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시조 주몽, 그 죽음의 미스테리
우리에게 자랑스런 역사를 안겨준 고구려. 그 고구려를 건국한 이는 바로 고주몽이라는 인물이다.
그는 고구려인들에게 추모성왕이라는 시호로, 후대인의 기록에는 동명성왕이라는 이름으로 추앙받은 영웅이었다. 아무런 기반, 지지세력이 없는 상태에서 그는 고구려를 건국하였다. 주몽은 자수성가형 인물임과 동시에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든 위대한 위인이다. 그런데 그런 주몽의 죽음에 대한 미스테리가 있다면 믿어지는가?
많은 이들은 의아해할 것이다. 에이~ 그게 무슨 소리야. 미스테리라니...
나 역시 처음에 주몽의 죽음에 하등 이상이 없다는 걸 느꼈다. 하지만 고구려사를 공부할수록 나는 주몽의 죽음에 얽힌 미스테리에 고구려의 고대사가 숨겨져 있다는 것을 알았다.
고구려사의 최대 정점인 태조왕...
태조왕 대에 이르면 고구려는 국력이 강력해져 한나라를 위협할 정도로 성장하고, 중앙집권체제를 이룩하여 고대국가로서의 기틀을 갖추었다. 많은 이들은 태조왕이 고구려의 고대국가체제를 정비 했기 때문에 궁(태조왕의 이름)의 시호가 태조인 이유를 태조왕이 고구려를 중앙집권체제로 유지시 켰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는 앞뒤가 맞지 않는다. 당시 고구려인들도 지금 우리와 같은 사고를 가졌을까? 중앙집권체제, 고대국가의 기틀.... 이는 후대인이 붙인 것이지, 그 시대 사람이 붙인 용어가 아니다.
나라를 열었다는 태조
왜 고구려인들은 6대 임금에게 이와 같은 시호를 붙였을까?
한권으로 읽는 시리즈의 저자인 박영규씨는 태조왕의 국력신장정책으로 고구려의 영토가 저 멀리 중국 동해안까지 진출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 근거로 동해곡 수령이 붉은 표범을 바친 것인데 붉 은 표범은 아열대 기후에 서식하는 동물인데 이 기후대가 맞는 지역이 중국 동해안 즉 산동반도 남 쪽 지방이라고 한다.
하지만 단순히 영토를 넓혔다는 의미에서 그에게 태조라는 칭호를 주기에는
뭔가 부족하다. 게다가 표범이 아열대 기후에 산다고 했는데 이는 틀린 말이다. 관자라는 책을 보면 조선의 대표적 특산품에 표범가죽이 있었다고 한다. 조선은 발해연안, 만주, 한반도 일대에 자리했 는데 이로보아 표범이 아열대 기후에 서식하기 때문에 고구려는 아열대 기후 지역인 산동반도 이남지역까지 차지했다는 것은 섣부른 해석이라 보여진다.
태조의 비밀,,,, 그 비밀에는 해씨에서 고씨로의 정권교체에 있다.
고구려 2대 유리왕부터 모본왕까지는 왕의 성씨가 해씨였다. 그런데 6대 태조왕 때부터 고구려 임금의 성씨는 고씨로 바뀐다.
중국 사서에는 고구려 왕에 대해 처음에 소노부에서 나왔다 나중에 계루부에서 나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소노부로 대표되는 해씨세력이 계루부로 대표되는 고씨세력에 의해 축출당했다는 의미이다.
다시 말해서 태조왕이 고씨의 천하를 이룩했기 때문에 고구려인들은 그가 해씨의 천하를 종결하고, 고씨의 천하를 열었다는 의미에서 그에게 태조라는 시호를 바쳤을 것이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모본왕이 희대의 폭군이라 기록하였다. 하지만 모본왕의 기사를 보면 그가 폭군이었는지 의문이 들게 하는 기록이 있다.
즉위 2년 왕이 군사를 일으켜 우북평, 어양, 상곡, 태원을 습격하였다.
같은 해 서리와 우박으로 백성들이 굶주리자 나라의 창고를 열어 백성을 구제하였다.
만약 모본왕이 폭군이었다면 백성들을 구제했을까? 이는 그가 폭군이 아니라는 점과 후대의 누군가 에 의해 그가 폭군의 대명사로 알려졌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단군조선의 고토(우북평, 어양, 상곡, 태원은 만리장성 이남인데, 이 지역은 옛 조선의 영토였다)를 회복한 중흥의 군주 모본왕은 왜 폭군이 되었을까? 그건 모본왕을 시해한 태조왕의 고씨세력이 자신들의 역성혁명의 명분을 찾기 위해 모본왕을 폭군이라 조작했을 것이다. 이로써 왜 고구려 6대 임 금에게 태조라는 시호가 붙여졌는지 확인해봤다.
주몽의 죽음에 대해 다룬다면서 왜 모본왕과 태조왕에 대해 다루었느냐 물을 것이다. 이는 주몽의 미스테리를 밝혀줄 실마리이기 때문에 태조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서는 주몽의 죽음에 대한 미스테 리를 풀 수 없기 때문에 그러했다. 지금부터 주몽에 얽힌 죽음의 미스테리를 파헤쳐보고자 한다.
삼국사기를 보면 주몽이 나라를 연지 18년이 지난 기원전 19년 그의 나이 40세 때 부여에서 아들 유 리가 찾아온다. 그런데 주몽은 기다렸다는 듯이 그를 태자로 봉하고, 얼마 안있어(5개월 후) 붕어(황제의 죽음을 높이는 말)한다. 이 기록이 이상하다고 느껴지지 않는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유리가 오자마자 태자로 봉하고 죽음을 맞이하였다? 누군가에 의해 짜여진 각본 같이 느껴지는 건 나뿐인가?
주몽은 고구려를 건국하고 스스로 성을 고씨라 하였다. 그런데 그 아들 유리는 해씨이다. 이는 주몽과 유리의 왕위계승이 정상적인 방법이 아니라는 점을 의미하지 않을까? 유리가 아버지를 찾는 신물로 든 것이 칼인데, 이 칼은 무력을 상징한다. 결국 무력으로 소노부 계열의 해씨세력 유리가 계루부 계열의 고씨세력 주몽을 왕위에서 몰아낸 것을 의미하지 않을까?
유리왕의 기록을 보면 그는 아버지 주몽과 많이 다름을 볼 수 있다.
정책면에서 보면 아버지 주몽은 정복활동을 통해 고토를 회복하려고 했다. 하지만 아들 유리는 정복활동 대신 현상유지에 급급했다. 게다가 유리는 고구려 개국공신이자, 선왕의 친구인 협보의 직위를 박탈하고 농가의 일을 맡긴다. 이에 협보는 울분을 참지 못하고 자신의 가솔을 이끌고 남쪽으로 내려간다. 얼핏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이는 지배세력이 바뀌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게다가 유리왕 ~ 모본왕까지는 주몽에 대해 제사를 지내지 않다가 태조왕 때 시조묘를 건립하고 제사를 지냈다는 사실에서 유리왕의 왕위승계가 정상적인 방법이 아닌 무력에 의한 것이라고 유추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유리왕은 수도를 졸본에서 국내로 옮긴다. 이는 부여를 방비하기 위한 목적이라고 하지만 사실, 졸본의 고씨 세력의 견제를 피하기 위함이 아닐까 한다. 즉 국내로 천도한 것은 고씨 세력을 억제하기 위한 유리왕의 한 방편이 아닐까?
유리왕이 마음대로 주몽 시절의 지배층을 쫓아냈다는 것, 정책 노선이 주몽과 다른 점, 천도를 단행한 점, 그리고 그가 부여에서 고구려로 오자마자 바로 태자로 책봉되고, 얼마 안있어 주몽이 죽음을 맞이한 점 등으로 미루어보아 그의 왕위계승이 확실히 정상적인 방법이 아님을 분명하다.
이는 유리로 대표되는 해씨세력이 주몽으로 대표되는 고씨세력으로부터 왕위를 빼앗은 것이라 볼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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