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역사(일본)

일본역사 - 메이지시대

지식창고지기 2009. 5. 20. 23:32

9. 메이지 시대 (明治 時代)

 

① 메이지 유신

 

1868년, 메이지천황은 신정부의 정치방침인 5개조의 선언문을 발표하고, 에도를 토오쿄오(東京)로 개칭하고 수도를 쿄오토에서 토오쿄오로 옮겼다. 또 연호를 메이지(明治)로 정했다.

 

메이지정부는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정치기구를 수립하기 위하여 여러가지 개혁을 단행했다. 이 시기의 정치개혁을 메이지유신이라고 한다. 신정부는 1869년에 다이묘들의 영지와 영민들을 천황에게 반납하게 하고(版籍奉還), 1871년에는 종래의 번을 폐지하고 대신 전국을 현으로 나누어 중앙정부에서 관리를 파견했다(廢藩置縣). 그리하여 세금이 모두 중앙정부로 들어오게 되고, 관리들은 정부로부터 월급을 받는 형식으로 바뀌었다. 또 메이지 신정부는 천황의 일족을 황족, 귀족과 다이묘를 화족, 무사를 사족, 농민·직인·상인을 평민으로 개칭하여 四民平等을 선언했다. 이에 따라, 평민들도 姓을 가지게 되고, 직업이나 주소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게 되었다.

 

② 부국강병

 

메이지정부는 일본을 구미열강과 같은 수준의 강국으로 만들기 위해 부국강병책을 취했다. 정부가 직접 구미의 앞선 기계나 기술을 사들이고, 병기공장, 제사, 방적 등의 관영 공장을 짓고, 광산을 개발하는 등 근대산업을 발전시켰다. 또 전신, 우편시설을 정비하고, 토오쿄오와 요코하마간의 철도건설이나 새로운 화폐제도를 제정하기도 했다.

 

메이지정부가 새로운 개혁정치를 해나가는 데는, 무엇보다도 많은 자금이 필요했다. 따라서 1873년 정부는 세수입을 일정하게 유지하기 위해서 농민들로부터 세금을 거두는 방법을 바꿨다(地租改正). 그것은 우선 지주나 자작농에게 지권을 나누어 주고, 에도시대에 애매했던 토지의 소유권을 확실히 만든 다음, 그 지권을 갖고 있는 자에게 그 토지에 상당하는 만큼의 세금을 현금으로 납입하게 했다. 그러나 이 개정은, 납입하는 세금이 에도시대와 같은 정도의 중과세였기 때문에, 농민들 중에는 세금을 낼 수 없어서 토지를 파는 사람도 생겨났고, 또 토지를 갖지 못하는 일반 소작인은 수확한 쌀의 50%를 소작료로서 지주에게 내어야만 했다.

 

게다가 에도시대에는 부락에서 공동으로 소유하고 있던 토지를, 신정부가 모두 빼앗아가 버렸기 때문에 농민이 이용할 수 있는 토지는 전시대보다 더 적어져, 대다수 농민의 생활은 에도시대와 별반 다르지 않은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새로운 시대가 되면 생활이 좀 더 나아지리라고 생각하고 있던 농민은, 이와 같은 제도에 큰 불만을 가졌다. 다른 한편, 소작료를 쌀로 받는 지주들은 쌀값이 오를 때 내다 팔아 큰 이익을 얻어 광대한 토지를 가진 기생지주화했다.

 

이 지조개정 후, 농촌의 가난한 소작인이나 자작농의 2,3남은 농촌을 떠나 도회지의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이 많아졌다.


그들은 일본의 근대산업 발전에 필요한 노동력이 되고, 또한 징병제도를 지탱하는 중요한 병력이 되었다.

 

③ 문명개화

 

문화적인 면에서의 근대화도 착착 진행되어 1872년, 학제를 제정하고 신분이나 직업에 관계없이 국민 모두가 교육을 받을 수 있게 했다. 또 구미 선진국에 유학생을 보내고, 구미로부터 학자, 기술자들을 초빙하여 서양의 선진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려고 노력했다.

 

국민들의 생활면에서도, 태양력의 사용, 1일을 24시간, 1주일을 7일로 정하고 일요일을 휴일로 하는 서양의 7요제도를 도입했다. 또 외국 정부의 압력으로 기독교 신앙도 인정하게끔 되고 신문도 속속 간행되었다. 토쿄의 긴자거리에는 빨간 벽돌로 지어진 서양식 건물들이 늘어서고, 도로에는 가스등이 설치되었으며, 상투머리를 자르고 단발을 하고 양복을 입는 것이 새로운 풍속이었다. 또 그 때까지 먹지 않았던 소고기를 먹게 되어, 도처에 소고기 전골집이 생겨나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이와 같이 교육, 학문, 의식주 등의 생활 전반에 걸쳐, 새로운 서양의 문화나 습관을 받아들이는 것을 문명개화라고 불렀다.

 

또 당시 자유주의, 개인주의 등 구미의 근대사상이 들어와, 인간은 모두 자유 평등하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는 사상이 널리 퍼져 나갔다. "하늘은 사람 위에 사람을 만들지 않고, 사람 밑에 사람을 만들지 않았다"라고 시작되는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의 『학문을 권함』이 국민적 베스트셀러가 되어 수많은 사람들에게 애독되었다.

 

교육면을 보면, 처음에는 수업료를 내면서까지 자식을 학교에 보낼 필요는 없다는 생각을 가진 농민들도 많았지만, 차츰 소학교 교육이 확산되었으며, 1877년 토오쿄오 대학의 전신인 토오쿄오의 학교가 세워지고, 후쿠자와 유키치의 케이오의숙, 오오쿠마 시게노부의 토오쿄오전문학교(현재의 와세다대학) 등과 함께 많은 인재를 배출했다. 메이지정부는 교육의 충실화에 힘쓰며, 서구화 정책을 취하면서도 국가주의를 관철시켜 1890년에는 교육칙어를 공포하여 교육의 기본을 명시했다.

 

④ 번벌 정치

 

정부는 외교를 적극 추진했다. 우선 막부가 구미 제국과 체결한 불평등조약을 개정하려는 속셈과, 그와 동시에 서양의 제도나 문화를 시찰시키기 위해, 정부 대표를 구미 제국에 파견했다. 그러나 조약개정에 관한 교섭은 여의치 않았고, 대표들은 조약개정보다 우선은 산업을 발전시켜 일본의 국력을 키울 필요성을 통감하고 돌아왔다.

 

이 무렵, 정부내에는 사쯔마번과 쵸오슈우번 출신자가 각각 파벌을 조성하여 정치를 좌지우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정부에 대해 불만을 가진 자가 적지 않았다. 특히, 사족계급은 메이지유신 때문에 실직한 뒤, 장사들을 했지만, 장사 경험이 없는 관계로 망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하여 급기야는 사족의 반란이 전국 각지에서 일어났다. 사이고오 타까모리는 신정부에 대한 사족의 불만을 외부로 배출시키기 위해서 정한론(征韓論)을 주장했지만, 구미 선진국의 발전상을 직접 목격하고 돌아온 온건파 오오꾸보 등은 국내정치를 충실하게 하는 것이 선결과제라고 생각, 이에 반대했다. 1877년 불만 사족세력이 사이고오를 부추겨서 가고시마에서 대규모의 반란을 일으켰다(西南戰爭). 그러나 징병제에 의해 잘 훈련된 신식군대는 이 반란을 반년만에 진압해 버렸다.

 

이와 같이 국내가 동요하고 있을 동안에도, 정부는 인접 국가들에 대해 일본의 영토를 정하는 교섭을 추진했다. 1875년에는 러시아와 교섭하여 사할린을 러시아영토로 하는 대신 치시마(千島)를 일본영토로 정했고, 또 1879년에는 류우큐우를 오키나와현으로 만들었다.

 

⑤ 입헌 정치

 

구미의 근대사상이 소개되자 국민들 사이에 자유·평등·인권사상이 전파되어, 전제적인 번벌정치를 강력하게 반대하는 사람들이 늘어갔다. 이타가끼 타이스케(板垣退助)는, 국민의 권리를 보호하는 헌법을 만들고, 의회를 개설해야 한다고 주장. 자유민권운동을 시작하여 1881년에 일본에서 최초의 정당인 자유당을 만들었다. 또 다음해 오오꾸마 시게노부가 영국식 의회주의를 주장하며 입헌 개진당을 만들었다.

 

1889년, 메이지천황은 이토오 히로부미(伊藤博文) 등이 독일 헌법을 모델로 하여 만든 헌법 초안을, 대일본제국헌법으로 공포하고, 다음해인 1890년 제국의회를 개설했다. 이 헌법은 천황밑에 내각·재판소·의회를 두고, 행정·사법·입법의 3권분립의 형태는 취하고 있지만, 천황 주권인 헌법이기 때문에, 내각은 천황에 대해서만 정치적 책임을 지고, 의회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지 않는다. 또 육해군은 천황 직속이기 때문에, 내각이나 의회도 이를 견제할 수 없다. 국민의 권리는 일단은 인정되어져 있으나, 그것을 제한하는 법률이 있어서 자유는 엄격하게 통제되어져 있었다. 제국의회는 귀족원과 중의원을 제한하는 시스템이었다.

 

1890년 7월, 최초의 중의원 선거가 행해지고, 11월에 의회가 열렸다. 그러나 이 선거에서는 일정한 세금을 내는 25세 이상의 남자에게만 선거권이 있었기 때문에, 국민의 1%만이 투표할 수 이었다.

 

⑥ 청일·러일 전쟁

 

메이지정부는 근대산업 발달에 노력하면서, 해외진출도 고려하게끔 되었다. 우선 우리나라를 개국시켜서, 일본제품을 파는 시장으로 만들었는데, 당시의 우리나라는 청국의 세력권이었기 때문에, 일본과 청국의 대립이 심화되어갔다. 1894년 농민봉기가 일어나자 당시의 조선정부는 청국에게 출병을 의뢰하자, 일본도 출병, 양국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일본은 단기간에 승리를 거두고, 다음 해 시모노세끼 조약을 체결, 거액의 배상금과 함께 대만과 요동반도를 손에 넣었다. 그러나 곧 러시아·프랑스·독일의 3국은 요동반도를 중국에 되돌려 줄 것을 강력하게 요구, 일본은 어쩔 수 없이 요동반도를 중국에 되돌려 주었다. 그 후 만주에서 조선으로 진출하려고 하는 러시아와, 반대로 조선에서 중국대륙으로 나아 갈려고 하는 일본과의 대립이 점점 더 격화되었다.

 

한편, 영국과 러시아가 아시아에서 대립하고 있었기 때문에, 1902년 일본은 영국과 영일동맹을 맺고, 전쟁시에는 서로 돕기로 약속하고, 1904년 러일전쟁을 개시했다. 러시아에서는 국민이 전쟁에 불만을 품고 있었는 데다가, 러시아혁명이 격화되고 있었고, 일본도 전쟁에 이기기는 했지만, 더 이상 전쟁을 계속할 경제적 여유가 없게 되어, 1905년 미국의 중재로 포오츠머스조약을 체결하고 전쟁을 종결지었다. 그 결과, 일본은 사할린 남쪽반과 남만주철도등을 얻었다.

 

그 후, 일본은 1906년 중국에 남만주철도회사를 세우고, 1910년에는 한국을 병합하여 식민지로 만들었다.

 

이러한 가운데, 메이지정부 최대의 외교문제였던 조약개정중에서, 치외법권이 청일전쟁 직전에 철폐되고, 러일전쟁후에 관세자 주권을 회복했다.

 

⑦ 자본주의의 발달

 

일본의 근대산업은 1890년경이 되자, 방적업·제사업 직물업 등에서 기계화가 진척되어 면사나 생사를 중국·조선·미국으로 수출했다. 청일·러일전쟁의 결과로 풍부한 자원을 손에 넣게되고, 1901년에는 일본 최초의 관영 야하타제철소가 완성되어 중공업 발달의 기초가 되어 제철이외에 조선·기계 등의 생산도 개시되었다. 이러한 산업혁명의 결과, 자본주의가 발달하여 종래의 봉건사회에서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사회문제가 발생했다.

 

농촌에서는 세금을 내기 위하여 자신의 토지를 팔아 소작인으로 전락하는 농민이 늘어나고, 농촌에서 살 수 없게된 소작인들은 도회지로 나와 공장 노동자가 되었다. 그러나 이들이 일하는 공장의 노동조건은 매우 열악한 것이었다. 반면, 광대한 토지를 축적하여 자신은 농사를 짓지 않고 소작료로 생활하는 기생지주는 점점 증가했다. 그들은 다액납세의원이 되어서 의회에도 진출했다. 당시 이들 대지주나 자본가는 일본정치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산업이 발달함에 따라, 자본이 대기업에 집중되고, 유력한 대자본가 즉 재벌은 금융·무역·운수·광산 등을 중심으로 다각적 경영을 하여 금융자본이 산업자본을 지배하게 되었다.

그런 가운데, 일본에도 사회주의 사상이 퍼져나가, 소작인이나 노동자의 생활을 조금이나마 개선하려고 하는 소작쟁의 노동운동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하지만 정부는 법률을 제정하여 이들에 대한 단속을 강화하여 억압했다.

 

 * 참고 사이트: http://guidejapan.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