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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 태조 누르하치

지식창고지기 2009. 7. 14. 19:01

청나라 태조 누르하치

 

 

(누르하치)

 

누르하치(努爾哈赤)의 성은 아이신줴뤄(愛新覺羅)인데 건주여진의 한 귀족가정에서 태어났다. 조부 각창안(覺昌安)과 부친 탁시는 모두 건주여진의 귀족으로서 명조로부터 건주좌위(建州左衛) 도지휘사 벼슬을 받았다.

 

누르하치는 어려서부터 말타기와 활쏘기를 배웠고 무예도 익혔다. 누르하치가 25살 되던 해 그의 조부와 부친이 투룬호트 성주 니칸외란과 명나라 군대한테 살해 되었다.

 

누르하치는 부친이 남겨놓은 13벌의 갑옷을 꺼내여 수하 병사들에게 나눠준후 니칸외란을 공격했다. 니칸외란을 죽인후 누르하치는 파죽지세로 기타 부락을 정벌해 몇년 지나지 않아 건주여진을 통일하였다.

 

당시 여진족은 건주여진외에 해서여진과 야인여진이 있었다. 해서여진중 가장 강대한 부족은 예허부락이였다. 1593년 예허부락은 예진, 몽골 등 9개 부락과 연맹을 맺고 3만명의 군사를 일으켜 누르하치의 건주여진을 공격해왔다.

 

이에 맞서 누르하치는 건주여진 군사를 이끌고 연합군과 싸워 끝내 승전을 거두고 여진족의 각 부락들을  통일하여 통치하였다.

 

여진을 통일하는 과정에 누르하치는 여진문자를 발명하고 팔기제도(八旗制度)를 제정하였다. 기는 행정단위 일뿐만아니라 군사조직이기도 하다. 매 기 아래에는 우록(牛綠)을 두었는데 300명을 한 개 우록씩 하여 평시에는 농사를 짓고 수렵도 하고 전시에는 싸울수 있게끔 하였다. 8기 제도는 생산을 주도하였을 뿐만 아니라 전투력도 강화하였다.

 

1616년 누르하치는 8기 귀족들의 옹호를 받아 헤투알라(지금의 요녕성 신빈부근)에서 스스로 칸(汗)의 지위에 올라 국호를 후금(後金), 연호를 천명(天命)이라 하였다.

 

누르하치는 후금을 건립한 후 2년 남짓한 시간을 들여 내부를 정돈하고 각 방면의 생산을 발전 시켰으며 병력을 확충하였다.

 

1618년 그는 직접 2만 군사를 거느리고 명나라 정벌에 나섰다. 먼저 무순을 공략한후 누르하치는 6만의 병력으로 후금을 토벌하러 오는 세갈래 명나라 군대를 각기 격파하였다. 이 전쟁을 역사에서 <싸르후대전>이라고 한다.

 

싸르후대전 이후 명왕조의 원기가 크게 상했다. 누르하치는 2년후 8기군을 거느리고 요동의 중요한 요충지인 심양과 요양을 점령하였으며, 1625년 누르하치는 후금의 서울을 심양으로 옮기고 이름을 성경이라 고쳤다.

 

1626년 누르하치는 직접 13만 대군을 거느리고 요하를 건너 녕원성(寧遠城)을 들이쳤다. 녕원에 남은 명나라 군사는 만여명밖에 되지 않았지만 녕안성 백성들과 함께 끝까지 녕원성을 사수했다. 후금 군대는 큰 손실을 보았고 누르하치도 중상을 입어 부득히 퇴각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누르하치는 속이 상하고 화가 나기도 한데다가 상처가 악화되어 끝내 숨을 거두었다. 그 때 나이 68살이었다. 그후, 그의 여덟째 아들 황태극이 후금의 칸위를 이어받았다.

 

누루하치의 시신을 모신 칸능은 현재 심양의 유원지화된 한 공원(북능공원)내에 자리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