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사학 특강 9] 김유신의 꿈과 좌절
‘화랑도’는 본래 관에 의하여 주도된 것이 아니고 순수한 민간의 전통이었다.같은 풍습이 ‘선인’이라는 이름으로 백제와 고구려에도 있었던 것으로 보아 고대로부터 전승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그렇다면 그들은 어떤 성격의 집단이었으며 낭도들 중에서 화랑을 선발할 때에는 어떤 기준으로 했을까.
작가 김동리씨는 이들이 ‘종교적 집단’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자신보다 국가를 먼저 생각하고 15세 내외의 소년이 전쟁에 나가 기꺼이 목숨을 버리는 일은 생사를 초월한 종교적 신념이 아니고는 어렵다는 것이다.그것을 뒷받침하는 자료가 삼국사기에 소개된 최치원의 ‘난랑비서문’이다.
“우리 나라에는 현묘한 도가 있는데 이를 풍류(風流)라고 한다.이 교를 설치한 근원은 선사에 자세히 실려 있거니와 실로 이는 삼교를 포함한 것으로 모든 백성과 접촉하여 이를 교화하였다”
‘선사’라는 자료는 실전되었으나 최치원의 이 글은 ‘풍류’라는 말이 명산대천을 찾아 시와 가무를 즐기는 유흥의 문화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종교였음을 명백히 하고 있다.당시 화랑도는 또 ‘풍류도’라고도 불리웠고 삼국유사는 화랑도의 명부를 ‘풍류황권’이라 기록하고 있다.이 ‘풍류교’ 즉 ‘바람과 물의 교’는 무엇일까.기독교인이면 즉시 요한복음의 기사를 떠올리게 된다.유대인 관원 니고데모라는 자가 밤에 가만히 예수께 찾아와 ‘영생의 도’를 묻자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해 준다.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 3:5)
그 분은 또 성령에 대해서도 설명해 준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요 3:8)
필자는 최치원이 말한 이 ‘바람과 물의 교’가 기독교라고 생각한다.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면 방언,신유,예언 등의 은사와 증거가 나타나므로 성령받은 자를 화랑으로 선출할 수 있었을 것이다.경주박물관에는 진흥왕 무렵의 것으로 보이는 금석문이 소장되어 있는데 거기에는 두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맹세한다’(天前誓)라는 말이 들어 있다.진지왕 때의 불승 ‘진자’는 미륵에게 화랑이 돼 오시라고 발원하다가 꿈에 한 동자를 만났는데 그 이름을 미시(未尸)라고 했다.이 미시는 바로 ‘메시아’일지도 모른다.법흥왕이 불교를 도입한 후로 화랑도가 소멸되었으나 진흥왕은 화랑이 국방의 초석임을 인식하고 다시 정부 주도로 화랑의 제도를 시작했다.이 제도의 부활때문에 혜택을 본 사람이 바로 15세에 화랑이 된 김유신이었다.화랑이 된 그는 17세때에 또 중악(中嶽)의 석굴에 들어가서 기도하다가 삼국통일의 비전을 얻었다고 한다.
유신은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이었던 구형왕의 증손이었다.유신의 조부 무력은 관산성 전투에서 백제 성왕을 전사하게 하고 1만여명을 섬멸한 대공을 세웠는데도 벼슬이 아찬에 머물렀다.유신의 부친 서현은 신분 상승을 위해 왕족인 입종의 딸 만명을 연애하여 유신을 낳았다.김대문이 쓴 ‘화랑세기’는 지금 실전되었으나 날조된 위서 ‘화랑세기’는 유신에 대한 한가지 험담을 적어 놓았다.그가 어려서부터 여색을 좋아하여 창녀 천관의 집에 드나들므로 모친 만명이 나무랐다.유신은 그곳에 가지않기로 약속했는데 어느 날 마상에서 졸다보니 말이 또 그리로 갔으므로 그는 말의 목을 베고 돌아섰다.그 후 창녀 천관은 중이 되어 그 자리에 천관사를 세웠다는 것이다.15세에 성령으로 거듭나 화랑이 되고 17세에도 석굴에 들어가서 기도했다는 유신이 언제 또 창녀의 집에 드나들었을까.천관사는 교회였고 천관(天官)이란 성직자였을 것이다.경주에 교회가 아직 남아 있어 유신이 기도하러 다녔으나 모친 만명은 불교 국가인 신라에서 그런 행동이 눈에 띄면 장차 큰 뜻을 이루는 데 불리할 것이라고 충고했을 것이다.
또 단재 신채호 등 일부 사학자는 유신이 당과 협력하여 삼국을 통일하려다가 고구려 땅을 잃게 되었다고 비난하기도 한다.그는 왜 당과 손을 잡으려고 했을까.당을 건국한 이연의 가문은 본래 선비족 출신의 농서 이씨였고 부친을 도와 당을 건국한 이세민은 형과 조카들을 죽이고 부친의 제위를 물려받은 사람이었다.그 이세민이 죄를 회개하고 거듭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나는데 AD 635년 그는 파사의 선교사 알로펜의 설교를 듣고 재상 방현령 등과 함께 기독교인이 되었던 것이다.그 때의 일은 지금 서안 비림(碑林)에 보존되어 있는 ‘경교유행중국비’에 상세히 기록돼 있다.이세민은 경교의 교지가 진실로 인간을 구원하는 도리라 하며 즉시 장안에 대진사(大秦寺) 즉 교회를 세우게 했다.또 그는 전국 각지에 경사(景寺)를 세우게 했으며 알로펜을 진국대법주 즉 대덕으로 삼고 그리스도를 경존,선교사를 경승,기독교인은 경사(景士)라 했다.이것을 알게 된 유신은 기독교인이 된 이세민과 손을 잡고 불교의 천하가 되어버린 동방을 다시 하나님의 땅으로 회복시키려 했을 가능성이 있다.그로부터 8년이 지난 AD 643년 이세민은 고구려가 계속하여 신라를 괴롭히자 보장왕에게 사신을 보낸다.
“당 태종이 도사 숙달(叔達) 등 8명에게 노자 도덕경을 주어 파견하므로 왕은 이들을 승사관에 맞아들였다”(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알로펜 선교사의 설교를 듣고 경교의 신자가 된 이세민이 고구려에 노자의 도덕경을 보냈을 리가 없다.그는 고구려 왕에게 메시야경(迷詩所經)을 보내며 예수를 믿고 신라를 괴롭히지 말라고 권했을 것이다.그러나 고구려왕이 이를 듣지 않자 이세민은 친히 군사를 이끌고 고구려를 공격했다.그는 안시성 싸움에서 부상을 입고 돌아가 AD 649년에 죽었다.김유신은 계속해서 이세민의 아들 고종과 삼국 통일의 일을 추진하였으나 백제 공격을 예정한 AD 660년 여승 출신의 측천무후가 병약한 고종을 젖히고 정권을 장악하게 되었다.백제와 고구려 공격은 계획대로 시행되었으나 측천무후는 이세민의 약속을 파기하고 백제와 고구려 땅을 점령하려 했다.이에 놀란 유신이 당과의 전쟁을 선포하고 고토 수복에 나섰으나 청천강 이남만을 겨우 찾게 된 것이다.
/김 성 일<작가·한세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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