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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종교와 사상 (4)

지식창고지기 2009. 12. 28. 09:07

중국의 종교와 사상 (4)

 

 

제16강 명말청초 사상의 등장

 

        1. 경세사상

 

--명말청초의 사상은 황종희의 경세론, 고염무의 고증학, 왕부지의 기철학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이 흐름들은 성리학과 양명학에 대해 다 비판적인 시각에서 당시의 현실에 대한 관심을 바탕으로 사상체계를 제기한 특징이 있다.

 

--명 나라 초기부터 관학으로 사상을 지배했던 성리학은 물론 후기에 대두한 양명학도 한족 왕조인 명 나라의 부흥을 이루지 못하고 만주족의 청 왕조에게 중국 대륙을 넘겨준 상황에 대한 반동과 비판이 두 학문 모두에 대한 부정을 바탕으로 한 경세론, 고증학, 기철학으로 나아가 나름대로 경세치용의 방책을 제시한 것이다.

 

--이러한 움직임은 동림당과 복사에 의해 명말에 제기되었다.

 

--황종희의 경세사상은 명나라가 망한 뒤 고향에 은거하며 저술한 <명유학안>과 <명이대방록>에 제시되어 있다. 특히 <명이대방록>에서 그는 하은주 삼대를 이상으로 삼아 민본사상과는 동떨어진 명말청초의 정치적 현실을 비판하였다.

 

--현대적 안목에서 보면 황종희의 경세사상은 계몽주의적 관점에서 왕이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는 정치를 해서는 안 되며, 왕의 도덕성을 기다리지 말고 좋은 제도를 통해서 정치가 이루어지도록 해야하며, 반드시 신하들과 협력하고 백성들의 이익을 위해 왕은 자신의 권한을 행사해야 한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2. 기철학

 

--명말의 기철학은 주자학과 양명학이 다 외세의 침입이라는 시대적 문제에 대응하지 못하고 학문의 사회적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는 데 대한 반성으로 제기되었다.

 

--기철학의 대표자는 왕부지였다. 그는 구체적이며 표현 가능한 사물을 가리키는 器, 그리고 器의 생성원리인 氣의 개념을 정신적인 원리인 理나 道보다 우선시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성리학에서 氣의 상위개념 역할을 하던 추상적 원리로서의 理는 氣 가운데 존재하는 것으로서 오히려 氣의 하위 개념이 되었다. 그의 이런 생각은 성리학의 권위를 뿌리부터 부정한 것으로서 마치 성리학 성립 이전으로 복귀한 것과 같았다.

 

--왕부지에 이어 주자학을 비판하는 데에 힘을 기울였던 顔元에 의해 기철학은 더욱 발전하였으며 戴震에 이르러 완성되었다. 대진은 성리학자들이 맹자가 제시한 理, 天道, 性 등의 개념을 왜곡시켰다고 보고 그 잘못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며 성리학자들이 제기한 理를 부정하고 오직 氣만을 본질적인 것이라고 보았다. 살아 움직이는 기를 우주만물의 본체라고 보았으며, 기의 작용을 원칙적으로 긍정적인 것으로 보는 그의 기철학은 필연적으로 기가 드러난 결과인 欲, 情, 知와 같은 작용을 긍정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이는 기철학을 유물론적 철학으로 해석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하기도 했다.

  

      3. 고증학

 

--유학의 흐름을 역사적으로 보면 한의 訓詁學, 당의 詞章學, 송명의 性理學, 청의 考證學으로 연결시켜 생각할 수 있다.

 

--고증학은 실증주의적 입장에서 문헌 고증을 통해 고전을 정리하고 해명하려 했으며 그런 점에서 훈고학과 비슷한 점이 많다.

 

--청 왕조가 한족 지식인들의 학술활동에 대해 강력한 사상통제를 실시했기 때문에 한족 지식인들이 고전에 몰두하면서 울분을 달랠 수밖에 없었던 것이 고증학 발달의 정치적 배경이었다.

 

--청 왕조는 동시에 <강희자전> 편찬, <사고전서> 편찬, <고금도서집성>편찬 등 대규모 편찬사업을 벌여 한족 지식인들을 회유하였다. 고증학은 대규모 편찬사업을 배경으로 발달하였다.

 

--초기 고증학자 고염무는 유학자들이 理氣와 心性과 같은 공리공담에 빠져 경전에 담긴 치국평천하의 도를 소홀히 했다고 비판하면서 실사구시의 태도로 경전을 연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일지록>은 그의 학문적 태도와 관점을 잘 보여주는 저작이다.

 

--고증학자들은 대체로 역사를 연구하는 태도로 유가 경전을 연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런 태도는 경전에 절대적인 진리가 담겨있다고 보는 성리학자들의 태도와 판이하게 다른 것으로서 경전을 절대화하기를 거부하고 학문적 연구의 대상으로 간주하는 관점을 고수하였다.

 

--초기의 고증학은 현실에 대한 설득력있는 설명을 목표로 하는 역동성을 내포하고 있었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 학문을 위한 학문으로 나아가 현실과의 연관성이 약화되었다. 고증학은 경전 중심의 학술을 다양한 분야로 확대시켰지만 한편으로는 학문적 객관성에 치우친 나머지 사회적 역할을 상실한 셈이었다.

 

제17강 서양문명의 충격과 대응, 변법파와 양무파

 

        1. 중국 근대의 개막

 

--백련교의 반란, 아편전쟁, 태평천국운동으로 이어지는 청 왕조 몰락의 역사는 통치 집단 내부에서 서양식 개혁을 통한 부국강병책으로 자신들의 통치체제를 강화하자는 움직임을 불러일으켰다. 서양의 실무를 받아들이자는 양무운동은 이렇게 대두하였다.

 

--그러나 청일전쟁은 양무운동의 한계를 여실히 보여주었으며 그 결과 변법유신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과정은 중국의 경우 근대문명 형성과정 자체가 서구문명 수용과정이라는 성격을 내포함을 보여준다.

 

        2. 청나라 말기 사상계의 동향

 

--이상주의였던 홍수전과 홍인간에 의해 제기된 태평천국의 혁명적 사상은 남녀평등, 유일신 숭배, 서양식 역법 도입 등 혁신적인 내용을 포함하고 있었다. 비록 실패하였지만 태평천국이 제시했던 혁명적 사상은 이후 중국사회 변화의 길을 예고한 셈이었다.

 

--한족 지식인들이 몰두했던 고증학은 과학적 방법론과 많은 성과에도 불구하고 정치에 대한 무관심이 큰 특징이었다. 청왕조가 정치적 목적 아래 추진한 문화사업과 함께 발달한 고증학의 필연적 성격이라고 하겠다.

 

--고문의 전통에 기대어 발달한 고증학의 정치적 무관심과 사회적 효용 부재를 비판하면서 등장한 청말의 공양학파는 학문과 실천의 일치를 주장하였다. 공자진, 위원이 대표하는 공양학파는 청말의 시대적 위기 상황에 대한 지식인들의 반응을 대표한다. 그러나 공양학파는 근대적 가치를 내재화하지는 못하였으며 여전히 봉건적 전통의 옹호를 주장하였다.

 

--주자학(성리학)은 중국적 정통성의 계승을 강조하려는 청왕조에 의해 관학의 위치를 부여받고 있었으며 근대의 태동을 억압하는 가장 주요한 장치로서 기능하고 있었다.

 

        3. 양무파의 중체서용론

 

--봉건으로부터 근대로 전환해야 한다는 시대적 과제는 서양문명의 수용을 핵심 내용으로 할 수밖에 없었다. 중체서용론은 이 문제에 대해 청왕조 지배층이 내린 결론이었다.

 

--중국학문을 본체로 삼고 서양학문을 응용한다는 중체서용론의 주장자는 장지동이었다. 서양을 배운다는 특징을 가리켜 이들을 양무파라고 부른다.

 

--중체서용론은 논리면에서는 절충주의, 내용면에서는 봉건체제 옹호론이었다.

 

--뒤이어 등장한 변법파는 중체서용론이 주장했던 기술적인 서양학문 도입을 넘어서서 민권, 의회, 입헌군주제와 같은 핵심적인 원리까지도 도입하자는 주장을 내걸었다.

 

        4. 변법파의 동도서기론

 

--변법파는 강유위, 담사동, 양계초, 엄복 등이다.

 

--담사동의 道器論은 변법파의 논리를 대표한다. 도는 중국의 윤리질서, 기는 서양의 과학기술을 말한다. 그런데 그의 도기론은 성리학을 포함하여 일반적인 중국학자들의 경향과 달리 추상적 원리인 도보다 구체적 사물의 쓰임새로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기가 우선한다는 입장을 견지한다. 기가 체이고 그에 따라 사후적으로 정의되는 도가 용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그의 도기론은 器體道用의 세계관이다.

 

--담사동의 도기론은 봉건윤리와 봉건적 신분질서에 대한 비판으로 나아간다. 이로 인해 담사동은 청왕조에 의해 처형되기에 이른다.

 

--변법파가 추진했던  변법유신은 백일천하에 그치고 말았다. 이는 대중의 이해를 바탕으로 하지 않은 개혁, 역사에 대한 통찰이 결여된 개혁의 한계를 잘 말해 준다.

 

제18강 서양사상의 창조적 수용, 동서문화논쟁․과학과 인생관 논전

 

        1. 5.4신문화운동의 구호, 과학과 민주

 

--1915년 진독수는 <신청년>을 창간하여 중국의 전통문화를 비판하고 그에 대한 대안으로 “과학과 인권을 함께 중시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5.4시기의 구호가 된 “과학과 민주”의 깃발을 내걸었다.

 

--민주는 근대 서양의 공화제와 인권론을 말하고, 과학은 서양의 과학적 사고방식 및 사회과학과 자연과학의 지식을 말한다.

 

--5.4운동 당시에는 打倒孔家店이란 구호로 대표되는 반봉건적 구호가 유행하였다.

 

--한편 1917녀 러시아혁명의 영향으로 사회주의가 대안으로 급속하게 부각되었다. 사회주의는 진독수와 이대소에 의해 도입되어 중국 근대화의 노선으로 제시되었으며, 이를 둘러싸고 논쟁이 벌어졌다.

 

        2. 5.4운동기 전후의 서양사상 수용

 

--본격적인 서양사상 수용은 5.4신문화운동 시기에 들어와 이루어졌다. 듀이와 러셀 등 저명한 서양 사상가들이 중국을 방문한 때도 이 무렵이었다.

 

--니체의 사상, 무정부주의 등 허무주의적 사조가 당시 중국에서 유포되었다. 그 이유는 허무주의 그 자체보다도 전통과 권위에 대한 절대적인 부정이라는 분위기로 인한 것이었다.

 

--허무주의와는 또 다른 차원에서 전통에 대한 부정을 가능하게 해 준 과학주의도 함께 유행하였다. 당연시되던 모든 것에 대한 비판과 회의, 그리고 판단에 있어서 증거를 중시하는 과학주의는 당시 전통에 대한 비판과 부정을 지향하던 젊은이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우상과 미신을 파괴하기 위해 사용했던 진화론도 당시 젊은이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자연과학의 이론으로 제기되었던 진화론은 사회진화론으로 확대 해석되어 수용되었다.

 

--1921년 중국공산당 창당을 전후하여 마르크스주의가 중국에 전파됨에 따라 마르크스주의의 핵심논리인 유물변증법을 이해할 필요가 대두하였으며, 그를 위해 헤겔철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3. 동서문화논쟁

 

--과학과 민주를 기치로 한 서양사상은 진보적인 지식인들과 젊은이들 사이에 큰 인기를 끌었지만 전통을 중시하는 지식인들은 중국문화의 우수성을 세계에 떨치자는 주장을 펼쳤다. 1910년대 후반부터 1920년대 후반에 이르는 동안 이들 사이에 벌어진 논쟁이 동서문화논쟁이었다.

 

--중국문화의 우수성을 주장하는 이들을 동방문화본위파, 서양문화 수용을 주장하는 이들을 전반서화파라고 부른다.

 

--서양은 물질문명, 동양은 정신문명이라는 단순논리를 앞세워 중국의 세계문명에 대한 책임이라는 국수적인 주장을 내걸었던 양계초는 동방문화본위파의 선구자였다. 그가 내세웠던 중국의 정신문명의 정수는 유학이었다. 뒤이어 양수명은 그의 저서 <동서문화와 그 철학>을 통해 서양, 인도, 중국은 각기 독자적인 문명을 이루었으며 이후 세계문화는 세 문명의 혼융에 의해 이루어질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의 주장은 현대신유가의 출발점이 되었다.

 

--이에 대해 진독수, 이대조, 구추백 등은 중국은 전통사회로 돌아갈 것이 아니라 사회주의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호적은 총체적인 서구화를 주장하였다.

 

        4. 과학과 인생관 논전

 

--중국의 전통문화와 서양의 근대문화를 둘러싼 논쟁은 과학과 인생관에 대한 논전으로 발전하였다.

 

--전통문화 옹호론자들은 과학을 인과율의 지배를 받는 객관적인 영역으로, 인생관을 개인의 인격과 관련된 주관적인 영역이라고 주장하면서 과학이 인생관의 영역을 침해하면 안 된다는 논리를 제기하였다. 이의 대표적인 논자는 북경대 교수인 장군매였다.

 

--이에 대해 지질학자 정문강, 호적과 진독수로 대표되는 좌우익의 서양문화 수용론자들은 각기 인생관이라는 사회적, 정신적 영역에 과학이라는 근대적 정신이 결합되어야한다는 것을 주장하였다.

 

--절박한 시대상황 속에서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던 중국의 젊은이들은 객관법칙에 입각하여 현실을 진단하고자 했던 과학파에 기울었다. 특히 인류의 긴 역사와 당시의 중국적 현실에 대한 과학적 분석을 제기했던 마르크스주의가 중국 젊은이들의 관심을 끌게 되었다.

 

--한편 우익진영은 과학을 중시하는 철저재건론, 중국적 전통을 중시하는 현대신유학으로 나뉘어 발달하였다.

 

제19강 마르크스주의의 전파와 모택동사상의 발전

 

        1. 마르크스주의의 수입

 

--1917년의 러시아혁명은 5.4신문화운동을 주도한 진보적인 지식인들을 자극하였다. 그들 가운데 이대조와 진독수는 초기 공산주의적 지식인의 선구였다. <신청년>을 통해 그들은 마르크스주의를 중국에 전파하는 데에 힘을 기울였다.

 

--그들은 마르크스주의 원전을 통해 마르크스주의를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일본학자의 해설서를 통해 받아들였으며, 방대한 마르크스주의 이론 가운데 유물사관, 계급투쟁설을 집중적으로 받아들였다.

 

--일본에서 마르크스주의를 처음 접한 이대조는 초기 마르크스주의자 가운데 가장 선구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계급투쟁과 유물사관에 입각하여 중국의 현실을 분석하고 근대화의 논리를 구성하였다. 그는 과학파인 호적과 “문제와 주의 논전”을 벌인 것으로 유명하다.

 

--경제가 하부구조를 이루고 그 위에 문화와 관념 등의 상부구조가 발달한다는 구체적인 논리를 제시한 이대조의 유물사관은 이전 시기에 중국 젊은이들의 관심을 끌었던 진화론을 대체하였다. 역사의 최종단계로 공산사회의 대두를 제시한 마르크스주의 역사관은 중국 전통사상에 보편적으로 존재했던 유토피아적 전통과도 합치하였다.

 

--마르크스주의는 당시 중국의 젊은이들과 지식인들에게 당면한 역사적 현실의 유래와 앞으로 건설해야 할 이상적 사회의 모습을 어떤 사상보다도 구체적으로 제시함으로써 큰 관심을 끌었다.

 

        2. 모택동사상의 성숙

 

--이대조에 뒤이어 마르크스주의의 발전에 기여한 사람은 구추백이었다.

 

--모택동은 구추백에 이어 중국적 마르크스주의의 발달을 주도하였다.

 

--모택동은 유물변증법을 중국의 현실에 적용하는 혁명적 실천의 과정 속에서 자신의 사상을 발달시켰다. 이 때문에 모택동사상은 실제적인 경험을 중시하며 군사투쟁의 성격도 띠게 되었다.

 

--혁명전쟁과 군사투쟁의 경험과 이론을 사상의 높이까지 끌어올려 모택동은 <실천론>, <모순론>과 같은 저작을 발표하였다.

 

--모택동은 인간에게 고유한 본성인 ‘자각적 능동성’이 내재하고 있어서 인식이 실천과 결합된다고 보았다. 그리고 그 자각적 능동성이라는 정신작용이 항상 실사구시적 태도와 결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즉 어떤 주관적인 가치판단을 통해 실천을 결심하고 그 결심은 반드시 실제상황에 대한 깊은 경험적 고려를 통해 통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모택동의 이런 생각은 마르크스주의 이론과 중국 혁명의 실제상황이 결합한 결과였다. 이는 마르크스주의의 중국화라고 할 수 있다.

 

        3. 모택동사상의 절대적 지배

 

--중국 혁명 과정에서 마르크스주의 대신 신민주주의라는 절충적이고 완화된 중간적 노선을 제시했던 모택동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 단기간에 사회주의적 개조를 완성한다는 방향으로 생각을 바꾸었다.

 

--모택동의 이런 생각은 중국 사회의 생산력이 아직 걸음마단계에 불과한데도 생산력이 고도로 발달한 단계에 대해 적용되는 마르크스주의적 사회체제를 중국 사회에 적용하는 무리한 생각이었다.

 

--결국 정치적 변화가 경제적 변화를 훨씬 앞질러 일어나는 것은 마르크스주의적 유물사관과 거리가 먼 것임에도 불구하고 모택동은 정치 분야만을 선구적으로 변화시키려 한 것이다. 정치가 여타 분야를 선도한다는 그의 생각은 문화대혁명으로 귀결되었다. 정치적 혁신이 선도적으로 일어나 경제, 사회 분야를 뒤따라 혁신시키고 중국 사회를 선진화시킨다는 생각은 실상 그가 줄곧 주장해 왔던 실사구시의 원칙을 벗어난 비현실적인 생각이었다.

 

--20세기 전반 마르크스주의의 중국화가 효과적으로 이루어진 모택동사상은 20세기 후반 이후 이상과 같은 과정을 거쳐 중국적 현실과 유리되어 역사의 뒷전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4. 새로운 모색과 혼돈

 

--1981년 중국공산당은 <건국 이래 당의 역사문제에 대한 몇 가지 결의>를 통과시켰다.

 

--<결의>는 모택동 사상의 공헌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모택동이 만년에 범한 착오에 대한 비판을 가함으로써 존중되어야 할 모택동사상과 오류를 범하는 모택동 개인을 분리하였다. 이는 모택동의 사상과 행위를 구별하고 모택동사상을 역사화시키는 것이었다.

 

--1980년대 중반 중국의 지식인들은 계급투쟁이나 유물변증법 대신 ‘인도주의’를 중국적 마르크스주의의 특징으로 채택하고자 하였다. 이는 유물사관을 기초로 한 마르크스주의의 토대를 흔드는 새로운 모색과 혼돈의 시작이라고 할 만하다.

 

제20강 중국 종교․사상의 현단계, 문화열과 신유가

 

        1. 새로운 시작-인간을 위하여

 

--중국은 1976년 모택동 사망, 1978년 개혁개방 방침 천명, 1984년 사회주의 상품경제, 1992년 사회주의 시장경제의 단계를 거치는 동안 사상적으로도 그에 상응한 변화를 거쳐 오늘에 이르렀다.

 

--그 동안 금기시되었던 다양한 서양 사상이 유입되었다. 그 가운데 서구 마르크스주의의 유입은 ‘인간을 중심으로 하는 마르크스주의’를 강조하고 ‘계급투쟁을 중심으로 하는’ 중국식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반성을 불러 일으켰다.

 

--니체, 쇼펜하우어, 사르트르 등의 비이성주의적 인본주의도 1989년 6.4천안문사태를 전후하여 널리 유행하였다. 문화대혁명에 대한 반성과 비판이라는 시대적 의미를 가졌던 비이성주의는 이후 문화열논쟁 과정에서도 지속적으로 탐구되었다.

 

        2. 문화열논쟁의 제기

 

--1980년대에 제기되어 1990년대까지 지속된 문화열논쟁은 중국의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한 진단과 전망을 둘러싼 논쟁이었다. 말하자면 중국의 정체성에 대한 논쟁이라 할 만하다.


(1) 철저재건론

 

--5.4시기의 전반서화론을 연상시키는 급진적인 개혁개방론으로서 서구화, 자본주의화를 내걸었다.

 

--과학자인 김관도, 해석학자인 감양이 대표적이다.

 

--사회과학과 자연과학 이론을 배경으로 하였다.

 

--1988년 방영된 텔레비젼 다큐멘터리 <하상>에 대한 논쟁을 통해 전면에 부각되었다.

 

--초안정구조를 가진 변화를 거부하는 중국문명을 서구문명으로 대체하여 철저하게 재건하자는 논리를 제기하였다.

 

--중국공산당에 의해 부르조아 자유화의 주범으로 비판받았다.


(2) 비판계승론

 

--모택동사상의 영향 아래 있는 주류 학자들이 대부분 이 입장을 취하였다.

 

--장대년, 임계유 등 모택동사상 계열의 주류학자들은 <신민주주의론>에 근거를 두고 중국의 전통사상을 잘 따져보아 알맹이와 찌꺼기로 구분하여 선택적으로 받아들이자는 논리를 제기하였다.

 

--그들은 중국이 비록 현재는 낙후된 국가이지만 중국의 전통은 계승해야 할 우수한 문화이며 사회주의 또한 발전시켜야 할 우수한 이념이라고 주장하였다.

 

--비판계승론자들은 철저재건론을 주체를 상실한 맹목적 서구추종이라고 비판하고 유학부흥론은 퇴영적이라고 비판하였다.


(3) 유학부흥론

 

--두 유파와 비교해 볼 때 가장 보수적인 입장이었다.

 

--5.4시기의 동방문화본위파, 이후의 현대신유가에 뿌리가 있다.

 

--화교학자인 두유명, 성중영, 유술선, 김요기 등이 주요한 사상가들이다.

 

--1980년대 들어 중국공산당이 현대신유가에 대해 수용하는 태도를 보임에 따라 활발하게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들은 대체로 유학, 특히 성리학을 중국의 정통 사상으로 보고 중국문화의 독창성과 우수성을 강조하였다.

 

--최근 급속히 발전한 한국, 대만, 싱가포르, 홍콩, 일본 등 동아시아 국가들이 유교 문화를 공유하고 있다는 유교자본주의론도 그들의 대두 배경이다.

 

        3. 현대신유가

 

--현대신유가는 유학을 중국문화의 정통이라고 주장하며, 그 가운데 특히 성리학을 존중하고, 서양사상을 수용하여 중국의 현대적 요구에 맞도록 적용하고자 하였으며, 5.4신문화운동에 대해 비판적이고, 강한 도덕주의를 표방하였다.

 

--웅십력, 풍우란, 모종삼이 주요한 사상가로 꼽힌다.

 

--불교에서 방법론을 배우고 양명학에서 중국문화의 근본정신을 찾았던 웅십력은 서구문화에 대한 강한 저항적 태도를 바탕으로 유학을 통해 현대적인 도덕형이상학을 구축하고자 하였다.

 

--웅십력의 다음 세대를 대표하는 신유학자는 풍우란이다. 어려서 유학을 공부했던 그는 청년기에 미국에서 신사상을 공부했으며 동서고금의 사상에 대한 풍부한 지식을 바탕으로 저술한 그의 <중국철학사>는 고전적 저작으로 꼽힌다. 그는 전통사상의 논리화를 끊임없이 추구했으며 1950년대에는 독특한 추상계승법을 제기하여 사상계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20세기 후반 홍콩과 대만의 신유학을 대표하는 학자는 모종삼이다. 그는 중국 유학의 핵심인 도덕과 심성에 대한 이론들을 도덕형이상학의 체계로 현대화시켜 서구사상의 핵심인 과학과 민주를 내포하고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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