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공산당의 역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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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서문
1921년에 성립한 중국공산당의 역사는 1991년으로 70년이 되었다. 중국공산당은 마르크스주의 이론으로 무장한 중국 노동자계급의 혁명정당이다.
마르크스주의는 유럽에서 탄생되었다. 1848년,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공동으로 쓴 ≪공산당 선언≫이 출판되면서 탄생하였던 마르크스주의의 역사는 현재로 143년이 되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이 저작에서 자본주의사회 발전의 필연적인 추세에 근거하여, 계급이 소멸되는 사회주의혁명과 사회주의 건설은 3가지 발전단계를 경과한다는 점을 과학적으로 예견하고 설명하였다.
첫번째 단계는,
프롤레타리아트가 광대한 노동인민을 이끌어 폭력적으로 부르주아를 타도, 자신의 통치를 수립하고 자신이 통치계급이 되어 민주를 쟁취하는 단계로, 노동자혁명의 제일보이다.
두번째 단계는,
프롤레타리아트가 자신의 정치통치를 이용하여 점차 부르주아의 모든 자본을 탈취하고 모든 생산수단을 국가, 즉 통치계급으로 성장한 프롤레타리아트의 수중에 집중시키는 단계이다. 이것은 곧 국민경제를 사회주의로 개조하늘 것이며, 아울러 사회주의 건설을 시작하는 단계이다.
세번째 단계는,
사회주의 개조와 사회주의 건설을 평화롭게 발전시키는 단계이다. 이 단계에서 결정적인 의의를 갖는 것은 노동자계급이 이끄는 인민정권과 이미 공유화된 생산수단을 이용하여 가능하면 신속하게 총생산력을 증가시키는 것이다. 이것은 장기적인 건설과 개혁의 과정이다. 왜냐하면 사회주의 자체는 부단히 변화하고 부단히 진보하는 사회이기 때문이며, 새로운 조건 아래 긴 발전과정을 통해서야 당면의 자본과 토지소유권의 자연법칙에 따른 자연발생적 작용을, 자유롭게 연합된 노동의 사회경제발전법칙에 따른 자연발생적 작용으로 대체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이러한 과정을 거쳐야 광대한 인민의 재능을 전면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고, 이를 기반으로 생산력을 고도로 증가시킬 수 있으며, 집단재산의 모든 원천도 충분히 발현시킬 수 있다. 그리고 부르주아가 다시는 존재할 수도 또 재생산될 수도 업게 할 수 있으며,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하는 구조를 만들 수 있다. 이것이 공산주의사회를 실현할 수 있는 전제이다.
마르크스주의가 탄생된 지 71년이 지나고, 러시아의 1917년 10월혁명과 중국에서의 1919년 5·4운동을 거쳐서야 중국에 마르크스주의가 전파되었고, 아울러 이 마르크스주의는 중국의 노동자계급과 광대한 인민들에게 장악되었다. 왜냐하면 전파되었을 당시 중국에 200만 정도의 현대산업 노동자가 있어 노동운동을 시작하였기 때문이었다. 중국공산당은 마르크스주의와 중국 노동운동이 서로 결합된 산물이었다. 그러나 모택동이 언급하였듯이 중국 인민은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습득한 이후 25년이라는 장기간의 시간을 거친 이후에야 비로소 제국주의와 그 앞잡이인 중국 지주계급과 관료부르주아의 중국 인민에 대한 통치를 끝장낼 수 있었다.
중국 인민이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습득하였다는 모택동의 말은 마르크스-레닌주의의 문구를 단순히 암송하였다는 말이 아니라, 중국공산당인들이 마르크스-레닌주의의 보편원리와 중국혁명의 구체적인 실천을 성공적으로 정확하게 결합시켰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그러나 이론과 실천을 정확하게 결합시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투쟁·실패, 재투쟁·재실패, 즉 실천·인식, 재실천·재인식이라는 여러 차례의 반복된 나선형식의 전진과정을 경과해야만 했다.
그리고 실천과 인식의 주체는 개별 지도인물과 지도집단이 아니었고, 당 집단과 노동자계급과 광대한 대중이었다. 그러므로 이론과 실제가 결합되는 과정은 당의 지도와 대중이 결합되는 과정이었으며, 대중으로부터 시작하여 대중 속으로 들어가고, 다시 대중으로부터 시작하여 다시 대중 속으로 들어가는 과정이었다. 이론과 실제의 결합과 지도와 대중의 결합이라는 순환은 실천적 결과를 통하여 진리가 검증되고 진리가 발전되는, 즉 진리를 견지하고 잘못을 수정하는 자아비판적인 과정이기도 했다. 이론과 실제의 결합(실사구시), 지도와 대중의 결합(대중노선)과 자아비판은 모택동이 ≪연합정부를 논한다≫에서 개괄한 중국공산당이 중국 인민 가운데서 만들어낸 새로운 사업작풍이었다. 이 세 가지는 다른 정당과 구별되는, 중국공산당만이 가진 세 가지 특징이었다. 또한 중국공산당과 중국 인민이 혁명과 사회주의 건설의 승리에서 얻은 세 가지 근본원칙, 즉 모택동사상의 세 자지 근본원칙이었다.
중국공산당 70년의 역사는 위대하고 빛나는 것이지만, 그것은 동시에 어렵고 복잡한 것이기도 했다. 이 70년 가운데, 앞의 28년은 당이 중국 인민을 이끌고 사회주의혁명과 사회주의 건설을 전개한 단계이며 후반 42년은 당이 중국 인민을 이끌고 사회주의혁명과 사회주의 건설을 전개한 단계였다. 신민주주의혁명과 사회주의혁명은 성질이 다른 것이나, 서로 연관된 것이고 서로 연결된 두 개의 과정이었다. 신민주주의혁명은 사회주의혁명의 필요한 준비여고, 사회주의 혁명은 신민주주의혁명의 필연적 추세였다. 이 두가지 혁명의 단계에서 중국공산당은 중국인민을 이끌고 힘차게 투쟁을 전개하여 위대한 성과를 거두었고, 또 심각한 좌절도 경험하였다. 그러나 스스로 잘못을 바로잡은 후 중국 인민을 이끌고 계속 전진하였다.
28년간의 신민주주의혁명 중, 당과 중국 인민은 1923년부터 1927년까지의 제1차대혁명 초기와 중기에 중대한 승리를 거두었고, 그 후기, 즉 1927년 상반기에 비통한 실패를 경험하였다. 1927년부터 1937년까지의 10년 동안의 토지혁명기간 중, 전기인 1927년부터 1932년까지는 노동자·농민 홍군이 30만명에 달하는 등 중대한 승리를 거두었고, 중기의 1934년에 다시 제5차 반포위공격과 대장정 초기에는 비통한 실패를 경험하였다.
이와 동시에, 승리와 실패에 대한 경험을 총결산하는 가운데, 또 마르크스주의를 교조화하고 코민테른 결의와 소련 경험을 신성화하는 가운데, 또 마르크스주의를 교조화하고 코민테른 결의와 소련 경험을 총결산하는 가운데,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중국 실제에 결합시키려는, 모택동을 대표로 한 중국공산당의 정확한 이론이 제1차대혁명 중에 싹트고 토지혁명전쟁 전기에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1931년 준의회의를 거쳐 모택동을 대표로 하는 정확한 노선은 전 당에서 지도적인 위치를 확립한 이후, 1935년 1월에서 1937년 7월에 걸친 토지혁명전쟁 후기와 1937년 7월에서 1945년 8월까지의 항일전쟁시기에, 모택동사상은 체계화되고 다방면으로 전개되어 성숙한 경지에 다다랐다. 그리하여 중국공산당 70년 역사상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중국의 실제와 결합시키는 첫번째 역사적인 비약이 실현되었다. 즉 당은 농촌에서 도시를 포위하고 무장으로 정권을 탈취하는 신민주주의혁명을 통하여 혁명승리 후 사회주의혁명의 길로 즉각 들어설 수 있는 정확한 길을 찾아내었던 것이다. 모택동사상의 지도 아래, 중국 인민의 혁명역량은 8년 간의 항일전쟁에서 이전에 볼 수 없을 정도로 장대하게 발전하였다.
이러한 기초 위에서 1945년 8월부터 1949년 10월까지의 4년 간의 전국해방전쟁을 거쳐 중국혁명은 결국 전국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노동자계급이 이끄는 노농연맹을 기초로 한 중화인민공화국이 건립된 것이다. 이 승리는 ≪공산당 선언≫에서 말한 노동자혁명의 제일보 승리, 즉 정권취득의 승리였다. 이 때부터 중국은 사회주의의 길로 들어섰으며, 중국 사회는 사회주의 과도기로 향하기 시작하였다.
1949년부터의 42년 간의 사회주의혁명과 사회주의 건설단계도 마찬가지로 성공과 실패의 반복된 시련을 겪었다. 이 42년은 4시기로 구분하여 볼 수 있는데, 즉 1949년 10월부터 1956년 9월 당 제8차 전국대표대회 이전가지의 기본적인 사회주의 개조 완성기 7년, 1956년 9월부터 1966년 5월까지의 전면적인 사회주의 건설기 10년, 1966년 5월부터 1976년 10월까지의 문화대혁명 10년, 1976년 10월 이후 사회주의 현대화건설 신시기 10년이 그것이다.
사회주의 개조가 기본적으로 완성되는 7년은 확실히 개가행진의 시기였으며, 1956년부터 중국은 사회주의 초급단계에 진입하였다. 중국혁명 승리와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이, 과학사회주의가 중국에서 거두고 또 세계정치 발전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던 첫번째 위대한 승리였다고 한다면, 1956년 사회주의 개조의 기본적인 완성은, 과학사회주의가 중국에서 거두고 또 위와 동일한 세계적인 의의를 가진 두번째의 위대한 승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모택동사상이 거둔 빛나는 승리였다. 중국 사회주의의 개조, 특히 자본주의 상공업의 사회주의 개조는 평화적인 방식, 즉 경제적으로는 구매하고 정치적·사업적으로는 자본가에게 적당한 안배를 부여하는 방식을 취하였다.
그러나 중국 사회주의사업에서도 서둘러 성공을 구하는 중대한 편차와 순수함을 서둘러 구하려는 편차를 보였다. 1956년 초부터 1957년까지, 모택동과 주은래 등 중국공산당원은 1956년 2월 소련공산당 제20차 전국대표대회에서 폭로되었던 사회주의 건설과정에서 소련이 범하였던 잘못된 경험에 비추어 중국 독자의 사회주의 건설 경험을 총결산하고, 중국 실정에 맞는 사회주의 건설방식을 탐색하고, 주요한 성과도 거두었다. 주요한 성과는 다음과 같았다. 즉 민주를 확대하고자아비판을 발전시키는 방식을 채용하고, 여러 방면의 일을 통일적으로 개혁하고 돌보며 적당히 안배하고 국가와 집단, 개인 삼자의 이익을 함께 고려하는 방침을 채용하고, 장기공존과 상호감독, 그리고 백화제방·백가쟁명의 방침을 채용하며, 중공업과 경공업·농업·연해와 내지·경제건설과 국방건설·중앙과 지방·한족과 소수민족·중국과 외국 등 각 방면에 걸친 관계문제를 정확하게 처리하는 방침을 채용하였다.
인민 내부의 모순(이것은 사회주의사회의 주요모순이다)을 정확히 처리하여 모든 적극적인 요소를 사회주의 건설에 동원되도록 하며, 이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서 전 당과 국가생활 중의 민주집중제를 완비하고, 민주적이며 집중적이고 자유롭고 또 기율 있고 개성을 발전시키며 통일의지가 있는 생기발랄한 정치국면을 조성하였다. 사회주의의 개조에 반대하고 사회주의 건설을 파괴하는 반혁명분자는 반드시 의법조치하였다. 그러나 원래의 모든 반동계급·반동파에 속하였던 인물에 대해서는 그들의 통치가 전복된 후 그들이 반란을 일으키지 않고 파괴행위를 하지 않거나 소란을 피우지만 않는다면, 그들에게 생활의 출로를 부여할 뿐 아니라, 그들을 적극적으로 교육시켜 노동하는 가운데서 법을 준수하는 사회주의 공민으로 개조시켜 소극적인 요소를 적극적인 요소로 변화시켰다. 1956년부터 1957년에 걸친 이 같은 탐색과정을 통해 1978년 12월 11기 3중전회 이후 등소평이 이끈 중국 특유의 사회주의 건설에 관한 이론과 노선의 기본적인 틀이 제시되었다.
그러나, 중국공산당과 중국 인민은 사회주의를 전면적으로 건설하는 데 사상적인 준비와 경험이 결여되어 있었고, 또 반식민지·반봉건사회의 잔재의 영향으로, 그리고 경제·정치·문화·사회 등 다방면에 걸친 소련의 고도의 중앙집권관리체제 형식을 채용함으로써 조성된 위험으로 인하여, 중국공산당은 1951년부터 1978년 12월까지 21년 간 지도사상의 측면에서 사회주의사회의 계급투쟁을 확대하는 잘못을 범하였고, 사회주의 건설과 사회주의 개조의 측면에서는 시급히 성공을 구하는 등의 좌경적인 잘못을 범하였다. 먼저, 1958년부터 1960년까지 3년 간의 대약진운동은 당과 국가 그리고 인민에게 심각한 손실을 주었다.
1961년 하반기부터 1966년 상반기까지 5년 간, 당은 전국인민을 이끌고 국민경제를 조정하고 실제사업 중의 좌경적 착오를 바로잡기 위하여 투쟁하였다. 이 노력은 현저한 성과를 올렸다. 그러나 등소평이 지적하였듯이, 사상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에는 문화대혁명의 발발로 이어졌다. 문화대혁명은 대약진보다 더욱 심각하고 더욱 기간이 긴 전국성의 좌경 착오를 당과 국가, 그리고 인민에게 미쳤다. 등소평은 ≪1957년 이후 중국 당의 중요한 착오는 좌경이었으며, 문화대혁명은 극좌였다≫고 단언하였다.
문화대혁명 10년 간의 큰 재해로 전 당과 전 인민은 크게 깨달았다. 그들은 1976년에 수천, 수백만 명이 참여한 4·5 운동을 일으켰다. 이 운동은 같은해 10월에 사인방을 분쇄하고 문화대혁명의 동란을 마무리하는 데 위대한 대중적 기초를 마련하였을 뿐 아니라, 1978년 12뭘 11기 3중전회 이후 모택동 만년의 좌경적 착오를 바로잡고 경제·정치·문화·사회 각 방면에 걸친 고도의 집권적 사회주의체제를 전면적으로 개혁하는 데 위대한 대중적 기초를 다졌다.
11기 3중전회 이후 1982년 9월 제12차 전국대표대회, 1987년 10월 제13차전국대표대회를 거쳐 1990년 12월 13기 7중전회에 이르기까지, 등소평 지도아래 중국공산당은 중국 특유의 사회주의 건설을 확립하였는데, 이것은 마르크스주의와 모택동사상의 이론과 노선을 견지·발전시킨 것이었다. 이 시기에 당은 중국의 1950년대 중기의 사회주의 개조의 기본적인 완성에서부터 21세기 중엽의 사회주의 현대화의 기본적인 실현에 이르기까지를 사회주의 초급단계라는 과학적인 논단을 제출하였다. 즉 경제건설을 중심으로 4항의 기본원칙 견지, 개혁개방의 사회주의 초급단계의 노선, 그리고 일련의 유효한 방침정책을 제출하였던 것이다.
11기 3중전회는 역사와 당면의 실천경험을 신중히 결산하면서, 중국 특유의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12개 조의 주요원칙을 개괄하였다.
1. 노동자계급 지도의 노농연맹을 기초로 한 인민민주주의독재를 견지하고, 인민의 대표제도를 부단히 완비하고, 공산당 지도의 다당합작과 정치협상제도를 부단히 완비하고, 광범위한 애국적 통일전선을 부단히 굳건히하고 발전시키며, 사회주의 민주와 사회주의 법제건설을 강화하는 데 노력한다.
2. 사회생산력의 발전을 사회주의의 근본임무로 삼아 현대화건설에 매진하며 부단히 인민의 물질문화생활수준의 향상에 노력한다.
3. 경제·정치체제와 기타 영역의 관리체제를 부단히 완비하는 것을 통해, 중앙·지방·기업과 광대한 노동 인민들의 능동성·적극성과 창조성을 충분히 이끌어낸다.
4. 대외무역관계를 발전시키고 외국자본을 이용하고 그리고 선진기술을 유치하는 등 다양한 형식을 취하고 경제특구·경제개방구를 운영하고 필요한 경제정책과 융통성 있는 조치를 취하여 부단히 대외개방을 확대한다.
5. 사회주의 공유제를 주체로 한 다양한 경제성분이 병존하는 소유제 구조를 견지하고, 개인경제·사영경제와 기타 경제성분이 공유제 경제에 대해 유익한 보충작용을 발휘토록 하고, 아울러 그들을 정확히 관리하고 인도한다.
6. 사회주의의 계획상품경제를 적극적으로 발전시키고 계획경제와 시장조절을 상호 결합시키며, 국민경제의 지속·안정·협조발전을 촉진하는 데 노력한다.
7. 노동에 따른 분배를 기축으로 기타 분배방식을 보충하는 분배제도를 실행하고, 성실한 노동과 합법적인 경영으로 부를 축적한 일부 사람과 일부 지역을 허락, 지지하고 먼저 부를 축적한 사람이 아직 부를 축적하지 못한 사람을 돕도록 고무하여, 전체 인민과 전체 지역이 점차 함께 부유해지도록 한다.
8.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모택동사상을 지도사상으로 삼고 조국의 훌륭한 문화유산을 계승·발양하며 세계상의 모든 우수한 문화성과를 흡수하여, 전민족의 사상·도덕과 과학·문화소양을 부단히 향상시킴으로써 사회주의 정신문명을 건설한다.
9. 평등호조·단결합작·공동번영의 사회주의 민족관계를 건립, 발전시키고, 민족구역자치제도를 견지, 완비하고 민족차별대우·민족억압·민족분열에 반대한다.
10. 한 국가·두 제도라는 구상과 실천에 따라, 조국의 통일대업을 점차 실현한다.
11. 독립자주적인 평화로운 외교정책을 견지하고 평화공존 5개 원칙의 기초 위에 모든 국가와의 우호관계를 발전시키며, 패권주의와 강권주의 정치에 반대하고, 피압박 민족과 피압박 인민의 정의로운 투쟁을 지지하고 세계평화를 옹호하며 인류진보사업을 촉진한다.
12. 공산당의 지도를 견지하며 당의 지도제도·지도작풍과 지도방법을 부단히 완비하고 당의 정치·사상·이론과 조직건설을 강화하여, 당을 사회주의 사업의 굳건한 지도핵심으로 성장시킨다.
11기 3중전회 이후 당은 중국 특유의 사회주의 건설을 위한 정확한 길을 찾았으며, 중국 특유의 사회주의 이론과 노선을 만들어내었다. 이로써 중국공산당 70년 역사와 마르크스주의 이론과 중국 실제와의 결합의 두번째 역사적 비약이 실현되었다. 이것은 또한 과학사회주의가 중국에서 취득한 세번째 위대한 승리였다. 현대화하고, 고도의 문명적이며 민주적인 사회주의 국가, 즉 중국 특유의 사회주의 건설을 위한 이론·노선의 제출과 그것의 실현은 중국공산당과 중국 인민의 인류에 대한 중요한 공헌이었다.
중국공산당 70년의 역사에서, 중국공산당과 중국 인민이 획득한 신민주주의혁명의 승리, 사회주의 개조의 기본적인 승리와 사회주의 건설의 중대한성과는 모두 실사구시의 사상노선과 대중노선의 사업방침, 그리고 수시로 진리를 견지하고 수시로 잘못을 수정하는 자아비판의 방법을 통하여 획득된 것이었다. 이와는 달리, 당과 인민이 신민주주의혁명 단계에서 맞부딪쳤던 1927년과 1934년 두 번에 걸친 참담한 실패와 사회주의혁명과 사회주의 건설단계에서 맞부딪쳤던 3년 간의 대약진운동과 10년 간의 문화대혁명의 심각한 좌절은 모두 실사구시의 사상노선과 대중노선의 사업방침, 그리고 진리견지와 잘못을 수정하는 자아비평이라는 3가지 훌륭한 전통작풍, 즉 반드시 영원히 계승하고 발양시켜야 할 모택동사상의 3가지 근본원칙을 위반하였던데서 기인한 것이었다.
11기 3중전회 이후 수년 간, 당이 집행한 중국 특유의 사회주의 노선과 개혁·개방의 총방침은 세상 사람들이 모두 놀랄 만한 성과를 이미 거두었다.
이 기간에 국민총생산액은 배로 증가하였고 인민생활이 현저히 개선됨으로써 11억 인구의 의식문제는 기본적으로 해결되었다. 1990년대에 중국공산당과 중국 인민은 평균적으로 생활이 안정된 수준에 도달하기 위하여 분투해야 할 것이다. 이 같은 목적을 실현한 이후 다음 세기 중엽에는 국가의 사회주의 현대화를 통해 중진국의 국가 수준에 도달하기 위하여 더욱 분투할 것이다. 중국공산당 70년 간의 옳고 그른 양측면의 풍부한 역사적 경험을 익히고 당의 훌륭한 작풍과 성공의 경칩을 발휘하는 것은 중국 특유의 사회주의건설을 위한 노력에 유효할 것이다.
간단명료한 중국공산당사인 이 책은 이 같은 목적을 위하여 씌어진 것이다. 이 책이 개혁에 뜻이 있고 중국 특유의 사회주의를 건설하려는 독자 제위께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그러나 70년 간 중국공산당사의 내용이 상당히 풍부하고 매우 복잡한 반면 우리의 수준은 한계가 있기 때문에 여러 부분을 잘못 서술하고 소흘히 한 측면이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독자 제위의 비평을 바란다.
1991년 2월 16일
료개륭
역자 서문
이 책은 ≪중국공산당의 빛나는 70년≫을 번역한 것이다. 중국의 신화출판사가 중국공산당 창당 70주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중공중앙문헌연구실과 중공중앙당사연구실에 의뢰하여 출판한 이 책은 이들 연구기관의 여러 연구자들이 공동으로 집필하고, 료개륭이 최종적으로 수정·심사하였다.
이 책이 집필된 1991년은 중국공산당이 창당된 지 70년이 되는 시점이다. 1921년 7월 상해에서 13명의 중국 공산주의자들이 제1차 대표대회를 개최함으로써 탄생된 중국공산당은 제국주의 세력과 중국 내의 봉건적인 세력을 일소하기 위하여 그야말로 힘겨운 투쟁을 전개하였다. 이 같은 힘겨운 투쟁과정은, 저자 서문에서도 밝힌 바대로 대체로 신민주주의혁명과 사회주의혁명, 그리고 사회주의 건설과정으로 대별된다. 신민주주의혁명과정은 봉건적인 세력의 주된 상징으로 인식된 군벌을 타도하고, 일본으로 대표되는 제국주의 세력을 몰아내기 위한 과정이었다. 이 과정에서 중국공산당은 중국국민당과 때로는 합작하고, 때로는 생사를 걸고 투쟁하였다.
중국공산당은 신민주주의혁명을 승리로 이끈 이후 곧바로 사회주의혁명과 건설의 과정에 돌입하였다. 사회주의혁명과 건설의 과정도 신민주주의혁명의과정과 마찬가지로 힘겹고 고난에 찬 과정이었음은 물론이다. 1978년 11기 3중전회에서 등소평이 권력을 장악한 이후 좌경적인 오류였다고 평가한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으로 사회주의혁명과 건설은 심각한 좌절을 맛보기도 하였던 것이다. 등소평으로 대표된 새로운 중국공산당 지도부는 ≪점증하는 인민의 물질적인 욕구와 낙후된 생산력≫을 사회주의 건설과정의 주요모순으로 인식하고 생산력의 발달을 어떤 것보다 우선시하였으며, 이를 과거의 모든 역사적인 사건을 평가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삼았다. 생산력의 고양을 사회주의 건설과정에서 중요한 목표로 설정하고 그 구체적인 방안으로 이른바 개방과 개혁의 방향을 지향한 등소평체제는 당시의 중국 사회주의의 낙후된 경제상황에 근거하여 이른바 사회주의 초급단계론을 제출하기도 하였다.
이 책은 이상에서 본 각 시기마다의 중국공산당의 전략과 노선을 중점적으로 살피고 있다. 말하자면 중국공산당을 역사의 주체로 설정하고 1921년 창당부터 1991년에 이르기까지 중국공산당의 투쟁의 승리와 실패로 점철된 역사를 서술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통하여 1919년 5·4운동 이래 중국 역사를 개괄하고 있다. 물론 중국공산당사=중국현대사라는 등식은 지나친 도식일지 모른다. 그러나 7·4운동 이래 중국 역사의 전개과정에서 중국공산당이 수행하였던 역할은 결코 과소평가될 수는 없다. 따라서 5·4운동 이래 중국역사를 개괄하는 데 중국공산당이 지나온 역사를 조망하여 보는 것은 필요하고도 유익한 일이다.
더욱이 기존의 사회주의체제가 예상과 달리 급속도로 무너져가고 있는 현시점에서 중국의 개방과 개혁조치는 결국 중국 사회주의를 종말로 이끌고 말 것이라는 조급한 전망이 엄존하는 지금, 과연 중국 사회주의는 종말을 고할 것인가를 중국의 개방과 개혁을 이끌고 있는 현 지도부, 즉 등소평을 수반으로 한 중국공산당 지도부의 현실인식과 그에 따른 처방을 그 역사적인 경험을 전제하여 주의깊게 살펴보는 것은 의미있는 일일 것이다.
이 책을 일독할 가치는 다음과 같이 본서가 지닌 특징으로 더욱 가중된다 하겠다. 즉 첫째, 중국공산당 역사의 서술 대상시기를 1991년까지로 잡아 현시점에 가장 가까운 시기까지 중국공산당사를 다루었기 때문에, 1991년 현재의 시점에서 중국공산당의 중국사회주의 현실에 대한 평가와 그에 따른 전략을 살필 수 있다. 둘째, 중국인의 시각에 선, 그것도 공식적인 입장이 상당히 반영된 중국공산당사라는 특징이다. 중국공산당사에 대한 일본인 연구자의 입장도 구미쪽의 입장도 아닌 중국인 연구자 자신들의 입장을 보여주는 중국공산당사이기에, 이 책을 통하여 1991년으로 중국공산당 77주년을 맞이한 지금 현재의 중국인 연구자들의 입장, 나아가서는 중국공산당의 공식적인 입장이 어떤 것인지를 가늠하여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비록 본서가 70년에 걸친 중국공산당사를 간략하게 다루었기 때문에 70년 간의 중국공산당사를 만족할 만큼 충분하고 풍부하게 그려냈다고 잘라 말할 수는 없지만, 중국공산당의 현실인식과 방침, 그것의 실천과정에서의 실패, 그리고 방침수정과 성과 등을 중심으로 1919년 이래 중국 역사의 전개과정에 접근하고자 하는 경우 일독의 가치는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혹 번역상의 잘못으로 원저자들의 의도가 가려졌는지도 모르겠다.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번역자의 책임임을 밝혀둔다. 번역기간이 예정보다 연장되었음에도 재촉 없이 번역이 끝날 때까지 충분히 기다려주었을 뿐 아니라, 엉성한 번역을 꼼꼼하게 읽고 교정하여 준 녹두 편집부에 고마움을 전한다.
끝으로 다음과 같은 원칙에 따라 번역작업을 하였음을 밝혀둔다.
첫째, 중국의 고유명사화한 축약지명은 본래 지명으로 풀어썼다. 가령, 섬감령 변구의 경우에는 섬서·감숙·영하 변구로 풀어썼다.
둘째, 중국 고유명사는 편의상 한글식 읽기로 통일하였다.
셋째, 읽는이의 편의를 도모하기 위해 필요한 경우 역자주를 첨가하여 *로 각주를 달았다.
넷째, 고유명사는 각 장에서 처음 등장하는 경우 한자를 병기하였으나 그 다음부터는 이를 생략하였다.
1993년 6월
역자
1. 중국공산당 창립시기 (1919년 5월∼1923년 5월)
인류문명의 발생지 가운데 하나인 중국은 각 민족 인민의 장기적인 노력아래 찬란한 역사와 문명을 창조해 왔다. 중화민족은 원래 근검하고 용감하며 자유를 몹시 사랑하고 혁명정신이 풍부한 민족이었다. 그러나 근대에 들면서 중국은 낙오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낙오는 완전히 외국 제국주의와 본국 반동정부의 압박과 착취의 결과였다.≫* 따라서 제국주의와 봉건주의의 타도는 중국 인민이 근현대혁명과정에서 이루어야 할 기본임무였다. 중국혁명의 지도역량이자 중국 노동자계급의 선봉대인 중국공산당이 탄생된 것은 중국 근대 사회·정치·경제발전의 필연적인 결과였다.
* 모택동,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제1차 전체회의 개회사≫
1. 봉건사회로부터 반식민지·반봉건사회로 전락한 중국 사회와 구민주주의혁명의 실패
반식민지·반봉건 중국 사회
1840년대부터 자본주의 제국주의 열강은 잇따라 중국을 침략하였다. 1840년 영국은 아편전쟁을 일으켜 청정부를 압박하여 1842년 8월 7일 첫번째 불평등조약인 남경조약을 체결하였다. 조약체결로 중국은 홍콩을 영국에 할양하고 배상금 2,100만 달러를 지급하였다. 그리고 연안도시인 광주·복주·하문·영파·상해 등 다섯 항구를 통상항구로 하였고, 협정관세를 실행함으로써 중국관세율을 반드시 영국과 공동으로 ≪의정≫하게 되었다. 미국과 프랑스도 잇따라 청정부를 협박하여 망하조약·황포조약을 각각 체결하였다. 이들은 더욱이 최혜국 대우와 영사재판권 등을 첨가시켜 이후 ≪조계≫ 설립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이런 일련의 불평등조약으로 중국은 주권을 상실하였다.
아편전쟁 이후 1856년에서 1860년에 걸쳐 영국과 프랑스는 또 다시 연합하여 중국 침략전쟁을 일으켜 청정부에게 천진조약과 북경조약에 서명하도록 하였다. 제정러시아와 미국도 청정부를 압박하여 천진조약을 체결하였다. 더욱이 러시아는 중국으로부터 144만 ㎢의 토지를 약탈하였다. 1883년에서 1885년까지 프랑스는 다시 중국 침략전쟁을 일으켜 중법신약을 체결하였다. 1894년에서 1895년까지 일본은 중일갑오전쟁을 일으키고 이 전쟁에서의 승리를 바탕으로 마관조약을 체결하였다.
이 조약으로 중국은 요동반도·대만·팽호열도 등을 일본에 할양하고 2억 량에 달하는 배상금을 지급하게 되었다. 1900년, 8개국 연합국이 중국을 침략, 청정부를 압박하여 신축조약을 체결하였다. 그 배상금은 4억 5천만량이었다. 따라서 중국은 약 20억 달러를 배상금으로 부담하게 되었다. 이러한 액수는 청정부의 1901년 총수입의 16배에 달하는 것인데 이것만으로도 중국의 재원은 기본적으로 고갈되기에 충분하였다.
이후 중국의 봉건통치계급은 날로 부패해져 갔고 청정부는 점차 제국주의의 중국 침략의 도구로 변하여 갔다. 사실상 봉건주의는 제국주의가 중국을 지배하는 주요한 사회기초이며 제국주의는 봉건주의가 자신의 지배력을 옹호하기 위해 기댈 수 있는 대상이었다. 그들은 상호간에 결합하여 중국 인민을 잔혹하게 압박·착취함으로써 중국 인민들은 정치권력을 전혀 가질 수 없었고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리는 생활을 해야만 하였다. 이렇게 중국은 대외적으로 독립적이지 못했고, 대내적으로 민주적이지도 자유롭지도 못하였고, 외국의 자본이 중국의 경제를 통제하여 민족자본주의의 발전이 심각한 장애를 받는 반식민지·반봉건국가가 되어버렸다. 따라서 중국 근대사회의 주요모순은 제국주의와 중화민족간의 모순, 봉건주의와 인민대중 간의 모순이었으나, 가장 중요한 모순은 전자였다. 통치영역에서 제국주의와 봉건주의를 타도하는 것은 근대 중국혁명의 기본임무였던 것이다.
구민주주의혁명의 실패
제국주의가 봉건주의와 결합하여 중국을 반식민지 반봉건사회로 변화시키는 과정은 동시에 중국 인민이 제국주의와 그 주구에 반대하여 민족해방과 민주자유를 쟁취하는 투쟁을 전개하는 과정이기도 하였다. 아편전쟁에서부터 5·4운동까지의 80년 간은 중국 구민주주의혁명 기간으로 중국 인민은 여러차례에 걸친 반제·반봉건 투쟁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투쟁은 태평천국운동·무술유신운동·의화단 농민의 자발적인 반제운동·신해혁명 등으로 표출되었다. 이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고 영향력이 컸던 것은 태평천국과 신해혁명이었다.
농민지도자 홍수전이 이끈 태평천국혁명은 1851년 1월 광서 금전에서 봉기하여 1864년 7월에 남경을 함락시킬 때까지 14년 간 계속되었다. 태평군은 만 명도 안되는 상태에서 백만대군이라 불릴 정도로 발전하였고, 18개 성을 공략하여 수중에 넣었으며, 아울러 ≪태평천국≫이라는 농민정권을 수립하여 중국의 봉건세력과 외국 침략자들에게 상당한 타격을 주었다. 그리하여 중국농민혁명의 위대한 역량을 보였다. 그러나 농민들은 새로운 생산방식의 대표자가 아닐 뿐 아니라 낙후된 생산방식의 한계를 갖고있었기 때문에 역사발전의 방향을 명확히 보지 못하여 철저한 민주혁명강령을 제기할 수 없었다. 따라서 그들은 청왕조와 외국 침략자들의 연합세력에 진압당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11년, 부르주아 혁명가 손중산과 황흥 등이 이끈 신해혁명에서는 ≪오랑캐를 내쫓고 중화를 회복하며 민국을 수립하고 지권을 평등하게 한다≫는 강령과 민족·민권·민생의 삼민주의혁명 주장이 제출되었다. 이것은 완전한 부르주아 민주혁명강령이었기 때문에 이 혁명은 완전한 부르주아 구민주주의혁명이었다. 1911년 10월, 무창에서의 봉기가 성공하자 혁명의 물결은 신속히 전국을 휩쓸었다. 1912년 1월 1일 남경에서 손중산을 임시대총통으로 받드는 임시정부를 성립시켜 중화민국을 수립하였다. 이로써 260년 간 지속된 청조통치를 타도하고 2000년을 이어온 봉건제제를 종결지었다. 그러나 곧 제국주의와 중국봉건세력이 결합하고 부르주아가 다시 자신의 동요성과 타협성을 보임으로써, 혁명의 승리는 결국 북양군벌의 두목인 원세개에게 빼앗기게 되어 신해혁명은 실패하였다.
태평천국혁명·무술유신으로부터 신해혁명이 실패된 시기까지를 보면, 중국의 부르주아·쁘며부르주아·농민계급은 중국의 반제·반봉건 민주혁명투쟁을 승리로 이끌 수 언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그러므로 반제·반봉건 부르주아민주혁명을 승리로 이끌고, 나아가 중국사회주의혁명을 지도할 책임은 역사적으로 19세기 후반기부터 20세기 초반기에 걸쳐 생산되고 점차 장대해진 중국 산업노동자계급에 부여되었다. 즉 프롤레타리아트 및 그 정당인 중국공산당의 어깨 위에 올려진 것이다.
2. 신문화운동의 홍기, 초기 노동운동의 발전
신문화운동의 흥기
신해혁명 실패 후 북양군벌통치 아래 민주혁명은 한동안 최저의 상태로 떨어졌다. 그러나 역사는 제자리 걸음을 할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혁명을 유발시킨 모순들이 해소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더욱 격화되어 새로운 출로의 탐색이 요구되었기 때문이었다. 한무리의 쁘띠부르주아 급진민주파가 역사 흐름의 전열에 섰다. 그들은 민주와 과학을 부르짖어 봉건전제와 봉건예교에 반대하였고 문학혁명의 신문화운동을 제창하였다.
1919년 9월 진독수는 상해에서 ≪청년잡지≫(1916년 9월에≪신청년≫으로 이름을 바꿈)를 창간하였다. 그는 창간호에 ≪청년에게 고함≫을 발표하여 당시 중국 사회의 암흑을 열거하고 ≪인권과 과학≫이라는 구호를 제출하여 청년들의 사상해방과 부패 관념의 일소와 진취적인 정신의 추구를 요구하였고 청년들이 민족구망운동에 떨쳐 일어나도록 촉구하였다. 이대교는 1916년 9월에 ≪청춘≫을 발표하여 청년들에게 ≪과거 역사의 구속을 타파하고 부패된 학설을 파괴≫하여 ≪청춘중국을 재생하기 위하여≫ 분투하자고 요구하였다. 러시아 10월혁명 이전중국 신문화운동은 민주와 과학을 중요한 기치로 하여 봉건주의 및 그 의식형태에 맹렬한 공격을 퍼부었다. ≪중국의 정치상·도덕상·학술상·사상상 모든 암혹을 구하여 다스리자≫고 요구하였다.
삼강오륜·충효절의 등 봉건적인 속박은 ≪금세기 사회·국가≫와 근본적으로 상치된다고 지적하였다. 호적과 진독수는 백화문을 언문에 대체하자고 제창하였으며 아울러 ≪문학개량≫(호적), ≪문학혁명≫(진독수)의 구호 아래 신문학을 제창하였다. 노신·호적·유반농 등은 백화문 신문학을 창립하여 봉건문학자 오래된 팔고문과 용감히 싸운 전장이었다. 신문화운동은 비록 구민주주의의 범위를 넘지는 않았지만 그것은 한차례 위대한 사상계몽운동이었다. 이것은 봉건주의사상과 몇천 년 동안 이어진 전통관념에 대해 냉정한 비판을 가하였으며 사람들에게 진리를 추구하는 열정을 격발시켰다. 또 마르크스주의의 중국전파를 위한 길을 열고 5·4운동을 폭발시키기 위한 사상적인 준비를 다졌다.
중국 노동자계급의 장대한 발전과 초기 노동운동
중국 노동자계급은 1850∼60년대 국내 관료자본주의와 민족자본주의의 출현에 따라 생산되고 발전되었다. 사실상, 중국의 관료자본과 민족자본 기업이 있기 이전, 중국의 대문을 부수고 외국 자본주의가 침입하여 187년대 외국 자본이 중국 통상항구에 기업을 건립함으로써 중국의 첫번째 산업노동자가 탄생하였다. 이로 인하여 중국 노동자계급은 중국 부르주아에 비하면 연령이나 자격면에서 좀더 오래되었고, 사회기초에서 보면 그 범위가 월씬 넓었다. 신해혁명 후와 제1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북양군벌정부가 개인기업에 대한 제한을 완화하고 구미 제국주의가 전쟁에 몰두하여 중국에 관심을 두지 못하였기 때문에, 중국의 민족자본주의 공업은 비교적 신속히 발달할 수 있었다. 중국 산업노동자의 대오는 날로 장대해졌다. 1911년 중국에는 60여만 명의 산업노동자가 있었으며, 1919년에 이르면 200만 명 정도로 발전하였다.
중국 노동자계급은 세계 노동자계급과 마찬가지로 인류 역사상 가장 선진적인 계급이었다. 중국 노동자계급은 일반 노동자계급에게 공통되는 장점을 지녔고, 선진적인 대공업생산방식과도 상호 연관된 이들은 중국의 새로운 생산력을 대표하였다. 이들은 조직성과 기율성이 풍부하고 개인소유의 생산수단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또 부단히 발전하는 가장 원대한 전도를 가진 계급이었다. 동시에 중국 노동자계급은 특수한 장점도 가지고 있었다. 즉 그들은 제국주의·봉건주의·관료자본주의라는 삼중의 압박을 받아 가장 굳건하고 가장 철저한 혁명투쟁정신을 지녔다. 이들은 고도로 집중되어 있으며 그 절대다수가 바다에 인접한 각 성(省)과 수륙교통로에 인접한 대(大)·중(中) 도시에 분산되어 있어 조직화의 측면에서 강대한 정치역량으로 쉽게 형성될 수 있었다. 그들은 대부분 파산한 농민 출신이기 때문에 많은 농민들과 자연스럽게 관계를 맺을 수 있어 근현대 중국 특유의 가장 혁명적인 계급이자 혁명적 지도계급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중국 노동자계급에게도 약점은 있다. 그것은 인원 면에서 비교적 적고 미숙하며, 문화수준이 낮다는 것이다.
또한 중국 봉건사회가 길게 존속하였기 때문에 상당히 많은 소생산의 영향을 깊게 받는다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 정당의 지도와 투쟁의 실천과 교육을 거쳐야만 이러한 약점은 극복될 수 있으며 혁명을 지도할 수 있다.
중국 노동자계급은 그 탄생에서부터 끊임없이 압박자에 반항하고 착취자에 반항하여 왔다. 일찍이 1858년 홍콩의 2만여 명의 도시행정 노동자와 운송 노동자는 영국과 프랑스 침략군의 광주 강점에 반항하기 위해 파업을 실행하였다. 1906년 안원탄광의 6,000명의 노동자가 동맹회조직에 참가·봉기하였고, 1911년 천한철로의 철로건설 노동자들은 봉기하여 손중산이 지도하는 부르주아혁명에 호응하였다. 1913년 한양병공장 2,000여 명의 노동자는 가치가 떨어진 지폐로 임금을 지불하는 데 반대하기 위하여 파업을 단행하였다. 1916년 천진 프랑스 조계의 1,700여 명의 중국노동자는 프랑스 제국주의의 조계확대에 반대하기 위하여 파업을 거행하였다. 1912년부터 1919년 5월까지 기재된 파업은 130여 차례였다. 5·4운동 이전중국 노동자의 파업투쟁은 노동자계급이 이미 주요한 사회역량으로 성장하였음을 나타내준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투쟁은 여전히 자발적인 단계에 놓여 있어 노동자계급 자신은 즉자적인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단지 부르주아와 쁘띠부르주아의 추수자로서 혁명에 참가하였고 아울러 그들의 투쟁도 임금증가·생활개선 등의 경제투쟁에 집중되었다.
노동자계급이 부단히 장대해져 가고 또 그 의식이 날로 향상됨에 따라 특히 마르크스주의가 중국에 전파됨에 따라, 중국 노동자계급은 즉자적 계급에서 대자적 계급으로 변해 갔으며, 노동자계급이 민족을 해방하고 사회를 해방해야 한다는 역사적인 임무를 깨닫게 되었다. 중국 민주혁명과 사회주의혁명을 승리로 이끌 계급임을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3. 5·4애국운동, 마르크스주의의 중국 전파
5·4애국운동
1919년 북경에서 5·4운동이 폭발하였다. 이것은 중국이 구민주주의혁명에서 신민주주의혁명으로 이전되는 위대한 대결절점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은 독일과 오스트리아 동맹국이 패배를 선포함으로써 끝났다. 영국과 미국·프랑스·일본 등 전승국은 1919년 1월 파리에서 베르사유 강화회의를 개최하였고, 중국은 전승국의 자격으로 회의에 출석하였다. 중국정부의 대표는 제국주의의 중국에서의 특권을 폐지하고, 중·일 간의 ≪21개조≫를 취소하며, 독일이 산동에서 취한 권익을 회수하는 등의 요구를 회의에 제출하였다. 그러나 파리 강화회의는 중국의 국가영토주권을 옹호하려는 정당한 요구를 거절하였을 뿐 아니라 독일이 전쟁 이전 산동에서 가지고 있었던 각종 특권을 일본이 접수하게끔 결정하였다. 중국은 침략당한 권익을 회수하지도 못한 전승국이 되어버렸을 뿐 아니라 도리어 패전국의 대우를 받게 되어 분할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파리 강화회의는 제국주의 열강의 나누어 먹기 식의 회의가 되어버렸다.
파리 강화회의에서 제정된 이른바 ≪화평조약≫을 매국적인 북양군벌정부는 승인하고자 서명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 소식이 북경에 전해지자 각계는 놀랐고 군중의 감정은 격앙되어 중국 인민 내부의 애국적인 열정이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5월 4일, 북경의 13개 대학과 전문학교 학생 3,000여 명이 천안문에서 시위집회를 개최하여 제국주의의 파리 강화회의에서의 중국 문제에 대한 결정에 항의하고, 중국 대표에게는 ≪화약≫에 대한 서명을 거부할 것을 요구하였다. 또한 친일파 관료 조여림, 육종여, 장종상 등의 처벌을 요구하였다. ≪밖으로 주권을 쟁취하고, 안으로는 국적을 징벌하자≫, ≪조약서명을 거절하라≫, ≪죽음을 걸고 청도를 되찾자≫ 등의 구호를 소리높여 외쳐댔다. 시위학생들은 장종상을 몹시 두들겨 팼으며 조여림의 주택 조가루에 불을 놓았다. 북양군벌정부는 많은 군인과 경찰을 출동시켜 학생들을 체포하였다. 북경의 학생들은 이에 격분하여 동맹휴교를 함과 동시에 전국에 통전하였다. 천진·상해·장사·광주 등 전국각지의 학생들은 분분히 호응하여 동맹휴교를 전개하고 거리로 나갔다. 6월3일, 북경 학생들은 노천 강연을 전개하였다.
이 때 다시 북양군벌정부는 강연을 하는 학생들을 체포하였다. 이에 전국 인민들은 더욱 격분하였다. ≪6·3≫이후 중국 노동자계급이 이 운동에 참가함으로써 애국운동은 새로운 단계에 들어섰다. 6월 5일부터 상해의 노동자들은 파업을 실행하고 학생들은 동맹휴교에 들어갔으며 상인들은 철시를 실시하였다. 10일, 상해에서 파업에 참가한 노동자는 6, 7만 명을 헤아렸다. 운동의 중심은 북경에서 상해로 이전되었으며, 운동의 주력은 학생에서 노동자로 이전되었다. 동시에 운동은 전국의 20여 성, 100여 도시로 확산되어 상당수의 노동자계급·쁘띠부르주아와 민족부르주아가 참가하는 반제국주의운동으로 전개되었다. 이것은 북양군벌정부뿐 아니라 제국주의까지 매우 놀라게 하였다. 전국 인민 특히 노동자계급의 강대한 압력 아래, 북양군벌정부는 체포한 학생들을 석방하였으며 조여림, 장종상, 육종여 3인의 ≪사직≫을 비준하였다. 28일, 강화회의에 참가한 중국대표단은 전국 인민의 압력 아래 ≪화약≫에 대한 서명을 거절하였다. 5·4애국운동은 큰 승리를 거두었다.
5·4운동 동안 중국공산당이 탄생되지는 않았으나 이대교, 진독수 등 일군의 초보적 공산주의사상을 가진 지식인들은 각지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이들이 사실상 이번 반제투쟁의 조직자였고 지휘자였다. 모택동·주은래·운대영 등은 각기 장사·천진·무한 등지에서 이번 반제애국운동에 적극 참가하였을 뿐 아니라 지도하기도 하였다. 노동자계급이 독립된 정치역량으로 정치무대에 등장함으로써 5·4운동은 철저히 비타협적인 반제반봉건 혁명운동이 되었다. 5·4운동은 중국 신민주주의혁명의 시작이며 중국공산당 성립을 위한 사상상, 간부상의 준비였다.
중국에서의 마르크스주의의 전파
5·4운동은 문화사상의 측면에서 중국에서 마르크스주의의 광범한 전파를 촉진하였다. 모택동이 말했던 것처럼, 중국인이 마르크스주의를 찾은 것은 러시아 인의 소개에 의한 것이었다. 1917년 레닌의 지도 아래, 러시아는 10월 사회주의혁명의 승리를 쟁취하였고 지주계급의 통치를 전복하여 세계에서 첫번째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새로운 형태의 국가를 건립함으로써 인류역사의 신기원을 열었다. 10월혁명은 중국 각 계층의 주의를 유발시켰으며 중국인은 이를 국가전도와 희망으로 간주하였고 혁명 승리의 서광으로 간주하였다.
10월혁명이 폭발하자 중국에 신속하게 마르크스-레닌주의가 전래되었다. 그것은 중국의 선진분자가 프롤레타리아트의 우주관으로 국가의 운명을 관찰하고 중국혁명의 길을 신중히 모색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이로써 중국의 신문화운동은 마르크스주의를 광범하게 전파하는 운동으로 발전하였다. 이때로부터 중국 역사에는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는데, 이것은 곧 중국혁명이 세계 프롤레타리아트 사회주의혁명의 일부분으로 된 것이었다. 중국의 민주혁명은 구민주주의혁명 시대로부터 노동자계급이 지도하는 신민주주의혁명시대로 진입하기 시작하였다.
이대교는 중국에서 가장 일찍이 러시아 10월혁명을 선전하고 마르크스주의를 선전한 걸출한 대표자였다. 1918년 7월부터 11월까지 그는 ≪프랑스·러시아 혁명의 비교관≫ ≪서민의 승리≫ ≪볼셰비키주의의 승리≫ 등을 발표하여 열정적으로 10월혁명을 노래하고 10월혁명의 길은 세계 각국 혁명의 필연적인 길이라고 지적하였다. 이 때, 모택동이 5·4운동의 총사령이라 지칭하였던 진독수는 10월혁명과 노동운동의 영향 아래 급진민주주의자로부터 마르크스주의자로 변화하여 마르크스주의와 과학사회주의를 수용하고 선전하였다.
≪신청년≫은 마르크스주의를 선전하는 주요 진지가 되었다. 진독수는 5·4운동 전야인 1919년 4월 20일에 ≪20세기 러시아혁명≫을 발표하여 ≪18세기의 프랑스정치혁명, 20세기의 러시아 사회혁명은 당시 사람들에 의해 심하게 욕을 먹었으나, 후세의 역사가에 의해 이들은 인류사회를 변동시키고 진화시킨 대관건으로 간주되었다≫라고 하였다. 5·4운동 이후 신문화운동은 주로 마르크스주의와 과학사회주의를 선전하는 사상운동으로 발전하였다. 이대교는 1919년 5월 ≪신청년≫ 편집을 주관하면서 마르크스주의 연구 특별호를 편집하였으며, 동시에 ≪나의 마르크스주의관≫을 발표하여 비교적 체계적으로 마르크스주의의 기본원리를 소개하였다.
≪신청년≫에는 마르크스주의, 사회주의혁명, 소련 연구, 중국 노동자계급의 상황 및 노동운동에 관한 많은 문장과 통신이 발표되었다. ≪신보≫부간에는 이대교의 도움아래 마르크스 연구 전용란이 만들어져 마르크스주의 저서와 사회주의를 소개하는 문장이 게재되었다. ≪매주평론≫도 지속적으로 10월혁명의 상황에 대한 문장을 게재하였으며 아울러 소련 정부가 반포한 헌법·토지법·혼인법 등을 소개하였다. 당시 전국에 출현하였던 200여 개의 진보적인 사단과 진보적인 간행물도 정도는 다르지만 마르크스주의 선전과 사회주의혁명 문제를 탐구하는 글을 발표하였다.
북경에는 이대교가 참가하고 만든 소년중국학회와 이 회의 간행물인 ≪소년중국≫이 있었다. 상해에는 심현려가 창간한 ≪성기평론≫과 소력자가 주편한 ≪민국일보≫ 부간 ≪각오≫가 있었으며, 장사에는 모택동이 주편한 ≪상강평론≫과 그가 운영하던 문화서사와 러시아연구회가 있었다 천진에는 주은래가 주편한 ≪천진학생연합회보≫와 ≪각오≫ 및 그들이 운영하는 각오사가 있었다. 제남에는 왕진미 등이 조직한 여신학회와 ≪여신≫이 있었다. 동시에 마르크스주의를 선전, 소개하는 서적과 번역서들도 많았는데, 가령 ≪공산당 선언≫, ≪노동과 자본≫, ≪자본론 입문≫, ≪사회주의사≫, ≪마씨 유물사관 개요≫, ≪마르크스 전기≫, ≪과학사회주의≫ 등이 있었다.
5·4시기, 진독수·이대교·모택동·채화삼·주은래·등중하·이달 등 일단의 초보적인 공산주의사상을 가진 지식인들이 마르크스주의를 선전하고 학습하면서 마르크스주의와 노동운동을 결합시키는 과정에서 선봉과 교량적인 역할을 하였다. 모택동과 주은래 등도 5·4운동중에 진독수와 이대교의 영향 아래 마르크스-레닌주의의 과학적 세계관을 수용하여 중국 인민의 해방사업 가운데로 적극적으로 뛰어들어 광대한 인민의 근본적인 이익을 구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실제 투쟁에서 인민혁명의 지도자로 성장하였다. 마르크스주의의 광범한 전파는 중국공산당의 건립을 위한 사상기초를 다졌다.
마르크스주의 전파과정상의 3차 논전
중국에서의 마르크스주의의 전파는 결코 순조롭지만은 않았다. 제국주의와 봉건군벌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혔을 뿐 아니라 각종 부르주아·쁘띠부르주아사조의 반대에 부딪히기도 하였기 때문이다. 이로 인하여 마르크스주의 선전과정에서 반마르크스주의와 3차례에 걸친 논전이 전개되기도 하였다. 1919년 7월, 부르주아의 우익입장에 서 있던 지식인 호적은 ≪문제를 더 많이 연구하고 주의를 적게 논하자≫는 글을 발표하여 ≪문제≫와 ≪주의≫ 논쟁을 일으켰다. 그는 ≪문제를 더 많이 연구하고 주의를 적게 논하자≫는 미명 아래 마르크스주의가 중국의 국정에 부합하지 않음을 주장하여 마르크스주의로 중국혁명을 이끌려는 시도에 반대하였다.
그는 개량주의를 주장하였다. 구체적인 문제에 대한 다양한 연구의 필요성을 제창함으로써 사회문제의 근본해결에 반대하였다. 호적의 관점에 반대하기 위하여 이대교는 8월 ≪매주평론≫지에 ≪문제와 주의를 다시 논한다≫를 발표하여 마르크스주의가 중국의 국정에 적절하다고 인정하였고 마땅히 마르크스주의를 국가운명을 관찰하는 지도사상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중국문제는 반드시 근본으로부터 해결해야 할 혁명이라고 천명하였다. ≪문제≫와 ≪주의≫논쟁은 실제로 중국은 마르크스주의가 필요한지의 여부, 중국은 혁명을 필요로 하는지의 여부에 관련된 논쟁이었다. 이대교는 각지의 미숙한 마르크스주의자들과 함께 마르크스주의는 중국의 국정에 적절하다는 점을 논증하였고 중국 사회는 한차례 철저한 혁명을 진행할 필요가 있음을 주장하였다. 이 논쟁으로 마르크스주의의 영향력은 확대되었을 뿐 아니라 여러 사람들은 중국혁명 전개를 위한 정확한 노선탐구에 적극적으로 몰두하게 되었다.
1920년 2월부터 1921년 4월까지 입헌개량을 주장한 연구계의 장동손, 양계초 등은 사회주의를 연구하고 선전한다는 미명하에 거짓 사회주의·진정한 개량주의 길드 사회주의(혹은 행회사회주의라고도함)를 적극 주장하고, 마르크스주의의 중국 전파를 반대하였다. 그들은 중국공업의 낙후성과 진정한 노동자의 절대적인 부족을 이유로 들어 중국혁명의사회주의 전도를 부정하고 자본주의의 발전을 당면한 급무로 고취하여 계급조화·폭력혁명 반대·프롤레타리아트 독재 수립 반대 등을 선전하였다. 이대교·진독수·이달·채화삼 등은 그들의 오류를 비판하는 글을 깼다. 그들은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중국 공업의 프롤레타리아트가 받는 압박은 구미 프롤레타리아트보다도 휠씬 심하여 혁명의 요구는 훨씬 강하다.
사회주의 원칙은 중국에 적합하며 중국의 출로는 사회주의에 있다. 1920년 12월, 모택동은 유법근공검학 신민학회 회원에게 보내는 편지에 ≪중국의 혁명은 반드시 사회주의혁명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는 점에 적극 찬성하고 부르주아의 개량주의 길을 비판하였다. 진독수는 쌍방 논쟁의 문장과 서신을 함께 모아 ≪사회주의 논전≫이라 이름하여 ≪신청년≫에 발표하였다. 이것은 중국이 사회주의 길로 나아가야 할 것인가, 자본주의 길로 나아가야 할 것인가, 혹은 사회혁명을 실행하여야 할 것인가, 사회개량을 실행해야 할 것인가에 관한 논쟁이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의 힘찬 공격 아래 1년 이상을 끈 이 같은 논쟁에서 결국 부르주아 개량주의자들은 패배하였다. 이 논쟁은 마르크스주의의 중국 전파를 진일보 진전시켰다.
제2차 논쟁이 진행됨과 동시에 구성백·황능상을 대표로 하는 무정부주의자들은 ≪좌≫적 면목으로 출현하여 마르크스주의를 곡해하고 공격하였다. 그들은 모든 권력에 반대하여 마르크스주의의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에 관한 이론을 힘을 다해 공격하였으며, 엄격한 조직기율을 가진 노동자계급 정당의 건립에 반대하고 개인의 ≪절대자유≫를 주장하였다. 무정부주의는 일종의 쁘띠부르주아의 사조로서 20세기 초에 중국에 전래되었다. 중국은 소생산자들이 우세를 점한 국가이기에 이러한 사조는 중국에 광범한 사회적기초를 가졌으며 당시의 청년지식인들과 노동자들에게 비교적 커다란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무정부주의자들의 영향을 일소하기 위하여 진독수·이대교·이달·채화삼 등은 계간 ≪신청년≫, 월간 ≪공산당≫에 무정부주의를 비판하는 문장을 발표하였고, ≪민국일보≫ 부간 ≪각오≫에서도 무정부주의를 비판하는 문장과 통신을 발표하였다.
그 가운데 ≪신청년≫에 발표된 진독수의 ≪정치를 논한다≫, ≪사회주의 비평≫, ≪무정부주의 토론≫ 등의 문장 및 ≪공산당≫의 제1기부터 5기까지의 ≪단언≫, 이달의 ≪사회혁명의 토론≫과 ≪무정부주의의 해부≫, 채화삼의 ≪마르크스 학설과 중국 프롤레타리아트≫ 등의 문장은 무정부주의의 ≪이론≫과 실제에 대해 폭로하고 비판을 가하였다. 그들은 노동자계급의 역사작용에 대해 거듭 천명하여, 무정부주의의 국가학설, 경제학설 방면의 근본적인 오류를 지적하였다. 무정부주의를 비판함과 동시에 북경과 광동 당 조직은 조직상에서 무정부주의자들을 일소하여 당 조직의 순결성을 지켰다. 이러한 논쟁은 1922년까지 지속되었는데, 논전을 통하여 허다한 혁명청년들은 마르크스주의와 무정부주의를 구분지을 수 있었다. 그리하여 마르크스주의로 기울어져 학습하고 수용하였다.
마르크스주의 전파과정 중의 3차례에 걸친 논전은 4개의 중요한 문제를 해결하였다. 중국은 마르크스주의가 필요하다는 것, 중국은 반드시 사회주의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 중국은 노동자계급 정당이 필수적이라는 것, 부르주아의 통치를 전복한 뒤 반드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건립하여야 한다는 것 등이 그것이었다. 이로 인하여 마르크스주의의 중국 전파가 촉진되었으며, 그에 따라 마르크스주의 사상진지가 공고하게 되고 확대되었다. 중국공산당의 성립을 위해 사상의 장애를 일소하여 마르크스주의와 노동운동의 결합을 촉진하였다.
4. 당의 초기 조직 건립
각지 공산주의 소조의 건립
마르크스주의가 중국에 광범하게 전파되어 중국 인민의 전진의 길을 비추자 노동자계급의 투쟁은 더욱 발전하였다. 1919년부터 1922년까지 전국의 파업은 161차, 파업인원 수는 24만5천여 명에 달하였다. 이 중 정치파업이 현저하게 증가하였다.
중국 노동자계급의 성장이 강화됨에 따라 노동운동의 발전은 자신의 계급을 조직하는 선진적인 계급조직을 절실히 요구하였으며,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지도를 절실하게 요구하였다. 또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중국 전파는 노동운동 가운데서 자신의 물질역량을 찾아내야 했다. 마르크스도 ≪철학은 노동계급을 자신의 물질무기로 삼으며 마찬가지로 노동계급도 철학을 자신의 정신무기로 삼는다≫고 지적하였다. 중국공산당 탄생의 기본조건, 즉 계급기초와 사상기초는 1920년대 초기에 이미 성숙되어 있었다.
이 때 중국의 공산주의 지식인들은 실천과정에서 중국 사회를 근본적으로 개조하려면 러시아 10월혁명의 길로 나아가 반드시 러시아 볼셰비키 식의 노동자계급 혁명정당을 건립하여 노동자계급과 인민대중을 이끌어 해방을 쟁취하여야 한다는 인식에 도달하였다. 1927년 초 이대교와 진독수는 공산당조직을 건립하려고 구상하였다. 진독수는 두 번에 걸친 반동정부의 체포를 피하기 위하여 북경을 떠나 상해로 가고자 하였는데, 이 때 이대교가 그를 천진까지 배웅하였다. 그들은 서로 중국공산당 건립에 관한 의견을 교환하여 북경과 상해에서 각자 건당 준비를 하자고 약속하였다.
1920년 4월, 코민테른 극동서기처 대표인 보이딘스키 등이 북경에 와서 중국의 혁명조직과 연관을 갖고자 하였다. 그는 북경대학 러시아어 교수 폴레보이의 소개로 이대교와 함께 중국혁명문제와 건당에 대한 의견을 나누었다. 이후 이대교의 소개로 보이딘스키는 상해로 가 진독수와 회견하였으며 이 때 한 걸음 더 나아간 건당문제를 논의하였다. 그리하여 진독수는 중국공산당 조직을 발기하기로 결정하였다.
1920년 5월, 진독수·이한준 등은 상해에서 ≪마르크스주의학설연구회≫를 조직하여 건당준비에 착수하였다. 8월, 보이딘스키의 원조 아래 중국 공업과 노동운동의 중심인 상해에서 중국의 첫번째 공산주의 소조가 성립되었다. 그 성원은 진독수·이달·이한준·진망도·시존통 등이었고 진독수가 서기를 맡았다. 상해 소조는 전국적인 성격의 당 조직을 발기·주비·조직하는 중대한 임무를 맡아 실제적으로는 중국공산당의 발기조라는 성격을 지녔다. 9월, 상해 소조는 회의를 개최하여 전국의 통일된 중국공산당 조직을 건립할 것을 논의하였다. 이후 각지 공산주의 소조 건립을 도을 것을 결의하였다.
북경의 이대교는 보이딘스키가 상해로 간 이후 그 비서인 마마예프의 원조 아래 건당 준비작업에 착수하였다. 10월에 북경에서 공산주의 소조가 건립되었다. 이후 진독수·이대교와 각지 공산주의자들은 건당사업에 적극적으로 연계하였다. 1920년 5월 모택동은 상해에서 진독수와 함께 마르크스주의 연구와 학습에 관해 토론하였다. 모택동은 장사로 돌아온 후 8월에 문화서사를 세우고 러시아연구회를 만들었으며 신민학회 회원의 마르크스주의 서적연구를 조직하였다. 그리하여 사회주의를 선전하였고, 이 해 겨울, 장사 공산주의 소조를 건립하였다. 이와 동시에 동필무·진담추 등은 무한에서, 왕진미·등은명 등은 제남에서, 담평산·진공박 등은 광주에서 각기 공산주의 소조를 건립하였다. 이외에 장신부·조세염·주은래 등은 프랑스에서, 시존통·주불해 등은 일본에서 각기 공산주의 소조를 조직하였다.
* ≪공산주의 소조≫라는 명칭은 후인이 당의 초기 조직을 통칭한 것으로, 중국공산당의 제1차 전국대표대회 이전 당의 초기 조직의 명칭은 통일되지 않았었다.
공산주의 소조의 초기 활동
각지 공산주의 소조는 건립되자마자 적극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노동자계급 정당은 마르크스주의와 노동운동이 결합된 산물이다. 중국공산당이 창건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마르크스주의와 중국의 노동운동이 결합되어야 했다.
1) 각지 공산주의 소조는 건립 이후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학습과 선전사업을 강화하였다.
상해 공산주의 소조는 이러한 측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1920년 8월, 소조성원이었던 진망도는 ≪공산당 선언≫을 번역하여 상해에서 출판하였고, 9월 소조는 ≪신청년≫을 당 기관지로 변경시켰으며, ≪마르크스 자본론 입문≫, ≪사회주의사≫ ≪계급투쟁≫ 등의 마르크스주의 저작을 출판하였다. 11월에는 반공개적인 월간 ≪공산당≫을 창간하여 공산주의와 공산당에 대한 지식을 선전하였으며 레닌의 건당론과 러시아 볼셰비키당의 역사적 경험을 소개하였다.
2) 공산주의 소조는 노동자에게 마르크스주의를 선전하였고 노동자 간행물을 출판하였다.
1920년 8월, 상해 공산주의 소조는 주간 ≪노동계≫를 창간하였다. 이어서 북경에서 ≪노동음≫ 광주에서 ≪노동성≫ 등을 간행하였다. 이러한 간행물들에 제국주의·봉건주의·자본가라는 중충적인 압박과 착취의 상황이 반영된 다량의 자료를 게재함으로써 노동자들에게 마르크스주의와 과학사회주의를 통속적으로 이해시키고자 하였다. 또 국내외노동자투쟁 상황을 보도하여 노동자계급이 해방의 길을 취해야 함을 역설하였다. ≪노동계≫는 노동자들에게 그들의 ≪대변자≫며 ≪밝은 별≫이라고 일컬어졌으며, ≪노동성≫도 노동자들의 환영을 받았다. 아울러 노동자들이 비교적 집중된 지역에서는 노동자보습학교를 운영하였다. 1921년 1월, 북경 공산주의 소조는 등중하가 주관하는 장신점 노동보습학교를 성립하였고, 상해 공산주의 소조는 이계한이 주관하는 상해 노동보습학교를 운영하였다. 무한 공산주의 소조도 이와 유사한 식자반조직을 운영하였다. 이렇게 공산주의 소조는 보습학교를 통하여 노동자군중에게 과학사회주의사상을 선전하여 효과적으로 노동자의 계급의식을 높였고, 또 노동자계급 가운데 핵심인원을 찾아내고 키워냈다. 이들 핵심을 통하여 전체 노동자계급을 조직하여 노동조합 건립과 노동자지도를 위한 기초를 닦았다.
3) 공산주의 소조는 먼저 노동자계급 자신의 조직---노동조합---건립에 착수하였다.
각지 공산주의 소조의 선전과 교육을 거쳐 노동자대중의 계급의식은 신속히 향상되었으며 이에 따라 노동자계급의 이익을 대표하는 노동조합 건립이 절실히 요구되었다. 1920년 11월, 상해 공산주의 소조의 노력아래 중국 노동자계급의 첫번째 노동조합조직인 상해기기노동조합이 성립되었다. 12월에는 다시 인쇄노동조합이 성립되었다. 북경 공산주의 소조의 지도 아래 1921년 ≪5·1≫국제노동절에는 장신점 노동자 1,000여 명이 시위에 참가하였으며 아울러 노동자구락부를 건립하였다. 호남의 공산주의자들도 노동자들 사이에 들어가 친구를 사귀었으며 노동자들의 상황을 이해하고 노동자야학을 운영하고 노동조합를 세웠다. 호남노동조합지도자 황애·방인전은 무정부주의의 영향에서 벗어나 사회주의청년단에 참가하여 노동조합 노동자의 계급의식 향상을 도왔다.
4) 혁명 핵심역량의 배양에 주력하였다.
1920년 여름, 상해에서는 외국어학사가 만들어졌다. 이 조직은 1921년 봄, 20여 명의 학생들을 세부분으로 나누어 모스크바 동방대학으로 보냈다. 1921년 8월, 장사에서는 호남자수대학을 운영하였는데, 이것은 중국공산당의 당간부학교의 성격을 떤 첫 학교로서 혁명간부를 배양하였다. 1921년, 광동에서는 선전원양성소·주음자모교도단·러시아어학교 등을 운영하였으며, 무한에서는 여름방학 독서회 등을 조직하였다. 이러한 활동을 통하여 마르크스주의의 기본원리와 기초지식을 학습시킴으로써 혁명핵심을 배양하였다.
5) 사회주의청년단을 조직하였다.
많은 진보적인 청년들을 단결·교육시켜 혁명에 참가시키고 마르크스주의를 학습시키기 위하여 상해 공산주의 소조는 1920년 8월에 상해 사회주의청년단을 건립하였다. 유수송이 서기를 담당하였고 단원은 신속히 증가하여 30명 정도가 되었다. 아울러 각지에 사회주의청년단 장정을 보내 각지에서 사회주의청년단을 건립하도록 요구하였다. 이에 따라 북경·광주·장사·무한·천진 등지에서 계속하여 사회주의청년단이 조직되었다. 1921년 봄 중국공산당이 성립되기 직전, 상해에서 중국사회주의청년단 임시중앙국이 성립되었다. 단원은 2,000여 명에 달하였다. 그러나 당시 건단 지도사상이 불명확하고 단원의 성분이 복잡하여 의견이 여러 갈래로 나뉘었으며, 경비문제도 곤란하였을 뿐 아니라 동시에 장태뢰·유수송 등의 지도간부들이 출국함에 따라 5월경 상해·북경 등지의 청년단은 해산되었다. 이 조직들은 11월 다시 회복되었다. 호남·호북 등지의 청년단 역시 조직 정돈을 거쳤다. 1922년 5월 중국사회주의청년단이 다시 정식으로 성립되기 시작하였다.
6) 마르크스주의 기본원리와 레닌의 건당원칙을 이용하여 당의 성질·지도사상·조직원칙·최종 목적 등에 대해 연구하고 토론하였다.
1920년 하반기 상해 공산주의 소조는 ≪신청년≫과 월간 ≪공산당≫을 통하여 중국에서의 공산당건립, 폭력혁명 실행, 노동자계급 독재 건립 등을 명확하게 주장하였다. 1920년 8월부터 1921년 1월까지 오고간 편지 중에서 채화삼과 모택동은 자신들의 건당에 대한 기본 관점을 천명하였다. 채화삼은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당은 노동자계급의 선봉대·작전부여야 하며, 노동자계급운동의 신경중추여야 한다. 노동자계급 정당의 최종적인 투쟁목표는 공산주의사회의 창조에 있다.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노동자계급의 기기인 소비에트를 건설하여야 한다. 모택동이 채화삼에게 보낸 편지에는 ≪유물사관은 우리 당의 철학적 근거다≫라고 지적함과 동시에 ≪당신 편지의 내용은 지당하며 이에 대해나는 완전히 찬성한다≫고 하였다. 1920년 11월, 상해 공산주의 소조는 ≪중국공산당 선언≫을 제정하고 이를 당원 수용의 기준으로 삼았다. 이 선언은 임시 당강의 역할을 하였으며, 당의 지도사상과 건당원칙을 실천적으로 탐색한 것이었다.
선언의 주요 내용은 ①공산주의자의 이상, ③공산주의자의 목적, ③계급투쟁의 최근 상태에 관한 것이었다. 선언은 ≪공산주의자의 목적은 공산주의자의 이상에 따라 새로운 사회를 창조하는 것이다. 우리의 이상사회가 실현되려면 먼저 현재의 자본제도를 전복하여야 한다. 자본제도를 전복하려면 자본가의 국가를 강력하게 타도하는 수밖에 없다≫고 지적하였다. 선언은 노동자계급의 정권탈취과정을 밝히는 데서 노동자계급 독재의 필요성을 논증하였다. 이 선언은 당의 제1차 전국대표대회에서 통과된 강령의 지도사상과 완전히 일치하였다. 이것은 중국공산당 조직은 처음부터 엄격하게 마르크스주의 기본이론과 레닌의 건당원칙에 따라 시작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인데, 이는 당의 노동자계급의 성질을 보장하는 것이었다.
5. 중국공산당의 정식 성립
중국공산당의 제1차 전국대표대회(1대)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중국에서의 광범한 전파와 노동운동의 발전은 중국공산당의 건립을 위한 단단한 사상기초와 계급기초로 작용하였다. 각지 공산주의 소조의 출현은 아울러 당 성립을 위한 간부상·조직상의 조건을 마련해주었다. 따라서 각지에 분산된 당 조직을 통일시키고 전국 노동자계급의 통일된 정당을 건립하여 각지에서 날로 증가하는 노동운동과 혁명운동을 지도해야 할 필요성이 요구되고 있었을 뿐 아니라, 이미 그러한 조건도 성숙되어있었다.
코민테른 극동서기처 대표 보이딘스키는 중국 공산주의자와 그들에 의해 건립된 각지의 공산주의 소조가 빠른 시일 내에 연합하여 당 대표대회를 개최하여 중국공산당을 정식으로 성립시키기를 희망하였다. 그가 자기 나라로 돌아간 후 코민테른 대표 마린과 니콜스키가 상해에 와서 중국의 정식 건당을 도왔다. 각지 공산주의 소조가 각지에서 적극적으로 사업을 전개하고 있었기 때문에 중국에서의 건당 조건은 이미 성숙되어 있었다. 상해 공산주의소조는 북경 등지의 공산주의 소조와 연락하여 각 소조에게 대표 2인씩을 상해로 파견하여 회의를 개최하자고 통고하였다. 국내 각지의 공산주의 소조와 여일 공산주의 소조에서 모두 12명을 파견하였다. 그들은 모택동·하숙형·동필무·진담추·왕진미·등은명·이달·이한준·장국도·유인정·진공박·주불해 등이었다. 그들은 전국의 50명의 당원을 대표하였다. 진독수는 광주에서 직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사직할 수 없어서 포혜승에게 회의참가를 위임하였다. 이대교는 북경대학들서 일이 많았기 때문에 회의에 출석할 수 없었다. 코민테른 대표 마린과 니콜스키가 회의에 참가하였다.
7월 23일, 상해 프랑스 조계 망지로 106호에서 정식으로 중국공산당 1대가 개최되었고 마린과 니콜스키는 대회에 참석하여 축사를 하였다. 대회에서는 본 지구당 조직성립 경과, 사업전개의 상황 및 사업방법과 경험 등각지 대표의 사업보고가 이루어졌다. 한편으로는 그 성과를 긍정하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계획성 있는 사업을 전개할 수 없는 부족한 점도 제출되었다. 회의는 5차례에 걸쳐 진행되었는데, 7월 30일의 제6차회의는 경찰의 갑작스런 조사로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이후 회의장소를 절강 소홍 남호 안의 배 위로 옮겨 회의를 계속 진행하였다. 대회의 중심임무는 중국공산당을 성립시키는 것이며 당의 강령과 실제 사업계획을 제정하는 것이었다. 대회에서 당면의 정치상황과 당의 기본임무·당의 조직원칙·당의 지도기관 등에 대해 토론하였다. 대회에서 당의 첫번째 강령과 당의 당면의 실제사업결의가 통과되었고 당의 중앙기관이 선출되었다.
당의 첫번째 강령은 다음을 명확히 규정하였다. ≪우리 당의 정식명칭을 ≪중국공산당≫이라 한다.≫ 중국공산당의 성질은 노동자계급 정당임을 확정하였다. 당의 강령에는 노동자계급 혁명군대로서 자본가계급을 전복하여 노동자계급으로 국가를 세우고 사회계급 구분을 소멸시키며, ≪노동자계급의 독재는 계급투쟁이 끝나는, 곧 사회의 계급 구분이 소멸되는 데까지 지속된다는 점을 승인한다≫, ≪자본가의 사유제를 소멸하고 기기·토지·공장·반제품의 생산수단 등을 몰수하여 사회공유로 귀속시킨다≫ 등이 규정되었다. 이것은 당의 최종적인 투쟁목적은 노동자계급을 지도하여 무력으로 철저한 사회혁명을 실행하고 정권을 탈취하고 노동자계급 독재를 수립하고 생산수단의 사유제를 소멸시키고 공산주의를 실현하는 것이라는 점을 명확히 밝힌 것이었다.
강령은 또한 민주집중제의 조직원칙과 당 기율을 규정하여 민주뿐 아니라 집중도 있어야 하며, 당은 반드시 엄밀한 조직과 엄격한 기율이 있어야 함을 강조하였다. 더욱이 당 조직은 반드시 신중하게 당원을 발전시켜야 하며 엄격한 입당순서를 발아야 한다고 지적하였다. 입당 이후 당원은 해당지역에서 조직생활을 해야 함과 동시에 실제적인 사업도 책임져야 한다고 규정하였다. 강령은 당의 성질과 투쟁목표, 당의 조직원칙과 기율, 당원의 조건과 입당수속에 대해 규정하였고, 당의 사상을 강화시키기 위해 당의 단결통일을 유지하였다. 이것으로 당은 혁명을 이끄는 전투의 핵심이 된 셈인데 이는 중대하고도 심원한 의의가 있는 것이었다.
대회는 ≪당면의 실제 사업에 관한 결의≫를 통과시켜 당의 당면의 중심사업은 노동운동을 이끄는 것임을 확정하고, 당원을 노동조합에 파견하여 독립적으로 노동운동을 이끌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공산당의 정치노선에 위배되는 노동조합 집행에 반대하여 기타 정당의 괴뢰로 전락되지 않도록 할 것을 명확히 규정하였다. 또한 노동자에게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적극적으로 선전하여 노동자계급의 계급의식 향상을 돕고 노동조합조직을 건립하고 건전화시켜 노동운동의 발전을 도모할 것을 규정하였다.
결의는 또한 당의 선전사업의 임무를 제출하여 전 당이 힘을 다해 마르크스주의를 선전하여 더욱 많은 사람들이 사회주의를 접수하도록 하여 혁명운동에 투입될 수 있도록 하라고 제기하였다. 결의는 선전사업에서 조직의 기율관념을 반드시 강화할 것과 선전기구를 일정하게 공산당이 장악해야 함을 강조하였다. 즉 ≪중앙이나 지방의 출판물을 막론하고 그 출판사업은 반드시 당원의 지도를 받아야 한다≫, ≪어떠한 출판물이더라도 중앙이나 지방이건 간에 우리 당의 원칙과 정책 결의에 위배되는 문장을 게재할 수 없다.≫ ≪결의≫는, 군벌주의와 관료제도에 반대하는 투쟁과 언론·출판·집회의 자유를 쟁취하는 과정에서 독립적인 정책을 취하여 노동자계급의 이익을 옹호해야 한다고 규정하였다.
대회에서는 진독수·장국도·이달 등을 당 중앙 지도기관인 중앙국을 구성하도록 하여 전 당사업을 책임지게 하였다. 진독수는 중앙국 서기를 담당하였으며 장국도는 조직을, 이달은 선전을 담당하였다. 당시 당원 수가 매우 적었고 각지의 조직도 완비되지 않았기 때문에, 회의는 한시적으로 당중앙위원회를 구성하지 않기로 결정하였다. 당 1대의 개최로 중국공산당이 정식으로 성립되었다.
대회에서 통과된 강령은 러시아 볼셰비키당의 모범과 경험으로 중국공산당은 그 탄생부터 공산주의를 목적으로 하고 마르크스-레닌주의를 행동지침으로 한 통일된 노동자계급 정당임을 분명히 하였다. 그런데 대회에서 당의 최종투쟁 목적은 명확히 하였지만 당의 최저강령, 즉 직접적인 행동강령---반제·반봉건적인 민주주의혁명---은 정확하게 확정짓지 못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당시 당이 미숙한 상태에 있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었다.
중국공산당의 탄생은 중국 역사상 하늘을 열고 땅을 가르는 위대한 사건이며 중대한 역사적인 의의를 지녔다. 재난에 시달려 온 중국 인민들에게 희망과 밝은 빛을 주었을 뿐 아니라 신뢰할 수 있는 조직자와 지도자를 갖게하였으며, 중국 노동자계급에게 자신의 굳건한 전투사령부를 갖게 하였다.
또 중국혁명의 승리를 보장하였다. 역사적인 사실은 반제·반봉건의 혁명임무는 단순한 농민전쟁으로 완수될 수 없고 부르주아의 구민주주의혁명으로도 완수될 수 없음을 증명하였다. 민국 수립 이후 일찍이 정당이 수풀처럼 많이 생겨났으나 그들 대다수는 정객의 결합에 불과하였으며 인민을 혁명으로 이끌지 못하였다. 단지 노동자계급의 정당만이 광범한 인민대중의 이익을 대표할 수 있으며, 중국 각족 인민을 이끌어 반제·반봉건 혁명임무를 완수할 수 있었다. 모택동도 지적하였듯이 중국공산당이 생기자 중국혁명의 모습은 완전히 바뀌었다.
6. 중국공산당 제2차 전국대표대회(2대)와 민주혁명강령의 제정
중국공산당 건립 후의 중요사업
중국공산당 1대 이후 당의 사업은 점차 정상적인 궤도에 올랐다. 진독수는 광동정부 교육위원회 위원장직을 사임하고 상해로 돌아와 당 중앙사업을 주관하였다. 1921년 11월, 그는 ≪중국공산당 중앙국 통고≫에 서명하여 이를 전 당사업에 대한 통일부서로 삼아 전 당사업 전개를 추진하였다. 1대 후 당의 중요한 사업으로는 다음을 들 수 있다.
첫째, 1대 대표가 각지로 돌아가 사업전개에 노력하였고, 새로운 동지들을 흡수하여 당의 대오가 부단이 확대되어 2대 이전 당원 수는 195명에 달하였다. 사회주의청년단도 빠른 발전을 거듭하여 전국적으로 17개 지방에 조직이 건립되었으며 그 단원도 5,000여 명으로 증가되었다.
둘째, 당은 주요역량을 노동운동에 집중하였다. 1921년 8월, 상해에서 중국노동조합서기부를 성립시키고 그 기관지 ≪노동주간≫을 창간하였으며, 동시에 북경·한구·장사·광주·제남 등지에 분부를 성립시켰다. 이들은 전국 각지 노동운동을 지도하는 당의 공개기관으로서 전국의 노동운동의 보조를 통일시켰다. 많은 당원들은 철로·공장·광산 등에 들어가 노동자야학을 운영한다든지 노동조합을 건립한다든지 하여 농해·경수·월한 철도 노동자와 방직·연초·토목건축·인력거 등 각 노동자의 다수에 걸친 파업투쟁을 지도하였다. 1922년 1월부터 홍콩의 3만여명의 선원과 운수 노동자들이 거행한 대파업은 중국 노동운동의 첫번째 고조의 서막을 열었다.
셋째, 당은 마르크스주의를 계통있게 전파하기 위하여 상해에 인민출판사를 만들고 마르크스 전서 2종, 레닌 전서 5종, 공산주의 총서 5종 등 총 3만6천 부를 출판하였다. 각지 당 조직은 마르크스 기념회를 개최하고 마르크스기념책 2만 본을 인쇄·발송하였다. 청년단은 반월간 ≪선구≫를 창간하였고, 당은 상해에서 평민여학을 운영하여 부녀운동의 핵심간부를 배양하였다. 이러한 활동은 마르크스주의를 진일보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넷째, 중국공산당은 장국도 등 14명을 대표로 파견하여 1922년 1월 코민테른이 개최한 극동 각국 공산당 및 민족혁명단체 제1차 대표대회*에 참석시켰다. 이번 회의는 워싱턴회의의 침략적인 면을 폭로하여 극동 인민들의 각성을 촉진시키기 위해 개최된 것이었다. 회의는 식민지·반식민지국가의 투쟁임무를 명확히 지적하였는데, 그것은 제국주의와 봉건주의는 중국과 극동 각 피압박 민족의 주요한 적이라는 것이었다. 회의는 중국과 동방 각 민족 인민이 반제·반봉건 민족민주혁명을 진행할 것을 호소하고 반제통일전선의 구호를 제기하였다. 회의기간에 레닌은 병이 있었음에도 중국 대표를 접견하여 중국공산당이 중국국민당과 합작할 의사가 있는지. 여부를 묻고 중국 노동자계급은 기타 혁명역량과 단결하여 중국혁명을 전진시키라고 독려하였다. 이번 회의는 중국공산당에게 민주혁명강령의 제정과 통일전선책략의 형성에 중요한 지도작용을 하였다.
* 1922년 1월 21일부터 2월 2일에 걸쳐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극동 각국 공산당 및 민족혁명단체 제1차 대표대회를 말한다. 이 대회는 코민테른에서 발기하였다. 이 대회에 표결권을 가지고 참가한 대표는 모두 178명이었고, 39명의 중국 대표 중 14명이 공산당원이었다. 이 대회에서는 중국과 극동 각 피압박 민족의 당면의 혁명임무는 반제국주의·반봉건주의 민족민주혁명이라고 명확히 제기하였다. 이 대회는 중국국민당과 중국공산당이 연합하는 정책을 세우는 데 중요한 외부적 계기로 작용하였다.
다섯째, 국공합작 문제를 탐색하였다. 손중산이 광동에서 두번째로 정권을 수립하여 광동·광서를 통일하고 광서로부터 호남에 걸친 북벌을 준비할 때인 1921년 12월 하순, 코민테른 대표 마린은 장태뢰를 동행하여 계림에 도착하여 손중산과 회담하였다. 손중산은 마린에게 중국문제에 대해 두 가지건의를 하여 동의를 얻어냈다. 그것은 지금 중국혁명에는 훌릉한 정당이 필요한데 이 당은 각계 인민, 특히 노동자·농민과 연합하여야 한다. 또 다른 하나는 혁명에는 무장핵심이 있어야 하는데 군관학교를 운영함으로써 혁명적 군사핵심을 배양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국내 각 파 군벌 사이의 쟁탈은 제국주의의 지지를 받아 더욱 치열해져 갔다. 1927년 직환전쟁* 이후 1922년에는 또 다시 직봉전쟁**이 터져 잇따른 전쟁으로 인민들은 심각한 재난을 받았다. 1922년 초 손중산의 북벌은 또 다시 진형명의 제지를 받아 그는 할 수 없이 노선을 변경하여 4월에 광동으로 돌아왔다. 6월 16일 진형명은 또 다시 무장정변을 일으켜 손중산을 고민에 빠뜨렸다. 손중산은 혁명에서 승리를 쟁취하려면 반드시 새로운 역량을 찾아야만한다는 사실을 인식하였다. 이 때 중국공산당도 손중산과의 연합전선의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탐색하기 시작하였다. 1922년 4월 말에서 5월 초에 이르기까지 중국공산당 중앙은 광주에서 간부회의를 개최하여 국민당과의 연합책략을 초보적으로 결정하였다. 6월 15일에는 ≪중국공산당의 첫번째 시국에 대한 주장≫을 발표하여 ≪중국 현존의 각 정당중에서 국민당만이 비교적 혁명적인 민주파다≫라는 인식에 도달하였으며 양당 ≪공동의 민주주의연합전선의 건립으로 봉건식의 군벌과 계속하여 전쟁하기를≫*** 건의하였다.
* 직례파 군벌과 안휘파 군벌 간의 전쟁.
** 직례파 군벌과 봉천파 군벌 간의 전쟁.
*** ≪중공중앙문건선집(1), 37쪽, 45∼4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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