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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종교와 사상 (3)

지식창고지기 2009. 12. 28. 09:06

중국의 종교와 사상 (3)

 

 

제11강 수당시대의 이론불교

 

        1. 중국불교의 자주적 모색

 

--민족적 경계와 계층적 차이를 넘어 널리 수용된 보편성을 가진 불교는 수당 왕조 동안 중국대륙의 문화적, 정치적 통합을 위한 접착제의 역할을 하였다. 왕조가 불교의 이런 기능을 적극적으로 환영했음은 물론이다. 불교는 가족과 친족 윤리의 틀에 사로잡혀 있던 중국인들의 시야를 넓혀주었다.

 

--불교는 중국화의 과정에서 몇 가지 난관에 부닥쳤다. 불교를 오랑캐의 종교로 보는 중화적 세계관, 왕을 하늘의 대리자로 보는 천명사상과 전통적 국가관, 중국인의 효윤리에 어긋나는 불교의 출가의식, 육체가 소멸해도 정신이 윤회한다는 영육의 분리론에 대한 중국인의 반발 등이 그것이었다. 이 때문에 불교는 몇 번에 걸쳐 폐불사건을 겪었다. 그러나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불교는 중국적 세계관과 밀착되고 중국불교로서의 성격을 갖추어 나갔다.

 

--불교 전래의 역사가 오래 된 남북조시대 후반에는 인도에서 전래된 수많은 경전들을 비교분석하고 통합하여 불교의 전체적 틀을 바로 인식하고자 하는 시도가 일어났다. 말하자면 당시 중국 불교도들은 수많은 불교적 가르침 중에 자신이 믿고 행하는 것이 정말로 석가의 가르침을 잘 따르고 있는 것인가에 대해 확인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를 가리켜 敎相判釋 혹은 敎判이라고 한다. 이후 불교에 대한 보다 깊은 인식을 바탕으로 하여 불교라고 해서 다 하나가 아니고 입장에 따라 다름을 인식하고 종파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종파의 형성은 자신이 믿고 행하는 것이 가장 석가의 가르침에 근접해 있다는 나름대로의 확신을 말한다. 석가로부터 자기의 스승과 자기 자신에 이르도록 불법이 전해져 내려왔다는 확신이 종파적 신념인 셈이다. 이처럼 석가의 가르침이 계통을 따라 자신에까지 이어졌다는 관념을 師資相承이라고 한다.

 

--수당 시대에 들어와 외래종교의 틀을 벗고 중국불교는 나름대로의 확신을 바탕으로 교학적 차원에서 일가를 이룬 천태종과 화엄종, 실천적 차원에서 역량을 발휘한 정토종과 선종을 비롯하여 삼론종, 법상종, 율종, 진언종 등 많은 종파를 형성하였다.

 

        2. 천태종

 

--천태대사 지의는 <법화경>의 사상을 석가가 남긴 불법의 정수로 보고 모든 경론을 <법화경>으로 귀결시킨 천태사상의 교의를 제기하였다.

 

--오시팔교라고 하는 천태의 교판은 <법화경>에 단계적인 깨달음의 이치가 들어있다는 확신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말하자면 <화엄경>이 설한 직접적이고 고차원인 설법이 실패한 뒤 석가가 중생은 현실적으로 볼 때 단계적으로 제도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으로 <법화경>의 설법을 제시해 주었다는 것이다.

 

--천태종은 선악의 요소가 모든 세계에 공존하고 있다는 선악상즉론, 천국과 지옥에 이르는 각 계가 단계적으로 중첩되어 있다는 십계호구설을 제기하였다. 지극한 부처의 세계와 사악한 지옥의 세계는 맨 밑으로부터 맨 위까지 열 단계로 이루어진 세계의 맨 위와 맨 아래에 해당한다는 단계적인 구조론을 제기한 것이다. 수행은 이 단계를 밟으며 위로 꾸준히 올라가는 것으로 보았다.

 

        3. 화엄종

 

--천태종이 주로 남중국 일대에서 수용되는 동안 화엄종은 북중국 일대에서 널리 수용되었다.

 

--석가가 깨달음을 얻은 뒤 해탈의 상태를 그대로 표현한 것이라고 하는 <화엄경>을 최고의 설법으로 보는 것이 화엄종의 기본 입장이었다.

 

--“重重無盡, 事事無碍”의 세계인 화엄의 세계를 석가가 얻었던 최고 경지로 보고 곧바로 그 세계로 몰입하는 것을 최고의 수행으로 보는 것을 제기하였다. 천태종에서 제기하는 단계적 수행이나 노력보다는 화엄의 세계에 대한 깨달음을 중시하는 것이 화엄종의 입장인 것이다. 화엄종은 인간의 마음에는 부처의 깨달음을 일거에 받아들일 수 있는 심성이 있는 것으로 보았다.

--화엄종이 천태종보다 더 널리 퍼졌던 것은 유학의 성선설을 정통으로 생각하는 중국적 사고방식의 영향도 컷을 것으로 짐작된다.

 

제12강 수당시대의 실천불교

 

        1. 정토종

 

--천태종과 화엄종이 이론적인 불교의 흐름을 대표한다면 정토종과 선종은 실천을 중시하는 불교의 흐름을 대표한다. 천태종과 화엄종도 나름대로 중국불교의 한 흐름을 이루고 있지만 선종으로 압축되는 실천을 중시하는 흐름이 사실은 중국불교의 흐름 가운데 가장 중심을 이루었다. 중국의 대승불교를 대표하는 흐름은 아무래도 선종으로 보아야 할 것이며, 불교의 중국화를 완결한 흐름 또한 선종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중국 정토사상의 기초는 구마라습과 혜원에 의해 마련되었다. 이들이 주장했던 염불과 신심이 해탈을 얻는 참된 길이라는 확신은 이후 정토종으로 발전하였다.

 

--정토사상은 무량수불이라고 불리는 아미타불에게 신심으로 염불을 하면 아미타불의 도움을 받아 극락정토로 갈 수 있게 된다는 믿음이다. 아미타불은 중생의 구제를 자신의 일로 삼아 끊임없이 정진함으로써 그 결과 해탈을 이룬 부처인데 부처가 된 이후에도 중생을 구제하는 일을 자신의 일로 삼아 영원히 중생구제에 나서는 부처를 말한다.

 

--정토사상이 대두하면서 중국 불교에서는 三身觀이라고 하는 부처를 세 차원으로 나누어 설명하는 방식이 나타났다. 기독교의 삼위일체설과 비슷한 삼신관에 의하면 부처는 진리 그 자체로서의 法身, 법신불이 특정한 시기에 특정한 모습으로 나타난 석가모니불과 같은 應身, 보살수행의 결과로 부처가 되었으며 부처가 된 뒤에도 영원히 중생을 구체하는 報身으로 나뉘며 세 차원의 부처는 하나의 동일한 부처의 세 면을 이룬다. 아미타불은 이 가운데 報身을 말한다.

 

--남북조시대에 중생구제를 본질로 하는 아미타불에게 중국인들의 마음이 쏠린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혼란스러운 시대상황에 있었을 것이다. 남북조시대는 중국 대륙이 남과 북으로 나뉘어 경쟁과 대립이 지속되었고, 남과 북의 서민들은 다 계속되는 민족이동과 전쟁의 와중에서 극심한 고통을 겪고 있었다. 이런 상황은 중국의 서민들로 하여금 교리에 대한 이해나 미래의 약속보다도 지금 당장의 고통과 공포로부터 자신을 구원해 줄 아미타불의 신통력에 대한 기대가 시급한 상황이었다.

 

--한편 아미타불에게 구원을 기대하는 정토종의 신앙은 자각적 깨우침을 중시하는 불교의 본질과 모순을 이루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과 세계에 대한 성찰이 아니라 아미타불을 간절히 부르는 염불을 가장 중요한 일로 삼는 정토종은 인도불교의 본질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는 흐름이었다.

 

        2. 선종

 

--선종은 중국불교의 총결산이라고 할 만하다. 시기적으로도 선종은 당 왕조에 들어와 남중국의 혜능, 북중국의 신수에 의해 틀이 잡혔다.

 

--선종은 오가칠종이라고 불리울 정도로 활발하게 대두한 좌선을 수행법으로 하는 불교의 흐름이 모여서 이루어졌다.

 

--선종의 특징은 不立文字, 敎外別傳, 直指人心, 見性成佛, 以心傳心, 師資相承 등의 독특한 성어들을 통해 잘 드러난다.

 

--선종을 특정한 경전을 중시하는 것이 아니라 스승이 직접 제자나 구도자의 마음을 움직이는 방식을 주요한 수행법으로 삼았다. 이는 선종의 강한 응집력의 바탕이 되기도 했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스승과 제자로 이어지는 폐쇄적인 종파의식이 강화되어 내려가 오히려 선종이 퇴조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선종은 인도 불교의 중요한 수행법인 명상수행의 전통이 중국화되어 좌선으로 발달된 결과였다. 이와 함께 사사무애의 화엄적 세계관의 영향으로 자기 자신의 깨달음을 중시하는 생각도 선종의 발달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인도로부터 중앙아시아를 거쳐 중국으로 들어온 불교는 선종에 이르러 긴 중국화의 과정을 마무리짓고 중국불교의 완결된 모습을 갖추었다. 사찰과 불상의 의례, 경전과 교리의 체계를 벗어나 스스로 자신의 본성을 바라봄으로써 해탈을 이룬다는 선종의 대두는 중국불교 발전의 정점이라고 할 만하다.

 

제13강 북송시대 주자학의 태동

 

         1. 북송 중기의 유학부흥운동

 

--유학은 북송에 들어와 부흥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된 결과 새로운 유학의 흐름이 대두하게 되었다. 이 흐름을 가리켜 新儒學, 性理學, 理學 등으로 부른다.

 

--새로운 유학의 부흥운동은 한왕조 이래 발달해 온 유학의 전통을 반성하는 방향과 유학 외부의 경쟁사상들 구체적으로는 불교와 도교에 대해 비판을 가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북송의 유학부흥운동은 문학상의 고문운동과도 동일한 궤도를 그렸다. 고문운동을 통해 유학자들은 문장에 유가의 도를 담아야 한다는 주장을 활발하게 폈다. 고문운동의 방향은 주돈이의 유명한 “文以載道”라는 말 속에 잘 나타나 있다.

 

--사학 방면에서 북송의 유학자들은 역사가의 역할을 단순한 사실 기록이 아니라 역사적 사건에 대해 시비를 평가하는 기능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런 논지 아래 그들은 <사기>를 낮추고 대신 <춘추>를 높이 평가하였다.

 

--북송의 유학자들은 한 왕조 이래 주로 행해져왔던 유가 경전에 대한 주석 작업을 넘어서서 경전에 담긴 뜻을 밝히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하였다. 그들은 경전에 대해 자유롭고 폭넓은 해석을 가하였다. 심지어는 이전 시기의 경전에 대한 주석들을 모두 의심하고 경전 성립 당시의 상황을 유추하여 새롭게 해석을 가하는 경우도 많았다.

 

--경전의 올바른 뜻을 찾아내고 성인의 도를 밝히는 것이 중시되었던 북송 시기에는 도가 전해져 내려오는 이른바 道統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제기되었다. 이런 상황은 이단론이 필연적으로 제기되는 배경을 이루었다. 불교와 도교에 대해서도 비판과 공격을 가하는 경우가 많았다.

 

--북송 시기에 신유학이 발달한 것은 불교, 도교와의 경쟁이라는 요인도 크게 작용하였다. 특히 고도로 세련된 형이상학과 존재론을 개발했던 불교의 사상체계는 북송의 유학자들을 크게 자극하였다. 유학자들은 불교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불교의 사상체계의 영향을 깊이 받은 것도 사실이었다.

 

        2. 북송시대 주자학의 선구자

 

--북송시대에 성리학을 발달시킨 다섯 명의 유학자를 가리켜 北宋五子라고 부른다. 그들은 주돈이, 소옹, 장재, 정호, 정이이다. 이들의 유학을 성리학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들이 “사물의 본성이란 무엇인가”라는 性의 문제와 “우주만물의 궁극적 원리는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답하기 위하여 理라는 관념을 집중적으로 추구했기 때문이다.

 

--불교의 영향을 반영하는 매우 추상적인 경향이 농후했던 성리학은 程朱學이라고도 부른다. 程子(정호와 정이의 두 철학자인 二程)와 朱子(남송의 철학자 朱熹)가 발전시킨 유학이라는 뜻이다.

 

--북송 성리학의 선구자는 <태극도설>과 <통서>로 유명한 周敦頤이다. 그는 <태극도설>에서 무극, 태극, 음양, 오행을 거쳐 만물이 나온다는 추상적인 일종의 우주발생론를 주장하였다. 그의 태극도설은 <주역>과 <도덕경>으로 대표되는 유가와 도가의 철학에 음양오행설이라는 중국의 전통적인 민간설을 결합시켜 중국인이면 누구나 알고있는 상식을 바탕으로 하여 사람들에게 쉽게 인정받을 수 있는 논리를 만들어냈다. <통서>에서 그는 또 고대 유가경전에서 제기되었으나 그다지 보편화되지는 않았던 誠이라는 개념을 학문과 실천의 최고 목표로 제기하고 誠을 이루기 위한 수양공부론을 주장하였다. 일반적으로 仁이나 聖, 德과 같은 개념들이 가장 높은 목표로 제시되어 있기는 했지만 상호관계가 명료하지 않았는데, 주돈이는 모든 덕목들 가운데 가장 높은 덕목으로 誠이라는 개념을 제기하였다.

 

--張載는 <주역>의 내용을 바탕으로 하여 氣一元論의 사상체계를 제시하였다. 그는 우주란 太虛之氣로부터 발현되는 생명과 움직임으로 가득 차 있으며, 우리 눈앞에 있는 무수한 사물은 氣의 움직임에 따라 만물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에 불과하다는 동적인 세계관을 제기하였다. 그는 또 심통성정론도 주장하였다. 만물을 인식하는 인간의 역량을 心이라는 개념으로 본 것이다. 성리학자들이 대체로 理를 비롯하여 知, 德 등 정적인 개념들을 주로 제기하는 데에 비해 장재는 상대적으로 동적인 개념을 제기하였다. 나중에 朱熹는 장재가 제기한 개념들을 理를 축으로 하여 변형시켰다.

 

--程頤는 理를 중심으로 한 理本體論을 주장하였다. 그는 理를 무형의 형이상자인 道라고 보았고 氣는 유형의 형이하자인 음양이라고 보았다. 말하자면 理를 氣보다 논리적으로 상위의 개념으로 본 것이다. 이 때문에 그의 이론을 리본체론이라고 한다. 그는 나아가 理를 보든 만물의 이치의 근원이 되는 본질적인 理인 太極之理와 개별 사물의 본질을 구성하는 分殊之理로 나누어 설명하였다. 그는 리본체의 사상을 바탕으로 하여 하늘이 부여한 인간의 궁극적이고 근본적인 본성은 맹자가 말한 性善이라고 주장하였다. 선한 인간의 본성은 태극지리처럼 모든 인간의 본질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이를 性卽理라는 명제로 설명하였다. 그는 리본체의 사상을 바탕으로 하여 인식론도 무형의 궁극적인 理에 대한 앎은 德性之知, 구체적인 사물을 이루는 유형의 氣에 대한 앎은 見聞之知라고 구분하였다.

 

제14강 주자학의 성립과 전개

 

        1. 주자학의 성립

 

--朱熹의 유학은 북송 성리학 뿐 아니라 그 이전의 유학, 도가사상과 불교까지도 받아들여 집대성하였다. 그의 이름을 따서 주자학이라고도 불리는 그의 유학은 이후 역대 중국 왕조와 동아시아 일대에서 관학의 지위를 누렸으며 동아시아 일대의 보편적 사상 역할을 하였다.

 

--朱熹는 방대한 저작을 남겼으며 <예기>의 한 편에 불과했던 <대학>과 <중용>을 존중하여 따로 떼어내서 <논어>, <맹자>와 함께 四書로 확정한 것도 그가 한 일이었다. 朱熹 이전까지는 五經을 중시했으나 그가 四書를 중시한 이래로 四書가 오히려 五經보다도 중요하게 취급되었다. 그는 거의 모든 고대의 유가 경전에 주석을 달고 역사, 의례, 문학에 대해서까지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

 

--그의 성리학설은 理氣論, 心性論, 工夫論의 세 분야로 이루어졌다.

 

--그는 북송 성리학자들의 理와 氣에 대한 논의를 절충하되 理가 중심이 되는 理一元論의 理氣論을 완성하였다. 그의 理氣哲學에서는 理가 氣의 원인이기 때문에 理氣論이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理一元論이다.

 

--그는 맹자의 성선설을 정통으로 보고 程頤의 性卽理의 설을 바탕으로 한 이원론적 심성론을 전개하였다. 그의 심성론은 심과 성을 이원화하여 설명하는 심통성정론, 본연지성과 기질지성에 대한 이원적 설명, 인심과 도심을 분리시킨 인심도심설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주희의 공부론은 <중용>의 尊德性과 道問學에 기반을 두었다. 마음에 대한 공부와 외부 사물에 대한 공부를 각기 대표하는 두 갈래의 공부를 지극하게 해 나가면 불교적인 깨달음을 방불하게 하는 어느 한 순간에 탁 트이듯 깨닫게 된다는 豁然貫通의 상태에 도달한다는 본다. 그리고 자기 마음에 대한 공부인 존덕성과 외부 사물에 대한 공부인 도문학 공부 가운데 어느 한 길만으로는 안 되고 반드시 두 공부를 함께 해야만 한다는 지행호발병진설도 함께 내어 놓았다.

 

        2. 주자학의 전개와 논쟁

 

--주희는 당시 여러 사상가들과의 논쟁 과정에서 자신의 학설을 가다듬었는데, 그 가운데 유명한 것으로는 中和論爭, 王覇論爭, 鵝湖論爭이 있다.

 

--中和論爭은 張栻과의 사이에 벌어졌던 心의 存養工夫에 대한 논쟁이었다.

 

--王覇論爭은 陳亮과의 사이에 한고조와 당태종의 통치를 왕도정치로 볼 것인가 패도정치로 볼 것인가를 놓고 벌인 논쟁으로서 朱熹는 두 왕의 정치를 패도정치로 보았다.

 

--朱熹는 陸王學의 선구자인 陸九淵과 만나 존덕성과 도문학이라는 工夫論에 대해 格物致知의 공부가 갖는 중요성을 놓고 토론을 벌였는데 이를 鵝湖論爭이라고 한다. 육구연은 주희가 주장하는 공부론이 지나치게 지리하고 산만하며 자기 자신이 없고 외부에 의존하는 공부라는 비판을 가하였고 주희가 주장하는 性卽理 대신 心卽理라는 자신의 주체적 견해를 중시하는 공부론을 내걸었다.

 

--남송 말기부터 주희의 학설은 정통의 지위를 차지하기 시작하며 남송에 이어 중국 대륙 전역을 장악한 이민족 왕조인 원왕조에 의해서도 관학으로 인정받았다. 주희의 저서는 과거시험의 교과서로서 인정받았으며 이후 청왕조 말기에 이르기까지 관학으로서의 주자학의 위치는 흔들리지 않았다.

 

제15강 양명학의 등장과 분화

 

        1. 양명학의 성립

 

--송 왕조 후기 이후 관학의 지위를 얻고 원 왕조에서 그 지위를 더욱 굳힌 주자학이 현실과의 긴장을 상실하고 절대화의 길을 걸음으로써 학문적으로 경색되어 간 데 대한 반발이 명 왕조에 들어와 양명학으로 나타났다.

 

--양명학은 王守仁의 호인 陽明을 따서 붙인 이름이다. 양명학의 선구자는 남송 때의 陸九淵이었으나 양명학이 주자학에 대항할 정도로 발달한 것은 명 왕조에 들어와서였다. 이 때문에 양명학을 가리켜 陸王學이라고도 부르고 心學이라고도 부른다.

--양명학의 대두는 理學으로부터 心學으로의 전환이다. 성리학의 주요 개념인 理가 지배적 위치를 양명학의 心에게 넘기게 되었다는 뜻에서이다. 그렇다고 명대 이후 양명학이 패권을 완전히 잡았느냐면 그런 것은 아니다. 성리학이 독주하는 상황에 대해 양명학이 제동을 걸었다고 보는 것이 현실적일 것이다.

 

--명 왕조의 부패와 무질서는 수많은 소수민족과 농민의 반란을 초래했고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성리학적 질서의 허구성을 느꼈던 왕수인은 성리학의 天理에 대해 현실을 살아가는 인간주체의 마음을 존중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양명학의 가장 큰 명제는 내 마음이 곧 이치라는 心卽理이다. 성리학이 외부 사물에 내재되어 있는 하늘이 부여한 이치를 내 마음으로 깨달아 이해한다는 가정을 왕수인은 정반대로 뒤집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사물이 마치 외부 현실 속에 객관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듯이 보이지만 실은 그것은 그 사물이 마치 나와는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이지 완전히 객관적인 외부 사물 나아가 외부의 현실은 없다는 것이다. 모든 사물은 나의 감각에 의해 포착되어 나에 의해 해석되고 있는 것이지 그 사물이 외부에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인가 아닌가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극단적으로 주관을 중시하는 왕수인의 관점은 유학자들이 최고로 존중하는 “六經이 모두 나의 脚注이다”라는 말 속에 과장되어 표현되었다. 성리학자들이 견지하는 육경을 하늘의 이치를 깨달은 성인의 말씀이기 때문에 나의 주관으로 해석하려 하지 말고 나의 주관을 거기에 복종시켜 받아들여야 한다는 관점을 정면으로 뒤집은 것이다.

 

--위에서 왕수인이 말하는 마음은 그냥 내 마음이 가는 곳이라는 뜻의 마음이 아니라 맹자가 말했던 良知良能의 良知임에 유의해야 한다. 그냥 내 멋대로 한다는 뜻이 아니라 인간에게 내재되어 있는 성선론적인 마음의 작용 원리를 말하는 것이다.

 

--인간에게 내재되어 있는 선한 마음의 작용을 회복시키고 발현시켜야 한다는 왕수인의 생각은 致良知論으로 요약된다. 치양지론은 知行合一論과 연관된다. 인간이 타고난 도덕성을 깊이 자각하고 그에 입각하여 행동해야 한다는 것이다.

 

        2. 양명학의 분화

 

--양명학은 크게 세 학파로 나뉘어 분화하였다.

 

--현성파(좌파), 귀적파(우파), 수증파(정통파)가 그것이다. 좌우의 이념적 축으로 나누는 방식은 그들의 차이를 현대적인 관점에서 이해하는 데에 편리하다.

 

--왕간, 왕기, 이탁오 등이 대표하는 현성파는 양지를 굳이 회복시키고 발전시켜야 하는 내재적인 마음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다 이미 이루어져 있다고 보는 입장을 취하였다. 현재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도덕적인 마음 뿐 아니라 더 많은 재산을 축적하고 싶어하고 더 잘 살고 편안하게 살고 싶은 마음도 양지라고 보는 것이다. 말하자면 인간의 현세적이고 통속적이고 나아가 이기적이기까지 한 마음까지도 현실적으로 인정해야 할 良知의 한 부분이라고 본 것이다. 이처럼 물질적이고 감각적인 욕망까지도 인정하려 했다는 점에서 그들의 주장을 유물론적 혹은 좌파적이라고 보는 것이다. 현성파는 태주학파라고도 불렸다. 현성파는 명대의 서민문화를 긍정하는 방향으로 나아갔으며 인륜도덕과 사회적 속박을 타파하려는 당시로서는 매우 과격한 모습을 띠었다. 노동자 출신이었던 왕간은 회남격물설로 유명하다. 그는 왕수인이 말한 心을 개인의 생명을 가리키는 身의 문제로 치환하였다. 명철보신론과 救世 의식으로 나아간 왕간의 사상은 백성들의 일상생활을 중심에 놓은 파격적이고 진보적인 사상이었다. 왕간의 사상은 하심은에 의해 聚和와 與民同欲으로 발전하였으며 李贄에 이르러 더욱 극단적인 방향으로 나아가 <焚書>를 통해 표현된 童心說로 발전하였다.

 

--섭표, 나홍선이 대표하는 귀적파는 양지를 내재적이고 본래적인 고요한 모습과 사물에 부닥쳐 작용하는 모습으로 나누고 고요한 모습으로의 회복이라는 즉 歸寂을 중시했다.

 

--수증파는 양지를 인간 고유의 주체적인 마음의 작용으로 보지 않고 하늘이 부여한 이치인 도덕법칙이라고 보았다. 수증파의 이런 관점은 실제로 하늘이 부여한 理를 중시하는 주자학적 관점과 그리 차이가 없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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