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역사(중국)

마오쩌둥(毛澤東)

지식창고지기 2010. 4. 19. 08:41

마오쩌둥(毛澤東)

마오쩌둥(毛澤東)의 일생

1911년 10월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혁명군에 입대하였다가 1912년 제대한 뒤 제1중학에 입학하였으며, 다시 제1사범학교에 입학하였다. 대학이나 외국유학을 하지 못한 그는 이 학교에서, 영국에 유학하고 돌아와 중국의 봉건사상 비판에 힘썼던 교사 양창지[]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재학 중인 1917년, 거의가 제1사범학교 학생들로 구성되고 후난성 혁명 지식인들의 본영이 된 신민학회()를 조직하였다.

1918년 학교를 졸업한 뒤 베이징[]으로 가서 후난 청년들의 외국유학을 도왔다. 그해 10월 마오쩌둥은 소년중국학회에 가입하였고, 양창지의 소개로 베이징대학 도서관 주임인 리다자오[]의 조교로 일하면서 방청하였으며 철학회와 신문학연구회()의 활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또 양창지에게 유물론적 철학과 윤리학 강의를 받았고 비밀학생단체들과 접촉하면서 무정부주의에 관한 책을 많이 읽어 그의 사상은 마르크스주의로 기울게 되었다.

1919년 5·4운동 발발 후 후난학생연합회를 설립하고 《샹장평론[]》을 펴냈으나 곧 폐쇄당하고 베이징으로 도망쳤으며, 러시아혁명에 관한 책을 많이 읽었다. 1920년 상하이[]에서 천두슈[]를 만났으며 다시 창사로 돌아와 1924년까지 창사 제1사범학교의 부속소학교 교장 겸 사범부의 어문() 교사가 되었다. 1922년 양창지의 딸 양룬후이[]와 결혼하였고, 그해 7월 상하이의 중국공산당 창립대회에 참가하였으며, 후난성 대표로서 중국공산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에 출석하였다.

1924년 국공합작()이 되자 공산당 중앙위원, 국민당 제1기 후보, 중앙집행위원, 선전부장 대리, 중앙농민운동 강습소장, 정치주보 사장 등을 겸임하였다. 1926년 장제스[]의 숙청으로 상하이에 갔다가 1927년 우한[]으로 가서 중국공산당 중앙농민부장이 되었고 국공분열() 뒤 농홍군() 3,000명을 조직하여 징강산[]에 들어가 근거지로 삼고 주더[]의 군대와 합류하였다. 이듬해 공농홍군() 정치위원이 되었고, 1930년 홍군 제1방면군 군사위원, 중국 공농혁명위원회 주석에 올랐다.

1931년 장시성[西] 루이진[]의 중화 소비에트정부 중앙집행위원회 주석이 되었고, 그 인민위원회 주석으로 뽑혔다. 1934년 10월 루이진에서 산시성[西] 옌안[]까지의 1만 2,500km에 이르는 대서천(西)을 시작하였으며, 도중에 구이저우성[] 쭌이[]회의에서 당 지도권을 장악하였다. 시안사건[西]을 거쳐 국공합작에 성공하자 항일()민족통일전선을 수립하고, 홍군을 국민혁명 제8로군으로 개편하여 일본군에 대항하였다. 그리고 《지구전론()》(1938) 《신단계론()》(1938) 《신민주주의론》(1940)을 발표하였는데, 마지막 것은 중국공산당 강령으로 채택되었다.

1945년 4월 중앙 제7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정치보고로 연합정부론을 발표하였고, 중앙위원회 주석이 되었다. 전쟁이 끝난 뒤인 1945년 8월 충칭[]에서 장제스와 회담하여 화평건국의 제원칙에 합의하였으나 실행이 불가능하게 되자, 1946~1948년 내전을 벌여 승리하였고,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를 베이징에 세우고 국가주석 및 혁명군사위원회 주석으로 뽑혔다. 1949년 12월 소련을 방문하여 1950년 2월 중소우호동맹호조조약과 기타 협정을 맺었다.

 

1957년 반우파() 투쟁과정에서 《인민 내부의 모순을 바로잡는 문제에 대하여》를 발표하였고, 1958년 제2차 5개년계획의 개시와 더불어 ‘총노선’ ‘대약진’ ‘인민공사’ 등 이른바 3면홍기()운동을 폈다. 1959년 4월 국가주석을 사임하고 죽을 때까지 당주석으로만 있었다. 1964년 4월 《마오쩌둥어록[]》을 간행시켰고, 1965년 10월 이후에는 당내에서 완전 고립되어 연금상태에 있었으나 문화대혁명을 지휘하였으며, 1960년 이후의 중소논쟁과 문화대혁명 기간을 통하여 ‘마오쩌둥사상’을 높이 내걸었다.

1968년 10월, 1959년부터 국가주석으로 있던 류샤오치[]를 실각시켰다. 1969년 마오쩌둥-린뱌오[]체제가 확립되는 듯하였으나, 1971년 9월 린뱌오는 반()마오쩌둥운동에 실패하여 죽었다. 1970년 헌법수정초안을 채택하여 1인체제를 확립하고 중국 최고지도자로 군림하였다.


그러나 그가 사망하기 직전인 1976년 4월 대중반란이라고도 할 천안문사건()이 일어나 위대한 영웅 ·독재자 마오쩌둥은 완전히 고립된 채 죽음을 맞이하였다. 그의 전생애를 살펴볼 때, 중국의 독립과 주권을 회복하고, 중국을 통일하여 외세에 의해 국토를 유린당한 중국민들의 굴욕감을 씻어주며, 관료제도를 견제하고 대중의 정치참여를 유지하여, 중국의 자립을 강조한 그의 목표는 칭송할 만한 것이었으나, 2가지 개혁정책인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은 잘못된 것이었다.

모택동사상 (毛澤東思想)

중국공산당 전(前)주석 마오쩌둥[毛澤東(모택동)]의 혁명사상.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중국적 발전형태라고도 할 수 있는 이 사상은 전략과 전술, 세계인식 및 당면의 사회주의 건설이념 등을 포괄한 중화인민공화국의 국가적 이데올로기였다. <마오쩌둥사상>이라는 말은 1945년의 중국공산당 제7차전국인민대표자회의(7전대회)에서 당규약에 규정되었는데, 그 후 1958년의 8전대회에서는 스탈린 비판의 영향도 있어 당규약으로부터 삭제되었다. 그러나 1965년 후반부터 개시된 이른바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에서는 중·소논쟁의 격화와 더불어 다시 마오쩌둥사상의 우위성이 강조되기 시작하였다.

 

문화대혁명은 마오쩌둥사상으로 일색화된 중국공산당의 재건과 마오쩌둥사상에 의한 권력지배의 일원화를 추구하여, 마오쩌둥 자신이 발동한 격렬한 당내투쟁이며 광범한 대중이 참가한 대중운동화된 권력투쟁이었다. 1969년 4월의 중국공산당 제9전대회에서 새로 채택된 당규약 총강에서는 <중국공산당은 마르크스주의·레닌주의·마오쩌둥사상을 자기 사상을 지도하는 이론적 기초로 삼는다>라고 규정하였다. 종래의 <마르크스-레닌주의>라는 표현에서 <마르크스주의·레닌주의·마오쩌둥사상>이라는 표현으로 변화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마르크스시대나 레닌시대와 다른 마오쩌둥시대의 도래가 역사적으로 구분되고 공식적으로 창도(唱導)된 것이다. 동시에 <마오쩌둥사상>은 제국주의가 전면적으로 붕괴되어가고 사회주의가 전세계적으로 승리해 가는 시대의 마르크스-레닌주의>라고 규정되었다. 여기에서 볼 수 있듯이 마오쩌둥사상이란 단순히 마오쩌둥의 혁명사상 일반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마오쩌둥적인 이론과 실천의 한 포괄적 체계로서 격상된 개념을 말하며, 확실히 마오쩌둥주의 (Maoism)라고 바꾸어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에는 마오쩌둥사상을 유일한 정통 마르크스-레닌주의, 나아가서 그 발전의 최고 형태로서 그것을 보편화시키고자 하는 원망(願望)과 집념이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마오쩌둥사상에는 중국민족의 재생과 통일을 갈구하는 강렬한 민족의식 아래, 반봉건·반식민지의 광대한 토양에서 농민 주체의 무장투쟁으로 전개되어 간 중국혁명의 특징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마오쩌둥사상의 기본적인 성격으로서 ① 농민, 특히 빈농·하층중농에 의거한 농민 주체적 혁명경험의 절대화 ② 대단히 독창적인 유격전의 전략·전술 및 <정권은 총구로부터 태어난다>라는 신념에서 볼 수 있는 마오쩌둥 군사사상의 전면적 발현 ③ 이러한 중국혁명의 경험을 중화사상(中華思想)의 확대재생산이라고도 할 수 있는 민족의식으로 지지하고 있는 강렬한 내셔널리즘 등을 들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