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 사회주의 경제체제의 수립을 위해 - 집단농장화 및 대약진운동(1950년대 후반)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
1954년 / 사사오입 개헌
1956년 / 3대 정, 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이 대통령,장면이 부통령에 당선됨
한국전쟁이 끝나가는 52년경 중국에서는 토지개혁도 어느 정도 마무리되어 본격적인 사회주의 경제체제를 수립하기 위한 계획이 세워진다. 이 정책의 핵신은 장기간의 점진적인 사회주의 공업화의 실현, 국가가 주도하는 농업, 수공업, 상업정책 등이다. 사회주의 건설을 위해 3차에 걸친 5개년계획이 수립되었고, 제1차 5개년계획은 1953년부터 시행되었다. 이 계획대로라면 67논 3차 5개년개획이 끝나는 해 중국은 사회주의 체제를 안정시킬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특히 이 계획은 경제적인 측면에 집중되었는데, 사회주의 선배격인 소련을 모델로 했다. 농업에서 소련에서 집단농장인 콜호즈와 유사한 농업합작사를 추진하는 한편, 중공업을 크게 발전시키고자 했다. 군사적인 면에서도 이 계획이 끝나는 시기까지 무기의 자급체계를 비록한 자주 국방체제를 확립하는 것이었다.
농업면에서는 소농 중심의 농업상산체제를 고쳐 집단농장화를 적극 추진해나갔다. 집단농장화는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으나 기대했던 만큼의 소득증대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것은 집단농장 관리의 문제, 그것을 운영하는 간부의 자질 부족, 강압적인 방법으로 인한 농민의 참여의식 부족 등의 이유였다.
55년 전국 대표대회에서는 이 문제에 대해 첫째, 자발적인 의사, 상호이익을 기초로하여 빈농에 의지하고 중농과 단결할 것, 둘째, 겅제성을 줄이고 중농의 이익을 해치는 것을 줄일 것, 셋째 개인이 경영하는 농가의 생산의욕을 꺽지 말 것 등의 개선책을 마련했다.
어떻든 1차 5개년계획으로 인해 농업, 수공업, 자본주의적 상공업은 사회주의적 집단소유 혹은 국유제가 되었다. 공업의 비중이 농업보다 높아졌고, 철강생산 등의 목표량을 당성하는 등 사회주의 체제이 기초가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였다.
1956년 9월 8회 당대회가 열려 지금까지의 경제정책에 대한 검토 및 새로운 정책에 대한 결의가 있었다. 이 회의에서는 그 동안의 성과를 바탕으로 2차 5개년계획의 방향을 결정했다. 첫째 국민경제의 균형있는 발전과 각 부분간의 균형있는 발전, 둘째 공업과 농업간의 격차를 줄이기 위해 농업에 대한 투자비율을 높일 것, 셋째 합작회사의 이익 분배비율을 높일 것 등이었다.
그러나 1975년에 접어들면서 중국 사회주의 건설계획에 대한 근본적인 변화조짐이 보였다. 10월 당대회에서 (빠르고 휼륭하고 유익한 사회주의를 건설한다) 는 원칙이 결정된 것이다. 이른바 대약진운동이다.
제국주의의 위협이 계속되고 있는만큼 무엇보다 인민 내부의 반사회주의 세력들의 반동적인 움직임을 차단하고 사회주의 혁명을 완수해야 한다는 것이 중국의 정책노선이었다. 이것은 공업과 국방건설의 속도를 빨리해야 한다는 정책변화로 이어졌다. 그 속도는 15년 내에 공업생산면에서 영국을 추월하자는 것이었다. 이로한 정책은 58년 당대회에서 통과되었다. 또한 이제는 소련을 모델로 하지않고, 수정주의로 빠지고 있는 소련을 새로운 사회주의 모델로 만들어내고자 했다.
공업정책이 적극 추진되었으며 늘어나는 노동자들의 식량을 해결하기 위해 합작사가 합병되어 인민공사가 만들어졌다. 58년 말에는 거의 대부분의 농가가 인민공사에 소속되었다. 인민공사는 평균5천 호 정도 구성되고 전국에 2만 4천여개가 설립되었다. 인민공사에서는 공급제와 임금제가 채용되었는데, 식비는 노동의 유무에 상관없이 인민공사가 지급하고 일정 등급에 따라 임금을 지불했다. 그러나 임금은 거의 유명무실한 것이었고 노동에 따른 분배원칙에도 맞지 않아 노민들의 열심히 일할 의욕을 고취시키는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결국 대약진운동은 실패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조건에 맞지 않는 무리한 목표는 농민과 노동자들을 혹사기켰드며, 목표량에 이르지 못했어도 허위보고를 올리는 일이 빈번했다. 그리하여 표면적으로 대약진운동은 엄청난 성과를 거둔 것으로 보고되곤 했다.
현실은 보고된 수치와는 전혀 달랐다. 농촌에서는 식량의 자급자족이 되지 않아 굶어죽은 사람들이 적지 않았고, 거지가 되거나 강도가 되는 경우도 많았다. 대약진운동은 참담한 실패로 끝난 것이다. 59년 국방상 팽덕회는 대약진운도의 실패를 솔직히 시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니 그는 당을 분열시모택동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직위에서 파면되었다. 당에서는 대약진운동이 실패는 급속한 공업화 노선 때문이 아니라 소련의 비협조, 자연재해 때문이었다고 진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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