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사학 특강 8] 우리는 왜 불교를 들여왔는가
고대 인도의 인더스 문명을 건설한 사람들은 메소포타미아쪽에서 흘러 들어간 셈족의 한 줄기인 드라비다족이었다.그들의 언어는 우리와 같은 SOV형태의 교착어이며 가야를 통해 들어온 드라비다어는 우리말에도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인더스 강일대에 정착한 드라비다족의 신앙은 수메르와같은 자유분방한 다신교였다.그때 야벳계열의 언어를 사용하는 아리안족이 힌두쿠시 산맥을 넘어 남하했다.그들은 창조주 브라흐마에게 소와 양으로 제사하는 유일신 종교를 신봉하고 있었다.그들은 원주민인 드라비다족을 정복하고 인더스 문명을 말살하기 위해 엄격한 계급제도를 만들고 그들을 노예계급으로 묶었다.그러나 마치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나안의 다신교에 혼합됐듯이 창조주를 섬기던 아리안의 신앙은 드라비다족의 다신교와 섞여서 힌두교가 됐고 창조주 브라흐마는 힌두교의 여러 신들 중의 하나가 됐던 것이다.
인도 가비라 성에서 고다마 싯달타(BC 560-480)가 성주의 아들로 태어났을 때 인도는 힌두교와 연합한 계급제도가 더욱 분화되어 그 폐해가 막심했다.본래 고다마 싯달타의 사상은 계급제도와 결탁한 힌두교의 신들을 축출하기 위해 제기한 무신론적 구원론이었다.그것을 종교로 육성하여 포교를 시작한 것은 마우리아국의 아소카 왕(BC 272-232)이었다.그 때까지도 고다마 싯달타의 가르침인 비폭력,불살생의 원칙이 지켜졌는데 대륙에 들어오면서 점차로 살생유택을 내세우는 호국 불교로 변모하게 되었다.동이족과의 협력을 포기했던 후한 광무제의 아들 명제는 유학을 대체할 통치 이념을 모색하다가 AD 67년에 호국 불교를 들여오게 된 것이다.
그러나 후한에 들어온 그 불교가 고구려에 들어온 것은 소수림왕 2년 즉 AD 372년이었다.아무리 교통이 불편한 시대였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불교의 전래가 300년도 넘게 걸렸던 것일까?그것은 고구려에서 불교를 막아낸 강력한 종교 세력이 있기 때문이었다.역사학자들은 우리 나라에 불교가 들어오기 전에 샤머니즘이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하는데 무당이나 점쟁이의 세력이 불교를 300년 동안이나 못들어 오게 했다는 것은 이치에 닿지 않은 억지 논리다.나는 고구려가 이미 기독교 국가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고구려는 말타고 활을 쏘는 전투적인 혈통을 지닌 나라였다.그러나 이상하게도 고구려 초기에 전쟁을 잘했던 왕들은 모두 대신들에 의해 제거되었다.
고구려 제5대 모본왕은 군대를 이끌고 한나라의 북평,어양,상곡을 지나 태원까지 쳐들어가서 요동태수의 항복을 받아냈던 영웅이었다.그러나 삼국사기의 고구려본기는 그가 성품이 포악하여 측근에게 시해당했다고 기록해 놓았다.제6대 태조대왕의 아우 수성은 한나라의 유주자사,현토태수,요동태수 등이 침입해 왔을 때 선비족과 연합하여 이를 대파하고 현토와 요동 땅을 수복한 맹장이었다.왕이 죽고 수성이 즉위했는데 그도 역시 신하에게 살해당했다.삼국사기는 역시 그가 포악했기 때문이라고 썼다.이후로 고구려의 영토는 위축되고 시작하고 국력은 약해지기 시작한다.왜 전투적인 민족의 고구려에서 전쟁 잘하는 영웅이 대접을 받지 못했을까.오른편 뺨을 때리면 왼뺨도 돌려대라는 기독교 정신을 그들이 고지식하게 따랐던 때문은 아니었을까.
날로 연약해지던 고구려는 16대 고국원왕 때에 큰 수모를 당한다.동족인 선비족의 모용황이 쳐들어와 환도성을 불태우고 왕의 모친과 왕비를 잡아갔으며 왕은 달아나 겨우 목숨을 건지는 치욕을 당했던 것이다.이 때 형제국인 백제는 그것을 구경만 하고 있었다.동이족 모두가 한나라와 대결하여 싸우는데 슬그머니 물러서있던 고구려는 선비와 백제로부터 따돌림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고국원왕은 초토화된 고구려를 다시 일으켜보려고 호국불교를 생각하게 되었고 위나라 승려 굴마(堀摩) 등과 접촉하기 시작했다.그러나 이때 백제의 근초고왕이 쳐들어와 고국원왕을 죽이고 물러간 것이다.살해당한 부친의 뒤이은 소수림왕은 즉위,이듬해에 더이상 대신들이 이의를 말할 수 없는 상황을 이용해 호국 불교를 도입하고 불승 아도에게 절을 건축하도록 승인했다.아도는 위승 굴마와 고구려 여인 도녕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었다.
그 후 AD 384년에 백제를 방문한 ‘호승’ 마라난타를 필자는 불승으로 보지 않는다.그 후로 백제가 불교를 받아들인 흔적이 없는 것이다.마라난타라는 이름은 아람어로 ‘우리 주께서 오신다’라는 뜻의 ‘마라나타’와 유사하다.호(胡)는 서역에서 왔다는 말이고 당시 기독교의 선교사도 승(僧)이라는 말로 불렀다.어쨌든 불교는 고구려에서의 성공을 발판으로 신라 포교를 위해 전력을 다했다.AD 488년에는 불승이 왕궁에 잠입하여 소지왕의 왕비와 통정까지 했을 정도였다.그러나 신라가 불교를 공인한 것은 고구려가 받아들이고 다시 155년이나 지난 뒤인 AD 527년 법흥왕 때였다.이 때 불교 도입을 주도한 세력이 병부령 이사부와 어릴 때 고구려에 들어가 혜량이라는 중으로부터 수계를 받고 돌아온 무장 거칠부 등 군부세력이었다.그들은 대신들을 위협하여 호국 불교를 들여오고 다시 5년 후인 AD 532년 기독교의 종주국이었던 금관 가야를 쳐서 멸망시키는 것이다.종주국을 친 명분을 세우기 위해 거칠부는 신라 국사를 편찬하면서 가야의 수로왕을 난폭한 자로 만들고 가야가 신라를 여러 번 공격한 것으로 개작하여 기록해 놓은 것이다.
고구려에서는 호국불교를 받아들인 후에 광개토왕이라는 영웅이 나타나서 백제와 신라를 압박했고 또 장수왕이 그 뒤를 이었다.장수왕은 불승 도림(道琳)을 첩자로 백제에 들여보내 개로왕을 미혹케하여 국력을 소모시킨 후 군사를 몰고 들어가 개로왕을 죽임으로서 고국원왕의 원수를 갚았다.그 후에 신라까지 불교를 도입하고 가야를 멸망시키자 백제의 성왕은 마침내 백제에도 불교를 들여오기로 결심했다.AD 541년에 성왕은 양나라로부터 불경과 불상을 도입했으며 일본에도 이를 전하여 동방 3국과 일본이 다 불교국이 되었고 후한,위,진에 이어 대륙을 석권한 선비족의 나라 북위와 하화족의 나라인 양나라 등 동방의 모든 나라가 다 불교국으로 된 것이다.
/김 성 일 <작가·한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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