘을 빌리고자 한나라 태수[현도군:서안평] 딸과 정략결혼을 한다.
하지만, 한나라 태수 딸이 불안전한 해유리의 권력기반과 해유리의 본처와의 갈등 때문에 한나라로 가 버리는 일이 발생하는데 해유리는 압록강까지 찾아갔지만 이미 늦어 그 유명한 황조가를 부른다.
유리왕은 졸본에서 권력기반이 너무나 취약하여 수도를 국내성으로 옮기는 천도를 단행한다.
고려를 망하게 하고 조선을 개국한 이성계가 자신의 권력기반이 약하고 개성사람들의 반발 때문에 수도를 한양으로 천도하는 거와 같이 유리왕 또한 졸본에서 자신의 기반이 취약한 관계로 국내성으로 천도를 단행한다.
유리왕에게는 여섯 아들이 있었다. 제1왕후에게서 도절을 낳았고, 다른 다섯 아들인 해명, 무휼(대무신왕), 여진, 해색주(민중왕), 재사는 다른 왕비에게서 얻었다.
정사에는 왕자들의 모후가 명확히 나와 있지 않다.
다만, 3남인 대무신왕의 모후가 송양왕의 딸이라는 기록이 있고, 송양왕의 큰 딸은 유리왕 즉위 다음 해에 죽은 것으로 보아 둘째 왕비 역시 송양왕의 다른 딸이 아닌가 여겨진다.
태자인 도절(BC 17~AD 1)은 18세 때 세상을 떠났다.
그의 죽음에 대해 명확한 기록은 없다. 그러나 여러 정황을 살펴보면 화친을 위해 부여의 인질로 보내려는 부왕의 명을 거역하다가 죽임을 당했거나 자결을 한 것으로 추측된다.
차남인 해명(BC 12~AD 9)은 21세 때 세상을 떠났다.
해명은 활달한 성격의 왕재였다.
유약한 유리왕은 강인한 해명을 두려워하여 자결을 명했고, 해명은 부왕의 명을 받아들인 것으로 삼국사기는 기록하고 있다.
3남인 무휼은 훗날 고구려 3대왕인 대무신왕으로 등극한다.
4남인 여진은 AD 18년 4월에 익사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여진의 죽음은 유리왕을 비탄에 빠지게 했다.
그의 시체를 찾은 비류 사람 제수에게 금 10근과 밭 10경을 주었다는 기록이 전한다.
여진의 죽음은 유리왕에게 큰 충격이었던 듯하다.
아들이 죽은 후 병상에 누웠고, 그해 10월에 세상을 떠났다.
5남인 해색주는 훗날 고구려 4대왕인 민중왕으로 등극한다.
6남인 재사는 생몰년이 미상이나 그의 아들이 훗날 고구려 6대왕인 태조왕으로 등극한다.
(참고 : '인간적으로 불행했던 유리왕' - 네이버 지식iN)
고주몽의 아들 비류, 온조
『해동고기』에는 혹은 시조 동명(왕)이라 하고, 혹은 시조 優台(우이-우태)라 하였으며, 『북사』 및 『수서』에는 모두 동명(왕)의 후손으로 구이라는 이가 있어 나라를 대방에 세웠다고 하였는데, 여기에는 시조를 구이라 하였다.
그러나 동명이 시조인 것은 사적이 명백한데, 기타의 것은 믿을 수 없다].
윗글에대한 다른 견해
[위서]에는 유리왕의 아들 여율이 고구려 3대왕이 됩니다.
여율은 비류에서 죽은 태자 여진으로 추정되고
대무신왕에게 죽임을 당한 것으로 고려됩니다.
따라서 대무신왕은 고주몽의 막내아들로 고려됩니다.
유리왕이 죽인 태자 도절이나 해명도 고주몽의 아들들로 고려됩니다.
고주몽의 나이와 유리왕의 나이를 고려하면 태자 도절이나 해명이 유리왕의
아들일 수가 있나 연구해보시면 좋겠습니다. 물론 당시에는 15살이면 왕이나
장수가 되는 시대입니다만...
유리왕은 주몽의 친아들이 맞고, 주몽은 기원전 79년생이다.
주몽이 기원전 58년 봄 22세의 나이로 동부여에서 졸본으로 도망칠 때 유리는 복중에 있었다. 따라서 유리왕은 기원전 58년생으로서 태어나면서 그 할머니 유화부인과 어머니 예씨부인과 함께 동부여에 인질로 잡혀 무려 40년 동안이나 살았다. 그러다가 그 할머니 유화부인이 죽고 난 5년 후 어머니 예씨부인과 함께 동부여를 탈출하여 졸본으로 와서 그 아버지 주몽왕을 찾아오게 된다.
주몽이 동부여를 탈출한지 40년 만에 그 아들 유리도 같은 길을 따라 졸본으로 와 태자가 되고 주몽이 죽자 왕위를 이은 것이다.
이때 주몽의 나이는 61세였으니 늙어 죽을 수 있는 나이이다.
그리고 유리왕은 왕위에 오른 후 처음에 송양의 큰 딸과 혼인해서 도절을 얻었는데 이 여인은 일찍 죽었다. 그리하여 다음에는 화희와 치희를 얻어 화희에게서 해명을 얻었고, 다시 송양의 작은 딸과 혼인해 대무신왕 무휼과 민중왕 해색주, 그리고 여진이란 아들이 있었는데 어릴 때 강물에 빠져 죽었다. 그리하여 유리왕은 귀염둥이 막내아들이 죽자 말년에 재사라는 아이를 양자로 삼는다.
앞서 장자인 도절이 일찍 죽었고, 도읍을 졸본에서 국내위나암으로 옮기게 되었는데, 외척인 골천호족이 도읍이전을 반대했고, 태자인 해명도 이에 동조했다.
그리하여 유리왕은 화가 대단히 났고, 결국 자신의 둘째 아들이며 태자로 봉했던 해명에게 스스로 자살하라는 명을 내리게 되어 해명은 죽게 되고, 송양의 작은 딸 소생인 무휼을 태자로 봉하는 것이다.
그런데 대무신왕이 죽었을 때 태자인 모본왕 해우가 어렸기 때문에 민중왕 해색주가 대무신왕을 이어 왕위에 올랐다가 죽고 모본왕이 왕위에 올랐으나 그는 정신이상자였다.
그리하여 고구려의 대신들은 모본왕을 제거하고 유리왕의 양자였던 재사를 왕위에 올리려고 하나 재사는 자신이 나이가 많다고 사양해, 할 수 없이 그의 일곱살난 아들 궁을 왕위에 올리게 되는데 이가 곧 태조대왕이다.
이때 고구려 왕실의 혈통이 주몽의 혈손은 모본왕으로 끝나고, 유리왕의 양자인 재사의 혈손으로 이어지게 되어 은연중에 역성혁명이 일어나게 된다.
주몽의 후손은 해씨이고, 재사의 후손은 고씨이다.
이후 고구려의 왕위는 모두 재사의 혈손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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