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역사(중국)

중국 현대정치가-대륙을 잃어 버린 패배자 장개석(蔣介石)

지식창고지기 2010. 2. 27. 11:46

장개석의 일생 ]

장개석(蔣介石: 쟝졔스, 1887~1975)은 중국국민당(中國國民黨) 집권 시기에 당(黨), 정(政), 군(軍)을 통솔했던 지도자이다. 이름은 중정(中正), 자는 개석(介石), 학창시절의 이름은 지청(志淸)이다. 1887년 10월 31일 절강성 봉화(奉化)에서 태어났다.

1907년 보정육군속성학당(保定陸軍速成學堂)을 수료하고, 이듬 해에 일본으로 건너가 진무학교(振武學校)에서 군사학을 공부하였다. 같은 해에 동맹회(同盟會)에 가입하였다.

무창봉기(武昌起義)가 발발한 후에 중국으로 돌아가 호군도독(沪軍都督) 진기미(陳其美) 부대에서 연대장을 역임하였다.

1918년 민월(闽粤) 지원군 총사령부 작전과 주임, 월군(粤軍) 제2지대(支隊) 사령관을 역임하였다.

1922년 6월 진형명(陳炯明)이 군사 반란을 일으키자 손문(孫文)은 '영풍함(永豊艦)'으로 피난하였는데, 이때 장개석은 손문을 수행함으로써 그의 신임을 얻었다.

1923년 육해군 대원수 최고사령부 참모장과 야전 사령부 참모장을 역임하고, 8월에 소련으로 가서 시찰을 하였다. 1924년 국공합작 이후 황포군관학교(黃埔軍校) 교장과 월군(粤軍) 총사령부 참모장을 역임하였다.

1925년 2월에 1차 동정(東征)에서 진형명을 정벌하고, 8월에 국민혁명군 제1군 군단장을 역임하였다. 9월 2차 동정(東征)에서 총지휘를 맡아 진형명의 잔여 세력을 섬멸하였다.

1926년 3월에 '중산함사건(中山艦事件)'을 만들고, 5월에 '당무 정리안'을 제출하여 중국공산당원을 배척하였다. 그후 계속하여 군사위원회 주석, 국민당 중앙당부 군인부 장관 등을 역임하였다.

 

1926년 7월, 국민혁명군이 북벌을 시작할 때 장개석은 총사령관을 역임하였다. 국민혁명군은 노동자와 농민들의 지원을 받으면서 북양군벌(北洋軍閥) 오패부(吳佩孚)와 손전방(孫傳芳)을 정벌하고, 호남성, 호북성, 강서성, 복건성을 수복한 다음, 계속하여 하남성, 안휘성, 강소성, 절강성으로 진군해 갔다. 12월에 국민당 중앙당부와 국민정부는 광주(廣州)에서 무한(武漢)으로 옮겨갔지만, 장개석은 남창(南昌)으로 옮기기를 주장하면서 직접 통치를 기도하였다.

1927년 3월, 국민당 2기 3중전회에서는 <당의 통치기구 통일에 대한 결의안(統一黨的領導機關決議案)> 등 당권 강화와 개인독재 방지를 위한 일련의 결의안을 채택하고, 장개석의 중앙당무 위원회 주석과 군인부 장관 등의 직위를 해제하였다. 이에 장개석은 1927년 4월 12일 상해에서 '4. 12정변'을 일으켜 공산당원과 혁명인사들을 잔혹하게 학살하고, 각지에서 당내의 반대자들에 대한 숙청작업을 전개하였다. 이로써 제1차 국공합작이 결렬되었다.

1927년 4월 18일, 장개석은 남경에서 별도로 '국민정부(國民政府)'를 세워 무한의 국민정부와 대치하였다. 같은 해 12월 1일, 송미령(宋美齡)과 결혼하였다. 이로써 송자문(宋子文), 공상희(孔祥熙)와 인척관계를 맺고, 그들을 통하여 미국과의 관계를 강화하였다.

1928년 국민당정부 주석, 군사위원회 주석 겸 제1군 총사령관을 역임, 제1군과 풍옥상(馮玉祥)의 제2군, 염석산(閻錫山)의 제3군, 이종인(李宗仁)의 제4군을 지휘하여 봉계군벌(奉系軍閥: 장작림을 총수로 하는 북양군벌의 한 파)에 대한 작전을 개시했다. 12월에 장학량(張學良)의 동북군이 남경 국민정부 산하로 들어갔다.

1929년 장개석은 군축을 명분으로 개편회의를 소집하여 다른 파들의 군대를 감축하려 하였다. 여기에 강력한 불만을 품은 풍옥상, 염석산, 이종인 등은 장개석과의 전쟁을 불사하였다. 장개석은 제국주의와 강소 절강 지역 자산계급의 지원을 받아 그들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그는 다시 왕정휘(汪精衛), 호한민(胡漢民), 손과(孫科) 등의 대항을 물리치고 자신의 통치 기반을 확고히 다졌다.

1931년 '9. 18 사변' 이후 외세배척보다 국내안정이 우선이라는 정책을 견지하면서 중국 공농홍군과 농촌혁명근거지에 여러 차례 군사 토벌을 감행하였다.

1936년 12월 장학량과 양호성(楊虎城)이 서안사변(西安事變)을 일으켜 서안에서 장개석을 구금하고 항일을 요구였다. 결국 중국공산당 대표단과의 협상 끝에 장개석은 공산당과 연합하여 항일에 임한다는 조건을 수락하였다.

항일전쟁 시기에 장개석의 통솔하에 있던 중국군대는 송호(淞沪), 흔구(忻口), 남경, 서주(徐州), 무한, 장사(長沙), 남창 등지에서 일본군의 진공을 저지하였다. 그러나 장개석은 항일에 다소 소극적인 자세로 나왔기 때문에 중국군은 더 이상의 역량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그 이듬해 1월에 장개석은 중국전선 연합군 최고사령관이 되었으며, 미얀마에 주둔하고 있는 영국군의 요청으로 미얀마에 원정군을 파견하여 영미 연합군의 대일작전을 지원하였다.

 

일본이 투항한 후 장개석은 미국의 지원 하에서 국공 정전협정을 파기하고 160만 정규군을 동원하여 1946년 6월 해방구(解放區: 공산당 통치 지역)에 대한 전면적인 공격을 개시하였다. 인민해방군은 강력하게 반격하였으나 8개월간 72만명이 희생되었다.

1947년 3월 병력을 이동하여 해방구의 동서 양 날개인 섬북(陝北)과 산동 지역에 대하여 집중적인 공격을 가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7월에 해방군이 전략적 공격으로 돌입하자 장개석은 1948년 1월과 8월에 부분적 방어와 중점적 방어의 전략 방침을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48년 9월부터 국민당 주력군은 요심(遼沈)전투, 회하(淮河)전투, 평진(平津)전투에서 해방군에 의해 섬멸되었다.

장개석은 결국 1949년 1월 사임을 선언하였지만 막후에서는 여전히 지휘를 계속하면서 국공 쌍방 대표회담에서 제정한 <국내평화협정(國內和平協定)>의 수용을 거절하였다.

해방군은 마침내 승세를 타고 계속 진군하여 대륙에서의 국민당 통치를 무너뜨렸으며, 장개석은 12월에 대만으로 도피하였다.

1950년 3월 대만에서 다시 총통에 선출된 이후 4번이나 총통직을 연임하고 계속적으로 국민당 총재에 당선되었다. 그는 "삼민주의 대만 건설", "반공과 국토수복"을 호소하며 대만에서의 통치를 유지하고, 미국과는 '공동방어조약(共同防御條約)'을 체결하였다. 그러나 그는 '대만독립', '국제 신탁통치', '두 개의 중국'을 반대하고, 하나의 중국이라는 민족적 입장을 견지하였다.

1975년 4월 5일 대북(臺北)에서 병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