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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과 중국의 국경선 변화

지식창고지기 2009. 11. 16. 09:55

조선과 중국의 국경선 변화


 

단군조선 이래로 고구려와 발해에 이르는 10세기 초까지 만주와 러시아 연해주 일대는 한민족의 활동영역에 들어 있던 민족의 고토(古土)로 민족문화 발전의 중요한 터전이 되었던 곳이다. 그 뒤 고려조에 들어와 예종이 도원사 윤관을 파견하여 이 지역에 웅거하고 있던 여진족을 정벌하게끔 하였다. 이에 윤관은 두만강 이북 70여 리를 개척하고 9성을 쌓았다. 이 때 쌓은 9개 성 가운데 하나인 선춘령(先春嶺)에 '고려지경(高麗之境)'이라 각자한 비석을 세웠다. 그 이래로 명조 말엽까지 국경문제로 중국과 분쟁을 일으킨 일은 거의 없었다.


명이 망하고 대신 중원을 차지한 여진족 청은 1658년 압록강·두만강 이북지역을 인위적인 봉금지대(封禁地帶)로 선포하여 중국인과 조선인의 이주를 엄금하는 조치를 내렸다. 그것은 만주가 청조 조상의 발상지라는 이유와 만주족의 경제적 자원과 비옥한 토지를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이러한 봉금지대는 조선의 변경 거주자들이 인삼 등을 채취하고 수렵과 벌목에 종사하던 생활무대였다. 그러므로 이들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금법(禁法)을 무릅쓰고 도강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봉금지대 설정 이후 발생하게 된 월경자(越境者) 처벌문제가 조선과 청국 간의 외교에 큰 쟁점이 되었다. 청은 특히 1712년 백두산 정계비를 건립한 이래로 월경금법(越境禁法)을 더욱 강화하여 한민족의 활동영역에서 만주를 완전히 배제코자 하였다.


청의 강희제는 1712년 목극등을 임명하여 백두산 일대를 탐사하고 양국간의 국경선에 대하여 조선과 약정토록 하였다. 목극등(穆克登)은 백두산 정상에서 동남으로 10여 리 떨어진 압록강과 토문강의 발원지점에 "변경을 조사하여 여기에 이르러 살펴보니 서쪽으로는 압록강이고 동쪽으로는 토문강이다. 그러므로 강이 나뉘는 고개 위에다 돌을 새겨 기록한다."는 국경을 결정하는 정계비(定界碑)를 세우면서 토문강이 송화강의 한 지류임을 알지 못하고 두만강의 상류인 것으로 오인하여 결국 우리나라의 영토내인 함북 무산군 삼장면 농사리(茂山郡 三長面 農事洞)에 정계비가 건립됨으로써 한민족의 한을 남기게 된 것이다.


그 뒤 1869년∼1870년간 서북지방에 극심한 흉년이 들자, 빈민들은 죽음을 무릎쓰고 두만강을 건너게 되었다. 청은 봉금정책을 폐지하고 간도 일대를 개방하고 토문강 동북안 일대의 황무지 개간을 위한 조사대를 파견하였으나 이미 다수의 한인들이 상당히 넓은 지역에 걸쳐 황무지를 개간해 놓은 상태였다. 이에 돈화현감은 토문강 이서와 이북지방에 거주하던 한인들을 1년 안에 조선경내로 추방하겠다는 고시를 하기에 이르렀다.


이 무렵 일단의 조선 변경인들은 청이 두만강을 토문강으로 오인한 것을 알고 두만강의 발원지를 탐사한 결과 목극등이 백두산 정계비에 기록한 토문강은 분수령 정계비가 있는 곳에서 발원하여 백두산에서 동으로 송화강으로 흘러 들어가고, 두만강은 정계비에서 원거리에 있는 지점에서 발원하여 동해로 유입된다는 사실을 확인하였고, 이로써 현재의 북간도 일대가 청국령이 아니라 조선의 영토임을 주장하게 되었다.


조선정부는 이에따라 도문강(圖們江 : 두만강) 이북과 토문강 이남의 중간지대가 조선 영토임을 청에 정식으로 통고하고 이의가 있다면 다시 국경을 조사할 것을 제의하였다. 그 결과 1885년 조선측의 이중하와 중국 훈춘부통의 덕왕 등 양국의 대표는 정계비를 현지 답사하고 수차의 회담을 가졌지만 양측의 주장이 달라 근본적인 합의를 볼 수 없었다. 양국간의 경계문제는 미결과제로 남아 있던 중에 러일 전쟁이 발발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 동안 조선정부에서는 간도지방에 거주하는 한인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하여 1902년 이범윤을 간도관리사로 임명하여 간도 거주 한인의 호구와 인구를 조사하여 조세제도와 지방행정제도를 갖추도록 하였고, 이주 한인을 압박하는 청의 관리와 군인을 몰아내고자 무장단체인 사포대(私砲隊)를 조직하기까지 했다.


한편,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1907년 용정에다 통감부 간도 파출소를 세우고 대륙침략정책의 일환으로 간도지역이 한국의 영토임을 주장하고 나왔다. 일제는 대륙침략의 필수조건을 얻기 위한 교환조건으로 간도지방을 청에게 완전히 양도하겠다는 제의를 한 결과 양국사이에 1909년 9월 4일 간도협약을 체결하였다. 이로써 한국은 이주 한인에 의하여 개척되어 대규모의 한인사회가 형성되어 있는 두만강 이북 약 18만 2,000여 리의 땅을 상실하게 되었다. 일제에게 국권을 침탈당한 한국은 토문강과 도문강이 두만강을 지칭하는 같은 강이라는 청의 주장이 확실하게 입증되지도 못한 상황에서 이주 한인이 피와 땀으로 개간한 옥토는 일본제국주의의 대륙팽창정책에 희생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