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역사(중국)

중국의 철학, "공자(孔子)"

지식창고지기 2010. 4. 17. 08:24

 

공자의 생애

 

공자는 노나라 창평향 추읍에서 태어났다.(B.C. 551년, 노양공 22년). 그의 조상은 원래 송나라의 귀족이었으나 노로 망명하였다. 공자의 아버지 공흘은 자가 숙량이었다. 그러므로 보통 숙량흘이라고 불리우고 있다. 어머니 안징재는 공자를 낳을 당시 10대의 어린 소녀였다. 60세가 넘은 숙량흘은 안씨의 셋째 딸을 후처로 맞이한 것이다.


공자의 출생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전설이 있다. 즉 어머니가 이산에 기도를 드려 공자를 낳았다고 한다. 그의 머리 가운데는 들어가고 나온 데가 있어 이름을 구(丘 : 언덕)라고 했다고 한다. 무인이었던 공자의 부친은 그가 세 살 때 돌아가시고, 모친은 그가 24세 때 세상을 떠났다. 공자는 어릴 적에 제기를 벌여놓고 예를 베푸는 놀이를 즐겼다고 한다. 이는 그가 어려서부터 비범한 자질을 보인 것이라고 하겠다.


그에게는 고정된 스승이 없었다. 그는 다만 타인의 장점을 본받고, 단점을 타산지석으로 삼은 것이다. 그러므로 자공은 "우리 선생님께서야 어디에서나 배우시지 않은 데가 있겠습니까? 또한 어찌 정해진 스승이 있겠습니까(자장-22)?"라고 말한 것이다.


공자는 19세 때(B.C. 533년) 견관씨의 딸과 혼인하여 다음해 아들 리를 낳았다. 그는 결혼하던 해에 벼슬길에 나아갔다. 노나라 계씨의 창고 관리직을 맡은 그는 곡물출납을 성실히 수행하였다. 그리고 21세 때 가축을 관리하는 일을 맡에 그 번식에 힘을 기울였다.


그는 이미 30대 청년시절에 제자들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이 무렵 노나라의 실권을 장악한 이는 삼환씨였다. 이들은 국토를 채읍으로 삼고 군대와 가신을 길렀다. 이에 위협을 느낀 소공은 계평자를 제거하기 위해 군사를 동원하였다. 그러나 삼환씨의 단결된 무력에 패하여 그는 제나라로 도주하였다. 공자도 패배한 임금의 뒤를 쫓아 제나라에 갔다(B.C. 517년, 공자 35세 때).


제나라 경공을 만난 공자는 정치의 요체를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며, 아비는 아비다워야 하고, 아들은 아들다워야 합니다 (안연-11)."라고 말해 주목을 받기도 한다.


제나라에서의 관직 등용에 실패한 공자는 악장을 만나 순임금의 소를 듣고 큰 감명을 받기도 했다. 그는 이 음악으로 인해 석달 동안 고기맛을 잊었다고 한다(술이편). 공자가 다시 노나라에 돌아온 뒤에도 정치는 어지러워만 갔다. 임금인 정공은 아무런 실권이 없었고 계씨는 계씨대로 가신들의 발호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즉 가신 양화가 공산불뉴와 손잡고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이들의 반란은 계환자의 계략으로 간신히 수습되었다.


공자는 51세 때(B.C. 501년) 노나라 중도의 재에 임명되었다. 중도 고을은 그가 다스린지 1년만에 치안과 질서가 바로잡혀 다른 고을의 모범이 되었다고 한다. 다음 해 노나라 정공과 제나라 경공이 협곡에서 회맹하였다. 이 때 경공은 무력으로 정공을 위협했으나 공자는 그의 야비한 처사를 꾸짖었다. 이에 제나라는 사과하는 뜻에서 이전에 빼앗았던 세 고을을 노나라에게 되돌려 주었다고 한다. 이런 공로로 공자는 다음 해(B.C. 499년, 53세 때_ 사공(건설부 장관), 그리고 다시 다음해에는 대사구(법무부 장관)로 승진하였다. 그는 곧 삼환씨의 세력 근거지인 세도성을 허물기로 하였다. 이는 바로 임금의 권위와 실권을 회복시키고자 한 조처였다. 이 일은 맹손씨 가신의 저항에 부딪혀 실패하고 만다.


그러나 B.C. 496년(56세 때) 정승의 일까지 겸직하게 된 공자는 관리의 기강을 바로잡기 위해, 대부 소정묘를 처형했다. 이렇게 되자 이웃 제나라에서는 노나라의 국력이 비대해짐을 두려워하게 된다. 그들은 대부 여서의 책략을 채택하여 노래와 춤에 능한 미녀 80명과 말 120필을 노에 보냈다. 정공과 계환자는 이 선물을 받고 사흘이나 조회를 열지 않았다고 한다. 이에 공자는 이들과는 큰 일을 함께 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벼슬을 버린다.


자신의 경륜을 펼치기 위해 주유천하의 길을 나선 공자는 위·조·송·정·진·채·초를 방문하였다. 공자는 여행 중 여러 차례 고난과 박해를 당해야 했다. 그는 송나라에서는 생명의 위협을 겪었고, 또한 광에서는 양호로 오인되어 닷새 동안 잡혀 있기도 했다. 또한 진·채에서는 7일간이나 양식이 떨어져 고생하였다. 이렇게 공자는 13년 동안이나 여러 나라를 순방하며 자기의 도덕정치를 채택할 임금을 찾았으나 끝내 만날 수 없었다. 당시의 제후들은 공자의 주장을 현실과 동떨어진 이상으로만 생각했다. 그것은 이들이 무력에 의한 영토 확장과 권모술수에 의한 권력 유지에만 급급했기 때문이다. 제후들을 설득하는데 실패한 공자는 후진의 교육을 위해 13년 동안의 유랑생활을 마감하고 다시 노나라에 돌아온다(B.C. 484년, 68세 때).


고국에 돌아온 그는 시·서·역·예·악·춘추를 재편찬하여 이를 정식 교재로 채택하였다. 그의 이와 같은 조처는 후진들이 전통문화를 계승하고 새로운 문화를 창출하는데 큰 도움을 주게 된다. 그러나 교육에 전념하는 그에게 슬픈 일이 연이어 일어났다. 즉 그의 외아들 리가 5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것이다(B.C. 483년, 공자 69세).


리가 죽은 다음해인 B.C. 482년에는 그가 가장 아끼던 제자 안연이 또 죽었다. 이때 그는 "아! 하늘이 나를 망쳤구나! 하늘이 나를 망쳤구나(선진-8)!"하고 탄식하며 절망에 잠겼다.


비극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다시 2년 후에는(B.C. 479년(노애공 16년, 73세) 4월 기축일에 숨을 거두고 만다. 그는 만년에 자기의 한평생을 이렇게 술회한 바 있다.


"나는 열다섯 살에 학문에 뜻을 두었고, 서른 살에는 뜻이 뚜렷하게 섰으며, 마흔 살에는 판단에 혼란이 없게 되었고, 쉰살에는 하늘이 내린 사명을 알게 되었으며, 예순 살에는 듣는 대로 그 뜻을 저절로 알게 되었고, 그리고 일흔 살에는 무엇이든지 하고 싶은 대로 하여도 법도를 벗어나지 않게 되었다(위정-4)."


공자는 이처럼 자기 완성을 위해 한평생 노력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만대의 사표가 된 것도 우연한 일은 아닐 것이다.

 

공자의 교육관

 

공자는 학문과 수양에 남다른 열성을 지닌 이였다. 그는 특히 시와 예를 중요시했다. 그러므로 아들 리에게 사람은 시를 배우지 않으면 할 말이 없고, 예를 배우지 않으면 세상에 나설 수 없다고 했다. 그는 시를 통해서 지식을 넓히고 정서를 순화하고자 했다. 또한 예로는 자기의 몸가짐을 단속하여 인에 이르고자 한 것이다. 교육자로서 뛰어난 자질을 갖춘 공자를 안연은 이렇게 평하였다.

"선생님의 덕은 우러러 볼수록 더욱 높고, 뚫을수록 더욱 굳으며, 앞에 계신 것을 본 것 같은데 어느덧 뒤에 계신다. 또한 차근차근 사람을 이끌어 학문으로 나를 넓혀 주시고, 예절로 나를 다듬에 주신다. 내가 그만 배우려고 해도 그만둘 수 없게 하시고, 내 능력을 다해 좇아 배우나 더욱 우뚝 서 계신 듯하다. 그러므로 아무리 따르고자 하여도 미처 따라 갈 수가 없는 것이다(자한-10)."


그의 가르침은 주입식이 아니고, 제자들의 자질과 개성에 맞추는 계발식이었다. 그러므로 똑같은 질문에도 그의 대답은 제자에 따라 달랐던 것이다. 예컨데 선진편의 자로·염유와의 다음과 같은 대화가 이를 말해 주고 있다.


자로가 '옳은 말을 들으면 바로 행하여야 합니까?' 하고 물으니, 선생님께서 대답하셨다. '부형이 계시는데 어찌 여쭈어 보지 않고 바로 행하겠느냐?' 이번에는 염유가 '옳은 말을 들으면 바로 행하여야 합니까?' 하고 물으니, 선생님께서 대답하셨다. '듣는 대로 바로 행하라.' 이에 공서화가 여쭈어 보았다. 유가 '듣는 대로 바로 행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을 때는 부형이 계시니라고 하시고, 구가 '듣는 대로 바로 행하라'고 하시니, 저는 의아하여 그 이유를 여쭈어 보고 싶습니다. 이에 선생님께서는 말씀하셨다.


'구는 소극적이기 때문에 앞으로 나아가게 한 것이고, 유는 지나치게 적극적이기 때문에 뒤로 조금 물러서게 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한 모퉁이를 가르치면 나머지 세 모퉁이를 알아야 한다고 했다. 이는 피교육자의 자발적 노력과 분발을 촉구한 것이다. 그는 시와 예 이외도 서경·역경·악·춘추를 정식 교과목으로 가르쳤다. 그의 제자들 중에는 이 6경에 통달한 이가 칠십 여명이나 된다고 한다. 그는 누구에게나 차별없이 교육을 베풀었다. 다만 속수를 예물로 받았다. 이는 피교육자에게 그만한 성의와 예절을 가르치고자 한 것이다. 또한 후배의 발전에 상당한 기대감을 지니고 있었던 그는 "젊은 사람들은 두렵다. 미래의 그들이 현재의 우리보다 못하리라고야 할 수 있겠는가(자한-22)?" 라고도 말했다.


제자에 대한 사랑이 지극했던 그는 안연이 죽었을 때 하늘이 자기를 망쳤다고 하며 비탄에 잠기여 자기의 학통을 이어줄 수제자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았던 것이다. 그가 세상을 떠난 후 제자들은 그의 무덤에서 3년간 시묘하였다. 3년이 되자 제자들은 통곡하고 제각기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자공은 다시 3년을 더 시묘하였다. 자공은 일찍이 공자의 인품을 이렇게 평가하였다.


"내가 우리 선생님을 따라갈 수 없음은 마치 사다리를 밟고 하늘에 오를 수 없음과 같다(자장-25)."


또한 유약도 사람이 생겨난 이래로 공자처럼 위대한 인물은 없다고 했 . 그의 탁얼한 인격과 성실한 가르침은 제자들에게 불멸의 인상을 심어준 것이다.

 

공자의 정치관

 

공자의 정치철학은 가족관념의 확장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하자면 가정에서 아버지는 장애로써 가족을 돌보기 마련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천자는 자애와 덕으로써 다스려야 하는 것이다.


그는 위정자는 먼저 자기의 몸가짐을 바르게 해야만 백성들이 따르게 됨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그는 백성을 형벌로 다스리면 법망을 피하고자 할 뿐 수치심이 없게 되나, 덕으로 다스리면 부끄러움을 알고 또한 착하게 된다고 했다. 공자는 또한 군자의 덕은 바람이요, 소인의 덕은 폴이라고 하여, 바람이 지나가면 풀은 눕게 된다(안연-19)고도 했다. 이는 위정자 자신이 모범과 준법정신을 보이면 백성도 따라 선행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공자는 사회적 혼란의 수습책으로 정명론을 내세운 바 있다.


자로가 공자께 위나라 임금이 정치를 맡긴다면 무슨 일부터 하시겠습니까? 하고 묻자 명분을 바로잡겠다고 한 것은 유명한 이야기다(자로-3). 또한 제경공이 정치의 요체에 대해 묻자, 그는 군군신신부부자자(君君臣臣父父子子)라고 대답하였다. 이는 곧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며, 아비는 아비다워야 하고 아들은 아들다워야 한다는 뜻이다. 즉 이름만의 임금이나 아버지가 아닌 이름에 값하는 임금이나 아버지가 되어 그 책임과 역할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다.


당시 제나라 경공은 실권을 대부인 진환에게 빼앗긴 채 허위를 지킬 뿐이었다. 또한 노나라도 삼환세력이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중 계손씨는 노나라 영토의 2/4를 채읍으로 차지했으며, 맹손씨와 숙손씨가 그 나머지를 절반씩 나누어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임금은 실질적으로 다스릴 수 있는 영토가 없는 셈이다. 계손씨는 이렇게 비대해진 자기 세력을 믿고 천자만이 줄 수 있는 팔일무를 자기집에서 추게 하였다. 공자는 이와 같은 권신들의 무도한 행위에 대해 노여움을 품고 있었다. 그의 정명사상은 명분을 바로잡고 신분질서의 확립을 통해 정치적 무질서를 추방하자는 것이었다. 그는 또한 위정자는 백성들에게 예치와 인정을 베풀어 그들을 심복케 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그의 덕치주의는 법가계열의 권력 지상주의와 냉혹한 인간 조종술과는 대립되는 것이다. 그리고 당대의 군주들에게는 현실과 동떨어진 이상으로만 인식되었다. 그가 끝내 정치적으로 아웃사이더의 입장을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은 당대 위정자들의 이와 같은 편견 때문이었다.

 

공자의 종교관

 

공자의 가르침은 실천윤리일 뿐 종교적 관념은 없다고 생각하는 이도 많다. 그들이 그 근거로 선진편의 "아직 사람도 제대로 섬기지 못하면서 어찌 귀신을 섬길 수 있겠느냐?" 아직 삶도 알지 못하는데 어찌 죽음을 알 수 있겠느냐?"와 술이편의 "선생님께서는 괴이한 일, 폭력, 난동, 그리고 귀신에 관해서는 말씀을 않으셨다."를 예로 들고 있다. 이들의 관점으로는 공자의 관심은 어디까지나 가지의 세계에 국한되었다는 것이다.


그가 초자연적인 세계나 내세문제보다는 현세의 일에 치중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순서에 관한 문제일 뿐 그도 천명(天命 : 하늘의 뜻)에 대한 진지한 관심과 열성적인 신앙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므로 공자는 송나라의 사마환퇴에게 생명의 위협을 당할 때에도 "하늘이 내게 덕을 내리셨거늘, 환퇴가 감히 나를 어찌하겠느냐(술이-22)?"고 말하며 태연자약하였다. 또한 그는 "하늘에 죄를 지으면 빌 곳이 없다(팔일-13)."라든가 "군자가 두려워해야 할 일이 세 가지 있다. 천명을 두려워해야 하고, 큰 인물을 두려워해야 하며, 성인의 말씀을 두려워해야 한다(계씨-8)." 그리고 "천명을 모르면 군자가 될 수 없다(요왈-3)."고 했다. 이는 그가 하늘을 만물의 주재자요, 의지를 지닌 존재로서 열렬히 신앙하고 있다는 뜻이다. 또한 공자를 귀신의 존재를 부정한 무귀론자로 보는 이도 있다. 송대의 주희도 그와 같은 견해를 지닌 바 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그는 제 귀신이 아닌데 섬김은 아첨이라고 말했으나, 이는 바로 자기의 조상에 대해서는 반드시 섬겨야 한다는 의미이다.


그는 제사 때에 마치 조상의 혼백이 강림한 것처럼 온갖 정성과 경건함을 다하였다. 이는 그가 조상신에 대해서도 거의 종교에 가까운 숭배심이 있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는 늘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며, 하늘의 뜻에 따르고자 하는 자세로 일관하였다. 그러므로 공자의 천은 종교적 의미를 지닌 존재로 간주해도 무방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