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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과 봉황이란 이름은 쓰지마, 일본의 창지개명 

지식창고지기 2009. 10. 15. 12:12

용과 봉황이란 이름은 쓰지마, 일본의 창지개명 

 

'식민지 땅이름에 용(龍)자가 들어가면 백성들의 기(氣)가 세지니 안돼',

'일본의 아름다운 지명과 같은 이름을 쓸 수 없으니 바꿔'



일제는 우리의 민족정신과 정체성을 말살하기 위해 성과 이름을 강제로 바꾸게 했다. 소위 창씨개명(創氏改名)으로 유래를 찾기 힘든 악랄한 정책이었다. 그런데 일제는 우리의 고유의 지명까지도 강제로 자신들의 편의에 맞춰 바꿔 버렸다. 이른바 창지개명(創地改名)이다.

기암절벽과 폭포가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는 경북 청송군 영덕군에 걸쳐 있는 주왕산. 이곳에는 장엄한 3개의 폭포가 있다. 제1폭포, 선녀탕, 제3폭포가 그것이다. 그런데 이들 이름은 원래 각각 용추폭포, 중용추, 용연폭포(혹은 상용추)로 불렸었다. 일제는 폭포의 이름에 용(龍)이 들어가 있어 식민지 백성의 기(氣)가 세질 우려가 높다는 구실로 개명을 해버린 것이다.

경상북도 경산시 용성면에 있는 쟁광리(爭光里). 이곳은 원래 일광리(日光里)였으나 일제는 "경치 좋고 아름다운 일본의 '일광'과 똑같다"며 강제로 이름을 바꿔버렸다. 대전의 계족산은 애초 봉황산 이었지만 일제가 봉황을 닭으로 격하시켜 이름을 계족산으로 고쳤고 서울 강북구와 경기도 고양시 경계에 있는 백운대 역시 일제가 주민들의 기상을 꺾기 위해 '백운봉' 바꿨다.

우리의 전통 지명에는 '○○골' '○○배미' '○○말'등 우리 고유의 말이 많았다. 특히 이름만으로 그 지역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정겨운 지명들이 많았다. 그러나 일제는 갖가지 핑계로 지명을 바꿨다.

인천 늘목마을은 을왕리(乙旺里)로, 수원 배나무골은 이목(梨木)동으로, 밤밭골은 율전(栗田)동으로, 군포의 산밑은 산본으로, 안성 쇠골말은 신동리로 ….

563돌 한글날을 앞두고 최근 경기문화재단이 발간한 '조선지지자료-경기편 영인본'에도 이같은 사례들이 잘 드러나 있다. 이 자료집을 보면 일제 시대 한자식으로 바뀐 지명의 옛 우리말 이름들이 자세히 나와 있다.

부천시 송내(松內)는 솔나무가 많다 해서 솔안말, 과천시 입암리(立岩)는 선바위(깎아지른 듯 우뚝 서 있는 바위)로 불렸고 용인시 마아산(馬牙山)은 정상의 바위가 말이 입을 벌린 모습과 비슷하다고 해서 말아가리산, 신리(新里)는 새말(새로운 마을)로 불렸었다. 양평 고현리(高峴)는 된고개, 안산 본오(本五)동은 배웃, 안양 갈산(葛山)동은 갈뫼 등으로 불렸다고 한다.

자료집 발간에 참여한 신종원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일제 시대 때 한자식 명칭으로 바뀐 사례가 많은데 우리말을 억지로 고쳐 본래의 뜻과 전혀 다른 지명을 갖게 됐다”며 “이번 지리정보 자료집으로 일제 시대를 거치며 왜곡된 지명의 원래 명칭을 확인하고 지역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경북 칠곡군의 왜관읍은 '왜관'이 일본사람들의 숙소였다는 이유 등으로 붙여진 지명이라는 설이 있어 주민들이 개명을 요구하고 있는 실정이다.

서울 시내 주요 동(洞)의 이름도 일제 때 강제로 한자식 이름을 갖게된 사례가 많다. 종로구 관수동의 경우 '넓은 다리(板橋)'라는 의미의 '너더리'였지만 일제가 청계천의 흐름을 살피는 곳이란 뜻의 관수동(觀水洞)으로 바꿨다. '잣골'로 불리던 동숭동도 일제가 행정편의를 위해 숭교방(조선시대 행정구역) 의 동쪽이란 뜻의 동숭동(東崇洞) 으로 개명했다.

서울시민이 즐겨 찾는 북한산도 고려때부터 줄곳 삼각산으로 불렸으나 일제가 행정구역 개편으로 북한산으로 명명했다. 지난 2007년 10월부터 삼각산 제이름 되찾기 범국민 서명운동까지 벌이고 있는 실정이다.

중앙일보 (김진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