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역사(중국)

63. 대만, 최후의 항쟁거점이 되다-정성공의 대만 정복(1661년)

지식창고지기 2010. 4. 22. 09:40

63. 대만, 최후의 항쟁거점이 되다-정성공의 대만 정복(1661년)


  명은 중국본토에서는 소멸되었지만 이 명의 명맥을 잇겠다고 하여 본토를 떠나 대만으로 들어간 사람이 있는데 그가 정성공이다.

  그는 복건 출신으로 아버지 정지룡은 해적출신으로 명나라에 귀순했고, 어머니는 일본인이었기 때문에 정성공 역시 일본에서 태어났다. 7세 때 중국으로 들어왔으며, 청나라 군대가 한해관을 넘어 북경으로 밀려들 때 난을 피해 남쪽으로 내려온 명 황제 융무제를 만날 수 잇게 되었다. 융무제는 정성공의 비범함을 알아버고 그에게 주씨 성을 내렸다고 한다. 청의 공격을 막고 명 황제를 지킨 것은 정성공의 아버지인 정지룡 등의 군사력이었다. 그러나 정지룡은 나중에 청나라에 투항해버리고 마낟.

  정성공은 아버지의 배신행위를 눈물로 만류했지만 아버지는 아들의 뜻을 받아주지 않았다. 정성공은 이에 그의 세력을 끌고 바다로 나와 해상에서 청나라에 대항했다. 그의 목표는 북경을 장악한 청왕조를 타도하고 한족 왕조를 다시 세우는 것이었다. 그 숙원을 달성하기 위한 발판으로 우선 남경을 장악하기 위한 작전을 전개했다. 그가 군대를 일으켰을 때는 1658년으로 순치제의 통치시기였으며, 당시 정성공이 거느린 군대는 20만 정도였다. 군대를 몰아 해안 지역에서 몇번의 승리를 거두었는데, 계속되는 승리에 자만한 정성공 분대는 남경에서 결정적인 패배를 맛보게 된다. 그는 그의 생일에 맞추어 남경을 함락시켜 남경에 십성하겠다는 낭만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청의 군대를 얕보고 담비다가 청군에게 크게 패한 뒤 그는 그의 근거지인 아모이(하문)로 철수했다. 중국본토에서 유일하게 발붙일 수 있는 곳이 이곳이었다.

  북경 회복이라는 목표 달성이 어렵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자신이 있는 해상전투의 근거지를 확보하려 했고, 그런 그의 생각에 떠로른 것이 대만이었다. 원래 대만은 남방계통의 원주민들이 살고 있었는데, 중국본토에서 대만을 정보했다는 기록은 수나라 때무터 보이고 있다. 그러나 대륙의 중국인들이 대만에 본격적으로 넘어가게 된 것은 명나라에 들어와서였다. 특히 해안지대인 복건, 광동성 사람들이 대만으로 들어가 살게 된 것이다.

  이 지역에 조직적인 통치가 이루어지게 된 것은 중국인이 아니라 서양세력에 의해서였다. 1624년 네덜란드는 안평에 상륙했고, 그 당시 살고 있던 원주민인 '다이오완 족'의 이름을 따 다이완으로 부르게 되었다. 1624년 이래 정성공이 들어올 때까지 약 40여년 동안 네델란드의 동인도회사가 대만을 통치했다.

  대만 정착 한족들은 이민족의 지배에 고통당하고 있었다. 이들은 네덜란드에 저항햇으나 그때마다 많은 피해를 당했을 뿐 네덜란드를 몰아낼 수는 없었다. 따라서 이민족에게 억압당하는 것보다는 정성공이 와서 통치하는 것이 더 좋을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들 정성공의 대만 정착을 바라고 있었다.

  1661년 정성공은 마침내 대만의 네덜란드 군을 공격했다. 나쁜 기상조건을 역이용하여 전개한 기습작전에 네덜란드 군은 재대로 저항하지 못했으며, 대만에 상륙한 정성공 부대는 네덜란드 총독의 부대가 수비하고 있는 대만성을 공격하여 약 1년여 만에 네덜란드 군을 몰아냈다.

  대만에 들어온 정성공은 농민들을 위한 정책을 펴 네덜란드 식민지 시대에 비해 살기 좋은 섬으로 만들었다. 또한 토착 고산족의 생존권도 보호했다. 그러나 대만을 장악한 지 1년이 되지 못해 정성공은 39세의 나이로 죽고 말았다. 그후 그의 아들인 정경이 아버지의 자리를 이어받아 20여년간 대만을 통치했으나, 1683년에는 청나라의 공격을 받아 정경의 아들인 정극상이 청에 투항하고 말았다. 정성공이 대만으로 들어올 때 청나라를 못마당하게 여기던 상당수의 지식인들이 따라 들어왔고, 따라서 정씨 3대에 걸친 통치시기가 대만이 중국화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청은 정극상의 투항으로 대만을 차지함으로써 완전한 중국지배를 달성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뒤 19세기에 들어오면 이른바 대만사건이라는 국제분쟁이 발생하게 된다. 이 사건은 대만의 산지 거주 토착 만족이 유구인 어부를 살해한 사건이었다. 유구는 일본의 영토였고 유구인이 살해되었다는 것은 일본인이 살해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일본은 이 사건을 기화로 대만을 공격하여 산지족을 죽였으며 그 군사동원의 경비를 청나라에 요구했다.

  그후 대만은 청나라가 약해지면서 강대국의 각축장이 되어갔다. 1884년 인도차이나 반도를 놓고 청과 프랑스 사이에 싸움이 있었는데, 이때 프랑스 군대가 대만의 기륭을 공격하고 팽호도를 점령하는 사건이 있었으며, 1894년 조선을 사이에 두고 청일전쟁이 일어나 청나라가 패하게 되면서 시모노세키 조약을 맺어 요동과 함께 대만을 일본에 넘겨주었고, 그후 1945년 일본이 2차 세계대전에서 패할 때까지 대만은 일본의 식민통치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