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역사(중국)

덩샤오핑 (鄧小平)과 중국의 개혁개방

지식창고지기 2010. 4. 19. 08:43

덩샤오핑 (鄧小平)과 중국의 개혁개방

 

 

덩샤오핑의 연대기

출생/사망 : 1904년 08월 22일 / 1997년 2월

학력 : 고급중학, 모스크바 중산대학

경력 : 톈안먼사건 무력 진압(1989), 공산당 중앙군사위 주석(1981),
         국무원 부총리(1973), 중앙위원회 총서기(1956),
         정치국 위원(1955), 중앙인민정부 위원(1949),
         중국 공산당 입당(1924)

 

출생지 : 중국 사천성
◇1920년 `근공검학'으로 프랑스에 유학.

◇24년 중국공산당 유럽지부에 입당.

◇26년 소련의 동방대학 및 중산대학에 유학.

◇27년 모스크바에서 귀국해 국민당파 군벌 평위시앙 휘하에 들어감.
   국공합작 파기 뒤 베이징을 탈출해 광시에서 지하활동. 이때부터 본명인
  `부솅' 대신 `샤오핑'이란 가명 쓰기 시작.

◇29년 광시성에서 농민폭동 주도, 홍군 제7·8군 창설.

◇1931년 마오쩌둥의 홍군 제1군단에 합류, 홍군 총정치부 부주임 및 장시
   소비에트구 현위원회 서기 겸 기관지 <홍성보> 총편집인에 취임.

◇33년 `마오 일파'로 몰려 실각.

◇34~36년 `대장정' 참가, 당 중앙비서장에 선임.

◇37년 8로군 129사단 정치위원.

◇1949년 양쯔강 도하해 국민당 정부수도 난징 공략, `제2야전군' 사령원 겸
   정치위원으로 쓰촨·구이저우·윈난·시짱(티베트) 함락.

◇1952년 정무원 부총리 및 국가계획위원회 위원.

◇54년 부총리 겸 국방위원회 부주석에 피선.

◇56년 당 8기 8중전회 1차회의에서 당정치국 상임위원 겸 주앙위 총서기
   에 선출돼 집단지도체제의 핵심대열에 합류.

◇1967년 모든 공직에서 파면.(1차실각) ◇68년 장시성으로 추방. (2차실각) ◇1973년 국무원 부총리에 복귀.

◇75년 인민해방군 총참모장 겸임.

◇76년 저우언라이 총리 추모인파로 빚어진 `천안문사건'의 책임자로 몰려
   직무박탈.(3차실각) ◇77년 당10기 3중전회에서 부총리·인민해방군 총참
   모장직 등 회복.

◇1981년 당중앙군사위원회 주석 취임. 완전한 실권장악.

◇83년 6기전인대 1차회의에서 신걸된 국가중앙군사위원회 주석에 선출.

◇89년 `천안문 사태' 유혈진압.

◇1990년 7기 전안대 3차회의에서 국가중앙군사위 주석직 사임함으로써
   일체의 공직에서 물러남.

◇91년말~92년 2월 `남순강화' 통해 개혁·개방 촉구.

◇97년 2월19일 사망.



덩 샤오핑(鄧小平)의 일생

13억 중국 대륙을 개혁과 개방의 길로 이끈 덩샤오핑(93)의 생애는 `부도옹'(오뚝이)라는 그의 별명처럼 좌절과 재기가 반복된 파란만장한 것이었다.

 

1904년 쓰촨성 파이팡 마을의 부유한 객가 집안에 태어난 덩의 인생에 결정적 영향을 준 것은 파리 유학생활이었다. 1920년 16살의 나이에 당시 근로장학제도인 `근공검학'을 통해 프랑스에 유학한 그는 파리에서 직공으로 어려운 고학생활을 하며 훗날 중국 총리에 오른 저우언라이 등 `근공검학' 출신 유학생들과 인연을 맺었다. 이들로부터 사상적 영향을 받은 그는 1922년 `중국사회주의청년단'에 가입한 데 이어 2년 뒤에는 중국공산당 유럽지부에 입당함으로써 정식 당원이 된다.


덩은 이어 아시아지역 청년 공산당원들의 훈련소였던 모스크바의 중산대학과 동방대학 유학생으로 선발됐다. 중국공산당과 국민당 사이에 국공합작이 이뤄졌던 시기였기 때문에 그의 동급생 가운데는 훗날 초대 대만총통이 된 장졔스의 아들 장징궈와 베이징 지역을 지배하던 군벌 펑위시앙의 아들 펑퍼눙도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11개월에 걸친 정치·군사 교육을 받은 덩은 중국공산당의 국공합작 노선에 따라 펑위시앙의 자문역으로 파견됨으로써 중국혁명에 첫 발을 내딛게 됐다. 이때부터 그는 자신의 본명인 `부셴'을 버리고 `샤오핑'이란 가명을 쓰기 시작했다.


그러나 장졔스의 정변으로 국공합작이 파기되면서 신변위협속에 구사일생으로 베이징을 탈출한 덩은 1929년 남서부 광시 지방에서 봉기를 주도하면서 인민해방군의 뿌리 중 하나인 홍군 제7군과 8군을 조직했다. 그뒤 국민당 정부군에 밀려 장시성으로 쫓겨간 그는 저 유명한 `징강산 근거지'에 합류해 마오쩌둥과 인연을 맺었다.


그곳에서 홍군 총부주임이란 요직에 오른 덩은 난산 끝에 사망한 첫번째 아내에 이어 동료당원인 진웨이잉을 두번째 아내로 맞았으나, 농촌을 근거지로 삼자는 마오의 노선을 지지했다는 이유로 당중앙으로부터 숙청당했다. 마오는 이때를 잊지 못한 나머지 문화대혁명 기간중 덩을 숙청하면서도 공산당원으로서 그의 당적만은 빼앗지 않도록 지시했다고 한다. 정치경력 중 최초의 숙청을 맛본 그는 독방에 연금당한 가운데 자신을 숙청한 장본인인 당 조직국 비서 뤄마이에게 아내를 빼앗기는 아픔까지 겪었다. 뤄와 재혼한 덩의 전 부인 사이에 태어난 아들인 리톄잉은 97년 현재 정치국내에서 국영기업을 담당하는 요직을 맡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연금에서 풀려나 평당원으로 백의종군한 덩을 다시 일선으로 복직시킨 것은 대장정 기간중 벌어진 쭌이회의였다. 이 회의에서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 등은 국민당 토벌군에 대한 군사적 패배 책임을 물어 당지도부를 축출하고 공산당의 지도권을 잡게 됨에 따라 덩은 35년 1월 당 중앙비서장에 선임됐다.


1937년 중일전쟁이 시작되자 덩은 8로군 129사단 정치위원으로 임명돼 사단장인 류바이청과 함께 눈부신 군사적 활약을 펼치면서 1940년 지금의 부인인 푸줘린을 만났다. `유덩 대군'이란 별명까지 얻은 이 군대는 2차대전 이후 국민당 정부군과의 내전에서도 `제2야전군'으로 확대개편된 뒤 맹활약하면서 쓰촨·윈난·구이저우·시짱(티베트) 4성을 함락시켰다. 화려한 전적으로 정치적 발판을 굳힌 그는 54년 국무원 부총리 및 국방위원회 부주석에 올랐다. 당시 총리는 저우언라이였고 국방위원회 주석은 마오쩌둥이었다.


부총리로 경제정책에 참여한 그는 일찌기 50~60년대부터 `대약진운동' 등 무모한 집산화를 시도한 마오의 정책을 거침없이 비판하곤 했다. 한 주요회의에서 마오가 “반대자는 기립하라”고 해 덩이 일어서자 “덩 동지는 키가 작아 앉은키와 같으므로 안건을 만장일치 통과시키겠다”고 했을 때, 덩이 책상을 딛고 올라섰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결국 덩은 `문화대혁명'이 시작된 지 1년 만인 67년 당시 국가주석인 류샤오치와 함께 `주자파'(자본주의를 지향하는 당권파)로 몰려 실각당했으며, 이때 그의 아들은 호위병으로부터 린치를 받아 불구자가 되고 말았다.


덩은 이때의 경험 때문에 전후세대인 청년이나 대학생들과 집단행동에 극도의 불신감을 갖게 됐으며, 지난 88년 천안문 사태 당시의 강경진압도 이때의 영향 때문이라는 해석이 있다.

흑묘백묘론(黑猫白猫論)


"고양이가 검든 희든 무슨 상관인가, 쥐만 잘 잡으면 그만이지."
중국 개혁ㆍ개방의 총설계사로 중국의 오늘을 있게한 덩샤오핑(鄧小平)의 유명한 '흑묘백묘론(黑猫白猫論)'에는 중국식 시장경제의 탄생을 잉태한 철학이 담겨있다.

투철한 마르크스주의자이면서 과감한 실용주의자였던 덩샤오핑은 1979년 미국 방문을 마친 뒤 "중국을 발전시키는 데는 자본주의 경제체제건 공산주의 경제체제건 관계없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바로 흑묘백묘론의 깃발을 치켜든 것이다.

`선부론(先富論:부유할 수있는 사람부터 부유해져라)'과 함께 오늘날 `세계의 공장'으로 부상한 중국을 있게한 흑묘백묘론은 원래 쓰촨(四川)지방의 속담인 `흑묘황묘(黑猫黃猫)'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공산혁명 성공 이후 마오쩌둥(毛澤東)이 이끄는 사회주의 중국에서 덩샤오핑의 운명은 `흑묘백묘'와 함께 했다. 그는 1960년대초 대약진운동의 실패 이후 류샤오치(劉少奇)와 함께 흑묘백묘를 거론하며 실용주의적 노선을 제시했다.

하지만 마오쩌둥이 다시 정권을 장악하면서 시작된 문화혁명으로 인해 흑묘백묘는 실현되지 못하고, 덩샤오핑도 `주자파(走資派)'로 몰려 숙청을 당하게 된다. 이후 홍위병이 설치던 광풍 속에서 덩샤오핑은 남부 장시(江西)성에 있는 트랙터 수리공장으로 하방(下放)되는 시련의 시절을 보내야했다.

하지만 `오뚝이(不倒翁)' 덩샤오핑은 마오쩌둥의 사망 이후 정권을 장악하는 데 성공했고, 새로운 중국의 미래를 다시 흑묘백묘론에 담아 설파했다.

덩샤오핑은 1987년 2월 중앙부서 책임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왜 시장을 말하면 자본주의이고, 계획을 말하면 사회주의가 되는가. 계획과 시장은 모두 하나의 방법에 불과하다. 단지 경제 발전을 위해서 좋다면 이용할 수 있는 것이다. 계획, 시장 이런 것들을 사회주의에 이용하면 사회주의인 것이고, 자본주의를 위해 이용하면 자본주의인 것이다"


흑묘백묘론에는 철저한 정경분리 원칙이 담겨있다. 다시 말해 정치와 경제체제를 분리한 채 경제분야에만 실리원칙을 적용한다는 것. 정치체제는 공산주의를 유지하고 경제분야에만 시장경제를 도입한 이른바 중국식 시장경제체제가 여기서부터 출발하는 셈이다.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중국식 사회주의(혹은 자본주의)는 공산당의 철저한 계획과 배려 속에서 진행되고 있다. 안전장치가 확실하게 마련된 개혁이라는 점에서 동유럽의 그것과 근본부터 차이를 나타내고 있다.

덩샤오핑은 1985년 8월 핵심당원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우리의 원칙은 마르크스주의를 실천하는 과정에서 중국만의 독특한 길을 가자는 것이고, 우리는 이것을 중국적 특색의 사회주의 건설이라고 한다."


사회주의 중국 인민들에게 "부자가 되는 것은 영광스러운 일"이라는 실리적(또는 자본주의적) 인식을 심어준 그가 여전히 `죽은 뒤에도 중국을 통치한다'고 얘기되는 것은 현재의 중국이 그의 설계도면대로 전개되고 있기 때문인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