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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가, 법가, 명가의 사상

지식창고지기 2010. 3. 19. 21:14

묵가, 법가, 명가의 사상

 

 

1. 묵가의 사상

 

묵가를 창시한 묵적(墨翟, 기원전 479?-381?)은 하층민이나 노동자 출신으로 추정되며, 그를 따르던 사람들도 하층 무사나 기술자 집단이었다. 묵자는 유가가 요․순을 높인 것과 달리, 황하를 잘 다스린 우(禹)임금을 높였다. 묵자는 뛰어난 기술자였지만 일상생활에 유용한 것만 가치를 인정하였고 전쟁 무기도 방어용만 개발하였다. 묵자의 사상이 담긴 ?묵자?에는 방어법에 관한 글이 많으며 기하학적 성과나 빛의 굴절 같은 과학기술의 발전이 담겨 있다. 그의 사상은 약소국과 피지배 계층을 위한 사상이었을 뿐 부국강병책이 아니었다.

 

묵자집단은 군대식 조직과 규율을 갖추었고, 규율을 어기면 집단에서 제적당하였다. 집단의 우두머리인 거자(鉅子)는 구성원을 죽이고 살리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검소하고 절제된 생활을 하면서도 일생 남을 위해 일했다. 이 같은 삶을 가능하게 했던 사상은 겸애(兼愛)와 교리(交利)였다. 겸애는 서로 사랑하자는 정치적 평등에 대한 요구였고, 교리는 서로의 이익을 나누어 갖자는 경제적 평등에 대한 요구였다.

 

특히 겸애는 중요 구성원이던 무사집단의 동고동락하던 체험을 승화시킨 것이다. 일반 무사는 명령에 따라 어떤 전쟁이든 참여하는 생계유지의 수단에 불과했지만 묵가는 자신들의 실천을 위한 사상으로 높여 갔다. 묵자는 세상의 혼란이 차별애에서 온다고 보았다. 따라서 자기를 위하듯 남을 위하고 제 나라를 위하듯 남의 나라를 위한다면 세상이 이로워진다는 이성적 판단에 근거한 공리주의적 입장에 서 있다. 묵자는 겸애가 옳다는 증거로 삼표(三表)를 제시하였고, 겸애를 하늘과 귀신의 뜻이라고도 하였다. 이런 주장은 대다수 서민들의 호응을 얻기 위해 만든 종교적 외피라는 지적도 있다.

 

묵자는 세상의 혼란이 사람마다 기준이 달라서 생긴 것이므로 묵자집단이 거자의 명령에 복종하듯 현명한 사람을 우두머리로 삼고 그가 가진 기준을 따르라는 상동론(尙同論)을 주장하였다. 이 속에는 강력한 중앙집권을 통해 춘추전국의 혼란을 종식시키려는 바램이 담겨 있다. 묵자는 지배계층의 특권이라는 점에서 유가식 장례와 상례, 음악연주와 가무도 반대했으며, 신분 세습을 합리화하는 천명(天命)사상도 반대하였다. 하지만 묵자사상은 진시황의 통일 이후 협(俠)의 정신을 통해 명맥을 이어갔다.

 

2. 법가의 사상

 

진나라 통일의 기반이 된 법가는 법학보다 조직론이나 방법론에 가깝다. 법가는 인간의 심리를 이용하여 조직에 활용했다. 법가의 선구자는 제나라 재상 관중(管仲)과 정나라 재상 자산(子産)이며, 뒤를 이어 법가를 발전시킨 사람은 신도(愼到), 신불해(申不害), 상앙(商鞅)이다. 신도는 ‘세(勢)’, 신불해는 ‘술(術)’, 상앙은 ‘법(法)’을 바탕으로 한 부국강병책을 주장하였다. ‘세’는 권세를 의미하며, ‘술’은 ‘방법’․‘기술’을 뜻하고, ‘법’은 법치를 의미한다. 특히 상앙은 연대책임제와 ‘신상필벌(信賞必罰)’을 주장하였다.

 

이런 사상을 종합하여 법가를 완성한 한비자(韓非子)의 사상은 첫째 성악설을 토대로 이기적인 심리를 이용하는 것이고, 둘째 덕이 아니라 ‘법’, ‘세’, ‘술’로 통치하는 것이며, 셋째 현실의 효용을 기준으로 삼는 것이다. 유명한 모순(矛盾)이야기는 봉건제의 회복과 계급조화론을 주장한 유가사상에 대한 비판이다.

 

법가는 생산 노동에 도움 안 되는 이론은 모두 부정하였다. 이런 입장은 복고적 역사관을 반대하는 발전적 역사관으로 나타나며, ‘수주대토(守株待兎)’ 이야기가 그 예이다. 법가는 유교 도덕론과 결합하여 2000여 년 동안 중국 전제군주제를 끌어 온 힘이었다. 현대 중국에서는 중국사상의 흐름을 유가와 법가의 대립으로 파악하고, 법가를 진보적 사상으로 보았다. 그러나 전제군주의 통치술을 강조함으로써 인간을 통치 대상으로만 보았을 뿐 자율성을 고려하지 않은 단점이 있다.

 

3. 명가의 사상

 

명가는 명(名)과 실(實) 문제의 관계를 바로잡아 질서를 회복하려 한 사람들이다. 서양 학자들은 궤변론자, 논리학파, 변증론자로 보았지만 그들도 다른 제자백가처럼 정치적 목적을 가졌으며, 그 방법으로 명실 문제를 다루었을 뿐이다.

 

명가가 나온 배경은

첫째 한자가 고립어인 점,

둘째 당시 제후들이 명분을 앞세워 이웃 나라를 침략하는 과정에서 말 잘하는 변사(辯士)나 사정 잘 살피는 찰사(察士)를 우대한 점,

셋째 명가에 앞서 ‘명’의 문제를 다룬 공자, 노자 같은 사상가들의 영향이다.

 

대표 사상가인 혜시는 『장자』「천하」편에서 역물십사(歷物十事)를 말하였다. ‘역물’은 사물을 관찰하여 대상을 파악한다는 뜻인데, 명제만 있고 논증이 없어서 후대의 많은 학자들이 자기 나름대로 해설을 붙였다. 이 명제들은 공간 개념, 시간 개념, 현상계의 존재와 고정 관념에 관한 개념을 다루고 있는데, 혜시는 이 명제들을 통해 존재든 관념이든 모두 상대적일 뿐이라고 하면서 만물이 하나라는 결론을 내렸다. 명제 자체는 논리적 명제처럼 보이지만 결론은 정치적인 셈이다.

 

또한 공손룡은 백마비마론과 견백석론(堅白石論)을 주장하였다. 공손룡은 「백마론」에서 흰 말은 말이 아니라는 명제를 세 가지로 논증하였고, 「견백론」에서는 단단하고 흰 돌은 나눌 수 있다는 점을 두 가지로 논증하였다. 공손룡은 당시 사회의 혼란이 개념의 혼란에서 왔다고 보고, 이 같은 논리적 설명을 통해 구체적인 사물의 개념을 명확히 규정하려 했던 것이다. 명가의 목표는 상식으로부터의 탈출에 있었다. 상식을 부순 명가의 논리는 비판 기능을 충실히 수행한 셈이다. 하지만 진나라 이후 많은 것들이 상식 차원에서 바로잡혀 지면서 더 이상 후대로 이어지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