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진연의 우리 터, 우리 혼>무너진 성벽에서 들리는 신라인의 아우성
데일리안 | 입력 2010.01.15 13:31 |
[데일리안 최진연 기자]부서지고 무너진 것은 가을부터 봄까지 더욱 빛난다. 잡목에 묻힌 성돌의 자태를 제대로 감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전쟁의 고비마다 아비규환의 살육장이었던 한국의 산성, 그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수많은 옛 이야기들이 성벽을 타고 바람결에 흘러 다닌다. 그래서 산성은 역사의 비밀 창고다. 울진 백암산성이 그런 곳이다.
영하 15도의 칼바람이 몰아치는 경인년 새해 벽두, 기자는 경북 울진군 백암온천을 병풍삼아 펼쳐진 백암산(1004m)에 올랐다. 그곳에 동해바다가 한눈에 조망되는 백암산성이 있기 때문이다.
언제 어느 세력이 축조했는지 기록도 없는 산성 취재를 위해 험한 길도 마다않고 찾아간 것이다. 백암산성은 신라시대 때 한 사냥꾼이 사슴을 쫓다가 발견한 백암온천에서 두 시간 남짓한 거리에 있다.
산행은 백암산관리사무소에서 시작한다. 백암폭포까지는 소나무군락이 어우러진 완만한 오솔길이다. 폭포가 가까워지면서 계곡과 능선에 바위무리가 널려있다. 계곡아래는 세월의 흔적이 지나간 절터도 보인다. 폭포에서 만난 아랫마을에 산다는 70대 중반 할아버지는 30년 전 암벽아래 있던 석불은 어느 무속인이 가져갔다고 했다. 그리고 갑옷과 장검도 있었는데 어느 날 없어졌다고 했다.
동면하고 있는 백암폭포를 지나자 급경사의 암벽이다. 밧줄을 설치했지만 20분정도는 난코스 길이다. 아름드리 소나무가 줄지어선 가파른 길에는 일제강점기 송진채취를 위해 나무밑동을 V로 파낸 자국이 드문드문 보인다. 반세기가 지나도록 아물지 못한 흉터는 그 시절의 참상이 떠올라 마음이 저린다.
힘겨운 고갯마루 3곳을 넘어서자 코앞에 부서지고 무너진 빛바랜 돌이 무수히 널려있다.
백암산성의 외성이다. 400m 남짓한 둘레에 너부러진 성돌, 천수백년의 시간을 품고 있는 역사 앞에 서자, 선인들의 숨결이 느껴지고 가슴이 뭉클해진다.
외성의 성벽은 산봉우리 내성에서 능선을 따라 내려오면서 쌓았다. 특히 내성으로 연결된 북동쪽 석축은 길이가 80m, 높이 2m 전후로 백암산성 전체 구간 중 가장 잘 남아있는 곳이다. 외벽은 석축으로 뒤 물림 쌓기를 했다. 상부에는 1~2단의 여장형태가 남아있는데 내외협축이다. 이곳에는 집수시설도 보이며, 동쪽에는 문지 흔적도 있다. 내부에는 약간의 수마석과 기와 조각도 발견된다. 외성 안은 넓지 않지만 건물지로 보이는 곳도 있다.
외성을 지나면 내성이다. 오른쪽으로 흩어진 석제를 따라 가파른 지형을 넘으면 평지다.
잔존하는 성벽구간이 이어졌다. 암문형태의 성벽도 보인다. 이 암문을 통해 어느 세력의 군사가 드나들었는지 묻히고 잃어버린 진실은 수수께끼로만 남아있다. 무수히 널려있는 성 돌에서 옛사람들의 무언의 소리가 들린다. 생사를 가르던 긴박했던 그들이 삶은 역사의 매듭이 돼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산성에서 가장 높은 곳, 서문지로 추정되는 성벽과 연결된 곳은 망루 같다. 햇빛을 받으면 희게 빛난다는 백암산 정상이 눈앞에 보인다. 울진군과 영양군 사이에 솟은 백암산 정상은 암벽과 급경사로 험준한 산등성이가 겹겹이 이어졌다.
서문지에서 곡선의 성벽은 내리막길로 들어선다. 남쪽에도 길지는 않지만 온전하게 남은 옛 모습의 성벽이 무척 반갑다. 작지만 여장이 이곳에도 남아있고. 남문지로 추정되는 흔적도 보인다. 계곡아래는 급경사다. 이곳에 수구문도 있었을 것이다.
내성은 가파른 봉우리와 능선을 따라 축조됐다. 지형 자체만으로도 적의 접근이 어려운 천연의 요새다. 성벽은 암벽 부분만 제외하면 전 구역에 걸쳐 축조했다. 성 돌은 외성과 마찬가지로 성내 주변 곳곳에 산재해 있는 암반을 잘라 쌓았다. 내성 전체 둘레는 1,2km다.
백암산성은 백암산 8부 능선을 휘감은 포곡식 산성으로 외성을 포함한 전체 1,6km 규모로서 국내 산성 중 중급에 속한다. 3곳의 성문지와 1곳의 암문, 드문드문 여장과 건물지의 흔적도 남아있다.
성안에서 발견되는 유물로는 기와와 도기조각은 통일신라, 고려, 조선의 유물이 발견되지만 고려시대 유물이 압도적이다.
백암산성의 초기축성은 어느 세력일까. 하단부는 알 수 없지만, 노출된 석축을 볼 때 장기간에 걸쳐 쌓지 않고 급조했기 때문에 쉽게 무너진 괴산의 미륵산성과 양평의 �왕산성과 흡사하다. 고려시대 산성들의 공통점은 해발 600m 이상 험준한 곳에 단기간 걸쳐 쌓다보니 허술하다.
전설에는 신라시대 구대림(丘大林) 황락(黃洛) 두 장군이 축조했다. 신라왕이 왜란을 피해 백암산성에 잠시 머물렀고, 고려 공민왕도 난을 피해 잠시 와 있었다고 한다.
이 땅의 유적 중, 산성만큼 소중한 곳이 어디 있을까. 선조들의 피와 땀과 목숨까지 받치면서 쌓았던 호국의지의 표상이 성곽이다.
백암산성은 오랜 세월 풍우에 깎이고, 등산객들의 무지로 인해 부서지고 있다. 더 훼손되기 전에 나서야 한다. 산성 보호를 위해 안내판과 백암산관리소에 산성 이정표도 세워야 한다.
문화재로 지정되지 않았지만, 외면할 수 없다. 관할지역인 울진군에서 확실한 관심을 가지고 산성을 보존해야 한다. 국민관광지인 온천지역과 더불어 역사산행코스로 최적지다.
울진지역에는 고산성, 평해읍성 등 20여개소의 읍성과 산성들이 산재해 있다. 그중 백암산성은 유사시 이곳 백성들의 피난처로 또는 항전의 장소로 생명을 지켜준 마지막 보루였다.
글·사진 / 최진연 기자(cnnphoto@naver.com)
지정 - 비지정
위치 - 경북 울진군 온정면 온정리
◇ 백암산성 남쪽성벽 ⓒ최진연 기자 |
언제 어느 세력이 축조했는지 기록도 없는 산성 취재를 위해 험한 길도 마다않고 찾아간 것이다. 백암산성은 신라시대 때 한 사냥꾼이 사슴을 쫓다가 발견한 백암온천에서 두 시간 남짓한 거리에 있다.
◇ 산성입구에서 발견된 송진채취 ⓒ최진연 기자 |
동면하고 있는 백암폭포를 지나자 급경사의 암벽이다. 밧줄을 설치했지만 20분정도는 난코스 길이다. 아름드리 소나무가 줄지어선 가파른 길에는 일제강점기 송진채취를 위해 나무밑동을 V로 파낸 자국이 드문드문 보인다. 반세기가 지나도록 아물지 못한 흉터는 그 시절의 참상이 떠올라 마음이 저린다.
◇ 백암산성 외성 출입구 ⓒ최진연 기자 |
백암산성의 외성이다. 400m 남짓한 둘레에 너부러진 성돌, 천수백년의 시간을 품고 있는 역사 앞에 서자, 선인들의 숨결이 느껴지고 가슴이 뭉클해진다.
외성의 성벽은 산봉우리 내성에서 능선을 따라 내려오면서 쌓았다. 특히 내성으로 연결된 북동쪽 석축은 길이가 80m, 높이 2m 전후로 백암산성 전체 구간 중 가장 잘 남아있는 곳이다. 외벽은 석축으로 뒤 물림 쌓기를 했다. 상부에는 1~2단의 여장형태가 남아있는데 내외협축이다. 이곳에는 집수시설도 보이며, 동쪽에는 문지 흔적도 있다. 내부에는 약간의 수마석과 기와 조각도 발견된다. 외성 안은 넓지 않지만 건물지로 보이는 곳도 있다.
◇ 산성 정상 북쪽의 암문지 ⓒ최진연 기자 |
잔존하는 성벽구간이 이어졌다. 암문형태의 성벽도 보인다. 이 암문을 통해 어느 세력의 군사가 드나들었는지 묻히고 잃어버린 진실은 수수께끼로만 남아있다. 무수히 널려있는 성 돌에서 옛사람들의 무언의 소리가 들린다. 생사를 가르던 긴박했던 그들이 삶은 역사의 매듭이 돼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산성에서 가장 높은 곳, 서문지로 추정되는 성벽과 연결된 곳은 망루 같다. 햇빛을 받으면 희게 빛난다는 백암산 정상이 눈앞에 보인다. 울진군과 영양군 사이에 솟은 백암산 정상은 암벽과 급경사로 험준한 산등성이가 겹겹이 이어졌다.
◇ 남쪽 성벽 1~2 단의 여장 ⓒ최진연 기자 |
내성은 가파른 봉우리와 능선을 따라 축조됐다. 지형 자체만으로도 적의 접근이 어려운 천연의 요새다. 성벽은 암벽 부분만 제외하면 전 구역에 걸쳐 축조했다. 성 돌은 외성과 마찬가지로 성내 주변 곳곳에 산재해 있는 암반을 잘라 쌓았다. 내성 전체 둘레는 1,2km다.
백암산성은 백암산 8부 능선을 휘감은 포곡식 산성으로 외성을 포함한 전체 1,6km 규모로서 국내 산성 중 중급에 속한다. 3곳의 성문지와 1곳의 암문, 드문드문 여장과 건물지의 흔적도 남아있다.
성안에서 발견되는 유물로는 기와와 도기조각은 통일신라, 고려, 조선의 유물이 발견되지만 고려시대 유물이 압도적이다.
◇ 성안에서 발견된 기와 조각 ⓒ최진연 기자 |
전설에는 신라시대 구대림(丘大林) 황락(黃洛) 두 장군이 축조했다. 신라왕이 왜란을 피해 백암산성에 잠시 머물렀고, 고려 공민왕도 난을 피해 잠시 와 있었다고 한다.
이 땅의 유적 중, 산성만큼 소중한 곳이 어디 있을까. 선조들의 피와 땀과 목숨까지 받치면서 쌓았던 호국의지의 표상이 성곽이다.
백암산성은 오랜 세월 풍우에 깎이고, 등산객들의 무지로 인해 부서지고 있다. 더 훼손되기 전에 나서야 한다. 산성 보호를 위해 안내판과 백암산관리소에 산성 이정표도 세워야 한다.
◇ 정상아래 봉우리 산성 전경 ⓒ최진연 기자 |
울진지역에는 고산성, 평해읍성 등 20여개소의 읍성과 산성들이 산재해 있다. 그중 백암산성은 유사시 이곳 백성들의 피난처로 또는 항전의 장소로 생명을 지켜준 마지막 보루였다.
글·사진 / 최진연 기자(cnnphoto@naver.com)
지정 - 비지정
위치 - 경북 울진군 온정면 온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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