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사(絲)의 전기
주지하다싶이 견사는 중국의 독특한 발명으로서 상당히 오랜 시간동안 중국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견사를 생산, 사용하는 국가였다. 중국 신화전설 속에 출현하는 중화민족의 선조- 선원황제의 왕비 "누조"는 공인된 양잠술의 시조이다.
전설에 의하면 누조는 뽕나무 밑에서 물을 마시다 나무위 누에고치가 그릇에 떨어졌는데 나무가지로 누에고치를 건져낼 때 의외로 가는 잠사가 걸려있었으며 점점 길게 뽑아지는 것을 발견했다고 한다. 이에 큰 계발을 받은 누조는 잠사로 옷을 만들려 시도했으며 양잠술을 개발하게 되었다. 고대 황제들은 누조를 "잠신(蠶神)"이라고 불렀고 오늘날 저명한 누에고향- 절강성 호주에서는 매년 청명의 잠화절이 되면 이 "양잠술 시조"를 참배하고 있다.
중국에서의 견사 역사
고고학 자료에 의하면 중국에서 잠사를 이용한 시대는 전설중의 누조시대보다 더 일찍하다고 한다. 1958년 신석기시대 양저(良渚)문화유적(오늘의 절강 여항) 중에서 4700년전의 견직물이 출토되었는데 가정 견사제품으로 인정되었다. 비록 이미 탄화되었지만 여전히 견사의 경위도를 분별해낼 수 있는데 16오리의 굵고 가는 잠사로 된 이 견직물은 당시 견직기술이 일정한 수준에 이르렀음을 표명하고 있다.
3천년전의 상조 갑골문 위에는 이미 잠(蠶), 상(桑), 사(絲), 백(帛) 등 문자가 새겨져 있는데 이는 당시 양잠업과 제사업이 사회생산중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음을 설명한다. 유가의 경전(經典)으로서 중국 고대 언어, 문자, 문학, 철학, 문화사상, 신화, 사회생활을 집결한 중요한 역사자료- "상서(尙書)"에도 견사에 관한 기재가 있다.
춘추전국시기 농업이 전례없던 발전을 가져와 남경여직(男耕女織)은 이 시기의 중요한 경제적 특징으로 발돋움했으며 뽕나무를 키우고 방직업에 종사하는 것은 당시 전형적인 사회경제 현상으로 되었다.
1972년 호남 장사 마왕퇴 서한 무덤에서 출토한 견직물을 보면 당시 상당한 기술수준을 장악하고 있었음을 증명했으며 동시에 염색, 자수 등 기술의 발전을 추진해 견직물은 더욱 완벽한 방향에로 나아갔다.
풍부한 문화 축적과정에서 견사의 독특한 풍격은 동양미학의 정신적 기질을 상징하게 되었다. 견사가 출현되었기에 중국의 복장은 가벼운 바람에 휘날리는 부드러움을 표현하게 되었고 중국회화 속의 인물도 누에고치가 실을 뽑는 아름다운 라인의 미를 나타낼 수 있다고 말 할 수 있다.
<<사진: 막고굴에 그려진 "장건서역도"
견사의 해외행
중국과 중아시아, 서아시아 각국의 문화교류는 일찍 기원전 2000년부터 시작되었다. 장기간의 역사발전과정중 민족사이와 지역사이의 교류는 화려한 복장문화를 형성했으며 여기서 중, 서를 이어놓는 실크로드의 중요한 역할을 빼놓을 수 없다.
기원전 5세기부터 중국의 견직물은 서양에 전해지기 시작했으며 독특한 아름다움으로 서양인에게 "천당에만 존재하는 물건"으로 찬양되었다. 그리스인, 로마인은 중국을 Serica,중국인을 Seris이라고 불렀는데 이 두 단어는 모두Serge(絲)에서 전환되어 나타난 것이다.
기원전 138년과 기원전 119년, 한무제는 전후로 두차례 장건 등 사람을 서역에 파견했다. 이 사절들은 수많은 비단과 도자기 등 중원의 물산을 갖고 대월지, 대하 등 나라에 갔는데 연도에 비단옷감을 선물 혹은 교환물로 했으며 상대국에서도 현지의 모직물 및 향료 등을 중국에 선물하거나 수출했다. 이로서 비단을 위주로 하는 무역의 길이 형성되었다. 한조때부터 당조시기에 이르기까지 이 길은 무역거래가 끊기지 않았으며 "실크로드"도 이때로부터 번영해지기 시작했다.
일찍 로마제국시기 중국에서 제조한 견사는 페르샤를 통해 로마시장에 대량으로 전해졌으며 로마제국에서는 수입이 수출을 훨씬 초과하는 현상을 초래하기도 했다. 기원 3세기, 로마제국의 비단은 같은 무게의 황금에 상당한 비싼 가격을 나타냈다.
보통 말하는 실크로드는 한, 당조의 서울- 장안을 기점으로 발찍해에 이르는 길을 말한다. 한편 실크로드는 서북으로 확장된 동시에 일본에도 통하게 되었다. 기원 107년, 일본국왕은 160명으로 이루어진 대표단을 중국에 파견해 자수, 재봉 등 기예를 배우게 했는데 귀국한 후 대표단은 중국에서의 견문을 국왕에게 회보함과 동시에 중국의 비단제품을 보였다. 그후 100여년간 일본은 수차례 공예가들을 파견해 중국에서 기예를 배웠으며 중국에서 파견된 견직공들도 일본 견직업 발전을 위해 중요한 기여를 하게 되었다.
유럽과 아시아대륙을 가로지난 실크로드와 해상 실크로드 및 남방 실크로드는 부드럽고 화려한 비단이 끊임없이 중아시아, 서아시아, 남아시아 및 유럽 각국에로 전해지게 했으며 중국의 양잠술, 자수 등 기술도 해외에로 널리 전파하게 했다.
견사의 공예
견직물의 생산, 발전과 더불어 자수(刺繡)가 탄생되었으며 또한 각이한 지역과 민족에 따라 다양한 자수공예가 형성되었다. 춘추전국시기 자수공예가 점차 성숙의 길로 나아갔는데 이는 최근 백년간 출토된 대량의 문화재로부터 인증되었다. 이 시기의 자수는 용, 봉황, 호랑이 등 동물무늬로 되어 있는가 하면 화초 혹은 기하무늬로 되어 생동하고 정교한 공예를 자랑하고 있다.
남북조시기에 이르러 중국은 불교가 성행했기에 불상 자수공예가 큰 인기를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불상 자수공예는 오늘의 영국과 일본 박물관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수법이 정교하고 색채가 화려하여 중국 고대 자수예술의 특수 성과 중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당조때 자수의 다른 하나의 성과라면 새로운 기법의 출현 즉 "안뜨기"가 발명되었는데 이 기법은 오늘날까지 여전히 전해지고 있다.
송조시기는 중국의 자수공예가 최고봉을 이룬 시기이다. 자수공예품의 수량과 품질은 전례없던 큰 발전을 가져왔으며 특히 관상용으로서의 자수예술은 최고의 실력을 과시하게 되었다. 봉건사회에서 자수는 여성들이 장악해야 할 기본공예었을뿐만 아니라 상층 여성들이 여유를 즐기고 정신생활을 풍부히 하는 주요수단으로 되어 자수품의 기능은 생활용과 관상용 두가지로 명확히 구분되었다. 또한 수많은 문인들도 자수품 창작에 적극 참여해 화가들이 원본을 제공하고 예술가들이 자수공예를 맡아 하는 사회적국면도 출현하게 되었다.
명조시기 민간수공업의 궐기는 자수공예와 생산이 새로운 활력을 띠게 했으며 자수공예로 이름을 떨친 가족과 개인들이 출현하기 시작했다. 명, 청조시기는 중국역사상 자수공예가 가장 성행한 시기로서 청조 200여년간 일부 지역성을 띤 자수류파는 우후죽순마냥 흥기되어 소수, 월수, 촉수, 상수, 경수, 노수 등 중국 저명한 자수공예가 출현하게 되었다.
소주는 비단의 발원지이다. 소주 여성들은 예로부터 훌륭한 자수기예를 갖추고 있었고 우월한 지리환경하에 화려한 자수공예품을 창조하였으며 소수(蘇繡, 소주의 자수공예)는 중국 자수예술의 대표작품으로 뽑히게 되었다.
오늘날 시대가 끊임없이 변하고 기계화 생산이 전통적인 수공업을 대체했지만 전통문화유산으로서의 자수공예는 여전히 계승발전되고 있다. 중국은 수많은 지역 명자수가 있을뿐만 아니라 소수민족 예를 들면 위글족, 이족, 따이족, 부이족, 요족, 묘족, 몽골족, 티베트족 등 다양한 민족자수도 아름다운 광채를 빛뿌리고 있다. 자수공예는 복장과 가정생활품으로 사용될뿐만 아니라 중국 회화, 서예의 심미적 요소를 융합시켜 독특한 예술품 이미지로 중국문화의 특색을 생동하게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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