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인 기록이 나타난 최초의 정사인 <사기(史記)>에는 중국 최초의 역사왕조인 은 왕조의 마지막 임금 주왕이 신하들을 ‘해’(인체를 잘게 썰어 누룩과 소금에 절인 고기), ‘포’(저며서 말린 고기), ‘자’(구운 고기)로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해, 포, 자는 이후 중국 춘추전국시대까지의 대표적 인육 조리법으로 계속되었습니다. 춘추시대 노나라 사람인 공자도 이 해 없이는 식사를 안 했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죠. 그러니까 결론적으로 공자는 인육을 아주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 문화가 인육을 즐겨먹던 시기였기 때문에 너무 놀라지는 않으셔도 됩니다.
중국의 식인 풍습은 <삼국지>, <수호지>, <서유기> 등 유명한 중국 고대의 소설에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삼국지>의 경우, 정사로 기록된 진수의 삼국지에는 유비가 즐겨먹은 음식이 인육으로 만든 포였다고 하며, 여포가 죽은 후 그 고기를 죄인들에게 먹였다고 합니다. 소설 <수호지>에서는 인육으로 고기만두를 만들어 파는 악한이 등장하고, <서유기>에서는 고승(高僧)의 고기가 불로장생의 영약이라 하여 삼장법사가 끊임없이 요괴들의 공격을 받는 장면이 나오지요.
▲ 자로 |
그러나 공자도 즐겨먹던 인육을 다시는 먹지 않게 된 계기가 있습니다. 공자가 아끼던 제자 자로의 일화가 그것입니다. 자로는 제자 중 최연장자로 공자의 제자라기보다는 친한 친구요, 가장 엄격한 비판자였습니다.
비록 제자였지만 공자가 진후 남자와 회견하였을 때 분개하였으며, 또 공자가 두 번이나 읍(邑)을 거점으로 반란을 일으킨 자들을 섬기려고 생각하였을 때도 항의하였지요.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도 엄격한 사람이어서 그는 결코 약속을 다음날까지 미루는 일이 없었고, 자기의 결점을 지적해주면 기뻐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성실하고 강직한 성격에도 불구하고 자로는 제자들 중에서 가장 온화하고 인간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기에 공자는 자로를 더욱 사랑하고 좋아하였던 것이지요. 자로는 타고난 무인(武人)이었기 때문에 공자는 일국의 군대를 지휘할 수 있는 사람으로 자로를 추천하였고, “자로 같은 사람은 제명에 죽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을 한 적도 있습니다.
공자의 염려대로 자로는 결국 그의 직선적이고 성급한 성격 때문에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자로는 위나라의 신하로 있었는데 공회가 괴외라는 사람과 공모하여 위나라 임금 출공을 습격하자, 출공은 노나라로 도망가고 괴외는 위나라 장공이 되었습니다.
자로는 이 소식을 듣고 자기가 출공의 신하로써 그가 곤경에 처했다면 이를 도와주어야 한다면서 성 안으로 들어가 괴외에게 공회는 쓸모없는 인간이니 자신이 잡아 죽이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괴외는 자기를 도와준 공회에게 피해를 줄 생각이 전혀 없어 자로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던 것이지요.
이에 자로가 그들이 서있던 곳을 태우려 했고, 괴외는 자로를 잡아 죽인 뒤에 자로의 살에 소금을 뿌려 젓을 담근 후에 단지에 담아 공자에게 보냈다고 합니다. 공자는 그것이 자로를 잡아 담근 것인지 모르고 먹다가 사실을 알게 되자 통곡한 후에 자로의 시신이 담긴 단지를 잘 장사지냈다는 것입니다. 이후로 공자는 좋아하던 인육고기인 해를 더 이상 먹지 않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시대의 대표적인 학자이며 선생인 공자까지 인육을 아무런 자책 없이 먹을 수 있었다는 것은 그 당시 인육을 먹는 일이 보편적인 문화였기 때문이라는 반증이 되겠지요. 그렇다면 중국의 식인문화는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요.
설마 지금도 중국 어딘가에서는 인육을 먹고 있는 소수부족이 있지는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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