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역사(중국)

주희(朱熹)-남송시기의 철학가 겸 교육가

지식창고지기 2009. 11. 6. 20:06

주희(朱熹)-남송시기의 철학가 겸 교육가

 

 

주희(朱熹)는 1130∼1200 중국 남송(南宋)시기 철학가이며 교육가이다. 주희의 자는 원회(元晦)인데 주자(朱子)는 그의 존칭이다.

 

 주희는 그리 부유하지 못한 가정에서 태어나 14살에 부친을 여의고 18살에 진사로 되여 10여년간 관직에 있다가 40여년을 교육사업에 종사해 왔다. 24세에 임관하여 복건성 둥안현(同安縣)의 주부(主簿)로 4년간 근무하였다. 그후 정이의 제자인 이동을 스승으로 모시고 유학을 전념했다. 1177년 주희는 <논어집주(論語集注)>와 <맹자집주(孟子集注)>를 편찬했다. 이시기 주희는 이학(理學)을 전파하기 위해 <백려동서원(白麗洞書院)>을 설립하고 제자들을 가르쳤다.

 

 주희는 공자, 증자(曾子), 자사(子思), 맹자로 이어지는 유학의 전수계통을 인정하고 사서(四書)를 중시하면서 사서에 주석을 달고 널리 경전을 연구하여 재해석을 시도하였는데 이것을 신주(新註)라고 한다.

 

주자학의 사상적 특징은 불교와 도교의 영향을 받으면서 이기심성학(理氣心性學)을 수립한것이다. 이기심성학을 성리학이라고도 한다.

 

 주희가 이(理)와 기(氣)를 두 기둥으로 심고 생성론, 존재론으로부터 심성론, 수양론에 걸쳐 정연한 이론을 완성시켰다는 사실은 유학사상 전무후무한 일로서 주희 이후 청(淸)나라 중기에 이르기까지 주자학파에 속한 학자는 물론이고 주자학을 반대하는 학자들도 모두 주희의 이론을 토대와 출발점으로 삼았다.

 

주희는 만년에는 위학(僞學)으로 몰려 핍박을 받았으나 사후에 명예가 회복되어 관학(官學)으로서의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명(明)나라 성조(成祖) 때 <사서대전(四書大全)> <오경대전(五經大全)> <성리대전(性理大全)> 등이 편집되어 과거(科擧)의 시험교재로 사용되었고 주자학의 정통적인 지위는 청나라 말기까지 계속되었다. 주자학은 조선반도, 일본에도 널리 전해졌다.

 

 주희의 저서로는 <주역본의(周易本義)>, <서명해(西銘解)> <초사집주(楚辭集註)> <시집전(詩集傳)> <사서장구집주(四書章句集註)> <사서혹문(四書或問)>과 같은 경전해석이 있으며 <태극도설해(太極圖說解)>, <통서해(通書解)>, <사상채어록(謝上蔡語錄)>, <연평답문(延平答問)> 등 북송 이래의 선학(先學) 저작을 교정, 편찬한것이 있으며 선학(先學)의 전기를 모은 <이락연원록(伊洛淵源錄)>과 <명신언행록(名臣言行錄)> 또 왕조의 정통성을 문제삼은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 등이 있다.

 

주희가 세상을 뜬후 후세에 편찬된 <주문공문집(朱文公文集), <주자어류(朱子語類)>는 주희와 주자학연구의 필수자료로 되였다. 중국 유학사에서 주희의 역할을 공자 버금에 간다.

 

 복건성의 무이산에 가면 무이정사가 있어 주희가 공부한 흔적을 남기고 있다. 또한 무이구곡가를 지었으며 이를 토대로 조선의 고산국곡가와 우암송시열의 화양구곡이 만들어지기도 하였다. 또한 무이정사를 바탕으로 이이는 은병정사를 지어 활동하기도 하였다. 이렇듯 주희의 영향은 조선시대 우리네 학풍에까지 미치었다고 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