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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 시대의 기갑부대 - 흉갑 기병

지식창고지기 2009. 8. 12. 10:05

 

 

(내가... 내가 날고 있어 !) 

 

 

현대전에서 탱크의 중요성과 위력에 대해 의심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만한 비용으로 그만한 효과를 낼 수 있는 무기가 흔치 않지요.  전폭기는 전장에서 그저 '파괴'를 담당할 뿐이지만, 탱크는 막강한 화력과 견고한 장갑의 방호력으로 전장을 글자 그대로 '지배'합니다.  하지만 사실 탱크의 진정한 힘은 막강한 화력이나 견고한 장갑만은 아닙니다.  탱크는 어디까지나 기동 장비입니다.  즉, A 지점에서 B 지점으로 신속하게 이동할 수 없다면 탱크로서의 가치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지 못할 바에야 그냥 대구경 화포를 쓰는 것이 낫지요.

 

나폴레옹 시대에도 바로 위에서 언급한 탱크가 갖추어야 할 3가지 덕목, 즉 화력, 방호력, 그리고 기동력을 갖춘 병과가 있었습니다.  일부 번역에서는 '장갑(裝甲) 기병'으로 번역되어 마치 미야자키 하야오의 판타지 만화를 연상하게 만드는, cuirassier입니다.  이는 대개 흉갑(胸甲) 기병으로 번역됩니다.  가슴받이 갑옷(cuirass)만을 갖추었으니까요.

 

 

 

(딴 건 모르겠지만 간지 하나는...) 

 

 

갑옷의 역사야 유구합니다만, 고대 그리스의 기병은 갑옷을 입지 않았다고 합니다.  초기 그리스 기병은 헬멧조차도 쓰지 않았다고 하네요.  기병 전술에 대한 책을 썼던 크세노폰은 방패조차도 사용하지 말 것을 권했습니다.  당시엔 등자가 없어서 기병들은 말에서 떨어지지 않는 것만도 힘에 겨웠거든요.  어차피 기병은 '기동 부대'일 뿐, 견고한 방호력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거든요.  그러나 확실히 갑옷을 장비한 기병과 그렇지 않은 기병이 전투에서 맞붙으면 그 우세는 명백했습니다.  헤로도투스에 따르면, (페르시아 침공 이전에) 마케도니아 기병대가 다른 이민족과 기병전을 벌일 때 우세할 수 있었던 것은 마케도니아 귀족들이 기마술에 뛰어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흉갑 덕분이었다고 평가합니다.  이 전통은 그대로 이어져, 훗날 알렉산드로스 대왕을 따라 동방 원정에 나선 마케도니아 기병대(당시 '왕의 친우들'이라고 불렸던 귀족 위주의 기병들)는 방패는 없어도 흉갑은 착용하고 싸웠습니다.

 

중세 기사들 이야기야 널리 잘 알려져 있으니 생략하고, 개인 화기가 발전되면서 기병이 갑옷을 입는다는 것은 정말 시대에 뒤떨어진 이야기가 되었습니다...만 의외로 기병의 갑옷은 생명력이 질겼습니다.  아무래도 부싯돌 점화 방식의 전장식 소총/권총은 발사 속도가 너무 느려서, 기병들끼리의 충돌에서는 총보다는 칼이 아직 더 선호되었거든요.  초기의 흉갑 기병은 가슴 뿐만 아니라 넓적다리에까지 판금 갑옷을 입고 중세 스타일의 투구를 쓴 모습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역시 갑옷으로는 총알을 막을 수 없었던지라, 기병의 갑옷은 점점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나폴레옹 전쟁이 시작될 무렵에는, 대개의 유럽 국가에서는 기병들이 갑옷을 완전히 포기했습니다.  대표적인 나라가 영국과 프러시아였었습니다. 

 

 

 

(16세기의 흉갑 기병... 권총과 가죽 부츠만 빼면 중세의 기사와 별로 다를 게 없었습니다.) 

 

 

하지만 프랑스를 비롯한 러시아, 오스트리아 등의 몇몇 나라들은 계속 흉갑과 헬멧을 착용한 흉갑 기병을 유지했습니다.  특히 나폴레옹은 흉갑 기병을 대단히 선호했습니다.  전통적으로 갑옷은 입지 않았던 카빈 기병(carabinier)들이 1809년 오스트리아군 소속의 유명한 창기병들인 울란(Ulhans) 부대에게 패배를 당하자, 총기병들에게도 갑옷을 지급하도록 지시했다고 합니다.

 

당시 흉갑은 총알도 막아낼 수 있을 정도로 두꺼웠을까요 ?  그렇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아주 멀리서 날아온 총알 정도야 막아낼 수 있었겠지만요.  그런데 왜 굳이 무겁고 거추장스러운 흉갑 기병을 선호했을까요 ?  이유는 몇가지가 있었습니다.

 

 

 

(이 무거운 걸 꼭 폼으로만 입고 다닌 건 아니야...)

 

 

1. 당시 기병들은 마상에서는 화기를 거의 쓰지 않았습니다.

 

기병들이 준비된 보병을 정면에서 공격하는 경우가 나폴레옹 시대에도 꽤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대부분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이유는 바로 총검으로 빽빽한 대열을 짠 보병 방진(square) 때문이었습니다.  이렇게 보병 방진을 짠 경우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또 예외도 존재했는지는 1812년, 기병대 영광의 순간  ( http://blog.daum.net/nasica/5880589 ) 를 참조해주시기 바랍니다.  나폴레옹이 1812년 모스크바 점령 직전 러시아군과 대규모 회전을 벌였던 보로디노에서도, 프랑스 기병대의 돌격은 러시아 보병들의 방진을 거의 깨뜨리지 못하고 오직 준비가 덜 되었던 방진 하나만을 깨뜨리는 것에 그쳤습니다.  1815년 워털루 전투에서 영국군의 보병 방진에 프랑스의 네이 원수가 기병 돌격을 감행했다가 '다 말아먹은' 사건은 꽤 유명합니다.

 

그러다보니, 기병들의 주목적은 보병을 정면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도주하는 보병을 추격하여 쓰러뜨리거나, 아니면 상대 기병들을 제압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경우이던 화력보다는 기동력이 중시되는 부분이었지요.  이런 형태의 활동에서는 총보다는 칼이나 창이 더 어울렸습니다. 

 

 

 

(이 ?들에게 총같은 거 필요없다 오로지 칼이라고 했다) 

 

 

플린트락 머스켓이 처음 나오던 시절, 독일에서는 권총을 여러자루 휴대한 일종의 권총 기병(reiter) 부대가 생겨나기도 했습니다만, 나폴레옹 전쟁 당시에는 마상에서 총을 사용하는 것은 거의 포기한 상태였습니다.  이유는 아무래도 장전 속도와 사격의 정확성이 너무나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땅 위에서 굳게 선 채로, 훈련이라고는 거의 신속한 머스켓 재장전만 죽어라고 하던 보병들조차도 1분에 2발인데, 흔들리는 마상에서 탄환을 장전하는 일은 불가능까지는 몰라도 매우 어려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특히, 가뜩이나 부정확한 머스켓 소총(또는 권총)을 말을 달리며 쏜다면 그 명중률은 안봐도 비디오였을 것입니다. 

 

 

 

(이 그림의 제목은 '누가 이길까?'입니다.  과연 누가 이길까요 ?  왠만하면 권총을 든 사람이 이길 것 같기는 한데, 말의 움직임이 약간만 요동쳐도, 팔이 약간만 흔들려도, 또는 불발이 생기면...)

 

 

가령 나폴레옹이 1799년 이집트에 상륙하여, 당시 이집트의 지배 세력이던 마멜룩 전사들과 피라미드 전투를 벌였을 때, 마멜룩 전사들은 16~17세기 독일 권총 기병대의 전법을 썼습니다.  이때 마멜룩 전사들의 솜씨는 프랑스군의 감탄을 자아냈습니다.  그들이 말을 달려 프랑스 보병 방진 코 앞까지 왔다가 재빨리 말을 틀어 비켜날 때까지, 그들은 터키식 머스켓 소총과 권총 2자루를 다 쏘아댈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결과는 마멜룩의 참패였습니다.  어차피 총질을 해댈 거면 역시 땅 위에 두 발을 딛고 밀집 대형으로 좀더 긴 머스켓 소총을 쏘는 것이 훨씬 나았던 것이지요.

 

 

 

(프랑스군의 총질에 패퇴하는 마멜룩 전사들) 

 

 

드라군(dragoon)이라고 해서, 짧은 기병총(carbine)을 지닌 용기병 부대도 있었습니다만, 이들은 기병이라기보다는 기마 보병에 가까왔습니다.  즉, 이들은 본격적인 전투를 벌이게 되면 말에서 내려서 싸우는 부대였습니다.  그 외에, 흉갑 기병을 비롯한 다른 기병들도 원래는 권총을 1~2자루씩 휴대하게 되어 있었습니다만, 실제로는 권총을 휴대하지 않는 경우가 더 많았습니다.  약 20% 정도만이 권총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네요.  아무래도 권총을 휴대하게 되면 쓸데없이 무게만 늘어나고 실제로는 쓸 일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부대원들 자신이 원치 않았다고 합니다.  1812년에 나폴레옹은 휘하 흉갑 기병들에게 카빈 소총까지 지급했지만, 이 기병들은 온갖 핑계를 대고 소총 수령을 마다했다고 합니다.  이건 이해가 가는 일입니다.  소총이 주어지면 검열을 위해서라도 닦고 기름칠하고 부품 유지하는 것이 보통일이 아니었을테니까요.  흉갑과 헬멧에 광을 내는 것만도 큰 일이었을텐데 말이지요.

 

이렇게 기병들의 무기가 총 대신 칼이나 창으로 굳어지면서, 자연스럽게 갑옷도 쓸모가 있게 되었습니다.  총알은 막지 못해도, 상대방 기병도나 창으로부터의 공격은 어느 정도 막아주었으니까요.

 

 

2. 흉갑은 실질적인 방호력보다는, 심리적인 효과가 있었습니다.

 

흉갑 기병들은 갑옷을 입었으니 사망률이 다른 기병들에 비해 적었을까요 ?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갑옷이 가려주는 곳은 가슴팍과 등, 그리고 머리 뿐이고, 팔이나 다리, 얼굴, 목, 아랫배 등은 모두 노출된 상태였습니다.  게다가, 갑옷을 입었다는 이유로 항상 더 위험한 전투에 투입되었으므로 사망률은 오히려 약간 더 높은 편이었습니다. 

 

 

 

(갑옷 입었다고 다 로보캅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은 나폴레옹도 그 점을 더 높이 샀다고 합니다.  바로 '갑옷을 입었다'는 그 느낌인 것이지요.  사실 정상적인 사고 방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절대 칼 한자루를 믿고 총검이 빽빽히 늘어선 보병 방진으로 돌격해들어가서는 안됩니다.  그건 100전 100패 확실한 죽음으로의 돌진이니까요.  하지만 공격 제1열에 선 보병들의 운명이 그러하듯이, 기병, 특히 흉갑 기병과 같은 중기병들은 죽음을 무릅쓰고서라도 돌격을 감행해야 할 경우가 있는 법입니다.   그때 머리와 가슴을 '보호'(?)해주는 갑옷을 갖추고 있다는 것은, 심리적으로 꽤 효과가 있어서, 기병들로 하여금 더 과감한 돌격을 하도록 해주었다고 합니다.  이 효과는 아군 뿐만 아니라, 적에게도 있었습니다.  즉, 번쩍거리는 갑옷을 입은 커다란 기병이 날이 시퍼런 검을 들고 달려들면 공포심을 가질 수 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보로디노 전투에서의 흉갑 기병들의 돌격) 

 

 

저 위의 링크에서 언급한 알바 드 토르메스 전투에서 보셨듯이, 보병 방진을 뚫는 거의 유일한 방법은 누군가가 희생하면서 말과 인간의 몸으로 보병 방진에 물리적으로 부딪히는 것이었습니다.  이때 갑옷은 그럴 용기와 함께, 더 힘차게 부딪힐 수 있는 무게와 관성도 함께 주었습니다.  물론 이런 충격력은 갑옷의 무게 뿐만 아니라, 원래 흉갑 기병의 덩치나 그 군마의 덩치도 컸기 때문이었습니다.

 

 

3. 사실 흉갑 기병이 꼭 가슴받이 갑옷 때문에 흉갑 기병이 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전에 영국 근위대가 곰가죽 모자를 쓰게 된 사연 ( http://blog.daum.net/nasica/5561874 )에서 언급한 것처럼, 척탄병이라는 보병은 원래 수류탄을 던지는 역할을 맡은 건장한 병사를 뜻하다가, 나중에는 그냥 '건장한 정예병'이라는 뜻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즉, 나폴레옹 시대의 척탄병들은 수류탄을 휴대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흉갑 기병이라고 꼭 다 흉갑을 착용하고 있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처음에는 모든 흉갑 기병이 정말 흉갑을 착용하고 있었지만,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흉갑이 사실 별 효과가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흉갑 기병 자신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1809년 이후로, 프랑스 흉갑 기병대에서도 흉갑을 착용하지 않는 병사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여름철에는 흉갑 착용이 병사들을 많이 괴롭혔거든요.  게다가 나폴레옹의 고질적인 군수품 문제도 한몫 했습니다.  흉갑 제작에는 많은 돈과 시간이 들어갔으므로, 워털루 전투를 위해 서둘러 병력을 편성할 때 제대로 장비를 갖추지 못해, 제 11 흉갑 기병 연대 전체에게는 아예 흉갑이 지급되지 않았습니다.

 

흉갑을 안 입었다고 흉갑 기병이 아니냐 하면, 예, 그래도 흉갑 기병이었습니다.  사실 cuirassier네 chasseur네 hussar네 하는 것들이 나름대로는 다 구별이 되지만, 저처럼 잘 모르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그냥 모두 칼 든 기병이었거든요.  흉갑 기병의 특징은 갑옷 뿐만이 아니라 바로 덩치에 있었습니다.  척탄병과 일반 병사의 구별이 수류탄 휴대 여부가 아닌 키에 의해서라는 것과 같은 이야기입니다.  흉갑 기병은 정예 기병이었으므로, 키도 크고 경험도 많은 병사들만 뽑았습니다.  당연히 말도 덩치가 크고 다리가 긴 말들만 골랐습니다. 

 

사실 나폴레옹이 흉갑 기병을 편성할 때 쓴 방법을 보면, 흉갑 기병이 왜 흉갑 기병인지가 그대로 나옵니다.  나폴레옹은 전체 기병 연대 중에서, 제1연대부터 제12연대까지에 가장 키가 크고 튼튼한 병사들과 말들을 골라 집어넣은 뒤, 그들에게 흉갑과 헬멧을 지급했습니다.  즉, 신체적으로 가장 볼 만한 엘리트 부대를 흉갑 기병으로 뽑은 것이지요.  흉갑 기병이라고 특별히 전술이나 무기가 남다른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래, 니들이 짱이다 ! - 프리틀란트 전투에서 나폴레옹 옆을 지나 돌격하는 제12 흉갑기병 연대.)

 

나폴레옹 당시 프랑스 내에서는 노르망디 산의 큰 말들이 가장 높게 평가받았고, 폴란드나 헝가리 지방의 말들은 덩치가 좀 작아 경기병용으로 많이 사용되었습니다.  이렇게 프랑스 육군이 군마를 구입할 때, 각 병과에 따라 합격 여부를 나눌 때 다음과 같이 말의 키에 따라 구분을 했다고 합니다.

 

흉갑 기병(cuirassier) 또는 카빈기병 (carabinier)           155 ~ 160 cm

총기병 (dragoon) 또는 포병대 군마                              153 ~ 155 cm

엽기병 (chasseur) 또는 경기병 (hussar)                      149 ~ 153 cm

창기병 (lancer)                                                         146 ~ 150 cm

 

 

이렇게 으리으리한 병사와 말과 장비를 집중시킨 흉갑 기병대는 실제 전투에서 제 몫을 다 했을까요 ?  꼭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전투에서 가장 많은 명예 기장을 받은 부대는 경기병인 hussar 부대나 chasseur 부대였고, 또 나폴레옹 휘하 기병 중 가장 유용했던 부대는 폴란드 창기병들이었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기병은 원래 존재 이유인 기동성에 충실할 때가 가장 유용했나 봅니다.

 

 

 

(저 엽기병들의 가죽 모자도 흉갑기병의 헬멧 못지 않게, 아니 오히려 더 칼날의 타격을 잘 막아냈습니다) 

 

 

프랑스 흉갑 기병대의 가장 뛰어난 전과는 1812년 러시아의 보로디노 전투였습니다.  여기서, 프랑스 흉갑 기병대는 러시아군의 보루 하나를 점령하는 쾌거를 올립니다.  쏟아지는 포도탄을 무릅쓰고서 말이지요.  물론 프랑스 포병대가 이미 보루의 벽 여기저기를 무너뜨린 후의 일이긴 하지만 말입니다.  이는 기병으로서 요새를 점령한 일이 전무후무하기 때문에 높이 쳐주는 것이고, 사실 전세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것은 아니었습니다. 

 

 

 

(뭐 ?  우리의 업적을 너무 깎아내리는거 아니야 ?  - 보로디노에서 보루를 점령한 흉갑 기병들)

 

 

그 외에 1815년 영국이 자랑하는 스카츠 그레이(Scotts Greys) 기병대를 사실상 전멸시킬 때, 거기서 가장 큰 공을 세운 것은 창기병들이었지만, 영국군 기병대의 앞을 가로 막아 창기병들이 측면 공격을 쉽게 할 수 있도록 해준 것은 바로 흉갑 기병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때 영국 기병대는 무절제한 추격으로 인해 흉갑 기병들과 맞부딪힐 때는 이미 기진맥진한 상태였으므로, 사실상 자멸했다고 보는 것이 맞을지도 모릅니다.

 

이때 프랑스군 흉갑 기병들에게 혼이 난 까닭이었을까요 ?  나폴레옹 전쟁 내내 흉갑 기병은 생각하지 않던 영국군이 정작 전쟁이 끝나자 왕실 근위대에게 흉갑을 지급하기 시작합니다.  물론 이는 어디까지나 왕궁 경호 업무, 즉 의전 행사 때만 그랬고, 전투에 나갈 때는 흉갑같은 것은 입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영국의 관광 산업에 한몫하고 있는 근위 기병대의 화려한 갑옷입니다.

 

 

 

(전쟁에는 몰라도 관광 자원으로서 오늘날 어려운 영국 경제에는 기여하는 바가 크다는...)

 

 

정작 프랑스군은 나폴레옹 당시의 영광에 집착하여, 실전에서도 흉갑 기병을 1차 세계대전 때까지도 유지했습니다.  이들은 정말로 흉갑을 입고 전장에 나갔다고 합니다.  다행히 프랑스 장군들도 상식이 영 없는 사람들은 아니라서, 이들이 흉갑을 입고 적의 기관총을 향해 돌격하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건 1913년도의 프랑스 흉갑 기병이라고 주장하는 사진인데... 당시 컬러 필름이 있었던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