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역사(일본)

미야모토 무사시

지식창고지기 2009. 5. 25. 23:31

미야모토 무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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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모토 무사시(일본어: 宮本武 미야모토 무사시[*], 1584? ~ 1645 6월 13)는 일본의 전설적인 사무라이이자 예술가이다. 일본의 아즈치모모야마 시대부터 에도 시대 초기의 인물로, 단 한 번의 대결에서도 패하지 않은 검술가로 알려져 있다. 서화에도 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두개의 가타나()를 사용하는 니텐이치류(二天一流) 검법의 시조이다. 수묵화가 겸 공예가로도 알려져있다. 성은 미야모토(宮本) 또는 신멘(新免)이며 통칭은 다케조(), 본성은 후지하라(藤原), 본명은 하루노부(玄信)이다. 유아명은 벤노스케(辨助,弁助,弁之助), 호는 니텐(二天), 또는 니텐 도라쿠(二天道), 저서로는 《오륜서(五輪書)가 있다. 오륜서에는 신멘 무사시노카미(新免武), 후지하라 하루노부(藤原玄信)라고 적혀있다.

 

현재 아리마 나오스미(有馬直純)와 나가오카 사도노카미(長岡佐渡守)에게 보낸 서찰에는 〈미야모토 무사시 하루노부〉(宮本武玄信)라고 적혀있고, 나가오카 사도노카미에게 보낸 서찰에는 니텐이라는 호도 적혀있다. 구마모토 에 있는 묘비에는 〈신멘 다케조 거사〉(新免武居士)라고 적혀 있다. 양자 미야모토 이오리(宮本伊織)가 무사시 사후 9년째 되는 해에 세운 〈신멘 다케조 하루노부 니텐 거사비〉(新免武玄信二天居士碑)(고쿠라 비문)에는 〈반슈 아카마쓰 후예 신멘 다케조 하루노부 니텐 거사〉(播州赤松末流新免武玄信二天居士)라고 적혀있다. 무사시 사후 71년 되던 해인 1716에 간행된 《本朝武芸小》에서 〈마사나〉(政名)로 이름을 소개하고 있다. 이것을 인용해 가계도와 전기, 무사시 공양탑에 폭넓게 사용되었으며, 이름을 마사나로 하는 무사시의 소설, 소개서가 다수 있지만, 니텐이치류의 문하생과 고쿠라 미야모토 가문의 사료에는 마사나라는 이름은 사용되지 않았다. 반대로 사료로써 신뢰성이 완전히 부정된 무사시계도 등에서는 적극적으로 사용된 점을 보아서 마사나라는 이름을 부정하는 의견도 있다.

 

교토의 무예가 요시오카 일족과의 싸움과 간류 에서의 시합이 소설, 시대극 등의 제재로 사용되고 있으며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있다. 저서인 오륜서는 현대에도 인생철학서로, 혹은 경영, 스포츠 등의 지도서로도 읽히고 있으며, 일본뿐만 아니라 세계각지의 언어로 번역되어 애독되고 있다. 국가 중요문화재로 지정된《鵜図》《枯木鳴鵙図》《紅梅鳩, 그 밖에도 《正面達磨》《盧葉達磨》《盧雁図屏風》《野馬》등 우수한 수묵화안장, 목검 등의 공예품이 현재 전해져 오고 있다.

 

 

출생

 

미야모토의 저서 《오륜서》의 첫머리에 기술된 “셈하건데 나이 육십 (つもりて六十)”를 그대로 받아들이면 간에이 20(1643) 60세가 되므로, 1584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하리마 효고 에서 태어났다. 그의 저서 오륜서에는 “생국 하리마(播磨)” 라고 명기되어 있다.

 

 : 에도 시대 후기의 지리서인 《도사쿠시(東作誌)에서는 미마사카 에서 태어났다는 설이 기재되어 있고, 이를 근거로 미마사카 탄생설이 생겨났다. 이 설은 요시카와 에이지의 소설 《미야모토 무사시》 등에서 채용되어 널리 알려졌다. 소설을 토대로 오카야마 미마사카 등에서는 미야모토 무사시 탄생지로써 관광개발을 하고 있다.

 

 

생년 및 출생지에 관한 제설

 

에도 시대 후기에 적립된《고쿠라 미야모토 가계도》(小倉宮本家系)와 나란히 무사시를 미야모토 가문 역대 연보의 필두로 보는《宮本氏正統記》에는 1582년 임오년생, 1645년 향년 64세라고 기록되어, 있어 1582년 태생이라고 주장한 의견도 있다.

무사시의 양자 이오리가 무사시 사후 9년째인 1654년에 세운 고쿠라 비문에 따르면 아버지는 무예가인 신멘 무니이다. 동시대에 활약한 도리류(理流)의 미야모토 무니노스케 후지하라 가즈마와 동일 인물리아는 견해도 있다. 무사시의 양자 이오리가 봉납한 도마리 신사의 표찰에는 〈有作州之氏神免者天正之間無嗣而卒于筑前秋月城受遺承家曰武掾玄信〉라고 기술하고 있다. 이로 볼때 덴쇼년간 아키즈키 에서 죽은 신멘이 무니였고, 무사시는 무니의 양자였다고 주장하는 의견도 있지만, 명백히 신멘 무니는 덴쇼년간 이후에도 생존해 있었다.

 

무사시의 양자 이오리가 남긴 무사시의 기록은 생전의 무사시를 알고 있는 사람에 의해 쓰여진 것이라 비판없이 그대로 받아들여지는 경향이 강하다. 그러나, 원사료가 불명확하고, 이오리가 무사시를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에 대해 문제시 보는 견해도 있다. 다른 사료와 비교해 사실을 오인해 적은 것도 밝혀졌다. , 무사시를 추켜세우기 위해 각색한 점도 많이 보인다.

 

, 에도 시대 후기에 정립된 고쿠라 미야모토 가계도에서 〈신멘 무니노스케의 양자로 되다.新免無二之助養子》〉의 기술을 근거로 무니는 양부라고 주장하는 견해도 있다. 현재 오카야마 현인 마사카 의 명문 집안의 성인 신멘(新免)는 무니의 대()부터 사용되었다고 전해 내려온다. 《小倉宮本系》에 무사시는 이오리의 조부인 다하라 이에사다의 차남로 기재되어 있지만, 이오리 자신이 봉납한 표찰과 고쿠라 비문에는 그러한 기록이 없다. , 무사시와 이오리의 관계를 기재한 에도 시대 중기의 지리서 《하리마카가미(播磨鑑)에도 무사시가 다하라 가문 출신이라고는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

 

 : 《도사쿠시》(東作誌) 등에서 무사시의 부친을 히라다 무니(平田武仁)라는 설이 유명하지만, 히라다 무니는 무사시가 태어나기 이전에 죽었다. , 이들 사료에서는 그 밖의 무사시와 관련된 기술도 타 사료와의 일치되는 점도 전혀 없다. 무사시와 관련된 사료적 가치는 전부 부정되고 있다.

 

 

무예가무사로서의 무사시

 

오륜서에는 13세에 처음 아리마 기헤이(有馬喜兵衛)와 결투해 승리하고, 16세에 다지마 의 아키야마(秋山)라는 무예가와 결투해 승리하는 등 29세이 될때까지 60여회의 승부를 해, 모두 이겼다고 기술하고 있다.

 

종래 학설에서는 1600에 일어난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아버지 무니의 옛주군인 신멘 가문이 우키타 히데이에 슬하에 있어 서군에 참진했다고 말해 왔지만, 아버지 신멘 무니가 세키가하라 전투 이전에 동군의 구로다 가문의 사관이였다는 것을 증명하는 구로다 가문의 문서가 존재하므로, 아버지와 함께 부젠 영지를 가진 구로다 요시타카를 따라 동군으로 참진해 규슈에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 설에 따라 구로다 가의 가신 다치바나 미네히라에 의한 무사시 전기 《헤이호타이소부슈겐신코덴라이(兵法大祖武州玄信公伝来)에서는 구로다 요시타카의 군에 속해 규슈 분고이시가키바루 전투에서 서군의 오토모 요시무네군과 싸웠으며, 출진 전의 일화와 도미쿠 공방전에서의 분전을 적고 있다.

 

《오륜서》에는 〈스물한살이 되어 서울로 올라가, 천하의 무예가와 만나 수번의 승부에서 승리를 하지 않은 일이 없다〉(廿一にして都へ上り、天下の兵法者にあひ、度の勝負をけつすといへども、勝利を得ざるという事なし)라고 기술하고 있다. 1584년 무사시가 태어났다고 생각하면 1604년의 일이 된다. 천하의 무예가는 고쿠라 비문에 기록된 〈후소다이이치노헤이주쓰 요시오카〉(扶桑第一之兵術吉岡), 즉 요시오카 일족이라고 사료된다. 이 결투는 문예작품 등에서 다양하게 각색되어 널리 알려졌다.

 

무사시가 했던 결투 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 것은 《간류 의 결투》라고 전해져 오는 것이다. 이는 게이초년간 나가토 (현재 야마구치 )의 후나시마 섬에서 사사키 고지로와 결투한 일을 말한다.

 

1614 ~ 1615년에 일어난 오사카 전투에서의 무사시는 도요토미 가문측에 속해 참진했다는 것이 통설로 여겨졌지만, 이는 근거없는 속설이다. 실제는 미즈노 나쓰나리의 객장으로 도쿠가와 가문측에 속해 참진했고, 가쓰나리의 적자 가쓰시게와 함께 활약을 했다는 것이 많은 사료에 기록되어 있다.

 

그 후, 히메지 혼다 다다토키와 친분을 가졌고 아카시 지역에서는 도시계획을 했으며 히메지, 아카시 등의 성과 사원에 정원을 조성하였다. 《海上物語》에서는 이 시기 봉술(杖術)에 하나인 신도무소류(神道夢想流)무소 곤노스케(夢想之助)와 아카시에서 시합을 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이 이야기가 기재되어 있는 《니텐키》(二天記)에서는 에도에서 시합한 일이라고 하지만, 니텐키의 원사료인 《부코덴(武公)에는 기재되어 있지 않다.)

 

겐나 초엽, 미즈노 가문의 가신 나카가와 시마노스케의 셋째 아들 미키노스케를 양자로 맞이하였고, 미키노스케를 히메지 성주 혼다 다다토키에게 출사시켰지만, 1626년 혼다 다다토키가 죽자, 순사하였다. 이에 미야모토 가문은 미키노스케의 동생을 그의 후임으로 해 존속시켰지만, 같은 해에 하리마 지역의 무사 다하라 히사미쓰의 둘째 아들 이오리를 새로운 양자로 맏이하였고, 미야모토 이오리를 아카시 오가사와라 다다자네에게 출사 시켰다. 이오리는 1631 20세의 나이로 오가사와라 가문의 가로(家老)가 된다.

 

1638년에 일어난 시마바라의 에서는 고쿠라 주로 부임한 오가사와라 다다자네를 따라 이오리도 출진하였고, 무사시도 다다자네의 조카인 나카쓰 오가사와라 나가쓰구의 후견인으로 하여 출진하였다. 난이 진압된 후에 노베오카 주인 아리마 나오즈미에게 보낸 무사시의 서찰에는〈拙者も石ニあたりすねたちかね〉라고 반란군의 투석에 맞아 부상을 입었다고 적고 있다. , 고쿠라에 머물러 있을 때 오가사와라 다다자네의 명령으로 호조인류 창술(宝蔵院流槍術)다카다 요시쓰구와 시합을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다.

 

1640구마모토 주 호소카와 다다토시에게 손님으로 초대되어 구마모토로 가게된다. 7인의 녹봉 18석에 구휼미 300석이 지급되었고, 구마모토 성 동부에 인접한 지바 성에 저택을 받았다. 가로(家老)이상의 신분이 아니면 허가되지 않는 매사냥이 허용되는 등 손님으로써는 파격적인 대우로 맞이 하였다. 같은 손님인 아시카가 요시테루의 남겨진 아들 아시카가 도칸과 함께 야마가 온천에 초대되는 등 호소카와 다다토시에게 존중받았다. 다음해 다다토시가 죽은 후에도 2대 번주 호소카와 미쓰나오에게도 이전과 같이 매년 300석의 구휼미가 지급되어 빈객으로서의 대우를 받았다. 부코덴(武公)에는 미야모토의 수제자였던 야마모토 겐고 자에몬(山本源五左衛門)의 말에 따르면 미야모토 무사시의 문하에 1000여명이 있었다고한다. 이 무렵 제작된 그림과 공예품 등이 오늘날에 전해져 온 것들이다.

 

1643년 구마모토 시 근교의 긴보 산(金峰山)에 있는 레이간도(霊巌) 동굴에서 《오륜서》의 집필을 시작하였다. , 죽기 수일전에는〈자철서〉(自誓書)라고 불리는 《돗코도(獨行道)와 함께 《오륜서》를 제자 데라오 마고노조에게 주었다.

 

1645 6 13일 지바 성의 저택에서 임종을 맞이하였다. 묘는 구마모토 유게(弓削)에 있는 통칭 무사시즈카()이다. 기타큐슈 다무케 (手向山)에 양자 미야모토 이오리가 세운 《신멘 다케조 하루노부 니텐 거사비》 통칭 고쿠라 비문이 있다.

 

무사시의 무예는 엔메이류(円明流)라고 불렸지만, 《오륜서》에서는 니토이치류(二刀一流), 또는 니텐이치류(二天一流) 두가지 명칭이 사용되었고, 최종적으로는 니텐이치류로 되었다고 생각된다. 후세에서는 무사시류() 등의 명칭도 사용되고 있다. 구마모토에 있을 시절 제자 데라오 마고노조, 모토메노스케 형제가 있었고, 히고 구마모토 에서 니텐이치류 검술이 융성하였다. , 마고노조의 제자중 한명인 시바토 산자에몬후쿠오카 구로다 가문에 니텐이치류를 전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