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역사(중국)

중국 현대정치가-중국인민의 영원한 우상 모택동(毛澤東)

지식창고지기 2010. 2. 27. 11:49

모택동의 일생 ]

 

모택동(毛澤東: 마오쩌뚱, 1893~1976)은 중국 인민의 지도자, 마르크스주의자, 무산계급혁명가, 전략가이고, 중국공산당과 중국인민해방군, 중화인민공화국의 창설자인 동시에 지도자이면서 시인이자 서예가이다.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1936~1976),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 주석(1943~1945)과 중앙위원회 주석(1945~1976), 중화인민공화국 중앙인민정부 주석(1949~1954)과 중화인민공화국 주석(1954~1959)을 역임하였다. 자는 윤지(潤之), 필명은 자임(子任)이다. 1893년 12월 26일 호남(湖南) 상담(湘潭) 소산충(韶山沖)의 한 농가에서 태어나서, 1976년 9월 9일 북경에서 세상을 떠났다.

 1911년 신해혁명이 발발한 이후 모택동은 호남에서 봉기한 신군부에 가담하면서 혁명활동을 시작하였다.

1913~1918년 호남 제일사범학교에 재학하였다.

1919년 장사(長沙)에서 ≪상강평론(湘江評論)≫을 창간하였다.

1920년 신민학회(新民學會)와 러시아연구회(俄羅斯硏究會)를 조직하여 마르크스주의를 적극적으로 선전하였다. 같은 해에 호남에서 공산주의 조직을 창설하였다.

1921년 7월, 중국공산당 제1차전국대표대회에 참석하였다. 그 후 중국공산당 상구(湘區) 위원회 서기, 중국노동조함 서기부 호남지사 주임, 호남성 공단연합회 총간사를 역임하면서, 장사(長沙), 안원(安源) 등지의 노조활동을 이끌었다.

제1차 국공합작 시기인 1923년 6월, 모택동은 중국공산당 3차대회에서 중앙집행위원에 당선됨으로써 중앙으로 진출하였다.

1924년 손문(孫文)의 국민당 개혁 작업을 돕기 위해 참가하였다. 국민당 1차대회와 2차대회에서 중앙후보집행위원에 당선되어 선전부 대리부장을 역임하였다.

1926년 제6기 광주(廣州) 농민운동 강습소를 주관하였다. 11월 상해로 가서 중국공산당 중앙농민운동위원회 서기를 역임하였다.

1927년 무한(武漢)으로 가서 전국농민협회 총간사를 역임하여 중앙농민운동 강습소를 주관하였다. 이 시기에 <중국사회 각 계급의 분석(中國社會各階級的分析)>과 <호남 농민운동 고찰 보고(湖南農民運動考察報告)>를 발표하여, 무산계급의 영도권과 농민동맹에 의한 혁명 전개를 주장하고, 진독수(陳獨秀)의 우경 투항주의를 비판하였는데, 여기에서 모택동 사상의 맹아를 엿볼 수 있다.

국공합작이 완전히 결렬된 이후 중국공산당 중앙은 1927년 8월 7일 무한에서 긴급회의를 소집하였는데, 여기에서 모택동은 "정권은 총부리에서 나온다(槍杆子里面出政權)"는 유명한 논리를 주장하고, 임시 중앙정치국 후보위원에 당선되었다. 회의가 끝난 이후 상감(湘赣)으로 가서 추수봉기를 일으켜 농공혁명군 제1사단(第一師)을 창설하였다. 그후 다시 부대를 이끌고 정강산(井岡山)으로 가서 토지혁명을 일으키고 최초의 농촌혁명근거지를 창립하였다.

 

1928년 4월, 주덕(朱德)과 진의(陳毅)가 이끄는 남창봉기(南昌起義)와 연합하여 중국 공농홍군(工農紅軍) 제4군을 구성하고 당대표를 역임하였다. 5월에 중국공산당 상감(湘赣) 지역 제1차대표대회에서 특위서기(特委書記)에 당선된 이후 중국공산당 제4군 선봉위원회 서기를 역임하였다. 이 시기에 모택동은 그때까지의 경험을 총괄하여 <중국의 홍색정권은 왜 존재하는가(中國的紅色政權爲什么能 够存在)>, <정강산의 투쟁(井岡山的斗爭)>, <작은 불티가 들판을 태울 수 있다(星星之火, 可以燎原)> 등의 저작을 발표하여, 농촌에서 도시를 포위하여 무력으로 정권을 탈취하자는 전략 사상을 제기하였다. 여기에서 중국적 특색을 갖춘 신민주주의 혁명으로 승리를 쟁취하자는 모택동 사상이 형성되기 시작하였음을 알 수 있다.

 

1930년 8월, 중국 공농홍군 제1방면군 전선지휘위원회 서기 겸 총정치 위원을 역임하였다.

1931년 중국공산당 중앙 소비에트지역 중앙국 위원, 대리서기, 중앙혁명군사위원회 부주석 겸 총정치부 주임을 역임하였다. 같은 해 11월, 중화소비에트공화국 임시중앙정부가 강서(江西) 서금(瑞金)에서 성립되면서 주석에 당선되었다.

1930년 12월부터 1933년 2월까지, 주덕(朱德)이 이끄는 홍일방면군(紅一方面軍)과 연합하여 국민당의 4차 대규모 군사 토벌을 분쇄하였다.

1933년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 위원에 당선되었다. 왕명(王明)을 대표로 하는 좌경 모험주의자들이 모택동의 중국혁명과 중국혁명전쟁의 지도 방침에 반대하여 중앙혁명근거지로 진입하였다. 그들은 모택동에 대한 당과 홍군의 영도적 지위를 배척하고 다른 노선을 택함으로써 국민당의 제5차 군사 토벌 항거에 실패를 가져왔다.

 

1934년 10월, 중국공산당 중앙과 홍일방면군은 부득이 소비에트지역에서 물러나 장정(長征)을 시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35년 1월, 장정 도중 귀주성(貴州省) 준의(遵義)에서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 확대회의를 소집하여 모택동에 대한 영도적 지위를 확립하고 왕명의 좌경노선 통치를 종결시켰다. 그후 계속하여 장국도(張國燾)의 우경분열주의를 분쇄하여 장정의 성공을 이룩하였다. 홍일, 홍이, 홍사방면군 등 3대 홍군 주력 부대는 섬북(陝北)에서 합류하여 구국항일의 새로운 국면을 전개하였다.

1935년 12월, 일제의 대륙 침략이 본격화되면서 전면적인 위기를 맞이하게 되자, 모택동은 와요보(瓦窯堡)회의에서 <일본제국주의 책략 반대론(論反對日本帝國主義策略)>을 발표하여 항일 민족통일전선 건설에 대한 이론과 정책을 수립하였다.

 

1936년부터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을 역임하여, 죽기 전까지 이 직책을 맡았다. 항일전쟁을 맞이하여 간부들의 수준을 향상시키고 교조주의를 극복하기 위해서, 1937년 철학 저작인 <실천론(實踐論)>과 <모순론(矛盾論)>을 발표하여 마르크스주의의 인식론과 변증법을 발전시켰다.

 1937년 7월, 항일전쟁의 전면적인 발발로 모택동은 중국인민을 영도하여 후방유격전을 전개하여 항일근거지를 건설하였다. <항일유격전쟁의 전략문제(抗日游擊戰爭的戰略問題)>, <지구전론(論持久戰)> 등을 발표하여 망국론, 속승론(速勝論)의 오류를 비판하고 항일전쟁의 승리 노선을 제시하였다.

1938년 11월, 왕명의 우경투항주의의 오류를 극복하기 위하여 중국공산당 6기 6차전당대회에서 <통일전선 중의 자주독립 문제(統一戰線中的獨立自主問題)>를 발표하였다.

1942년 전당대회를 소집하여 정풍운동을 전개하고, 사상적, 정치적, 조직적인 면에서 당의 통일을 이룩함으로써 항일전쟁의 승리를 위한 기초를 수립하였다.

1943년 3월,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 주석, 중앙서기처 주석에 당선되었으며, 그후 계속하여 죽기 전까지 중앙위원회 주석에 당선되었다.

항일전쟁 시기에 <중국혁명과 중국공산당(中國革命和中國共産黨)>, <신민주주의론(新民主主義論)>, <연합정부론(論聯合政府)> 등의 저작을 발표하여 중국 신민주주의 혁명의 이론, 정책과 정치, 경제, 문화강령을 천명하였다. 이것은 모택동 사상의 성숙을 의미한다.

 

항일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후, 모택동은 장개석의 공산당과 공산당의 무장역량 소멸 작전에 대하여, "첨예하게 맞선다(針鋒相對)"는 투쟁방침을 제기하였다.

1945년 8월, 모택동은 직접 중경(重慶)으로 가서 장개석과 담판하여 <쌍십협정(雙十協定)>을 체결하였다.

1946년 여름, 장개석은 전면적인 내전을 선포하였다.

1948년 9월~1949년 1월, 요심(遼沈)전투, 회하(淮河)전투, 평진(平津)전투를 지휘하여 승리를 쟁취하였다. 계속하여 "혁명의 완수"를 외치고 도강(渡江)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고, 대서남(大西南), 대서북(大西北)으로 진격하여 국민당 정부를 전복시켰다.

1949년 3월, 중국공산당 7기 2중전회를 소집하여 당의 사업 중심을 농촌에서 도시를 전환할 것을 결정하고, 당의 기본 정책을 규정하였다.

같은 해 6월, <인민민주전정론(論人民民主專政)>을 발표하여 중화인민공화국 정권의 성격과 주요 정책을 전명하였다. 9월에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제1기 전체회의를 소집하여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공동강령>을 제정하고, 중앙인민정부를 탄생시켜 주석에 당선되었다.

1949년 10월 1일, 북경 천안문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을 전세계에 선포하였다.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 3년간 모택동을 중심으로 하는 중국공산당 중앙과 중앙인민정부는 토지개혁과 기타 개혁을 시행하였다. 한편으로는 미군이 북한에 주둔하여 중국의 동북부를 위협하는 상황에 대비하여 북한을 지원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신속히 국내경제를 회복시켰다.

1953년 모택동의 건의에 따라 중국공산당 중앙은 과도기에 접어든 당의 총노선을 선포하고, 사회주의공업화와 생산수단 사유제에 대한 사회주의 개혁을 체계적으로 진행하였다.

1954년 제1기 전국인민대표대회 제1차회의에서 그가 주도적으로 기초한 <중화인민공화국헌법>을 제정하였다. 여기에서 모택동은 중화인민공화국 초대 주석(임기 5년)에 당선되었다.

1956년 4월, <십대관계론(論十大關系)>을 발표하여 중국식 사회주의 건설의 방향에 대한 초보적인 검토를 진행하였다.

같은 해 9월, 생산수단 사유제의 사회주의 개혁이 기본적으로 완성되자, 중국공산당은 제8차 전국대표대회를 소집하여 전국민의 주요 임무를 사회생산력의 집중적인 발전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 방침은 착실하게 시행되지 못하고 통치상의 오류를 범함으로써 많은 좌절을 겪어야만 했다.

1957년 2월, 모택동은 <인민 내부 모순의 정확한 처리에 관한 문제(關于正確處理人民內部矛盾的問題)>를 발표하여 사회주의 사회 속에 존재하는 인민 내부의 적대적 모순을 정확하게 구분하여 처리해야 한다는 주장을 제기하였다. 그러나 이 학설은 이후 모택동의 활동 속에서 제대로 실행되지 못하였다.

 

1958년 모택동은 대약진운동과 농촌의 인민공사화운동을 일으켰다.

1960년 겨울부터 1965년까지 중국공산당 중앙은 국민경제에 대한 "조정, 공고, 충실, 제고"의 방침을 시행하여, 대약진운동과 인민공사화운동의 오류를 어느 정도 바로잡음으로써 중국의 국민경제는 비교적 신속히 회복될 수 있었다. 이 시기에 모택동은 농촌사업 속에서 발생한 다른 오류들도 어느 정도 바로잡았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는 다시 국내의 주요 모순으로 여긴 새로운 계급투쟁으로 전환하였다.

 

50년대부터 모택동은 중국에 내정간섭을 하려는 일체의 행위에 대하여 단호히 대처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그러나 70년대에는 3세계 획분이라는 전략사상을 제기하여 대외 정책에 대하여 새로운 국면을 열고, 중국의 현대화 건설에 유리한 국제조건을 마련하기 시작하였다.

1966년 대내외적인 형세에 대한 극단적인 판단으로 문화대혁명을 일으키는 오류를 범했다. 임표(林彪)강청(江靑)의 선동으로 10년간이나 전국을 대혼란에 빠뜨렸으며, 그 결과 중국은 다방면에서 엄청난 손실을 감수해야만 했다.

 

중국인들은 모택동이 자주독립과 주권을 수호하고 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시종일관 제국주의와 패권주의를 반대해 왔으며, 일생을 통해서 중국혁명 건설에 많은 공적을 남겼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아직도 대부분의 중국인들은 이러한 그의 공적이 과실보다 훨씬 더 많다고 여기기 때문에 여전히 그를 중국인민의 우상으로 존경하고 있는 것이다.

1981년 6월, 중국공산당 중앙 11기 6중전회에서 통과된 <건국 이래 당의 몇 가지 역사적 문제에 관한 결의(關于建國以來黨的若干歷史問題的決議)>에서는 모택동의 역사적 지위에 대하여 나름대로 객관적인 결론을 내렸다. 즉, 모택동 사상은 중국에서의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발전으로, 그것은 여전히 중국공산당의 중심사상이며, 중국인민의 소중한 정신적 유산이라는 것이다. 모택동의 주요 저작은 모두 ≪모택동선집(毛澤東選集)≫을 비롯하여 ≪모택동서신선집(毛澤東書信選集≫, ≪모택동농촌조사문집(毛澤東農村調査選集)≫, ≪모택동신문공작문선(毛澤東新聞工作文選)≫, ≪모택동시사선(毛澤東詩詞選)≫ 등에 수록되어 있다. 모택동은 슬하에 3남 2녀를 두었는데, 장남은 한국전쟁에서 희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