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석과 제석굿
제석거리라고도 하는 제석굿은 옛부터 전통적으로 한민족의 천신(天神)인 제석님을 모시고 노는 굿(거리)이다. 이 굿은 한민족의 첫 나라인 고조선 때부터 나라의 연례 제전(祭典)으로 거행되어 오다가 조선조에 와서 무(巫)의 천대 및 탄압으로 말미암아 쇠퇴하여 오늘날 전국의 각종 굿거리에서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제석이 한민족의 천신이라는 사실은 <삼국유사> <고조선>조의 단군신화에서 확인된다. 거기서 단군의 할아버지 되는 환인(桓因)은 환인 제석으로 불린다. 그동안 연구에 의하여 환인은 한님, 하느님 등의 한자식 표기인 점이 밝혀졌다. 제석은 원래 인도의 고대 신령인 인드라(INDRA)가 불교에 수용되고, 중국에 와서 그렇게 한역(漢譯)된 것이다. 불교가 우리나라에 전래되어 무(巫)와 자연스럽게 결합되면서 삼국시대 때 한민족의 천신을 제석신의 성격과 결부하여 제석이라 부르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인드라는 고대 인도의 리그베다(Rig Veda) 찬가에 흔히 등징하는 천상신이다. 세계의 혼란과 패망을 조성하는 아수라(阿修羅)와 여러 차례 교전하여 매우 용맹스러웠다 한다. 불법에 귀의하여 도리천의 주신(主神)이 되었다. 세상에서 가장 높은 산 수미산(須彌山) 정상의 희견성(喜見城)에 있으면서 33천(天)을 통괄한다. 동방의 수호신인 이 제석천은 마신(魔神)과 싸워 인간을 보호할 뿐 아니라 우주의 동서남북을 1개월씩 순회하면서 큰 거울로써 그곳 인간의 선악을 살피기도 하는 것으로 믿어진다.
환인 제석은 그의 아들 환웅을 한 무리의 신령들과 함께 인간 세상에 내려보낸다. 환웅이 웅녀와 결합하여 단군을 낳으니 그가 곧 우리의 국조이다. 그가 나중에 아사달에 은퇴하여 산신이 되었음도 단군신화에 전한다. 한민족은 그 세 분을 의례로 모셔오고 있거니와, 조선조 세종 때만해도 황해도 문화현 구월산에 있는 단군천왕당(檀君天王堂)에서 환인, 환웅, 단군천왕의 삼성(三聖)에 국가의 제사를 올렸다. 무(巫)에서는 이 세 분을 삼신(三神)제석으로 받들고 신앙해온다.
중국의 역사서인 <삼국지 위지동이전>에는 고구려, 부여, 예, 삼한 등에서는 봄·가을로 온 나라가 크게 모여 제천의식을 가졌음을 기록하고 있다. 천제는 우리말로는 굿 곧 제석굿이었음을 능히 미루어 알 수 있다. 오늘날 굿의 수많은 거리는 역사의 흐름 속에서 형성된 것이고 당시에는 제석님을 위한 굿을 중심으로 약간의 거리만 놀아졌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 제석굿은 고려 때만 하더라도 팔관회, 연등회 등 불교의 이름을 덮어쓴 채 국가의 의례로 매년 거행되었다. 그러나 조선 왕조에 들어와서 무(巫)가 천대와 핍박을 받으면서 국가의례로서의 천제는 폐지되고 각 마을에서 봄·가을로 지켜오던 마을굿(洞祭-동제)은 대부분 유교식 제례(祭禮)로 변질되고 만다. 그뿐만이 아니다. 한민족의 전통의례인 굿에서는 으레 제석굿 또는 제석거리를 부정과 청배를 거친 다음 가장 먼저 모셔노는 법인데, 그 거리 이름이 불사(佛師)거리 또는 천존(天尊)거리로 바뀌어졌고 제석굿은 심지어 굿의 후반부에서 약식으로 놀아지게 되었다.
제석굿의 전통이 이렇듯 위축·변질됨에 따라 한민족의 하느님 신앙이 매우 약화되었거니와 한민족의 자긍심과 자존심도 큰 타격을 입는다. 한민족의 임금은 단군이래 하느님의 아들 곧 천자(天子)라는 확고한 의식을 갖고 있었다.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비문(碑文)에 천자임을 밝히고 있고, 고려 때까지 국왕은 천자라는 인식을 견지하였다. 한민족은 아울러 천손(天孫)임을 늘 잊지 않고 있었다. 그것이 조선조에 들어와 점차 잃어버리게 되었다. 일제는 여러 학술조사를 통하여 무(巫)가 한국인의 기층신앙이고 굿이 한국인 신명의 근원임을 알았다. 그리고는 무의 핍박과 왜곡에 나서 굿을 귀신신앙으로 몰아갔다. 무의 철폐에 실패한 그들은 무당을 등록시켜 통제하기에 이르렀고, 심지어 무당의 신당에는 일본 신도(神道)의 천조대신(天照大神)을 맨 가운데 모시게 함으로써 한국의 신령을 저급화하려고 노력했다. 해방 이후에는 이 땅에 서구식 사회가 펼쳐지고 서양의 기독교적 가치관과 이른바 과학적 합리주의가 통용되면서 무(巫)는 다시 미신 내지 귀신신앙으로 핍박받았다.
이런 역사의 과정에서 제석굿은 더욱 위축되고 왜곡, 변질될 수밖에 없었다. 제석님이 어떤 분인지 그 근원과 성격은 이제 무당들 사이에서도 잊혀져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최근 학계의 뜻있는 이들에 의해 한민족의 전통적인 제석 신앙과 제석님의 성격이 점차 밝혀지게 되었다.
한국 전통문화에서 제석굿이 갖는 의의는 다음의 세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 제석굿은 한국 전통문화의 기반이자 그 정신이 된다. 한국 전통문화예술의 거의 모든 분야가 고대 굿에서 기원하였음은 이제 정설로 되어 있다. 제석굿은 고조선의 단군이래 한민족이 거행해오던 최초의 굿이다. 따라서 정확히 말해서 제석굿이 한민족 전통문화예술의 근원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정신은 한민족의 하느님이자 조상인 제석님을 잊지 않고 모셔 천지인(天地人)의 합일(合一)을 이루고 한민족의 그런 근원을 세세생생 잊지 않겠다는 것이다.
둘째, 제석굿은 한민족의 정신적, 문화적 주체성의 근원이 된다. 이것은 달리 말하자면 한국인의 뿌리의식이 된다. 어느 민족, 사회나 그 문화 주체성은 가치의 구심점이고 사람답게 살아가는 기반이다. 자신이 어느 뿌리에 속하는지, 그 뜻이 어떤 것인지 몰라서는 정신적, 문화적 고아에 다름 아니다. 우리의 제석굿은 우리가 환인, 환웅, 단군의 자손이고 바로 천손임을 일깨워준다. 21세기 지구촌의 문화시대에 문화주체성의 확립은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셋째, 제석굿은 한국인의 신명과 조화의 기운을 되살려준다. 일제도 연구를 통하여 그것을 알아 차렸거니와, 굿은 한국인에게 신명과 조화의 기운을 준다. 굿 가운데서도 제석굿은 우리의 근원을 알게하는 으뜸 굿이다. 그 사실을 잊어 버렸기에 해방 이후 한국 사회는 신명과 조화의 기운을 잃고 나라가 분단된 채 혼란을 거듭하고 있다. 21세기 문화의 시대, 경쟁의 지구촌 사회에서 한민족은 신명과 조화의 기운으로써 화합하여 통일을 이루어내는 바탕을 만들고, 밖으로는 신명의 기운으로써 세계로 떨쳐 나아가는 첩경을 삼아야 할 것이다.
무의 천대와 핍박의 배경 속에서 굿은 그 동안 심한 변질을 겪어오고 전통굿의 전승은 매우 열악한 상황에 처하여 있다. 중요무형문화재 지정을 통한 정부의 전통문화 보존, 계승의 정책 덕분에 각 지역의 굿이 그래도 온전히 살아남을 수 있게 된 것은 다행이라 하겠다. 그러나 그 지점에서 계보와 지역적 안배가 중시되어 오기에 제석굿은 고려의 대상이 되지 못하였다.
이제는 인식을 달리해야 한다. 제석굿은 한국 굿 가운데 가장 기본적이고도 으뜸되는 굿이다. 이것은 한국 전통문화예술의 기반이자 근원이고 정신이다. 이런 사실이 바로 인식되고 제석굿이 중요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보존, 전승될 때라야 한국 전통문화예술이 바로 설 수 있다.
조흥윤 (한양대 교수, 한국샤머니즘학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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