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역사(중국)

64. 한족 최후의 저항-삼번의 난(1673년)

지식창고지기 2010. 4. 22. 09:40

64. 한족 최후의 저항-삼번의 난(1673년)


  이자성군의 군격을 받아 북경이 함락되고 자금성이 반란군의 발길 아래 놓이게 된 것이 1644년이었다. 이자성은 대순왕의 칭호로 성대한 북경입성식을 거행했다. 중국 천하는 이자성의 새로운 왕조에 의해 장악되는 것처럼 보였다. 이자성은 법을 공표하고 지방에 관리를 파견하는 등 국가 통치체제를 정비해갔고, 대세가 이미 이자성에게로 기운 것으로 판단한 지방 세력들은 이자성에게 충성을 맹세하기에 바빴다.


  그러나 이자성군에게 가장 거치적거리는 상대가 중국의 관문이라고 할 수 있는 산해관의 수비를 맡고 있는 오삼계였다. 산해관은 예로부터 중국의 최후 관문으로 만주족의 중국침략을 저지하는 데매우 중요한 요충지였고, 그곳에는 50만의 대군이 버티고 있었다. 그 지역의 책임자가 바로 오삼게였다. 그는 이자성군의 북경 공격을 저지하기 위해 북경으로 올라가던 중 그가 도착하기도 전에 북경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받고 다시 산해관으로 돌아가 있었다.


  한편 청나라도 태종이 죽은 후 8세 된 아들이 왕위를 계승했으며, 그의 삼촌인 다이곤이 대신 통치했다. 청은 중국을 장악하려는 야심을 버리지 않고 중국으로 침략해들어오기 시작했다. 청나라가 중국대륙으로 들어오기 위해서는 산해관을 거쳐야 했다. 이 산해관은 명나라 장수인 오삼계가 지키고 있었다. 오삼계는 명조를 멸망시킨 이자성에게 굴복할 생각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청나라에 투항하겠다는 마음도 없었다. 그는 새로이 성장하고 있는 양세력 사이에서 어떻게 할 것인가 망설이고 있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그의 진로를 결정한 것은 이자성의 부하들이 그의 아버지와 그가 아끼던 여자를 잡아갔다는 소식이었다.


  이자성에게로 기울 듯하던 그의 마음은 삽시간에 바뀌어 이제 이자성을 원수로 생각하게 되었다. 오삼계는 이자성을 치기로 결정하고 청에 도움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다. 오삼계의 오청은 청에게는 말할 수 없는 희소식이었다. 중국대륙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곳이 산해관이었고, 엄청난 희생을 치러도 이길 수 있을지 없을지 확신이 안 서는 천연의 요새인 산해관의 오삼계가 도움을 청해왔으니 더 바랄 것이 없었다. 청은 오삼계의 제의를 기꺼이 받아들이면서 군대를 보내주겠다는 약속을 했다. 청으로서는 중국을 장악하는 데 가장 큰 장애물인 이자성군과 오삼계군을 동시에 약화 혹은 해체시킬 수 있는 기회가 온 셈이다. 청나라가 격파해야 할 두 적대세력이 서로 싸워 힘이 빠진다면 청나라는 간단히 중국을 차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침내 이자성군과 오삼계군은 숙명의 일전을 벌이게 된다. 오삼계는 청군을 뒤에 두고, 산해관에 다가와 있는 이자성군을 공격했다. 이 싸움에서 오삼계는 청군의 도움을 받아 이자성군을 대파했다. 이자성군은 크게 패한 뒤 한걸음에 달아나 북경으로 되돌아갔다. 이자성은 전쟁에서 패하기는 했지만 4월 29일 성대하게 황제 즉위식을 거행했다.


  그러나 황제가 된 이자성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금방이라도 청의 막강한 철기군이 북겨으로 쳐들어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자성군은 지레 겁을 먹고 북겨을 떠나기로 결정했다. 황제로 즉위한 다음날 이자성군은 북경르 떠나 서쪽으로 피했고, 그 다음날 청군은 아무런 저항을 받지 않은 채 북경에 입성했다. 북경에 입성한 청은 고통받고 있는 백성들을 압제자로부터 구해내려고 한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그들은 북경에 들어오면서 "폭력을 제거하고 백성들을 구하며 천하를 편안하게 하려고 한다"는 포고문을 내걸었다.


  북경을 장악한 청나라는 명의 숭정제를 예에 따라 장사지내고 명나라 때 관료를 지냈던 모든 사람을 간직에 복귀하도록 했으며, 관청 사무에는 만주문자와 더불어 한자를 게속 사용하도록 하는 등 한족의 반발을 최소화하는 정책을 폈다.


  그러나 아직도 겉으로는 청나라에 굴복한 것처럼 하고 있었으나 내심 청나라에 대항하는 명나라의 옛 장수들이 있는 한 청나라가 중국대륙을 완전히 장악했다고 볼 수 는 없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세력으로 오삼계군, 그리고 공유덕, 상가희, 겅중명 등이 있었다. 특히 오삼계는 이자성군을 격퇴하는 데 공을 세웠을 뿐만 아니라, 명나라 부흥운동의 정신적인 지주였던 영력제를 추적, 미얀마 에서 죽인 공을 세웠던 자이다.


  청은 이들을 회유하기 위해 남쪽지방에 이들을 왕으로 봉했다. 운남, 귀주의 오삼계, 광동의 상가회, 복건의 경중명 등이 바로 그들인데, 이들을 삼번이라고 한다. 청왕조는 명의 남은 세력을 격퇴하기 위해 이 세력을 이용했으나, 이제 명을 따르던 세력도 어느 정도 제압했고, 북경으로 수도를 옮긴 정왕조도 안정적인 기반을 다지게 된 강희제 때에 이르러 세 왕의 세력을 굴복시킬 필요가 있게 된다.


  세 왕들은 청조가 그들을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고 그들의 요구도 들어주지 않은 것을 보고 마침내 청조에 대항하는 난을 일으키게 된다. 이것을 '삼번의 난'이라고 한다. 당시 대표적인 세력이었던 오삼계는 운남지역에 강력한 세력을 형성했으며, 태종의 딸과 자기 아들을 혼인시켜 청조와 결혼관계를 맺고, 티베트와 교역, 광산개발 등으로 만만치 않은 경제력도 가지고 있었다.


  1673년 11월 오삼계는 마침내 청조에 대항하는 군대를 일으켰다. 다른 두 왕인 경정충과 상가희의 아드린 상지신이 오삼계의 군사동원에 합류하기로 결정했다. 이 세 세력은 일시에 군대를 모아 양자강 이남의 대부분 지역을 장악했다.


  오삼계는 그가 거느리는 군대를 두 갈래로 나누어 청나라의 군대와 싸웠으나, 힘이 분산되어 전세는 오삼계군에게 불리하게 전개되었다. 오삼계군이 약화될 조짐을 보이자 다른 두 왕은 오삼계와의 연합을 풀고 청나라에 굴복하려 했다. 오삽계는 전세를 자기에게 유리하게 되돌이기 위해 그의 권위를 높일 필요를 느꼈고 그리하여 스스로 황제가 되어 나라 이름을 '주'로 하고 황제에 즉위했다. 그러나 그는 즉위한 지 5개월 여 만에 죽고 말았다.


  오삽계가 죽은 후 그의 군대는 곧바로 분열되기 시작했고 마침내 청나라에 총공격을 받아 멸망하고 말았다. 눈치를 보려 이 세력 저세력에 옮겨다니며 붙던 두 왕도 역시 청왕조에 의해 제거되고, 이후 약 250여년간 중국대륙은 만주족의 처안라에게 지배항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